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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대도시
황푸강 상하이 스카이 라인
헬렌 이모는 중국에서 우수한 대학 중에 하나인 상하이 푸단 대학교 경제학 교수 였다. 그녀는 키가 컸으며 갸름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이모는 당시에 대부분의 처녀들이 그랬듯이 머리를 꼬아 목뒤에 쪽을 만들어 언는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교수라는 직함 때문에 이모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존경과 경의를 표 했다. 나는 나이 어린 소년에 불과 했고 그녀는 40대 였지만 이모의 논리적인 언행은 내가 생각 하기에 보통이 아니었고 기발 했다.
“예수는 우리를 사랑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죽을 것이다.” 라고 내가 그녀와 살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느닷없이 나에게 선언 했다.
그때는 1946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의 원조를 받고 훨씬 잘 무장한 장카이색 대원수의 군대와의 전쟁에서 예상 밖으로 선전 하고 있었다. 원수의 군대는 탱크, 무기를 탑재한 차량, 함대, 최신 P-50 전투기,
그리고 B-23 폭격기를 보유한 공군을 가지고 있었다. 공산군은 무기도 제대로 없는 도보로 움직이는 군대였다.
해군도 없었고 공군도 없었고 기계화부대 도 없었다. 도보로 행군하는 군대는 철모가 없어서 앞에 빨간 별을 단 초록색의 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모자는 10년 후 대격변의 문화혁명동안 췌어맨 마오에 의해서 유명해 졌다. 군화가 없어서 손 바느질 한 광목 신발을 신고 행군 하고 싸웠다. 한쪽이 머리처럼 볼록한 몽둥이 모양의 구식 수류탄을 가지고 다녔다.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대부분의 소총은 장 카이색 군에게서 빼았은 것들이었다.
대원수는 좀더 잘 준비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산군을 패배 시키지 못했다. 2차대전 말 소련군은 만주에서 일본군을 정벌하고 공산군에게 유리하도록 도와 주었다.
*번역자 주: 만주에는 세계 제일이라고 알려진 일본 관동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1945년8월8일 미국의 나가사키 원폭 투하 직 후 소련군은 관동군을 목표로 만주에 진입 한다. 며칠 만에 소련군은 만주를 장악 했다. 미국이 소련에게 만주와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를 장카이색의 국민당에게 넘겨 주라고 요구 했으나 소련은 이를 무시하고 공산군을 전적으로 도았다. 거의 멸망의 위기에 처했던 공산당은 만주와 일본군 노획품을 발판으로 재기 했다. 1945년9월2일 일본이 미국, 영국, 소련, 국민당 중국에게 항복 한 후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평화협상에 실패하고 1946년 6월 전쟁을 시작 했다. 이를 제2차 국공 내전이라고 한다. 내전은 1949년10월 까지 계속 되었고 결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난다. 타이완으로 피난 한 장카이색은 중화민국을 본토의 머우제둥은 중국공화국(중공)을 세운다.
2년만에 공산군은 북쪽에서 근대 중국에서 가장 수준높고 복잡한 대도시 상하이 쪽으로 폭풍처럼 내려 오고 있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공산주의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포와 절망에 빠져 무척 불안해 하고 있었다. 금융의 중심지였던 상하이는 자본주의자, 산업인, 기업가, 장카이색이 거래하던 정치 깡패 등으로 꽉 차 있었다. 이들은 만약 공산당이 상하이를 점령 하면 모두 망할 운명이었다.
헬렌 이모는 장카이색의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녀의 신앙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더 강력하게 반대 했다.
독실한 복음주의 예수교신자 였던 이모는 잠자리에 들기 전과 식사 전에 기도 했다. 이모는 나에게 주기도문, 팜23장, 그리고 십계명을 외우게 했다. 때때로 음식 앞에서 머리를 숙이며 갑자기 나에게 식사기도를 하라고 요구 하기도 했다. 나는 무척 싫었다. 내 앞에 음식이 차려져 있는 데 기다리기도 힘들었고 기도 내용을 나는 전혀 이해 할 수 없었다. 나의 기도가 내가 이모에게서 배운 공식적인 표현의 반복이어서 당황 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모가 “주님” 에게 한 말을 내 기억 속에서 이것 저것 주워 모아 다시 중얼 거리는 바보처럼 느껴 졌다.
일요일 마다 이모는 나를 데리고 복음 교회에 갔다. 예배는 방대한 텐트 안에서 이루어 졌다. 아마 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다. 6살 짜리 소년이 상상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재미 없는 일이었다. 일어서고 앉고, 눈을 감고, 지루한 노래를 부르고 하는 일이 여러번 반복 되었다. 예배가 끝날 무렵, 벨벨트 주머니가 앉아 있는 신자들 앞을 지나 갔다. 그 때야 나는 숨막히는 지루 함에서 깨어 났다. 헬렌 이모는 항상 벨벨트 주머니에 넣으라고 나에게 동전 하나를 주었다. 그 주머니가 내 손에 닿을 때, 나는 주머니안에 있는 돈을 한줌 집어 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장난 이었다.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예배의 순서는 설교 였다. 목사가 지루한 설교를 시작 하면 때때로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내 자리에 앉아서 몸을 베베 꼬며 괴로워 하지 않으려고, 난징 반민촌 내 친구들과 노는 상상의 날개를 폈다.
헬렌 이모가 심심치 않게 “예수는 우리를 사랑한다. 공산주의자는 죽을 것이다” 라고 말 할 때, “사랑”과 “죽음”의 연관을 어린나는 알아 낼 수가 없었다. 사랑으로 말 할 것 같으 면 나는 목사의 설교나 이모의 기도를 통해서 사랑이 좋고 바람직 하다고 알 게 되었다. 죽음은 난징의 빈민촌과 상하이의 길거리에서 자주 보았다. 죽음을 보고 더 이상 당황하지는 않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나쁘고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 왜 헬렌 이모는 좋은 곳과 나쁜 것을 하나로 뭉뚱그맀을 까?
가끔 헬렌 이모는 우편물을 읽다가 “뱅크는 우리를 털어 가. 그러나 우리는 은행이 필요 해!” 라고 소견을 말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했다. 이모는 내가 보기에 혼자 중얼 거리고 있는 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물론 이모가 나를 쳐다보고 이야기 하면, 이모가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상대는 분명히 나라고 결론을 내리는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방하나인 아파트에서 이모와 나 밖에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이모와 동의 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 였다. 나는 이모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때가 많았지만, 그 말의 논리를 따지 거나 진실을 의심하는 질문을 하지 말자고 나자신에게 다짐 했다. 나는
의미심장한 말씀은 교수 같이 공부 많이 한 사람으로 부터 자연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생각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저녁 때, 뜬금없이 이모는 “불쌍한 놈, 네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 갔다. 너 좋겠다.” 라고 중얼 거렸다.
나는 이모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속으로 나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 좋았다. 항상 나를 감시하고 엄한 아버지의 눈 에서 멀리 떨어져 난징의 빈민촌에서 살 던 시절은 자유로 웠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아무에게도, 심지어 내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 해 버렸다면, 나는 유교의 계율 중에 하나인 불효를 범한 죄인이 되었을 것이다. 불효는 가장 나쁜 부도덕한 행위로서 사회로 부터의 추방 당할 수 있는 범죄였다. 내속을 들어낼 필요는 없었다.
나는 학교에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 해야 했기 때문에 아주 떳떳하지 못한 처지 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버지에 대한 자랑을 늘어 놓았다. 그들은 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높으며 얼마나 큰일을 했는 지 떠들어 댔다. 때로는 우리 아버지가 네 아버지보다 더 잘 났다고 서로 경합하는 꼴 사나운 일도 벌어졌다. 아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도 할 수없이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 될 까봐 나는 아무도 모르게 그 자리를 피 했다. 나도 분명히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타이거 브리지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아이들이 알게 할 수는 없었다. 죄수의 아들로 알려지는 것은, 누가봐도, 창피한 스러운 일이었다!
헬렌 이모가 아버지의 수감이 좋은 일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모는 악의 없이 말했고, 나는 아버지를 깍아 내리는 말이 아니고 이모의 또 다른 이상한 선언이라고 짐작 했다.
어느 일요일 날 오후, 내가 교회에서 잘 참고 예배를 보았다고. 이모는 나를 데리고 양자강의 지류인 황푸강 부둣가에 갔다. 붐비는 항구의 많은 배들은 나의 여행하고 싶은 마음을 끓어 오르게 했다. 삼판(평평한 바닥의 중국식 나무배), 장크(중국식 돛단배), 스쿠너(sailing ship), 저인망 어선(trawler), 모터보트, 증기선, 화물선, 유조선, 예인선, 함포가 삐죽 삐죽 나온 작고 큰 해군 구축함 까지 볼 수 있었다. 나는 배들이 지나간 물자국을 따라 배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중에 하나를 타고 멀고 먼 곳에 가는 꿈을 꾸고 있었다.
헬렌 이모는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 “바다는 블랙 홀 과 같은 곳이고 선원들은 동물과 같아!” 이모는 미간을 찡그려 주의 주는 표정을 지으며 높 낮이 있는 어조로 말 했다.
멀리서 보기에 선원들은 그저 정상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불량한 사람을 골라 내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헬렌 이모가 너무 한다고 생각 했다.
“바다는 배를 집어 삼키기도 한다. 다른 방법이 없을 때만 배타고 여행 해야 한다.” 이모는 내가 믿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주의를 주었다.
나는 황푸 부둣가에 갔던 일요일에 바닷물이 배를 삼키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모의 훈계에 응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헬렌 이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엇인가 교훈이 될만한 이야기를 해주 었다. 이모의 동생이었던 어머니 처럼 이모는 공격적이고 위협적이지 않았다. 나는 이모가 항상 나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모의 말을 다 알아듣지도 못했고 언제나 동의 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항상 이모의 이런 마음에 감사 했다.
이모는 어렸을 때부터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무척 두려워 했다. 이모가 살던 마을에서 소름이 끼치는 홍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모에게 물에 대한 공포증이 시작 되었다. 중국 북부는 옛날 옛적 부터 황허 강이 범람하여 정기적으로 홍수에 시달렸다. 강은 이모와 우리부모님의 고향인 산동을 지나 갔다. 꽤 자주 강이 제방을 넘어 범람 했는데 그때 마다 수천명의 농부가 죽었다.
그후 이모는 고비사막에 가까운 중국 서쪽 경계 지방인 란주에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경험이 강, 호수, 바다 등 어떤 형태의 물이든 물에 대한 공포감을 고착 시켰다고 이모는 믿고 있었다. 황허강 상류는 봄마다 급류가 발생하여 란주 가운데를 격노 한듯 우르릉 거리며 흘러 갔다. 사람들은 물에뜨는 10x10 푸트 플랫트 폼을 와이어로 강 양쪽 언덕에 묶어 놓고 이위를 걸어서 강을 건넜다.
어느날 헬렌 이모가 강을 건너는 데 강언덕에 묶어놓은 앵커가 끊어졌다. 플래트 폼은 급류에 휩쓸려 가다가 강이 급하게 굽어지는 곳에서 사라졌다. 구조도 하려 하지 않았고, 프래트 폼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실종 된 것으로 간주 했다. 기적적으로 프래트 폼은 7,8미터 하류의 강굴곡에 있는 바위에 부딧쳤다. 충격으로 사람들이 튕겨져 나가 강언덕가의 옅은 소용돌이에 떨어졌다. 살을 베거나 멍이 들거나 신경을 다치기는 했어도 모두 살아 남았다.
헬렌 이모는 그때 황허 강 급류 롤러코스터 라이드는 지옥문을 통과하는 것 같은 공포스러운 여행이었다고 말 했다. 물론 물에대한 공포증을 구태여 끄집어내지 않아도 바다가 배를 집어 삼킨다는 이모의 주장은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당시에 이모는 타이타닉 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나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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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후, 나는 이모가 7살 나던 해, 산동 고향 마을에서 천연두를 심하게 앓은 다음 부터 삐뚤어지게 행동 하기 시작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중국 시골에 살던 어린아이들은 마마가 내린 천벌로 부터 살아 남지 못했다. 그들은 고열로 괴로워 했고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서 격리 지키기만 했지
의료시설이 없어서 발병하면 얼마되지 않아서 죽었다. 어른 들은 전염이 무서워서 아이들을 가까에서 돌보지 않았다. 때때로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아이들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지독하게 앓고 있는 동안 보살핌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버려진데서 오는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필연적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마마는
얼굴에 상흔을 남겼다. 마마를 앓은 여자들은 결혼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남자도 곰보를 아내로 삼을 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그 운좋은 곰보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러해 지난 다음,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이모가 감추어 두었던 비밀의 폭로는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소스에서 나왔다. 바로 우리 아버지 였다. 나는 전혀 몰랐는 데 아버지는 헬렌 이모를 무척 싫어 했다. 아버지는 아마 내가 이모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1930년 대에 이모는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이모는 영어 때문에 갖은 고생을 하며 열심히 공부 하여 5년 만에 학사가 되었다. 전공은 가정 경제 였다. 이차대전 전에 이 과목은 미국 각 대학에서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과목 이었다. 젊은 여자들이 존경 받는 대학 졸업장을 취득 함과 동시에 유능한 와이프가 될 준비를 하는 과정이었다. 중국에 돌아와서 이모는 힘들여 얻은 졸업장에서 “가정”을 빼고 “경제학” 전공으로 행세 했다.
2차 대전 후 경제학은 앞으로 유망한 학문으로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킨 인기 있는 전공 과목이 되었다. 화려한 새 학문의 미국 학위를 내 세워 이모는 유명한 푸단 대학의 교수 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모는 경제학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영어를 잘 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의 무식을 알아 차리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미국 경제학 입문 교과서를 중국말로 번역 하여, 강의 할 때 학생들에게 읽어 주었다.
이모가 번역물을 큰 소리로 읽으면 학생들은 한마디도 빠트리지 않고 필기 하느 라고 바빴다. 대부분의 경우에 읽는 이모도 받아 쓰는 학생도 무슨말인지 몰랐다. 그러나 이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학생들이 권위 있는 교수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을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이해 했기 때문 이었다. 권위자의 말이 수수께끼 처럼 들린다면, 그것은 청중들이 그의 말을 이해 할 만큼 유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직도 이런 태도가 만연해 있다. 물론 헬렌 이모의 경우에는 아무도 권위자인 이모가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헬렌 이모는 4년동안 푸단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교수직 수입으로 살기 힘든 내전 동안을 견뎌 낼 수 있었다. 이모가 당황 하리 만큼 떳떳하지 못하게 살았지만, 내가 이모와 같이 살았던 4년동안 나는 무척 즐거 웠다. 이모는 관대 했고 쓸 데없이 내 자유를 제한하지 않았다. 이모는 항상 자신감과 위엄을 가지고 살 았다. 어렸을 때 잠깐 있었던 죽음에 대한 경험이 준 정신적인 상처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끔 이상한 선언을 하는 것 외에는. 되도록이면 부끄러워하고 섬세한 것 처럼 보이려는 보통 여자들과는 달리 이모는 크고 긴 보폭으로 걸 었고 권위 있는 목소리로 말 했다. 이모는 맛있는 음식과 깊은 애정으로 나를 보살폈다. 나는 그녀의 온화함에 감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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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부터 상하이는 금융의 중심지외에 누구나가 인정하는 범죄의 수도 였다. 상하이는 중국 어느 도시 보다도 더 많은 도둑, 깡패, 약탈자, 악덕상인 과 조폭으로 몸살을 하고 있었다. 황허강 입구의 중요한 항구로 상하이는 국제무역의 중심지였고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들어오는 입구 였다. 20 세기가 시작 되면서 상하이의 대부분은 조계지로서 외세가 지배하고 있었다. 각 조계지는 식민 정부, 법조약, 보안대가 있었다. 조계지 에서 중국인들은 아무 권한도 없었다. 미국인이나 유럽 사람들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각 조계지가 서로 혐력하여 법인을 잡아서 처벌 하지만, 중국인 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냐면 식민지 관리들은 정기적으로 약탈, 절도를 했고 젊은이들을 납치해서 동물처럼 취급하여 배에 싫어 외국에서 강제로 일하게 했다.
다른지방에 사는 중국사람들은 상하이를 약삭빠르고 남을 잘 속이는 사람들이 사는 중국에서 가장 복잡하고 발달된 대도시로 알고 있었다. 이차대전 후에 중국정부는 상하이에 있는 외국인 조계지를 모두 회수 하여 통치권을 회복 했으나 이 도시는 무법천지 라는 불명예를 벗어나지 못 했고 상하이 사람들은 항상 다른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불쾌한 반응을 일으키게 했다. 몇년 후 홍콩에서 나는 곤혹을 치른 적이 있다. 내가 아무생각 없이 상하이 말을 썻더니 아이들이 나를 상하이 사람으로 오인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바쁘게 돌아가는 어마어마한 대도시에서 살기 시작 한 처음 몇달은 이곳 말 배우는 데 집중 했다. 헬렌 이모는 이지방 말을 하지 않아서 식료품점에 가면 언제나 정가 보다 더 비싸게 주었다. 계산이 잘 못 됐다고 옳게 고칠 수 도 없었고 더 낸 돈을 돌려 받을 수 도 없었다. 이모는 상하이 말을 하지 못하는 대가를 치른 다고 생각 했다.
반면에 나는 상하이 말을 배워야 했다. 학교에서 상하이 말로 가르치고 다른 아이들이 이말을 쓰기 때문이 었다. 공산당이 중국 공화국을 세우기 전에는 국민 전체가 같이 쓰는 말이 없었다. 중국은 서로 통하지 않는 언어가 수백개나 된다. 그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생지에서 이사가지 않고 평생을 살 았다. 따라서 다른 지방 말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소수이지만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며 사는 사람은 그 지방 언어를 배워야 했다.
약 두달 만에 상하이 말을 잘 할 수 있었지만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와 숙제만 하는 외로운 생활을 했다. 이모집 동네는 프랑스 조계지에 있었는 데 어린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아이들은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안전하지 못한 상하이 길거리에 나와서 놀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어 장벽이 없어도 다른 아이들과 놀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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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난징 빈민촌의 놀이터와 친구들이 몹시 그리웠다. 상하이는 포장도로, 시멘트 건물, 붐비는 상가와 (인산)인해로 되어 있는 도시였다. 귀뚜라미, 지네, 누에 같은 것은 없었다. 상하이에서는 친구도 없었을 뿐 더러 친구가 있다고 해도 길거리에서 무엇을 하고 놀것인지를 나는 몰랐다.
때로는 몇시간 씩 창밖을 쳐다보며 심심풀이로 공상에 사로 잡혔다. 멀고 먼곳에 가는 상상을 하기 시작 한 것은 내가 상하이에서 외롭게 지낼 때 였다. 그렇지만 그 먼곳이 어디인지는 나도 몰랐다. 내가 그리는 풍경은 나무, 꽃, 목초지, 넓은 공간, 물론 많은 먹거리 등 주로 목가적인 것들이었다. 나는 어디론가 날아가서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나는 아주 밀착된 친구들로 된 그룹을 원했다. 서로를 믿고 헌신하며 같은 취미와 모험에 대한 포부를 서로 나눌 수 있는 그런 그룹 말이다.
이모는 절대로 나의 멀리 날아가 버리고 싶은 욕망의 원인이 아니었다. 이모는 나에게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그녀에게서 한점의 잔인함도 발견 할 수 없었다.
머나먼 곳으로 가고 싶은 욕망은 내 의식 속에서 떠나지 않 았다. 이것은 나 같은 괴짜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다. 학교에서 나와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없었다. 아이들은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부모가 얼마나 성공 했으며 어떻게 대 가족 안에서 일생을 보낼 까 하는 내용의 화제 였다. 그들 인생의 목표는 항상 부모 그리고 친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전형적인 아이는 자기 아버지 같이 되기를 원 했다. 될 수 있으면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아버지를 위해서 그가 이룩 했던 정도의 성공을 목표로 했다. 아무도 커서 이곳을 떠나려고 생각 하지 않았다. 나의 욕망이 그들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나는 이상하고 외롭게 느꼈다. 내가 아는 아이들 에게는 날아가 버리고 싶은 환상과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비정상이 아니면 기괴한 생각이었다.
나는 나자신의 특이함을 알고 있었지만, 내 동료와 세상을 보는 눈이 같지 않아서 약간 슬프기도 했다. 나는 색 다름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 했다. 내가 난징 아버지 저택에서 가족들과 같이 살때도 내가 가족의 일원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난징 빈민촌에서 살 던 일년은 예외 였다. 거기에서는 내동무들로 구성된 갱단의 일원이었다. 우리를 “작은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체격도 작고, 나이도 작고, 임무도 작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큰”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는 데도 우리는 세상을 다 얻은 것 처럼 느꼈다.
솔직히 말해서, 상하이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촌놈 처럼 느꼈다. 상하이 아이들은 재 빠르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계산에 빨랐다. 그들은 입는 옷도 여러벌이었고 여러가지 것들을 학습했다. 나는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들과 동화 되기 위해서 처음 한 일은 공부가 아니었다. 사업과 상업에 관한 것 이었는 데 동급생들은 벌써 이런 것들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 당시 학생들의 가장 가치있는 소유물은 먹물(잉크)을 만드는 먹(흑연)이었다. 이차대전 직 후 학교는 학생들에게 붓으로 전통적인 수필을 쓰게 했다. 그래서 어느 가정이나 학생에게 적어도 한개의 먹을 사 주어야 했다.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아서 먹물을 만드는 데는 연습과 기술이 필요 했다. 먹이 너무 진하면 붓에 엉겨 붙고 너무 옅으면 쌀로 만든 종이에 너무 쉽게 번진다.
중국 학자들이 먹을 만드는 것은 서양 화가들이 유화 물감을 섞는 것 만큼 중요 했다. 차이는 서양화가들은 아주 소수이 였지만 전통적인 중국에서는 모든 학자들이 붓글씨와 먹물만들기에 숙달 해야 했다. 좋은 먹의 품질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조업자들은 먹을 금과 조각으로 장식했다. 가장 좋은 먹은 은이나 금 만큼 비쌋다.
수필쓰기 첫째 시간에 나는 먹으로 먹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수업이 끝난 후 같은 이학년 동급생이 나에게
내 흑연과 자기 흑연 그리고 안 쓰는 붓 한개를 교환하자고 제안 했다. 그의 먹이 내것 보다 컸고 거기다 붓 한개를 준다니, 정말 수지 맞는 장사라고 생각 했다.
집에 돌아와서 헬렌 이모에게 학교에서의 거래를 이야기 했다. 이모는 먹과 붓을 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
넌 속았어!”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 했다. 내가 받은 더 큰 먹은 불량품 이었다. 내것은 작지만 양질이었고 더 비쌌다.
성미 좋은 이모는 나의 어리석음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7살 내기 사기꾼이 나에게 준 상거래에 대한 가르침은 평생 잊지 않았다. 대부분의 상하이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 부터 사업 수단을 배우기 시작 했다. 먹만 거래 한 것이 아니었다.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을 거래 했다. 구슬, 우표, 동전, 연필, 상자, 공책, 잣대, 지우개, 때로는 옷 까지 서로 바꾸었다.
쉬는 시간 운동장은 바자가 열린 시장 처럼 되었다. 아이들은 물건을 교환하고, 사고 팔고, 상대를 구슬리거나 유혹하고, 상대를 우격다짐하여 팔려고 하고, 물건을 이리 저리 살펴 보거나 서로 비교해 보고, 다른 사람 물건의 가치에 대해서 서로 다투는 등 치열한 상거래를 연출 했다.
아이들로 북적거리는 쉬는 시간에 학교운동장에서 노는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시소는 가만히 있었고 미끄럼틀도 비어 있었다. 모래 구덩이에서 노는 학생도 없었다. 일학년에서 6학년 까지 모든 학생들은 이런 저런 종류의 상거래에 참여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말하는 기술을 연마하고, 상대의 영리함을 따져 보고, 아주 작은 차이 까지 구별하는 능력을 완벽하게 하고, 상대가 자신의 속 마음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표정을 관리 하는 방법을 배웠다.
돈을 잃은 아이들은 절대로 울거나 떼를 쓰지 않았다. 손해는 학교 운동장 사업을 배우는 수업료 였다. 이익을 본 아이들은 지위와 명예를 얻었다. 그들은 교섭하는 기술로 다른 아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다른 지방 중국 상인들이 상하이 사업가들을 무서워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상하이 장사꾼 다음으로 유명한 캔톤 사업가는 상하이 상인과의 거래는 마치 강한 선수를 상대로 하는 정구 시합과 같다고 말한다. 눈 깜짝 하는 사이에 점수를 잃기 때문이었다.
4년 후 공산주의자들이 상하이를 점령 하자 많은 상하이 창업자들이 홍콩으로 옮겼다. 이들이 잘알려지지 않은 제3세계 식민지 홍콩을 휘황 찬란한 세계적인 대도시로 바꾸어 번영하는 상거래의 중심지로 만드는 추진력이 되었다. 홍콩은 1950년대에 섬유공업으로 시작 했다. 그후 가전자 제품을 만들었고 1970대에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상하이를 점령 한 후 처음 30년 동안 개인 사업이 허락 되지 않아서 사업가 엘리트들을 잃었지만 상하이의 비즈니스 리더십에 대한 잠재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상하이 사람들의 기업가 정신은 단순히 30년 동안 잠자고 있었을 뿐이었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 등 시아오핑이 “고양이가 쥐를 잡는 한 나는 고양이가 희든 검든 상관하지 않는 다” 는 유명한 경구로 사기업을 다시 허락 하자, 상하이 기업 활동은 잠에서 깨어나 맹렬히 급속도로 증가 했다. 등을 계승하여 스펙타큘러 한 경제발전을 했던 13년 동안 대통령이었던 지앙 제밍도 상하이 사람이었다. 그는 상하이 공산당의 높은 지위에 올랐고, 그가 1990년 대에 공산당을 장악하게 되자 상하이에서 같이 일 했던 동료 몇명을 폴리트부로(공산당 정치부)로 데리고 갔다. 나는 자주 그가 내가 말하는 상하이 “학교운동장 비즈니스 스쿨” 출신의 신동이 아니었나 의심해 본다.
다른 아이들은 사업 수단을 연마하고 있었 지만, 나를 겸손하게 만든 내 최초의 거래에서의 비싼 먹의 상실은 내 또래 아이들과 내가 얼마나 다른 가를 강조할 뿐이었다. 내가 상하이에 온지 3개월이 지났고, 나는 상하이말을 잘 했다. 헬렌 이모와의 생활이 안정 되었고 서로 익숙 해졌다. 그리고 이모의 예상 할 수 있는
삐딱 함이 나를 위로 해 주기 까지 했다.
어느 추운 겨울 오후, 학교가 끝날 무렵 나는 교내에 있는 백합연못 가를 걸어가고 있는 데, 연못에 색깔있는 종이 조각이 눈에 띠었다. 그것은 돈이었다. 갑진 은행 발행권은 연못가에서 약 5 피트 안의 얼음 위에 있었다. 상하이의 겨울이 꽁꽁 얼어 붙을 정도로 추울 수도 있지만 아직 연못 표면을 두꺼운 얼음으로 덮을 만큼 춥지 않았다. 그렇지만 돈을 주으려면 연못 으로 걸어 들어 가야 했다.
나는 은행발행 권을 갖고 싶었지만 얼음 밑은 살인적으로 차가웁고 위험 했다. 나는 서서 얼음의 두께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약 10피트 떨어져서 나보다 큰 아이가 돈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평형을 유지하면서 조심스럽게 한발은 연못가를 딧고 다른 한발을 뻗어서 얼음위에 서 보고 있었다. 나보다 더 큰 그가 한발로 얼음위에 서도 깨지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재빨리 그가 있는 곳으로 뛰어 가서 거기서 부터 연못에 있는 돈을 목표로 달려가서 돈을 주어 육지로 돌아 왔다. 마치 회오리 바람처럼 재빠른 동작 이었다.
깜짝놀란 그는 박수를 치며 환호 했다. 그는 “축하한다. 배짱 좋네! 너 말야, 얼음물에 빠져 죽을 뻔 알 았어.” 라고 말했다.
“응, 나는 네가 한 발로 얼음위에 서 보고 있는 것을 보았어. 네 몸무게와 내 몸무게를 비교해 보고 네 발밑의 얼음이 금이 가거나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아서, 가벼운 내가 얼음위로 달려 나갈 만 하다고 판단 했지.” 라고 설명 했다.
그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에서 그가 매우 인상 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통 성명을 하고 집쪽으로 걸어 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센 푸윤은 나보다 5살 위이고 5학년 이었다. 중간 키에 잘생긴 그는 부드러운 말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지나가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한마디 씩 하는 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는 것이 많은 것 같았다.
“여기온지 얼마나 돼?” 내가 상하이 말이 여기 본고장 사람들과 다른 것을 알아 차리고 이렇게 물었다. “석달 됐어.” “와, 석달?, 너 상하이말 잘 하는 편이야!” “응, 아직도 익숙해 지려고 배우고 있어” 그렇게 쉽지 않았어” 나는 솔직히 고백 했다.
“내가 도와 줄께,” 그는 뜻밖에 자진해서 나섰다. “상하이는 새로 온 사람이 쉽게 적응하기 어려워. 그렇지만 요령을 알 면 참 대단한 곳이야.”
심장 박동이 멎는 것 같았다. 나보다 크고 영리하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생각지도 않았는데 친구 하자고 하지 않는 가? 나는 너무나 좋아서 가슴이 벅 찼다. 그날 저녁 때 나는 센 푸윤을 만나게 된 행운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나는 헬렌 이모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낮 모르는 사람을 갑자기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이모가 뭐라고 할 지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내가 살얼음이 얼어있는 학교 백합 연못에 뛰어 들어 간 것을 말하는 것은 현명 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 찾은 친구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 하고 희망과 낙관으로 벅 차서 잠 들었다.
곧 방과후에 학교 입구에서 푸윤을 기다리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우리는 천천히 걸으 면서 상점에 있는 물건들을 낮낮히 쳐다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본것들에 대해서 끈임 없이 이야기 했다. 우리가 헤어질 지점에 도달하면 나는 항상 걸어온 거리가 너무 짧게 느껴 졌다. 그와의 산책은 나의 매일 있는 큰 기쁨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그 때를 기다렸고 우리가 같이 걸은 걸음 하나 하나를 음미 했다.
우리가 만난지 2주 쯤 지나서 부터 나는 푸윤을 큰형이라고 불렀다. 좋아 한다는 뜻과 나이가 많아서 존경 한다는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 하기를 무척 좋아했다. 우리들의 화제는 어느 것이나 누구나 상관 없었다. 학교, 선생님, 상점, 상품, 무기, 식기를 파는 노점, 짚을 타고 다니는 사복 안전원, 길거리를 배회하는 불쾌한 사람들, 순찰하는 경찰과 군인들 등등. 우리는 강요된 공경에 대해서 반항 하는 경향을 공감 했고 우리들 위에 권위를 가진 자들을 얕 보거나 비웃었다.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권위자들 중의 한 인물은 실력 없는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묻지마 식의 권력과 권위를 배격 했다. 그 권위를 적어도 어느정도의 지혜와 학력으로 뒷 바침 할 수 있었다면 덜 화가 났을 것이다. 우리를 진짜 화나게 한 선생님은 멍청이 들이었는 데 그들은 더욱 권위적이었다. 그중에 가학에 가까운 행위를 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전통적으로 맹종을 원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학생을 마음대로 때릴 수 있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체벌을 위해서 1인치 두께의 짧은 납작한 나무조각을 가지고 다녔다. 좀 지각있는 선생님은 학생의 손바닥을 매로 때렸다. 우리가 부당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선생님은 우리 보고 그를 향해서 손을 내 밀으라고 하고 손바닥을 한두번 때렸다. 어느날 선생님은 내가 비꼬는 말로 웃기려 했다고 3대를 선고 했다. 그에게 손을 내밀기 전에 아프지 않게 할 목적으로 손바닥에 침을 뱉고 문질렀다. 나는 난징 빈민촌에서의 경험했기 때문에 침이 진통제 역활을 한다고 믿었다. 왜냐면 동물들이 상처를 낫게 하기위해서 혀로 핥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렇다고 믿으면 정신적으로 진통 효과를 보는 미신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선생님이 내가 손에 침을 뱉는 것을 보고 발끈 했다. 3번 가볍게 때리는 대신, 그는 내 손바닥을 5번 있는 힘을 다해서 내려 쳤다. 손바닥이 몇일 동안이나 쓰라렸고 퉁퉁 부어 있었다.
더 무모한 선생님은 학생들을 체벌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 했다. 뺨을 때리거나, 귀를 비틀 거나, 머리 부딪치기 를 했다. 한 가학적인 선생님은 턱뼈 맨위와 두개골 사이, 귓불 뒤쪽 부드러운 부분을 누르기를 무척 좋아 했다. 그는 살금살금 학생의 뒤로 와서 갑자기 귀 뒤쪽 부드러운 부분을 바이스 처럼 꽉 눌렀다. 그 러면 머리가 터질 것 같이 아팠다.
큰형과 나는 수업시간에 끊임없는 숫자의 한자를 외어야 하는 데 대해서 몹시 답답하게 생각 했다. 한문(쓰는 중국말)은 글자(알파벳)가 없었다. 대신에 단어 하나 하나가 (표어)문자 였다. 한 글자를 완성 하려면 하나에서 어떤 경우에는 20번이 넘는 획을 붓으로 그려야 했다. 문자 하나를 배우려면 획의 조합과 차례와 각도를 모두 외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표어문자는 아주 기이한 모양이 된다. 선생님이나 한문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이면 표어문자의 모양을 보고 쓴 사람이 획의 순서를 제대로 막추었는 지 알 수 있었다.
한문을 잘 읽고 쓰려면 수천자의 문자를 외어야 했다. 학생들에게 커다란 부담이었다. 1949년,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인민공화국을 만들 때, 사람들이 다 글자를 이해 할 수 있도록 모든 문자를 체계적으로 간소화 시켰다. 그 이후로 5만자 이상의 옛날 표어문자를 그대로 쓰는 것은 엘리트 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 간주 되었다. 홍콩, 타이완, 그리고 외국 중국 사회에서 아직도 전통적인 한문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도 이중에 하나이다.)
큰형과 나는 비틀어지고 날카로운 유모어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을 모독하는 코멘트를 하던가 아니면 우리가 본 사람을 얕보는 말을 했다. 주먹코를 가진 사람을 “마늘코” 라고 하고 으시대며 걷는 사람들 보고 “바지에 똥을 싼 사람” 이라고 했다. 큰형은 수줍어 하며 입을 삐죽 내미는 여자들 보고 “변비로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고결한 척 하는 경찰보고 “기생충”이라고 하고 순찰 하는 군인 보고 “로봇” 이라고 했다. 그의 지도 하에, 나는 거친 재치와 신랄한 혀를 발전 시켰다.
여러번 큰형과 나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도망 가야 했다.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들의 불쾌한 언급을 듣고
우리를 두들겨 패서 버릇을 잡겠다고 위협 했다.
큰형은 물건과 그 가치에 대해서 아주 많이 알았다. 그에게서 나는 먹 뿐만 아니라 자기, 붓, 만년필, 옷, 구두, 가구, 자전거, 인력거, 자동차 등의 가치를 평가 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연한 나무로 만든 가구와 단단한 나무로 만든 가구 의 차이, 옻칠을 한 가구와 페인트 칠을 한 가구의 차이, 기름칠한 가구와 스테인 한 가구, 수입가구와 국내에서 만든 가구의 차이를 가르쳐 주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는 가구점 앞에서 가구 한점을 가리키며 재료와 가치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지식의 샘 같은 그를 나는 존경하고 흠모 했다. 아니 나는 그를 숭배 했다.
우리가 크면 갖고 싶은 자전거가 지나가면, 그는 자전거 제조사와 그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 했다. 자전거 골격의 구조, 핸들바의 모양, 바퀴 볼베어링과 살(스포크)의 품질등에 대해서 설명 했다. 나는 국내에서 생산된 자전거가 제일 나쁘고 영국제 라라이가 제일 좋고 미제 쉬인은 보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동차를 갖는 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지만, 큰형은 유명 자동차 회사 이름, 바디디자인, 생산국, 엔진크기를 알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차들의 제조회사를 구별 핳 수 있게 되었다. 모리스, 오스틴, 복스홀, 엠지, 자구아는 영국 제이고, 포드, 다지, 데소토, 램블러, 스튜드베이커, 쉐보레, 팩커드는 미제 였다.
자동차에 대해서 배운지 1,2주 만에, 나는 뷰익의 가치가 앞바뀌 위에 있는 크롬 라인으로 그려진 구멍의 숫자에 비례 한다는 것을 관찰 했다. 그 구멍이 많을 수록 더 고급이었다. 큰형이 나의 관찰을 확인 했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 뷰익에 있었던 4개의 구멍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풀어 주었다.
몇달이 적응의 희미한 열기 속에서 지나갔다. 큰형의 보호아래, 나는 복잡한 대도시가 내가 생각 한 것보다 더 거리낌 없이 편안하게 되었다. 학교친구들과 좀 거리를 두고 지내기는 했지만, 그들은 내가 누구 인지 알았고 나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점점 난징 빈민촌 친구들 못견디게 그리워 하지 않게 되었다. 아직도 그들을 생각했지만, 나는 생활의 리듬 속에 안정 되어 갔다. 헬렌 이모, 큰형, 그리고 대도시 상하이의 수많은 경관들과 함께.
어느날, 나와 큰형이 친구가 된지 일년 쯤 지나서, 내가 집으로 같이 걸어가려고 큰형을 기다리고 있는 데,
그가 겁에 질려서 갑자기 내 앞에 나타 났다. “리나, 날 도와주어야 해, 이리와, 빨리 가자!” 그는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지금까지 이렇게 초조해 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는 보통 때 조용 함과 자신감을 보였었다.
“무슨 일이야, 큰형?” 그가 숨을 헐떡이고 있는 데 내가 물었다. “나중에 이야기 해줄 께, 지금은 나를 따라서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
우리는 두 꼬마 런닝 백(미식 축구의 포지션) 처럼 급하게 학교를 뛰쳐 나왔다. 우리는 도로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렸다. 자전거와 버스 앞을 지나서, 보행자를 피하기 위해서 오른 쪽 왼쪽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걸리적 거리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거나 악을 쓰며 군중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알지 못 했던 어느 건물에 도착 했다.
“사람들 앞으로 가. 안되면 사람들 가지랑이 사이로 빠져 나가.” 큰형은 명령 했다. 사람들에게 깔려 죽을 뻔 했지만 작은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큰형의 임무 달성을 막을수는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아무리 위험해도 내가 그를 버릴 수는 없었다. 그에 대한 나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건물 안, 미로같은 홀에는 팔을 흔들며 악을 쓰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사람들 다리의 숲 가운데 서서, 큰형과 나는 더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다리들은 캉통안에 있는 정어리 처럼 촘촘 했다.
그 다리들은 나를 압박 해 들어 왔다. 내 가슴이 아프기 시작 하면서 어지러웠다. 일이분후 숨쉬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큰형은 내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흔들며, “가랑이를 꼬집어” 라고 악을 썼다.
나는 두 손으로 여자 남자 할 것없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그렇게 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곧 내몸을 눌렀던 압박은 풀렸다.
“여기서 나가자.” 큰형은 앞으로 나가려는 것을 포기 했다. 우리는 오른쪽으로 조금씩 움직여서 부채꼴 모양의 군중 에서 벗어나 입구 근처 까지 빠져 나왔다.
“제기랄!, 이거 망했어!” 큰형은 중얼 거렸다. 그는 낙담 해 있었고 얼굴 색이 잿빛이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고 싶은 욕망을 억제 했다. 우리는 아무말 하지 않고 몇 블록을 걸어 갔다. 갑자기 큰형은 아이스 크림 집에서 멈쳐 섰다. “아이스크림으로 위로를 받자.” 그는 아이스 크림 집으로 들어 가면서 속삭이 듯 힘없이 말 했다.
큰형은 언제나 주머니에 돈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돈이 어디서 낳느냐고 불어보지 않았고 그는 자진해서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는 운명이라고 생각 했다. 그는 돈을 가질 운명이고 나는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 하면 간단 했다. 나는 또한 그는 마술 같은 힘을 가지고 있어서 돈이 주머니에서 자란다고 생각 했다.
1947년 상하이에서 아이스 크림은 유행하는 가장 최신의 사치였다. 일년전 내가 난징에 살때 그곳에는 아이스크림이 없었다. 상하이의 아이스 크림 집에는 소파와 유리를 깐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당시에 화려한 시설이었다. 추세에 밝은 사람들, 부자, 특권층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큰형은 아이스 크림 선데이를 주문 했다. 나에게는 초콜릿 소스와 바닐라 아이스크림 만으로도 성찬이었다. 신이 있다면 그것은 신이 먹는 음식이라고 나는 확신 했다. 아이스크림을 다먹은 후 집게 손가락으로 컵을 깨끗이 훌터 먹었다.
“리 나, 이건 대재앙(카타스트로프)이야!” 큰형은 빠르게 녹고 있는 선데이에 수저를 저으면서 슬프게 말했다. “우리가 비집고 들어 가려 했던 곳은 은행 이야. 은행이 문을 닫고 있었어. 오늘 아침 학교에서 상급생이 나에게 은행이 닫는 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어. 만약 내가 거래하는 은행도 문을 닫는 다면 내돈을 미리 찾을 수 있기를 바랬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늦게 그곳에 도착했서. 거기에 있던 많은 사람들도 다 나같은 신세야. 내돈도 뱅크와 함께 없어 졌어.”
“왜 뱅크가 문을 닫았지?. 나중에 다시 여는 것 아니야?” 내 질문이 말이 되는 지 자신이 없었다. 사실은 그가 한말도 말이 되는 지 나는 확신 할 수 없었다.
“나도 왜 뱅크가 업무를 중단 했는 지 몰라, “ 큰형은 숙고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은행이 아주 높은 이자를 주었다는 것 뿐이야. 그래서 나도 돈을 은행에 맡긴 거야.”
나는 이자가 무엇인지 몰랐다. 나는 사람들이 돈을 은행에 맡기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헬렌 이모는 돈을 튼튼한 상자에 넣어 집에 보관하는 것이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 보다 더 낫다고 하는 몇명의 친구들과 여러번 언쟁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모 친구들은 은행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이모도 이것을 부인 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담섞인 말이 오고 간 다음, 이모는 예외 없이, “집에 있는 튼튼한 상자는 이자를 주지않아”라고 결론 지었다.
그 말과 미국에서 수련받은 경제학자라는 지위가 항상 토론을 끝냈다. 그런 대화로 부터 나는 이자가 좋은 것 임은 알고 있었다. 큰형이 “이자” 라고 부르는 것은 “이로움”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고 추론 했다.
큰형이 괴로워 하는 것을 알고 니는 더 이상 물어서 그를 귀찮게 하지 않기로 했다. 큰형이 하는 말을 내가 이해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너알아, 리나, 내가 은행에 넣은 돈은 내 수업료 였어.” 큰형이 나에게 설명 해주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가 학기가 시작 되면 회계과에 갖다 주라고 했어. 나는 학교 직원에게 집에 돈이 없으니 수업료 납부를 연기 해 달라고 부탁 했지. 학교에서 이를 허락 해 주었고 나는 그돈을 은행에 넣 었지. 이제 돈이 없어 졌으 니, 우리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할 지 모르겠어.” 그는 어른 처럼 침울한 목소리로 말 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를 경이로운 눈으로 찬찬히 쳐다보았다.뭐라고 할 지 몰랐다. 나도 그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어른도 마술 같은 신비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게 되었다. 이 12살 짜리는 어른의 세상을 다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리적인 결정을 내려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그에게 재난이 닥 쳤다. 나는 무엇 때문에 재난이 돌발 했는 지 모른 다. 재난의 복잡한 내용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른도 재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 아버지가 좋은 예라고 생각 했다. 한때 그는 거물이었지만, 결국 일개 안전원에 의해서 끌려 갔다.
큰형을 알기전에 나는 어른들은 아동들로 부터 분리 된 특권을 가진 계급이려니 했다. 우리 어린이들은 어른을 존경해야 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우리를 원하면 언제든지 무시할 수 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부모에게 불복하거나 불효 하는 것은 부도덕 하다는 것을 믿도록 세뇌 시켰다. 그러나 어른이 어린이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 지에 대한 도덕율은 없었다. 살기 힘들면 어른들은 우리를 남에게 주거나 팔 았다. 살기 좋은 때에도, 음식, 편안 함, 자유 같은 좋은 것들은 어른 차지 였다. 어린이들은 어른이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테두리 안에서 살아야 했다. 간단히 말하면, 어른은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처분 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큰형이 나에게 보여 준 것은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가 태어 날 부터 정해 지지도 않았고 신비 스러운 것도 아니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지식이었다. 어른이 권력과 명예를 갖게 하는 것은 지식이었다. 큰형의 행동과 자신감은 이것을 더 확연하게 했다.
그날 우리가 헤어질 무렵, 큰형은 그 답지 않게 원기없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나는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할 줄 몰랐다. 그가 돌아서서 천천히 걸어 가는 것을 길에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다음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질 때 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설움이 복 바쳤다.
다음날 큰형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댓글
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