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벽 요한 세례자.
■ 이벽 요한 세례자
조선 왕조 순교자 133위 중 대표인물은 이벽(요한 세례자)이다. 이벽은 18세기 조선 서학(西學)사상과 초기 천주교를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양문물에 능통했던 그는 서학의 배경에 천주교가 있음을 알았다.
이벽은 권철신(암브로시오)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천진암 강학회에서 신앙을 탐구했다. 이들은 강학회를 통해 동양의 종교와 사상을 천주교와 비교하며 천주교 신앙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서학이 신앙으로 발전된 데에는 이벽의 공이 컸다. 그는 서학이 단지 학문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것이며, 믿고 실천하고 깨달아야 할 인생의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의 진리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정약종(2014년 시복)을 제외한 이들 신앙의 선조는 모두 이번 예비심사 대상자 133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후 이벽 등 신앙의 선조들은 이승훈에게 북경의 선교사를 만나 천주교 서적을 구해다 줄 것을 요청했다. 이승훈은 북경의 북당성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관련 서적과 성물을 갖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당시 이벽은 서울 수표교 자신의 집에서 서적들을 더 열심히 읽고 공부한 뒤 선교에 나섰다.
마침내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조선에 교회가 설립됐다.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세례로 결속된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이뤄낸 것이다.
이벽은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전하는 데 더욱 열중했다. 이후 김범우(토마스)와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그리고 유항검(아우구스티노)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또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에서 신앙 공동체 모임을 지속했다.
하지만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명례방 모임이 발각되자, 이들은 유배나 배교를 강요당했다. 이벽도 부친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고 집 안에 갇힌 상태가 된다.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끊긴 채 이벽은 가족으로부터 배교를 강요받았다.
가족의 박해가 계속되자 이벽은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에 열중했다. 결국 그는 가족의 박해로 1875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벽의 죽음에는 여러 설이 존재하고, 파리외방전교회 달레(Dallet)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가 배교했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벽이 조선 초기 교회의 기둥으로서 적극적으로 교리를 연구하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벽은 자신이 가르치고 배운 것을 흐트러짐 없이 실천하고 양반 가문의 자제로서 할 수 있는 자신의 방법으로 신앙을 지키다 목숨까지 내놓았다.
■ 지난 과정과 앞으로의 전망
주교회의가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시복추진을 결정한 이후, 각 교구는 조선 초기 교회에서 신앙의 모범을 보인 수많은 순교자 중 대상자를 선별했다.
대상자 선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심스럽게 진행됐고, 사전 평가를 거쳐 133위가 결정됐다.
2013년 3월, 시복시성특위는 ‘역사 및 고문서 전문가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들을 임명했다. 이들은 12차례의 회의를 통해, 선별된 순교자에 대한 본격적이고 심층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전문가들은 순교자들의 삶의 굴곡과 요소를 여러 각도에서 빈틈없이 검토했다. 논란과 이견의 소지를 보이는 대상자에 대해선 교차연구를 거듭했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면밀히 보고했다.
그 사이, 주교회의는 2014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추진 안건 담당 청원인으로 김종강 신부(청주교구·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를 임명했다.
이어 2015년에는 조선왕조 순교자 133위의 약전을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됐다. 이어 2016년 10월 5일 시성성으로부터 ‘장애없음’ 교령을 받았다.
시성성의 ‘장애없음’ 결정으로 한국교회는 본격적으로 133위의 시복을 위한 예비심사를 착수할 수 있게 됐으며, 그 첫 법정이 2월 22일 열린다. 이제 한국교회는 이들 순교자들이 보여줬던 신앙의 증거를 찾고 판단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지난 2014년 시복됐던 124위의 시복재판은 2004년 7월 5일에 시작해 2009년 5월 20일 마무리됐다. 이어 시성성의 재판문서 검토와 시복결정까지 5년이 더 걸렸다.
133위에 대한 재판 또한 간단하지 않고 긴 시간과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저작물에 대한 출판 저작물 검열, 법정에서의 자세한 검증의 시간, 학자들의 증언 및 검찰관의 부정적인 증언까지 종합해 재판문서를 작성하게 된다.
특히 초기 교회공동체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이벽 선조의 순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만큼, 추후 재판 과정을 통해 검증과 추가 연구 등을 실시할 계획이다.
시복시성특위 위원장 유흥식 주교는 “예비심사는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검증하는 일로, 장하신 순교자들의 순교를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 증명하는 일이 계속 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 주교는 아울러 “보다 중요한 일은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들이 그분들의 믿음과 삶이 일치했던 모습을 본받는 일”이라면서 “그분들의 믿음과 삶을 본받으려 노력하면서 끊임없이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