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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설로 덮인 몽블랑
정 수 현
오래오래 전인 1994년 12월 8일 나는 로마의 휴미치노 지역에 자리 잡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에서 제네바행 이탈리아항공기에 탑승하였다.
오전 9시 17분에 항공기는 소음을 내며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서 한 시간 후에는 만년설로 뒤덮인 알프스산맥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깎아지른 바위가 펼쳐지고 그 사이에는 하얀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다 산등성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눈은 없어지고 푸른 초원 위에는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어 가히 목가적인 낭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한 시간 10분 만에 제네바의 쿠엥치앙 국제공항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스위스라 하지만 활주로의 50%는 프랑스 땅이었으며, 이렇게 유럽은 국경선이 막혀있지 않고 개방되어 있었다. 공항청사에서 입국수속은 간단하게 끝났고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은 프랑스 남동부 오트사바현의 소도시인 샤모니(Chamonix)였다.
낯선 땅에 도착한 나는 우선 사방을 살펴보았다. 북쪽으로는 브레방산(Brevent, △2,525)과 에키루즈 바위산들이 험한 절벽 위에 형성되어 있었다. 남쪽으로는 몽블랑산(Mont Blanc, △4,807)과 그랑조라스라는 설산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남북산악 어간에 폭이 좁은 길이가 20㎞나 되는 깊은 협곡이 형성되었고, 그 중심에 샤모니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지역은 해발 1,037m의 고지대로 남북설산에서 흘러내린 빙하수들은 낮은 곳을 찾아 물길을 틀어 샤모니를 관류하는 아르브(Arve)강에 모여든다. 이 강은 도도하게 제네바 근처까지 100㎞를 유하하여 론(Rhone)강과 합류한다.
샤모니 가로에는 2~3층으로 지은 연립주책이 여러 채 지어져 있었다. 추운 지방이라 그런지 한결같이 검게 도색을 하였으며, 지붕에는 여러 개의 연돌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다.
인구 10,000명 내외의 소도시이지만, 스케이트를 비롯한 스포츠시설이 잘 되어있어, 1924년 동계올림픽을 처음 연 장소였다. 또한 국립스키학교와 등산학교가 있으며, 알프스등반의 출발지이므로 호텔과 휴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이렇게 국립등산학교를 만들어져 모험심과 탐험심을 기르고 있었으니 참으로 부러웠다.
역사적으로 보면 서양인들은 15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색활동을 전개하는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그 일환으로 아메리카대륙을 비롯하여 세계도처에 발을 들여놓아 식민지를 만들어갔다. 그 탐험심 많은 서구인들은 제한적이지만 우리나라에도 발길을 들여놓았고, 심지어는 1901년 독일인 지리학박사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가 한라산을 등정하였다. 그는 한라산 높이가 1,950m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히는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런 인간의 욕구는 오늘날 우주탐사로 이어지고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윽고 나는 일행과 함께 구스타비아(Gustavia) 호텔에 도착하여 오찬을 하고 목적인 몽블랑관망에 들어갔다. 그러나 몽블랑산 입산은 통제되어 있어 샤모니 북쪽의 브레방산이나 남쪽에 있는 에귀디미디산(Aiguille du midi, △3,842) 전망대를 이용하여야 했다. 우리 일행은 브레방산 전망대로 오른다고 했으며, 이 삭도회사는 프랑스·독일·이탈리아 3개국 합작기업이라 하였다. 다행히 겨울이지만 날씨는 쾌청했고, 고지대이지만 춥지 않아 좋았다. 1년에 겨우 60일 정도만 몽블랑산을 볼 수 있을 정도인데 오늘은 재수가 좋았던지 조망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남달리 큰 고민에 빠졌다. 그것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높은 곳에 오르면 겁을 집어먹게 되어 케이블카 타는 것을 기피해 왔다. 나는 김중구 가이드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고 동참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가이드는 이 케이블카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니 안심해도 된다고 말하며 함께 타자고 권했다. 그러자 나 또한 다시 이곳에 올 수 없는 일생에 한번 기회이니 눈 딱 감고 따라가기로 어려운 결심을 했다. 그래서 탑승장에 이르러보니 케이블카는 4인승인데 2인씩 마주보게 앉아 나는 친한 서귀포시 강문실 동지 옆에 앉았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케이블카는 철도 위를 천천히 미끄러져 가다가 이내 공중에 매달렸다. 나는 밑을 내려다보니 허공에 뜬 현상이라 겁이 털컥 나고 공포증에 사로잡혔다. 그러고 있을 때 케이블카가 전주 있는 곳에 이르자 드르륵하는 소음이 들렸다. 그러자 날개도 없는 나는 떨어지면 산산조각이라는 망상이 떠올라 옆에 앉은 강문실 동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런 조마조마한 공포와 싸우며 브레방산 1,300m 지점에 이르니 케이블카 정류장이었고 내리라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60인승 곤돌라(Gondola)에 타고 정상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타보니 60여 명이 전부 한국인이었고, 그 중 어느 부인이 나와 같은 고소공포가 있는지 아~하는 두려움에 떠는 음성을 발했다. 이내 곤돌라는 수직으로 1,200m를 10분 만에 끌어올리자 그 발전된 과학 기술력에 감탄을 했다. 정상 30m 밑에 있는 곤돌라 정류장에서 밖에 나오니 갑자기 혹한이 엄습해와 덜덜 떨었다. 이제부터는 계단을 따라 2,525m의 정상에 오르니 샤모니 깊은 계곡 넘어 손에 잡힐 듯이 몽블랑산이 내 눈에 들어왔다. 주봉은 울퉁불퉁한 화강암괴가 꽤 넓게 좌우로 펼쳐져 유럽 제1봉인 4,807m에 이르고, 그 바위들은 밑으로 흘러내려 만년설을 이루고 있었다. 해는 이미 석양을 발하면서 몽블랑의 하얀 눈을 반사시켜 황홀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장엄한 자태에 탄성을 지르며 나는 사진 찍기에 바빴다.
이런 미지의 준령을 처음 정복한 것은 1786년 8월 샤모니에 사는 자크 발마와 의사인 미셀 파카르였다. 이렇게 집념을 가진 두 등산가의 도전으로 몽블랑산은 신비 속에서 벗겨져 자연 상태의 설산이라 단정을 하게 되었다.
이 산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에 위치하며 이탈리아어로는 몬테 비양코(Monte Bianco)라 칭하는데 이는 ‘흰 산’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탈리아 쪽은 사면이 매우 가파르고 프랑스 쪽은 비교적 완만하다. 그러다 이 산이 가로막혀 통행에 불편을 느끼던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1958년에 산을 관통하는 터널공사에 착수하였다. 드디어 프랑스의 샤모니에서 이탈리아의 크로마이외간 11.6㎞의 자동차 전용도로가 1965년 7월에 개통되자 육로교통은 200㎞를 단축하게 되었다.
나는 정상 바로 밑에 있는 전쟁터의 유개진지와 흡사한 매점에서 열을 지어 차례가 되자 커피 한 잔을 사마셨다. 그 맛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미로움과 여운을 남겼다. 30여 분간 주변을 감상하다 다시 곤도라를 타고 내려와 케이블카에 올랐다. 다행히 내려올 때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어마어마한 수직절벽을 유심히 살펴보았고, 그 틈새에 간혹 자라는 관목 중에는 빨간 열매까지 달려 보기에도 탐스러웠다. 밑으로 내려오니 낙엽송들도 경사면에 군락을 형성해있어 운치를 한결 돋보였다. 그러다보니 케이블카 정류장에 이르렀다.
그래도 고소공포증으로 겁쟁이였던 내가 이를 극복하고 몽블랑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는 일생일대의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할 수 있었다.
나는 즉시 버스를 타고 산천경계를 두루 감상하며 유엔기구가 많이 설치된 스위스의 제네바로 향했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
정 수 현
2017년 10월 20일 아침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비가 쏟아졌다. 타국에서 가을비를 대하니 어쩐지 쓸쓸한 기분도 들었지만 나는 초행길이라 차장 밖을 내다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하바롭스카야 거리에 있는 신한촌 앞에 잠시 멈추었다가 버스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드넓은 시베리아벌판을 달렸다. 그렇게 135㎞를 달려 도착한 곳은 독립운동의 혼이 서린 우수리스크였다.
옛 지명은 우수리강 지류에 면해있어 니콜스크 우수리스크라 하다가 1935년에는 볼셰비키혁명시 공을 세워 소련 최초의 원수가 된 보로실로프의 이름을 따서 보로실로프시(市)라 하였다. 그 후 우수리스크로 다시 변경되었고, 우리 동포들은 쌍성자(雙城子)라 하였다. 이 도시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모스크바로 가는 시베리아철도와 하얼빈으로 가는 동청철도의 분기점에 놓여있다.
정오가 될 무렵 다행히 비는 그쳐 다행이었고, 나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최재형(崔在亨) 선생이 말년에 사시던 고택에 이르렀다. 그 건물은 큰 도로변의 동쪽 측면에 붙여지어진 단층슬래브 집이었다. 콘크리트 벽체에 창문이 6개 달려 남북으로 길쭉한 25평 정도였다. 그리고 출입문은 남과 북쪽 벽체에 하나씩 설치해있고, 회색으로 집 전체를 도색해 있었다. 이 건물은 다행히도 2014년 대한민국 해외동포재단이 매입하여 안내판을 부착해 있었다.
『이 집은 연해주의 대표적 항일운동가이며,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였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하고 있던 곳이다.』
나는 이 고택에서 최재형 선생이 일편단심으로 심신을 다 바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최재형은 1860년(고종 11)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 최홍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9년 대홍수가 함경도를 덮치자 살길이 막막했던 최재형 일가는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의 연추(煙秋, 크라스키노)에 정착하였다. 그곳 연추에서 최재형은 러시아학교를 다니다가 살기가 어려워 2년 만에 가출하였다. 그는 목허우의 포시에트항의 선착장에서 러시아 선원들에게 발탁되어 상선의 견습수부가 되었다. 다행히도 선장인 표트르 세묘노비치는 최재형을 친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 그는 선장부부의 도움으로 최표트로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식 이름과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러시아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선장을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오가며 세계를 보게 되었다.
1878년에는 선장의 도움으로 블라디보스토크 무역회사의 사원으로 취업했다.
1882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금각만에 극동해군기지가 건설되었고, 그곳에서 자동차로 2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 슬리바안카 항구에는 육군보병군영이 설치되었다. 그러자 최재형은 뛰어난 러시아어 실력으로 군통역을 맡았고, 이어서 군납업에 착수하여 많은 돈을 벌어 갑부가 되었다.
1893년(고종 30) 최재형은 연추의 도헌(都憲)으로 선출되었다. 도헌은 오늘의 읍장격으로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등 한인사회발전에 힘썼다.
1900년(광무 4)에 이르러 연해주는 우리 동포가 10만 가까이 거주하게 되었다.
1904년(광무 8)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최재형은 러시아 해군소위로 임관하여 통역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면서 이주한 동포들을 규합하여 항일전투에 참가케 하는 책임을 지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무기 등을 입수하였다.
1907년(융희원년) 8월에는 간도관리사를 역임했던 이범윤(李範允)이 포수들을 이끌고 찾아오자 최재형은 1만 루블을 내놓아 러시아무기를 구입하여 무장케 하고 필요한 군자금으로 사용케 하였다.
1908년(융희 2) 4월 최재형은 전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 헤이그밀사였던 이위종, 의병장 안중근 등과 연추(크라스키노)의 그의 집에서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였다. 최재형은 동의회총재로 선출되어 연해주의 통합의병단체를 결성 지휘하게 되었다. 그해 2월에 창간된 해조신문이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이를 인수하여 대동공보(大東共報)로 발행하였다. 그 논조는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을 절규하는 격렬한 내용이었다.
1908년 7월에는 의병장 안중근을 지원하였으며 안중근은 2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지방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경흥습격에는 5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회령의 영산공격에는 실패하여 돌아왔다. 그러자 최재형은 안중근을 위로하며 대동공보의 연추주재원으로 근무토록 하였다.
1909년(융희 3) 7월에는 몸소 의병 200명을 이끌고 경흥의 신아산(新牙山) 공격작전을 지휘하여 일본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그해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거사를 적극 지원했다.
최재형은 안의사를 자기집에 기거토록 하였고, 무기와 여비를 지원함은 물론 동의회 소속인 우덕순(禹德淳)을 합류시켰다. 그리고 안중근에게는 최재형이 경영하는 대동공보의 기자증을 만들어주며 기자로 행동토록 하였다. 또한 안중근사건을 러시아법원에서 판결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 변호인으로 대동공보의 발행서명자였던 러시안인 콘스탄틴 헤드로비치 미하일로프를 선임하였다. 또한, 안의사가 이토 사살장소를 하얼빈역으로 택하게 한 것은 당시 중동철도를 러시아가 관리하고 있을 때라 러시아 관헌이 주재해 있었다. 그러므로 러시아가 재판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러시아 관헌이 안의사 신병을 일본에 인도하여 관동도독부 일본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자 안의사를 지켜주지 못해 마음 아파했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 병탄되자 최재형의 주도로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를 몰아내기 위한 13도의군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지도자들은 성명회를 결성하여 강제병탄의 부당함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만들어 일본천황과 세계 각국에 송부하였다.
1911년 5월 11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57명의 항일인사가 모여 독립군양성과 정부수립을 목표로 하는 애국단체인 권업회를 조직하였고, 최재형은 그 회장을 맡았다.
1916년 일본은 최재형을 스파이 혐의로 러시아 당국에 모함하자 러시아 관헌은 최재형을 체포하였다. 그러나 무혐의로 4일 만에 방면되었으나 여전히 감시를 당하였고, 그 많던 재산도 무한히 소요되는 독립운동에 전부 소모되어 그는 우수리스크의 초라한 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1917년 5월 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조직되자 최재형은 명예회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2월 최재형의 주도로 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하였고, 그는 외교부장이 되었다. 그해 4월 11일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재형은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920년 4월 5일 최재형은 우수리스크 자택에서 러시아내전에 간섭하기 위해 연해주에 출병해 있던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그런 후 4월 7일 우수리스크 감옥인근 왕바실재에서 60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3월 1일 최재형 선생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고, 2016년 8월 15일에 그 후손들에게 한국국적을 취득시켜 주었다.
2019년 3월 한민족 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은 그 고택을 최재형 기념관으로 건립하였으며, 그해 8월 12일에는 최재형 기념비를 제막하였다.
최재형의 손자인 최발렌틴은 모스크바에 거주해왔으나 2020년 2월 14일 불행히도 독일에서 사고를 당해 모스크바로 옮겨졌으나 그날 향년 82세로 타계하였다.
사람이란 누구나가 행복을 추구하고 고난은 멀리하려 한다. 그런데 독립운동가들은 가시밭길을 몸소 걸으려는 분들이니 아무나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까지 형극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했으니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 권력을 잡았던 사대부들이나 재력가들은 평안을 택한 사람이 많다. 나라는 없어져도 일본에 빌붙어 작위를 받으며 호의호식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최재형 선생은 천대받던 노비의 후예로 거룩한 나라 찾기에 혼신을 다 바쳤으니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나는 한적한 도로변에 말없이 서있는 선생의 고택 앞에서 한참 동안 명상에 사로잡히다가 해삼위(海蔘威)라 부르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청·일전쟁의 종착지에서
정 수 현
1999년 7월말의 산둥반도는 무척이나 더웠다.
그런 뙤약볕을 맞으며 나는 산둥(山東)반도의 동북단에 위치한 웨이하이(威海)시에 도착했다. 내가 불원천리하고 산 설고 낮 설은 이국땅에 가게 된 동기는 청일전쟁의 유적을 탐방하기 위함이었다.
1894년 7월 25일에 경기도 안산시 풍도에서 발발한 청일전쟁이 종결된 곳이 바로 웨이하이항 앞에 떠있는 2.1㎢ 의 조그만 섬인 리우꽁도(劉公島)였다.
나는 위해항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서쪽에 높이 솟은 산이 남쪽으로 산맥을 뻗어내려 항구를 감싸 안았고, 동쪽으로는 외해에 접해있으며, 항만 앞에는 푸른 숲으로 덮여있는 리우꽁도가 떠있었다. 나는 인천으로 가는 선착장을 지나 연안부두에 이르렀다. 그 즉시 중국화폐 20원을 내고 표를 사서 크지 않은 유람선에 중국인 100여 명과 함께 승선하였다. 유람선은 내항의 잔잔한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 30분 후 리우꽁도의 선착장에 이르렀다.
천막상가가 즐비하게 상품을 진열하여 손님을 기다리는 장소를 지나니 당시 청국 북양해군을 총지휘한 수사제독 딩뤼창(丁汝昌) 좌상이 좌대위에 높직하게 설치해 있었다. 바로 북양함대의 사령관이었고, 한을 품은 채 먼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1882년 임오군변시 군함을 이끌고 와서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압송하는 등 5회나 함정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다녀간 일이 있었다.
고개를 높이 들어 쳐다보니 울창한 푸른 숲으로 덮인 야산 중턱에는 청일전쟁 때 전사한 북양해군의 본부였던 하얀 충혼비가 우뚝 솟아있었다. 그리고 섬의 언덕 위에는 당시 북양해군 제독서가 위치하며, 그때의 유품을 진열하여 갑오전쟁박물관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일전쟁이라 부르는데 중국에서는 그 해가 갑오년이므로 갑오전쟁으로 칭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청일전쟁이 전개된 장면은 물론 우리나라의 아산만에서 일본함포에 얻어맞아 대파된 제원호(濟遠號, 2,300톤)의 무쇠덩어리 닻과 굵직한 함포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 동안 역사의 인식을 중화우월주의 사관에서 바라보는 중국인들이기에 승전한 전투가 아닌 패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퍽 이례적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부끄러운 과거사를 되돌아보고 미래에는 그러한 치욕을 되풀이하여서는 안 되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박물관을 보면서 청국의 대함대가 수장되어버린 그때의 전쟁을 재조명해보기로 했다.
1894년에 우리나라는 청국의 영향권 속에 있었고, 일본의 상업자본은 물밀 듯이 밀고 들어와 경제는 외세에 잠식되어 버렸다. 국내정치는 문란하였고, 부패한 관료들은 곳곳에서 발호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이러한 때 동학농민군은 1894년 2월 15일 봉기하여 5월 31일에는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그런데 이를 관군의 힘으로 진압하지 못할 것 같아 조정에서는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청군이 6월 8일 아산만에 상륙하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일본군도 1885년 조선에서 세력균형을 위해 청·일간에 체결한 톈진조약을 구실로 6월 9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그런 후 청일간에 전운이 감돌자 청일 양국의 육군은 속속 증강되었다.
청국의 해군은 북양수사제독(北洋水師提督) 딩뤼창(丁汝昌) 지휘 하에 철갑함 정원(定遠, 7,335톤)외 25척이었다. 일본해군은 연합함대사령장관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대장이 이끄는 해방함 마쓰시마(松島, 4,278톤)외 20척 함정이 전투준비를 하고 있었다. 해군은 1894년 7월 25일 풍도 앞에서 일본해군의 공격으로 청국해군은 패배하였다. 이어서 일본연합함대는 9월 17일 황해해전에서도 압승을 거두고, 1895년 2월 청의 해군기지 위해(威海)까지 진격하여 청의 전존함대를 격멸시켰다. 그런 후 위해만 입구에 해군제독서가 있는 리우꽁도를 포위하고 함포사격을 하였다. 그러자 수사제독 딩뤼창은 2월 12일에 음독자살하였다.
육전은 일본군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이 이끄는 제9혼성여단이 7월 28일 충남 성환에서 섭사성(聶士城)의 청군을 격퇴하였다. 이어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대장의 일본 제1군은 9월 15일 평양을 공격하여 청의 직례총독 섭지초(葉志招)가 거느리는 청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후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대장의 제2군은 10월하순에 뤼순(旅順)에 상륙하여 청군을 추격하며 산둥반도에 이르렀다. 1895년 2월에는 해군과 합동으로 웨이하이를 공격 점령하였다. 이래서 청은 2월 13일 패전을 인정하고 항복하였다. 그런 후 4월 17일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청국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나는 박물관에서 당시 전투상황을 두루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전쟁의 종착지가 바로 리우꽁도였다.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이라 하여 아시아에서 군림하던 제국도 신흥 일본에 참패하였다.
그러면 세계에서 세 번째 넓은 영토와 수많은 인구를 거느린 청제국이 신흥 일본에 무릎을 꿇은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 이후 천황을 중심으로 국론을 통일하고 발전한 서구문화를 답습하여 부국강병을 착착 진행하였다. 그에 따라 육군은 독일, 해군은 영국식 편제로 개편하고 지휘체계를 일원화하였다. 그뿐 아니라 고급지휘관들은 구미에 유학을 하여 선진 전술을 연마한 엘리트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실전에 가장 중요한 보병의 병기로는 자체 생산한 무라다(村田) 소총으로 전원 무장시켜 전투시 일사분란하게 적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또한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여 전투력을 제고시켰고, 엄정한 군기확립과 애국심 배양에 힘썼다. 해군은 비록 거함거포는 아니었지만 속도가 가지각색인 청국함대보다 평준화되어 기동성이 양호했다. 더불어 야전에 잘 조련된 해군이 민첩하게 속사포를 발사하여 초전에 적을 제압하였다.
그 반면에 청국은 광서제(光緖帝)가 확고하게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국론은 분열되어 전쟁준비를 소홀히 하였다. 육·해군조직은 서양의 현대적 편제를 도입하지 않았고, 전통적인 구식으로 지휘체계 역시 일원화되지 못했다. 그리고 장군급 지휘관들은 체계적인 군사지식을 습득하지 못했으며 주로 내란을 진압한 유공자들이라 정규 대응능력은 부족하였다. 또한 병사들에 지급된 소총은 외국에서 도입한 여러 종류여서 탄약도 각각 달라 그 보급과 운용에 고충이 많았고, 심지에 총기 없는 병사도 허다하였다. 따라서 병사들의 훈련은 부실하여 사격능력이 뒤졌고, 군기는 해이했으며 필승의 의지가 박약하였다.
또 하나의 큰 과오는 정권의 실권을 쥔 서태후가 60세 생일을 경축하기 위해 해군예산을 빼돌려 이화원(颐和园)을 건축하는데 사용해 버렸다. 이런 부패상으로 독일서 건조한 7,335톤급 철갑함인 정원(定遠)과 진원(鎭遠)도 겨우 포탄 3발씩을 가지고 해전에 임했으니 제대로 전투를 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정원은 침몰되었고, 진원은 좌초되었다가 일본군에 나포되는 수모를 당했다. 설상가상으로 군권을 쥔 리홍장(李鴻章) 마저 군사적 대응을 경시하고, 군부에는 자기파 인재만을 중용하는 편파성으로 우수한 지휘관을 발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영국과 러시아 등에 의존하는 외교중시 현상으로 패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한편, 우리나라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병조판서 민영휘와 무능한 임금이 청군을 끌어들인 게 원인이 되어 강대국의 싸움터가 되어 버렸다. 조선 조정은 국외중립을 선언했으나 그게 지켜질 리가 없었다.
7월 23일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이 이끄는 일본군 제9혼성여단이 경복궁으로 침입하였다. 7월 24일 0시 50분 일본공병대가 영추문을 부수고 진입하자 방위군과 교전이 벌어졌다. 일본군 대대장인 야마구치(山口)가 고종에게 무엄하게도 칼을 뽑아들고 수비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무기력한 고종은 아군에게 무기를 내려놓도록 명했다. 바야흐로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조선군이 보관한 무기를 몽땅 효창동의 일본여단사령부로 탈취해갔다. 그리고 일본은 친일정권을 세우고 한·일 공수동맹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이 강대국 싸움에 고통을 당했다.
이 청·일전쟁 후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후 중국침략을 가속화했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화하는 슬픈 운명에 처했다. 조선조 후반에 이르러 사색당쟁 속에 자기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배타의식으로 국론은 분열되어 서로 싸움질을 했다. 또한, 세계가 지각변동을 하는데 조선은 문호를 굳게 닫은 운둔의 제국으로 남았다. 그 결과는 선진국과 교류를 막았고 경제발전은 물론 신식군대 양성도 뒤떨어졌다. 그뿐 아니라 부정부패는 만연하여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드디어 1894년 2월 15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외세가 개입하게 되었고, 그게 나라를 잃는 국치로 연결되었다.
오늘에 와서 우리는 청·일전쟁에서 얻을 교훈이 있다.
리홍장식으로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외교로는 국가를 보위할 수가 없다. 전쟁이 끝나고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강화회의에서 청국은 일본국에 라오둥(遼東)반도를 할양키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로부터 이는 극동의 평화에 대한 장애를 주는 것이라 하여 3국간섭이 시작되었다. 더 적극적인 러시아는 고베항에서 군함시위까지 벌였다. 당시 일본은 3국을 상대로 싸울 전력(戰力)이 없었기 때문에 배상금 4,500만원을 받고 라오둥반도를 도로 청에 반환하였다. 그러나 3국간섭은 청국에 공짜가 아니었고,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다. 러시아는 둥칭(東淸)철도의 부설권을 얻었고, 독일은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조차하였으며, 프랑스는 상하이에 조차지를 획득하였다. 자위력이 없던 청국은 이렇게 하여 열강에 잠식되어 갔다.
위에서 보듯이 나라의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국론이 통일되어야 하며 강력한 방위력이 있어야한다. 그 방위력 중 최일선에선 군대는 부단한 조련으로 신전술·전기를 계속 연마하여야 한다. 강한 주철도 항상 닦고 기름칠을 하여야 오래 유지되고 그대로 두면 녹이 쓸어 부식되는 것은 만고의 진리라 할 수 있다
김영순 회장님
신문학 원고인 수필 3편을 보냅니다.
❍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인 최재형 선생
❍ 청·일전쟁의 종착지에서
❍ 만년설로 덮인 몽블랑
약력)
❍ 월간문예사조에서 수필·시·소설로 등단
❍ 전)제주도문화원 연합회장
❍ 제주수필문학회장
❍ 한국신문학인협회 고문
❍ 저서 : ‘노을지는 언덕’외 다수
2020. 10. 17
정수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