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과 관습을 넘은 사랑
2021.1.20.
어렸을 적 초등학교 가는 길은 황톳길 비포장도로였다. 친구들과 재잘거리기에 바쁜 어린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1km가 넘는 길이 모두 우리 집 소유의 땅이라는 걸 그때는 전혀 몰랐다. 학교 가는 길 중간에 있어 내가 가끔 크라운 샌드를 사 먹던 상점들도 모두 우리 땅에 지은 건물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면 소재지까지 뻗어가는 지방도로의 많은 구간도 우리 집 소유였고, 수원으로 가는 다른 지방도로에도 우리 집 땅이 있었다. 야당 의원만이 연달아 선출되면서 공화당 정부의 차별을 받아 1970년대 말이 되어서야 이 지역의 도로가 포장되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정부는 오랫동안 점유하고 사용한 도로에 대해 형편없이 적은 보상을 해 주었다. 그 보상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넓은 땅을 소유했던 증조부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몰랐을 것이다. 당신 땅만 딛고서 30리를 넘게 가셨다는 증조부!
증조부는 고종 때 태어나셔서 우정총국에서 통정대부 벼슬을 하셨다. 일제 강점기가 되자 일본어를 신문을 통해 독학하신 후 조선 총독부로부터 간척 사업 허가를 받아내셔서 소와 달구지, 인력만으로 삼면이 바다인 고향 주변 곳곳의 바다를 메꾸어 논으로 만드셨다. 그러나, 증조부께서 집안의 부를 늘리는 일에만 노력을 기울이신 것은 아니었다. 당신이 사시는 지역을 비롯해 포천, 고양 등에서 종중원이 종중 땅을 팔았다는 소문이 나면 노새를 타고 찾아가셔서 되사들여 종중에 내놓으셨다. 그리고, 그 땅들을 여러 종중원의 공동명의 재산으로 등기해 다시는 쉽게 팔 수 없게 하셨다.
증조부는 조상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지키고, 재산을 크게 늘리셨지만, 소작인들에게 가혹하게 하신 적은 없었다. 출산 같은 경조사가 소작 농가에 생기면 빠짐없이 고기와 미역 등을 보내셨다는 걸 보면 결코 고약한 지주는 아니셨다. 증조부는 90년 전쯤에 외지에서 배로 들여온 목재로 새로 집을 지으셨다. 내가 태어나 자란 이 집은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소작인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기 위해 부연도 달지 않으셨다. 또한, 비단옷도 입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6·25 때 두 번이나 북한군이 고향 땅을 점령하고, 인민재판이 열리는 등 주민들이 곤욕을 치렀지만, 별다른 피해도 보지 않으셨고 증조부는 부산으로 피난도 가지 않으셨다.
토지 개혁으로 증조부가 일군 농토와 부는 대부분 빼앗겼고, 농토가 아닌 산지와 집터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증조부의 경제적 성취가 아닌 다른 면모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증조부는 시대를 앞선 분이셨다. 일부러 검소한 생활을 하셨을 뿐 아니라, 신분과 사회 관습을 넘어 사랑을 한 분이셨다. 마흔이 넘어 당신의 농지를 돌아보러 다니시다가 한 농가에서 눈길을 뗄 수 없이 어여쁜 처녀를 보셨다. 단번에 그녀를 후실로 맞으셨다. 그런데, 증조부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이생에서 끝나지 않았다. 비록 첩이었지만, 그녀와의 사이에 낳아 당시로써는 당연히 서자 대우를 받을 자식들도 차별하지 않고, 서울 신설동에 집을 사시고 조실부모한 손자와 함께 대학 교육까지 받게 해 주셨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서자들은 제사 때 사당 안에 들어가 배례를 못 드렸으니 분명 증조부는 사고가 남다른 분이셨다. 그리고, 그 후실이 죽으면 당신 무덤의 먼저 사별한 정실 부인 반대편에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하셨다. 덕분에 서자의 식구들도 가족묘에 묻힐 수 있었다. 비록, 그 서자는 증조부의 지극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토지 개혁 후 남은 자기 소유도 아닌 우리 집 땅들을 마름이었던 사람과 찾아내 몰래 팔았다. 그리고는, 상속자인 아버지께 와서 형사 처벌을 받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하던 못된 자식이었다.
증조부는 후실과의 사이에 낳은 한 아들이 결핵에 걸렸을 때 당신의 아낌없는 참된 사랑을 보여주셨다. 증조부는 집 옆에 그 아들을 위해 별채를 지으셨다. 그리고, 강원도 원산(당시 원산은 강원도에 속함)의 약수가 결핵에 효과가 있다고 하자 사람과 말을 구해 릴레이식으로 원산에서 집까지 수백 km에 달하는 먼 길을 매일 아침 약수를 길어 물을 배달하게 하셨다. 물론, 그 약수로 결핵을 퇴치하지는 못했고, 허망하게도 그 아들은 먼저 이승을 떠났다. 하지만, 후실도 서자도 정실부인, 적자와 다름없이 대우하셨던 증조부의 시대를 앞선 뜻은 남아 있다.
20여 년 전에 고향에 종중에서 재실을 세워 당신이 생전에 종중을 지키기 위해 일제 치하에서도 기울이신 각별한 공을 기리게 되었다. 하지만, 종중 땅이 팔려 처분 대금을 분배하는 등의 이권이 있을 때만 몰려들거나 아니면 가짜 종중까지 만들어 소송을 벌이며 조상이 마련해 놓은 종중 재산으로부터 사익을 취하려는 후손들이 넘치는 시대에 종중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 증조부를 위해 재실을 짓는다고 그분의 종중을 위한 기여가 의미가 있게 될까? 나는 차라리 양반과 평민이라는 신분과 적자와 서자라는 사회적 관습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한 여인을 사랑하시고 대우하신 증조부의 인간애를 높이 평가한다. 그 할머니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증조부를 만나 적어도 동시대의 다른 여성보다 불행하지는 않은 삶을 사실 수 있었다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