|
시대 |
문 헌 |
마을이름 |
통수 |
호수 |
인구(남·여) |
숙종 37년 (1711) |
언양현호적대장 (신묘식) |
泉所 |
11 |
54 |
인구집계없음 |
정조 1년 (1777) |
언양현호적대장 (정유식) |
泉所 |
9 |
46 |
〃 |
정조 19년 (1795) |
언양현호적대장 (을묘식) |
泉所 |
8 |
41 |
371(178·193) |
정조 22년 (1798) |
언양현호적대장 (무오식) |
泉所 |
8 |
41 |
378(182·196) |
순조 25년 (1825) |
언양현호적대장 (을유식) |
泉所 |
8 |
39 |
350(173·177) |
철종 12년 (1861) |
언양현호적대장 (신유식) |
泉所 |
10 |
51 |
336(남녀구분안됨) |
- 이상 언양현 상북면시대 -
이때까지는 현재의 반연리와 반천리를 합쳐 천소(泉所)라 하였다.
연대 |
문 헌 |
마을이름 |
행정리 |
부락 |
반 |
가구 |
인구 (남·여) |
1959 |
언양면 면세일람(1960) |
盤淵 |
2 |
4 |
4 |
57 |
315 (170·145) |
1960 |
언양면 면세일람(1961) |
盤淵 |
2 |
4 |
4 |
57 |
309 (165·144) |
- 이상 울산시 승격 이전의 울산군 언양면시대 -
18세기 초반인 숙종 37년(1711)의 「경상도언양현(신묘식)호적대장」에는 천소리가 11통(統)으로 54호(戶)가 살았는데, 인구가 집계되어 있지 않다. 당시는 5가를 1통으로 조직했으니, 곧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70년 후인 18세기 후반의 정조 1년(1777)의「(정유식) 호적대장」에 의하면 9통 46호였는데, 역시 인구집계는 나와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그간 통수와 호수가 조금 줄어들었다.
19세기 말인 정조 19년(1795)「(을묘식)호적대장」에는 8통 41호로 인구는 371명인데 그중 남자가 178명, 여자가 193명으로 나타난다. 통수와 호수는 종래에 비해 조금 줄어들고 인구 중 남녀 성비율(性比率)은 남자보다 여자가 조금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3년 뒤인 정조 22년(1798)「(무오식)호적대장」에는 통수와 호수는 변동이 없고 인구는 378명으로 그중 남자 182명, 여자 196명으로 남녀 성비별로는 역시 여자가 남자보다 많은 수를 보이고 있다.
19세기 초엽인 순조 25년(1825)「(을유식)호적대장」에 의하면, 통수는 8통으로 변함이 없고 호수는 훨씬 줄어 39호였으며 인구는 역시 줄어들어 350명(남자 173·여자 177)이었다.
인구중 남녀 성비의 격차는 현저히 줄어들어 거의 비슷한 양상(樣相)을 보이고 있다. (1832년(순조 32)경상도읍지 <언양현>편에 일시 천소리와 반호리(盤湖里)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합쳐 천소리가 되었으나 당시의 통수 및 호구의 통계자료는 나와 있지않다).
그로부터 또 36년 후인 19세기 후반 철종 12년(1861)에 발간된「(신유식)호적대장」에 의하면, 10통 51호로 인구는 336명(남녀구분이 되어 있지 않음)이었다. 통수, 호수, 인구, 모두 종전보다 훨씬 감소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때까지가 현 반연·반천리 지역을 합친 당시 언양현 천소리의 공통된 집계자료이다.
조선 말기인 고종 8년(1871)「영남읍지」의 <언양현> 방리(方里)조에 7리 중<부제리(釜堤里)>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종래의 천소리(泉所里) 중 일부(북부지역, 즉 옛 반호리(盤湖里) 지역)를 떼어 독립시킨 것인데, 이것이 곧 오늘날의 반연리(가막못안, 톡골지역)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현 반연리와 반천리가 분리된 것이다.
반연리는 언양군시대인 한일합방 이전까지 계속 부제리라 하다가 1910년 10월 다시 반호리(盤湖里)로 복칭하고 상북면에 속했다. 1914년 3월 1일 옛 중북면의 반곡리의 일부(아래옹태)를 합쳐 반연리가 되었다. 당시의 호수 및 인구에 관한 자료는 없다.
일제시대와 1945년 광복을 거쳐 1958년까지는 이동별(里洞別) 호구에 관한 통계자료가 없어 알 수 없고, 단지 한국동란 직후 약 2년간(1954. 3∼56.1) 당시 반호리(현 반연리) 이장을 재임(在任)한 톡골출신 김정삼(金正三 : 1913년(계축)생·본 경주, 계림군(제숙공) 후손. 2000년 현재 88세)옹(翁)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대 중반(사연댐 수몰 10년 전) 당시 인구는 기억을 못하고 호수는 (법정)반연리 전체가 약 70호가 되었는데 그중 (행정)반연리에 약 40호(아랫옹태 28호, 세연동 12호 정도), (행정) 반호리에 약 30호(톡골 18호, 가막못안 12호 정도)였다고 한다.
울산시 승격 이전(울산군 언양면)인 제1공화국 말기인 1959년 반연리는 2개의 행정리(반연·반호)에 4개 자연부락, 4개 반, 57 가구로 인구는 315명인데 그중 남자는 170명, 여자는 145명이었다. 남녀별 성비(性比)로는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많았다.
이듬해(1960)는 가구는 변동이 없고 인구는 1년 사이 약간 줄어서 309명(남 165·여 144)명이었는데 남녀 성비로는 역시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많았다.
이상은 당시 발간된「언양면면세일람」(1960. 1961년판)에 의한 것이다.
반연리(울주군 통계연보)
연도별 |
가구 |
인구 (남·여) |
시대(행정구역) |
1973 |
32 |
158 (75·83) |
울주군 |
1974 |
· |
· |
|
1975 |
· |
· |
|
1976 |
32 |
156 (75·81) |
|
1977 |
31 |
140 (61·79) |
|
1978 |
31 |
141 (64·77) |
|
1979 |
29 |
127 (55·72) |
|
1980 |
· |
· |
|
1981 |
· |
· |
|
1982 |
28 |
115 (54·61) |
|
1983 |
27 |
108 (47·61) |
|
1984 |
28 |
121 ( · ) |
|
1985 |
28 |
109 (48·61) |
|
1986 |
28 |
109 (49·60) |
|
1987 |
25 |
107 (47·60) |
|
1988 |
25 |
104 (48·56) |
|
1989 |
25 |
106 (50·56) |
|
1990 |
31 |
106 (51·55) |
|
1991 |
22 |
93 (43·50) |
울산군 |
1992 |
22 |
86 (40·46) |
|
1993 |
26 |
91 (43·48) |
|
1994 |
27 |
97 (50·47) |
|
1995 |
31 |
106 (55·51) |
울주구 |
1996 |
29 |
88 (46·42) |
|
1997 |
30 |
84 (44·40) |
울주군 |
1998 |
32 |
90 (45·45) |
|
1999 |
32 |
85 (46·39) |
|
2000 |
35 |
90 (48·42) |
(법정)반연리가 반연(盤淵)과 반호(盤湖)의 2개의 행정리로 분동된 것은 한국동란 때인 1951년 12월부터이고 1959년 12월에 다시 통합, 반연리가 되어 1인의 이장을 두었다.
5.16 군사쿠테타 후 울산군이 울산시와 울주군으로 분리(1962. 6)되어 혁명정부가 울산공단의 공업용수용으로 사연댐을 축조(1963∼65)하자 옛 반연리(분동)지역이 수몰되었다. 이후 1972년까지는 통계자료가 없고, 1973년부터 현재(2000. 12)까지는「울주군통계연보」에 의해 고찰해 보겠다.
반연리(법정·행정리)는 첫째, 가구면에서 1973년 32 가구였는데 이후 별 변동이 없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감소되어 1987-1989년에는 25 가구에 머물다가 1990년에 조금 증가하여 31 가구에 이르렀다.
이후 1990년대 초에 급격히 감소(22 가구)되더니 1993년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 1995년 이후 평균 30∼32 가구선을 유지하다가 1999년 32 가구에 머물렀다.
지역의 여건상 산악지대이므로 큰 변동이 없는 셈이다.
둘째, 인구면에서는 1973년 158명(남 75·여 83)이었는데 이후 점차 감소하여 1983년에는 108까지 줄어들었다.
1984년에 121명으로 증가되었다가 다시 감소되기 시작, 1980년대 후반에는 104∼109명선으로 별 변동이 없다가 이후 다시 90여명으로 감소되고 1995년 다시 증가하여 106명, 이후 다시 점점 감소되어 1999년에는 85명(남 46·여 39)에 이르렀다.
인구중 남녀 성비로는 1973년 이후 1993년까지 20년간은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많다가 1994년부터 역전(逆轉)되어 여자보다 남자가 조금 많은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2000년 12월 30일 현재 반연리는 총 35 가구에 인구는 90명(남자 48·여자 42)으로 집계되었다.
반연리는 법정리이면서 행정리인 단일리(單一里)로서 현재(2000. 12) 2개의 자연부락(톡골, 가막못안), 2개의 반(1반은 톡골, 2반은 가막못안)으로 구성되어 1인의 이장을 두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톡골이 가막못안보다 큰 마을로 1999년 12월 현재 32 가구 중 톡골이 19 가구, 가막못안이 13 가구이다.
4. 역대 이장
성명 |
재임 |
기간 |
시대 |
박화덕(朴和德) |
1947. 6. 18- 48. 11 |
1년 6월 |
건국전후 |
김현규(金賢圭) |
1948. 12 - 49. 9 |
10월 |
건국초기 |
김태욱(金太旭) |
1947. 9 - 48. 3 |
7월 |
건국전후 |
박화복(朴和福) |
1949. 4 - 50. 3 |
1년 |
건국초기 |
김태욱(金太旭) |
1950. 4 - 51. 2 |
11월 |
한국전쟁 |
김재범(金在範) |
1951. 3 - 51. 2 |
10월 |
〃 |
반연리의 역대 이장(里長)은 1945년 광복 이전에는 자료가 없어 알 수 없고, 광복후 1947년부터 기록된 언양읍사무소 소장「역대이장명부」에 의하여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반연리(법정, 행정) ※언양읍사무소 소장「역대이장명부」에 의함.
(행정)반연리
대수 |
성명 |
재임 |
기간 |
시대 |
1 |
박화덕(朴和德) |
1951. 12 - 52. 3 |
4월 |
한국전쟁 |
2 |
박상백(朴相珀) |
1952. 4 - 54. 8 |
2년 5월 |
한국전쟁, 제1공화국 |
3 |
박우출(朴又出) |
1954. 9 - 57. 8 |
3년 |
제1공화국 |
4 |
박금덕(朴今德) |
1957. 9 - 59. 3 |
1년 7월 |
〃 |
5 |
박상걸(朴尙杰) |
1959. 5 - 60. 11 |
1년 7월 |
제1·2공화국 |
(행정)반호리
대수 |
성명 |
재임 |
기간 |
시대 |
1 |
김진우(金鎭佑) |
1951. 12 - 54. 2 |
2년 3월 |
한국전쟁 |
2 |
김정삼(金正三) |
1954. 3 - 56. 1 |
1년 11월 |
제1공화국 |
3 |
김찬규(金贊圭) |
1956. 1 - 58. 1 |
2년 1월 |
〃 |
4 |
김재범(金在範) |
1958. 1 - 59. 12. 13 |
2년 |
〃 |
통합(법정, 행정)반연리
대수 |
성명 |
재임 |
기간 |
시대 |
1 |
김학식(金鶴式) |
1959. 12 - 61. 2 |
1년 3월 |
제1·2공화국 |
2 |
김학식(金鶴式) |
1961. 6 - 74. 1 |
13년 8월 |
군정,제3·4공화국 |
3 |
김칠규(金七圭) |
1974. 2 - 79. 12 |
5년 11월 |
제4공화국(유신) |
4 |
허수원(許水源) |
1980. 1 - 84. 12 |
5년 |
제4·5공화국 |
5 |
김진문(金鎭文) |
1985. 1 - 89. 12 |
5년 |
제5·6공화국 |
6 |
김정길(金正吉) |
1990. 1 - 91. 12 |
2년 |
제6공화국 |
7 |
김진문(金鎭文) |
1992. 1 - 현재 |
재임중 |
〃(현재) |
반연리 이장은 1947년 6월에 재임한 초대 박화덕(朴和德) 이장 이후 1951년 12월까지 대부분 1년 미만의 단명(短命) 이장이었는데, 초대 박이장과 전후 2회에 걸쳐 1년 6개월을 재임한 김태욱(金太旭) 이장이 그중 장수한 셈이다.
1951년 12월 행정리로 반연·반호가 분리된 이후로 반연리는 한국동란 직후인 1950년대 중반 3년간 재임한 제3대 박우출(朴又出) 이장이, 반호리는 한국동란 당시 2년 3개월을 재임한 초대 김진우(金鎭佑) 이장이 각각 최장수 이장이었다.
종래의 (행정)반연리와 반호리가 통합, 오늘날과 같이 (법정 및 행정)반연리로 1인의 이장을 두게 된 것은 제1공화국 말기인 1959년 12월이었다. 초대 김학식(金鶴式) 이장 이후 현재(2000. 12)까지 최장수 이장은 초대에서 2대에 걸쳐 14년 11개월간 재임한 김학식 이장이고, 다음은 1985년 이후 현재까지 전후 2회(5·7대)에 걸쳐 14년간 재임중인 현 김진문(金鎭文) 이장이다.
5. 마을 지명유래
반연(盤淵)
<반연(盤淵)>이란 지명이 생긴 것은 일제시대인 1910년대 초의 일이지만, 이 주위에는 지형상 모두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꼬불길과 곳곳이 개울·늪·호수·못 등 저습지가 흩어져 있다.
이와같이 언양읍의 동부지역은 층암(層岩)으로 된 반석(磐石)이 많은 것이 한 특징이다. 따라서 각 처의 지명에 '반자(盤)'가 붙는 것을 흔히 본다. 반곡(盤谷)·반곡천(盤谷川)·반구(盤龜)·반구대(盤龜臺)·반구동(盤龜洞)·반구산(盤龜山)·반구천(盤龜川)·반고서원(盤皐書院)·반호(盤湖)·반송(盤松)·반천(盤泉)·반상(盤上 : 반송상리)·반중(盤中 : 반송중리)·반하(盤下 : 반송하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하에서, 토질에서 얻어지는 반(盤)을 그대로 습용(襲用)하면서 반호(盤湖)의 호(湖) 대신 연(淵)으로만 바뀌어 반호의 의미를 그대로 가진 것이 반연(盤淵)인 것이다. 반호는 이곳에 못이 많으므로 반호(盤湖)라 하였다고 한다.
톡골·톳골·텃골·굼소
현재 반연리의 으뜸 마을로 그 이름도 다양하다. 톡골·톳골·텃골·굼소라고도 하며, 또 옛 반호(盤湖)라 할 때는 이 마을을 자칭했다. 즉 사연댐의 축조로 반연리의 본마을인(행정)반연리가 1960년대 중반 수몰되자 아랫마을인 (행정)반호리(톡골, 가막못안)만 남게되어 이 반호리가 그 이름을 버리고 행정 및 법정리인 <반연리>의 이름을 따라 사용하게 된 것이니, 행정리명의 측면에서는 본동(本洞)의 이름을 취한 것이된다.
톡(톳)골을 이 마을 주위 묘소의 상석(床石) 및 묘갈(墓碣)·사정재단(祠亭齋壇) 등의 기록에는 토동(兎洞)·토곡(土谷) 등으로 표기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이 마을의 형세가 토끼 모양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說), 옹기흙을 파내었다고 토곡(土谷)이라는 설, 또 그 흙을 파낸 자리(터)라고 텃골이라는 설, 그 튊을 파낸 곳이 움푹 패여 굼깊다 하여 굼소(所)라고도 부른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문헌을 본다면 독골(瓮谷)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조선 초기 예종 때(1469) 편찬된「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언양현>조에 "一. 陶器所 磁器所 在縣內瓮谷里及縣南大吐里 陶器品下(도기소와 자기소는 고을안 옹곡리와 고을 남쪽 대토리에 있는데, 도기의 품질은 낮다)〃고 했다. 여기의 옹곡리는 후일 대곡리, 반곡리 등 여러 이름의 마을에 속했다가 근세에 와서 옹태(瓮台)에 해당하고, 대토리는 현 삼동면 하잠리(荷岑里) 사촌(沙村)마을이다.
옹태는 후일 상·하로 나뉘어 윗옹태는 태기리에, 아랫옹태는 반연리에 각각 속했다.
이 예종 때의 옹골리(瓮谷里)가 분화되어 옹(瓮)을 그대로 음독(音讀)한 마을은 옹태(瓮台·甕台)가 되고, 한편으로 훈독(訓讀 : 한자의 뜻을 새겨 읽음)한 마을은 독골(瓮谷)이라 하였던 것이 토골(土谷) 또는 톡골(톳골)로 변한 것이라 여겨진다.
울산지방에는 옹기터에서 비롯된 <독골>이란 지명이 지형이 움푹 패여 굼깊고 가막못안에서 꼬불꼬불 토끼길같은 구절양장(九折羊腸)을 따라 휘돌아 넘어가면 마을 가운데 서북(태기리)쪽에서 동남(범서읍 사연리)쪽으로 흐르는 개울이 나 있는데, 개울 남쪽은 북사면(北斜面)으로 음지마을이고 북쪽은 남사면(南斜面)으로 양지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 동쪽은 사연댐의 못둑(水門)이니 곧 사연댐 둑 서쪽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가막못, 가막못안
조선 고종 때는 가마못(釜堤)으로 한역(漢譯)한 이 마을은 종래의 반호(盤湖)이다. 가마못의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고 <가막못안>이라 불러온다.
이 가마못의 유래는 가마솥 같은 가매골(釜谷)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까마귀의 도래(渡來)에서 온 것이라는 설, 또 못의 토질이 검은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어쨌든 이 못으로 인해 마을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된 못인 것만은 틀림없다. 옛「언양읍지」에도 가막못을 오지(烏池), 부지(釜池), 부제(釜堤), 가막못안을 오지동(烏池洞) 또는 부제리(釜堤里)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즉 부제(釜堤) 또는 부지(釜池)를 오지(烏池) 또는 오지동(烏池洞)으로 표기하는 것은 음차(音借)한 것이다.
반연리 당제(堂祭)
(법정)반연리 중 톡골은 당사목(堂祀木)이 없으므로 당연히 마을 당제(堂祭)도 없다. 가막못안(烏池洞)은 가막못(烏池) 서쪽 끝, 즉 마을 입구의 갯가(반연리 346번지)에 수령 약 200년 가량의 왕버들이 있는데, 1982년 11월 10일 면보호수(面保護樹 : 고유번호 7-5-2-1)로 지정되었다. 주민들이 관리하며 높이 9m, 둘레 4.1m의 노거수(老巨樹)로 옛날부터 이 나무 밑에서 매년 정초에 마을에서 선임한 제관(祭官)이 정월 대보름날 자정(子正)을 기해 마을의 무사태평과 그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堂祭)를 지내고 있다.
이 왕버들은 일명 하류(河柳), 또는 귀류(鬼柳)라고도 하는데, 버드나뭇과의 낙엽 교목(喬木)으로 중부 이남의 개울가에 많이 나는 암수딴그루(雌雄異株)의 나무이다. 길가에 있는데 제단(祭壇)만 있고 당집(堂宇)는 없다.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묘
반연리 가막못안 오연재(烏淵齋) 뒤 산골짜기에 있다. 정무공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 1568-1636)은 경주인으로 사성(司成) 예(汭)의 7세손이다. 임진왜란 때 동생 계종(繼宗 : 六宜堂)과 함께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1594년 무과에 급제, 1597년 정유재란 때 서생포(西生浦)와 도산(島山 : 울산 학성) 등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2등공신으로 녹훈(錄勳)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가덕진첨절제사(加德鎭僉節制使)·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경기도수군절도사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임했다. 1634년(인조 12)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서 군사를 이끌고 용인(龍仁) 험천(險川)에 이르러 용전하다가 장렬히 순절(殉節)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병조판서에 추증(追贈)되어 정무(貞武)라는 시호(1651)가 내려졌다. 경주의 숭렬사(崇烈祠 : 현 용산서원), 경원(慶源)의 충렬사(忠烈祠), 울산의 충의사(忠義祠)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현손 부사 경로(慶老)가 찬술한「잠와실기(潛窩實紀)」가 전하며, <有明朝鮮國故忠臣贈兵曺判書貞武公崔先生之墓>라 쓴 고비(古碑)의 묘갈명(墓碣銘)은 영조 40년(1764) 이조정랑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가 지었고, 홍문관부교리 강복(姜樸)이 썼다.
오연재(烏淵齋)·화친재(和親齋)·반연정사(盤淵精舍)
반연리 346번지(가막못안)에는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 1568∼1636) 장군의 후손들이 추모하여 지은 경주최씨 문중의 오연재(烏淵齋 : 1963. 3. 중건)가 있고, 114번지(톡골 음지마을)에는 충의공(忠毅公)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 ?∼1456) 선생의 후손으로 이 마을 입향조(처음 입향은 사연댐으로 수몰된 세연동) 김지약(金池榒) 이하 누대의 봉향지소(奉享之所)인 김녕김씨(金寧金氏) 문중의 재실 화친재(和親齋)가 있다.
옛 반연리인 아랫옹태마을 동편 연화산 기슭에는 경주김씨(慶州金氏) 수은공(樹隱公 : 휘 沖漢)파 을계공(乙溪公) 살수문중 재실인 반연정사(盤淵精舍 : 사헌부 감찰 慕湖 金榮澤의 추모지소로 일제시대에 지음)가 있었으나 1960년대 중반 사연댐의 축조로 수몰 직전 훼철되어 지금은 전하지 아니한다.
→<원사정재(院祠亭齋)>편 참조.
오연재(烏淵齋 : 가막못안)의 뒷(북쪽) 골짜기에는 최진립 장군의 묘소가 있는데, 구「언양읍지」(1919) 산천조(山川條)에 "고을 동쪽 가막못안에는 정무공 최진립의 묘가 있다(縣東有鳥池洞有貞武公崔震立墓)"고 했다.
또 반연리 가막못안 서북쪽 장골산(長谷山) 중록(中麓)에는 선무원종1등공신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최환(崔環) 장군의 현손 통덕랑(通德郞) 태암(台巖) 최사룡(崔泗龍 : 본 경주) 선생의 묘소가 있다.
태봉산(胎封山)
반연리 가막못안 앞산(동남)이니 곧 범서면 사연리와 경계선상에 위치한 산이다.
옛날 왕실에서 태(胎)를 묻거나 또는 그것을 묻는 곳을 태봉(胎封)이라하고, 그 터를 태지(胎址)라고 한다. 조선 성종 16년(1485)에 이곳에 태를 묻었으므로 이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한다.
최해선(崔海璿) 의사 묘
반연리 가막못안(烏池洞) 마을 앞산(태봉산 맞은편 서쪽)에는 기미 3.1독립운동 때의 의사인 최해선(崔海璿 : 일명 允奉, 1898-1934) 선생의 묘가 있다.
선생의 자는 종서(宗瑞), 호는 삼일당(三一堂)이며 본은 경주(慶州)이다. 사성공(司成公) 예(汭)의 7세손으로 임진왜란 때 형 진립(震立 : 貞武公)과 함께 종군(의병)하여 공을 세운 남포현감(藍浦縣監) 육의당(六宜堂) 계종(繼宗)의 후손이다. 언양군 상남면(上南面) 길천리(吉川里)에서 태어나(뒤에 언양면 송대리로 이거) 1919년 기미 3.1독립운동 때(22세) 이무종(李武鍾)·김성진(金聲振)·최한홍(崔翰鴻)·이규경(李圭庚)·이규장(李圭章) 등 제의사(諸義士)와 함께 언양의거(彦陽義擧)에 참여하여 갖은 고초를 겪다가 왜경(倭警)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의 형고(刑苦)를 치루었다. 뒤에 만주(滿洲) 봉천(奉天 : 현 瀋陽)에 가서 다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건강이 악화, 그곳에서 37세로 병사했다.
1988년 봄 묘비(전 울산시교육장 于泉 李秉稷 撰)가 세워지고 1996년 6월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되었다.
장골(長谷)·장골못(長谷池)
가막못안 마을에서 서북(직동리)쪽으로 길게 나 있는 골짜기를 장골(長谷)이라 한다. 중간에 못이 두 개 있는데 윗못(長谷上池)은 일명 <장골1지>, 아랫못(長谷下池)은 일명 <장골2지>라고도 한다.
아랫못은 오래되었고 윗못은 이 골짜기(장골들) 아래 위로 농지가 많은데 아랫못으로 관개(灌漑)가 부족하여 1967년(정미)에 새로 판 것이다. 두 못 모두 길게 생겼다.
톡골못
톡골못은 톡골마을에서 서북쪽(태기)으로 2㎞ 남짓 떨어진 골짜기에 있다. 토골들에 충분한 물은 대기 위하여 1970년 1월에 착공하여 그해 5월에 완공하였다.
톡골고개
톡골에서 서남쪽인 가막못안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는데, 야트막한 고개지만 숲 사이로 난 좁고 꼬불꼬불한 길이 두메산골의 정경(情景)을 느끼게 한다.
토곡골
반연리 283번지에 위치하며, 옛날에 이곳에 흙이 좋아 가마터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연댐(泗淵堤)
5.16군사혁명정부가 1960년대 중반(1962.9-65.12) 대곡리의 대부분과 태기리·반연리의 각 일부 산간 계곡지대를 울산공업센터 공업용수로 사용키 위해 축조한 댐이다.
이 사연댐의 축조로 당시 반연리의 본동인 반연부락(아랫옹태와 세연동 일대)이 모두 수몰되었다. →<대곡리 지명유래> 참조.
사기디미
사연댐으로 수몰되기 전인 반연리의 본동(아랫옹태) 마을 남쪽 냇가에 있었다. 여러 곳에 사기(沙器)의 파편(破片)에 산견(散見) 되었는데, 옛날 이곳에서 사기를 주워내던 사기가마터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수몰되었다.
아랫옹태
옹태(翁台)는 조선 예종 때(1469)「경상도속찬지리지」에 나오는 옹곡리(瓮谷里)의 후신(後身)으로 대곡·반곡 등 여러 마을의 이름으로 개편되다가 1910년 전후 상·하로 나뉘어 윗옹태는 태기리(台機里)에, 아랫옹태는 반연리에 속했으나 사연댐의 축조로 1960년대 중반 완전히 수몰되었다.
반연리의 본동이었는데 현 반연리의 동북쪽 계곡의 위치했다. 수몰 당시 본동인 (행정)반연리는 약 40호 가량 되었는데, 그중 아랫옹태는 28호, 동남쪽 계곡에 위치한 세연동은 12호 가량되었다고 한다. 옹태리의 자세한 내력은 <태기리 지명유래>참조.
세연동(洗淵洞)·세인동
세연동(洗淵洞)은 흔히<세인동>이라고도 부르는 자연마을로 1960년대 중반 사연댐의 축조로 본동인 아랫옹태와 함께 완전 수몰된 마을이다.
(법정)반연리의 본동격인 (행정)반연리에 속한 자연마을로 수몰 당시 12호 가량되었다고 한다. 사염댐 수문(못둑)에서 동북쪽으로 쑥 들어간 골짜기마을이었다
'(둘러)싸이다(圍繞)'를 이 지방 방언으로 <쌔이다>·<세이다>라고 한다. 따라서 <세인>은 '싸인'이니 곧 세인동은 산에 둘러 싸인 (골짝)마을이란 뜻이다.
개고개
반연리의 본동(아랫옹태)과 태기리(台機里)의 사이에 있었던 고개인데, 1960년대 중반 사연댐의 축조로 수몰되었다. 고개의 모양이 고양이 같이 생겼다 하여 개고개(猫嶺)라 하였다. '괴내기'는 고양이의 이 지방 방언이다. 따라서 이 개고개는 <괴내기고개>가 변한 말이다.
옹태풍류가
대곡리에서 태기를 거쳐 반연리에 세연동 이르는 대곡천변(大谷川邊)을 따라 아홉굽이 냇가의 기이한 바위와 주변 풍광(風光)을 묘사 노래한 옹태풍류가(瓮台風流歌)가 구전(口傳)되어 내려온다.
"어화 세상 벗님네야, 강산 구경 가자시라. 반월성(半月城) 높이 올라 사면(四面)을 바라보니, 세연수(洗淵水) 맑은 물에 청룡 황룡 목욕하고, 안장바우 질매바우 장수 한 분 지나가고, 수리암 섰는 바우 평풍기림(屛風) 좋을시고, 진달래꽃 만발하여 평풍바우 수놓았네"
병풍처럼 둘러 싸인 기암절벽의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다.
<민요>편 참조.
아랫옹태 할배감나무
1960년대 중반 사연댐의 축조로 인해 아랫옹태 마을 전부가 수몰되기 전의 이야기다.
대곡리 한실에서 사연댐(현재) 못둑까지에 이르는 남북 직류(直流)의 대천(大川)에다 직동리에서 동쪽으로 흘러 대천과 합수되는 삼각지점의 조금 위 서편에 소천(小川)을 경계로 남북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 곧 수몰 된 옹태(아랫옹태)마을이다.
거랑 남쪽은 북사면(北斜面)으로 응달마을이고, 북쪽은 남사면(南斜面)으로 양달마을이다. 전체 약 28호 가운데 양달마을(북쪽)이 15호, 응달마을(남쪽)이 13호 정도였다. 모두 밀양박씨(密陽朴氏)만 세거(世居)하던 마을이었다.
이 응달마을(남쪽)의 안산(案山) 기슭에 두 아름쯤이나 되는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해마다 탐스러운 감이 수십 접이나 열리는 이 감나무는 당사목은 아니지만 마을에서는 <할배감나무>라 불렀다. 이 마을에는 원래 당사목이 없었다.
수몰 직전 주민들은 불의의 재앙이라도 닥칠까 우려하던 나머지 아무도 손을 못대고 그대로 수장(水葬)되었다. 지금도 가끔 갈수기(渴水期)에 배를 타고 이 부근을 지나치노라면 종종 수면 위로 1m 정도 빼끔히 머리를 드러내어 그 옛날의 역사의 증인처럼 출향인들의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반연리회관
마을회관은 가막못안은 없고, 톡골회관은 반연리 110-3번지(양지마을)에 있는데, 1979년 3월에 착공하여 그해 8월에 단층 1동(棟)을 준공했으며, 길가이므로 마당이나 부대시설이 없이 대지와 건평이 같은 20평이다.
첫댓글 와...............자료가 많은걸 보니 유래가 깊은 마을인것 같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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