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휘영청 보름달이 뜬 여름밤에 워싱턴 레이크 다리를 달리다가 호수를 가르는 파티 유람선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달빛, 반짝이는 물결과 함께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옛날 팝송 ‘은빛 달을 따라서(뱃놀이해요)<Sail Along Silv'ry Moon>’에 딱 들어맞는 정경이었지만, 그날 차 안에 있던 CD들 중엔 빌리 본 악단의 그 연주곡이 없었다.
두개의 알토 색소폰이 절묘한 화음을 이루는 그 연주곡은 거의 60년전 한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의 시그널뮤직으로 방송돼 크게 유행됐었다. 그 뒤 잇따라 히트한 ‘언덕 위의 포장마차(Wheel),’ ‘진주조개(Pearly Shells)’ ‘라 팔로마’ 등에 매료된 나는 미국에 이민 오자마자 빌리 본 중고 LP들을 본격적으로 수집, 지금껏 600여 곡을 CD에 녹음해 즐기고 있다.
내가 속한 6070세대는 어렵고 고단한 세월을 살았다. 코흘리개 때 전쟁이 일어나 헐벗고 굶주렸다. 청소년 때 부패정부 타도에 앞장섰고, 청년기엔 군사독재정권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대학생 때까지 교복을 입었고 머리도 맘대로 못 길렀다. 평생을 억척스레 일하며 자식들을 키웠지만 전에 없던 핵가족 세태 바람에 밀려 대부분 외롭게 노후를 보낸다.
그런 6070세대가 젊었을 때 즐긴 신바람(신선한 바람)이 있었다. 한국에 막 들어와 대중화되기 시작한 미국 팝송이다. 고교시절 유행에 민감한 친구들이 어디서 들었는지 폴 앤카의 ‘다이애나’나 닐 세다카의 ‘오, 캐롤’ 따위를 엉터리로 흥얼거렸다. 한 녀석은 오 캐롤 가사 중 “I'll surely die”를 “아임 쏘리다”라고 했고, 모두들 그게 맞는 줄 알고 따라 했다.
대학생 때는 팝송이 홍수를 이뤘다. 세시봉 같은 뮤직홀에선 팝송가사를 프린트해 입장객들에게 나눠주고 레코드판을 반복해서 틀어줬다. 페리 코모의 ‘미카사, 수카사(Mi Casa, Su Casa),’ 알 마티노의 ‘I Love You Because’ 등을 그렇게 배웠다. 팝송뿐이 아니었다. 샹송 ‘고엽(Autumn Leaves)’을 프랑스 원어로 가르쳐준 제2 외국어 교수가 인기짱이었다.
나는 음치인지 가수노래보다 악단연주를 선호했다. 빌리 본 말고도 폭포수 같은 현악기 음향의 만토바니(‘Charmaine’), 이지 리스닝 뮤직의 대부 퍼시 페이스(‘Moulin Rouge’), 달콤한 ‘샴페인 뮤직’을 표방한 로렌스 웰크(‘Yellow Bird,’ ‘Mocking Bird Hill’), 세미클래식의 거장 프랭크 푸르셀(‘Nabucco’)과 안드레 코스텔라네츠(‘Hora Staccato’) 등이 있다.
미치 밀러 합창단의 ‘Yellow Rose Of Texas’와 ‘콰이 강의 다리’ 휘파람 연주에 넋이 빠졌다.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 짐 리브스의 ‘He'll Have To Go,’ 패티 페이지의 ‘I Went To Your Wedding,’ 레이 카니프 합창단의 ‘Somewhere My Love,’ 워싱턴대학 출신 브러더스 포의 ‘Green Fields’ 등은 들을 때마다 나를 옛날로 되돌려준다.
지난 토요일에도 그랬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50여명의 6070세대가 함께 반세기 전으로 날아갔다. 한국의 유명 팝 칼럼니스트인 박길호씨가 시애틀의 누나(김명호씨)와 매부(김재훈 박사)를 방문한 길에 벨뷰 도서관에서 ‘추억의 팝송 인문학 산책’을 주제로 3시간 가까이 강연했다. 그는 SBS 방송의 팝 해설가이며 두 권의 관련 저서를 낸 독보적 전문가다.
페리 코모가 이발사였고, 알 마티노는 벽돌공이었다는 등 스타가수들의 전력과 ‘엘 콘돌 파사’의 사이먼&가펑클이 철천지원수가 된 사연, ‘Manha De Carnaval’에 깔린 그리스신화 오르페우스의 비극적 사랑 얘기 등을 가사와 함께 소상하게 설명 들으며 참석자들은 귀에 익은 팝송을 마치 처음 듣는 듯 진지하게 감상했다.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박 씨는 시애틀 강연의 호응이 서울보다 뜨겁다며 자주 오고 싶다고 말했다. 안 그래도 그런 기회는 6070 한인들이 스스로 만들 수 있다. 가사의 내용과 배경을 꿰뚫으면 더 좋겠지만 젊었을 때 들은 추억의 팝송들을 본고장 미국에서 함께 다시 들으며 컨템포러리(동시대 사람) 정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정신건강, 특히 우울증과 치매예방에 좋을 듯하다.
윤여춘(고문) 6-30-2018
첫댓글 윤여춘 선생님 옆에 앉아 추억의 거리를 걸으며 들었지요. 설파, 세시봉, 루네쌍스, 돌체...에서 클래식과 팝송에 빠졌던 아, 젊은 날의 추억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