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캐슬>과 ‘하나님 나라’
- 박흥순(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
JTBC 홈페이지 중 "스카이캐슬" 페이지
1. 시대를 반영한 드라마
사람들은 왜 드라마 <스카이 캐슬(sky castle)>에 열광하는가? 탄탄한 시나리오와 섬세한 연출과 감독 그리고 연기에 몰두하고 열연한 배우들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사회 민낯을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질투 섞인 시선”도 한몫했다. <스카이 캐슬>은 신분과 부를 독점하는 극소수 사람들의 시선으로 바라 본 학력, 직업, 신분, 계급, 가문, 혼인, 평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와중에 입시 강사가 입시 코디로 갈아탔다는 소문도 들린다. 입시 경쟁에서 새로운 정보를 취득한 학원과 학부모는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해 나갈 것이다. 한때 한국사회도 “개천에서 용났다”고 말하던 시기도 있었다. 분명한 계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부 잘하는 자녀가 신분 상승을 이루고 가문과 가족을 일으켰던 이야기도 종종 들렸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을 쓸 수 없는 신분과 계급이 고착화된 사회가 되었다.
협동이나 평등, 공공성이나 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하면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진부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상생, 즉 함께 살자는 말은 힘이 없는 사람들이 허공에 외치는 의미가 없는 소리로 들린다. 이런 현상은 비단 사회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교회 안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주일학교나 교회에서 무슨 대회를 열어놓고 등수를 가리는 것도, 각종 이유와 조건을 붙여서 달란트를 나누어주고 상품을 고르도록 한다. 대학 입시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고, 소위 이름난 대학에 입학을 하면 합격자 이름을 부르며 축복기도를 한다. 대학에 떨어지면 교회나 청년부에 나가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취직하면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취업과 혼인 모두 경제적 요소가 중요한 잣대가 된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치가 교회 안에서도 버젓이 통용될 뿐 아니라 상승효과를 만든다. <스카이 캐슬>은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2. 스카이 캐슬이 인도하는 믿음
<스카이 캐슬>은 문자 그대로 ‘하늘에 있는 성’이다. ‘하늘에 있는 성’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 장소를 뜻한다.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일 듯 어른거리지만 결코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공간과 장소를 상징한다. 기독교 신학자가 오래전 사용했던 ‘하나님 도성’(city of God)과 묘하게 겹쳐진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기독교 관련 암시가 아주 적게 스치듯 나타나지만, 한국교회가 직면한 정체성의 위기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극중 입시 코디 김주영은 강예서 어머니 한서진에게 설득하듯 말한다.
“어머니,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녀를 서울 의대에 보내줄 것을 의심하지 말라고 강조하며 말한다. 학교 시험 경향을 분석하는 수많은 입시 전문 강사를 거느릴 뿐만 아니라 시험 문제지를 유출할 수 있는 통로를 제대로 파악한 입시 코디 능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입시 코디를 맡게 된 학생의 성격과 행동을 분석하고, 주변 학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가족이 지닌 아주 사적인 비밀도 손에 쥐고 흔들어댄다. 그리고 계속해서 강조하며 말한다. “어머니,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전적으로 믿으라는 말은 어찌 보면 교회에서 무조건 믿으라고 말하는 것과 묘하게 겹쳐진다. 예배 중 대표기도를 담당한 사람들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게 하시고”라는 문구를 큰 목소리로 외쳐댔고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권력과 부를 누리는 것이 하늘로부터 주어진 당연한 은혜이고 복이라고 외치는 설교가 한국교회 강단에 차고 넘친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보여준 부와 권력을 세습하고 독점하고 싶은 탐욕과 함께 상위 1%에 해당하는 상류층이 사는 모습은 한국사회 단면과 함께 한국교회 민낯도 드러내준다. 스카이(sky)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표기하는 영문 약자이지만 묘하게 ‘하늘’이라는 이상적 장소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상적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학부모와 입시 전문가 그리고 학생이 합심하는 모습은 종교적 헌신과 흡사하다. 강예서는 서울의대 합격증을 받은 박영재를 부러워하며 어머니에게 말한다.
“영재오빠 포트폴리오만 있으면, 황금 로드맵이 생기는 거잖아?!”
지금까지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세습한 사람들은 자신들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려고 애쓴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 첫 회에서 ‘스카이 캐슬’에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은밀하게 정보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울 의대를 합격시킨 비법을 알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강예서도 ‘황금 길’을 따라서 걷게 된다고 꿈에 부풀어 말한다. ‘황금 로드맵’, 즉 ‘황금 길’을 걸을 수 있는 지도를 뜻하는데 이 또한 묘하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하는 것과 겹쳐진다(계 21:21).
“도시의 넓은 거리는 맑은 수정과 같은 순금이었습니다.”(계 21:21, 표준새번역)
눈앞에 있는 현재보다 현재 뒤에 있는 미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독려하는 드라마 속 대사는 ‘하늘에 있는 도성’, 즉 하나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 종교적으로 희생하고 헌신하라고 외치는 소리와 흡사하다. 결국 <스카이 캐슬>은 ‘하늘에 있는 성’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3. 두 밥상 이야기
그렇다면 드라마 <스카이 캐슬>은 한국교회와 성도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인가? 이 질문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도록 이끈다.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세습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가 양립할 수 있는지 묻는다. ‘하늘에 있는 성’을 의미하는 <스카이 캐슬>은 마가복음 6장에 14절부터 44절까지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 성서 본문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밥상을 소개한다. 하나는 ‘헤롯 생일 밥상’(막 6:14-29)이고 다른 하나는 광야에서 예수와 민중이 함께 한 ‘오병이어 밥상’(막 6:30-44)이다. 헤롯 밥상은 온갖 권력과 부를 거머쥔 사람들이 헤롯 왕 주변에 모여든다. 마치 <스카이 캐슬>이 선택된 소수에게만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세습할 수 있는 권한과 혜택을 주는 것과 흡사하다. ‘헤롯 생일 밥상’은 누구나 부러워할 권력과 부를 누리는 사람들이 앉고 싶은 이상적 장소와 공간을 대변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 없이 그 자리에 앉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하늘에 있는 성’, 즉 <스카이 캐슬>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헤롯 생일 밥상’은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된 세례 요한을 죽인 ‘죽음 밥상’이었다는 점이다. 권력과 부를 거머쥔 사람들이 앉아서 진수성찬을 먹고 마시며 한 짓이 의로운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모의였다니 소름이 돋는다. 헤롯 아내와 딸이 세례 요한 머리를 요청한 것처럼, <스카이 캐슬>은 김혜나를 죽도록 기획한다. 누군가 성공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가차 없이 한 생명을 빼앗아 버릴 수 있다고 판단하는 이상적 장소가 바로 <스카이 캐슬>이다. (이상적이고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모두 함께 누리는 삶을 사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이 누려야 할 것을 빼앗거나 재빠르게 가로채는 방식으로 부와 재산을 늘리는 것을 잘하는 일이라고 박수쳐왔다. <스카이 캐슬>은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싶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싶은 이상적 장소다. 한국교회와 주일학교도 이상적 장소로 대변된 <스카이 캐슬>이라는 잣대에 맞춰 외치고 교육한다.
또 다른 밥상은 광야에서 차려진 ‘오병이어 밥상’이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차려진 광야 밥상은 예수와 민중이 마주한 밥상이다. 민중은 왜 예수에게로 달려갔는가? 예수만이 민중과 마주한 밥상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를 찾아온 민중을 바라보며 연민하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연대했다.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세습하는 사람들이 민중과 함께 나누려는 의지와 태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민중과 기꺼이 밥상을 나누는 예수에게 달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형편없고 보잘 것 없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차려진 밥상이었지만, 그곳에 모여든 2만 여명이 배불리 먹고 남길 수 있는 기적을 일구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고 ‘함께 살자’고 스스로 몸으로 외치는 민중이 있어서 가능한 나눔 기적이다. 예수와 민중이 마주한 광야 밥상은 결국 서로 살리는 생명 밥상이다. 광야 밥상에서 보여준 생명 밥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서로를 연민하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연대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
광야에서 예수와 민중이 마주한 밥상이 ‘헤롯 생일 밥상’을 대체할 수 없다면, 한국교회와 주일학교는 <스카이 캐슬>이 곧 ‘하나님 나라’다. 그럼에도 희미한 희망이 남아 있다면, ‘함께 살자’고 외치는 민중과 ‘목소리 없는 사람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작고 희미한 희망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 결말은 그 작고 희미한 희망을 붙잡아 보자고 말한다. ‘헤롯 생일 밥상’과 같은 <스카이 캐슬>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는 당장 멈추고 방향을 전환하라고 제안한다.
4. 방향 전환
<스카이 캐슬> 극중 대사를 다시 살펴본다. 아내를 죽음으로 내몰고 아들과 화해하려고 몸부림치는 박수창이 후배 강준상에게 전하는 말을 들어보자.
“제수씨도 예서도… 손에 있는 것 놓기가 어렵겠지. 하지만 인생 길어. 코앞만 보지 말고… 10년, 20년을 내다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을 서울의대에 입학시키려 했던 박수창은 아내가 죽은 후에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과 정체성을 갖고 살며, 아들과도 화해한다. 그가 전해준 진심어린 충고는 강준상을 변하게 만든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변한 또 다른 한 사람은 바로 강예서이다. 서울 의대에 꼭 가야한다고 강요하는 할머니를 향해서 강예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할머니하고 다른데, 나이도 외모도 다 다른데, 내가 왜 할머니랑 똑같은 생각을 해야 하냐고요.”
눈에 쓰인 거짓과 독선으로 가득 찬 비늘이 벗겨진 후에 강예서는 그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비교와 경쟁으로 내몰았던 소중한 자신, 죄책감과 죄의식에 빠져 살았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과 관점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자기 존재와 정체성을 부정하며 살아왔던 한서진으로 불렸던 곽미향은 이렇게 말한다.
“내려놓고 나니까 내가 왜 그렇게 살았나 싶어.”
권력과 부로 상징하는 <스카이 캐슬>을 포기하고 그 곳을 떠난다. 강준상도 병원장이 되는 꿈을 포기하고 사직서를 제출하고, 강예서는 자퇴하고 혼자서 공부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스카이 캐슬>에 온통 정신 빼앗긴 한국교회와 성도는 정신을 차리고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향을 전환하고 돌아서서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실현해야 할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