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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중미산 정상에서
바람이 낳은 풍경소리
산등성 타고 오르다
힘겨운 듯 잦아드는데
눈 솔가지
똑 똑 메아리로 부러져
꿈결 인 듯 아련하기만 하다.
――― 박주순, 『동안거』에서
▶ 산행일시 : 2013년 11월 29일(금), 맑음
▶ 산행거리 : 도상 23.7㎞
▶ 산행시간 : 10시간 12분
▶ 시간별 구간
07 : 22 - 중앙선 국수역, 산행시작
08 : 26 - 형제봉(△507.6m)
09 : 05 - 청계산(淸溪山, △656.0m)
09 : 40 - 된고개, ┼자 갈림길 안부
10 : 40 - △539m봉
11 : 10 - 말머리봉(499m)
11 : 38 - 옥산(578m)
12 : 06 - 농다치고개
12 : 40 - △660.6m봉
13 : 00 - 소구니산(801m)
13 : 26 - 선어치(仙於峙, 서너치)고개
14 : 23 - 중미산(仲美山, 834m)
15 : 10 - 절터고개
16 : 00 - 삼태봉(三台峰, 684m)
16 : 11 - 678m봉, 절벽지대
16 : 40 - 통방산(通方山, 650m)
17 : 34 - 천안터널 앞, 산행종료
1. 추읍산, 형제봉에서
▶ 형제봉(△507.6m), 청계산(淸溪山, △656.0m)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수상하다. 양평 청계산 산행 들머리로 잡은 중앙선 국수역으로 가려고
상일초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강변역과 덕소 간을 운행하는 112-1번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
추운 새벽에 무려 34분이나 지나서 온다. 새벽에는 운행간격이 뜸한 모양이다. 산이 아니라
동네에서 꽁꽁 언 동태가 다 되었다.
하남시 지나고 팔당대교 건너 상팔당 마을에서 내려 팔당역으로 걸어간다. 팔당역에서는 양
평 가는 전철이 고맙게도 바로 온다. 전철 안이 훈훈하여 아까 얼마나 떨었던지 온 삭신이 아
리면서 풀리고 만사가 귀찮아지도록 녹작지근해진다. 그렇지만 국수역을 지나치지는 않았
다. 국수역사를 나서자 등산안내도와 이정표가 청계산 등로를 안내한다.
철로 아래 굴다리 지나 ┫자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간다. 0.79㎞ 진행하여 나온 너른 광장이
등산기점이다. 공동묘지 왼쪽으로 돌아간다. 세 갈래 길이 나온다. 이런 넙데데한 산자락에서
는 지도를 정확히 읽을 수가 없다. 맨 오른쪽 길로 들어 고갯마루를 넘자 어럽쇼 동네 길로 빠
진다. 알바다. 뒤돌아서 산세 가늠해보고 가운데 길로 간다. 맞다. 이내 한갓진 오솔길은 솔숲
지나 산등성이로 올라간다.
대기가 차디차다. 입김이 앞을 가린다. 발밑에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가 날카롭다. 등로는
286m봉을 직등하지 않고 왼쪽 산허리로 돌아간다. 맨발 걷기가 (요약하건데) 만병통치라는
안내판을 앞세운 부드러운 흙길이 나온다. 산굽이 돌아 약수터다. 돌거북이 입 앙 벌리고 약
수를 뿜어낸다. 굽이굽이 돌고 얕은 골짜기 잠깐 오르면 ┫자 갈림길 안부다.
눈길이 시작된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오가서 다져진 눈길이다. 된통 넉장거리 두 번 하고나
니 아이젠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늘 산행은 첨봉인 중미산이 약간 걸리
지만 육산이라 그다지 염려할 바는 아닐 것이라면서도 연신 엎어진다.
역시 산은 겨울산이다. 겨울산의 매력은 저렇듯 묵중하고 강인한 설산의 모습에 침잠할 수밖
에 없음이 그 첫째요, 이렇듯 길섶의 일목밀초마다 핀 소담한 눈꽃을 감상할 수 있음이 그 둘
째다.
점입가경인 설산과 눈꽃을 감상하느라 전혀 지루한 줄 모르고 올라 형제봉이다. 삼각점은 양
수 467, 1988 재설. 아담한 자연석의 정상표지석이 있다. 데크전망대는 동남쪽 전망하기 좋고
노송 아래 너른 공터는 쉬기 좋다. 잠시 서성이다 간다. 형제봉의 형봉 살짝 내렸다가 제봉 오
르고 급격히 떨어진다. 1급 슬로프다. 발 스키 탄다.
길게 올랐다가 짧아 내리기를 반복하며 고도를 높인다. 특고압(765kv) 송전탑 아래가 주변 나
무 베어내 경점이다. 점차 뭇 산을 내 발아래 둔다. 청계산 정상 포장마차에서 내건 ‘따뜻한
커피, 시원한 감로주’ 광고표지가 은근히 입맛 다시게 한다. 그 포장마차는 문 열지 않았다.
청계산 정상은 너른 눈밭이다. 사방 눈부신 설국이 펼쳐진다.
2. 형제봉 가는 길
3. 백운봉, 형제봉에서
4. 형제봉 정상
5. 청계산 가는 길에서
6. 용문산과 백운봉
7. 왼쪽부터 예봉산, 운길산, 문안산
8. 용문산
9. 청계산 가는 길에서
▶ 말머리봉(499m), 옥산(578m), 소구니산(801m)
눈 온 뒤 등산객들은 청계산만 오르고 내렸다. 한강기맥 벗고개 쪽이나 농다치고개 가는 길은
조용하다. 내가 첫발자국 찍는다. 눈이 그리 깊지 않다. 이번만큼은 정행(正行)하리라. 성큼
발걸음 내딛는다. 가파른 내리막은 숫제 설벽이다. 눈이 없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눈길이 험
로로 변했다. 난리는 혼자 당할 때 난리라고 했다. 여럿이 왔더라면 재미났을 눈길이 혼자여
서 살벌하다.
밧줄이 매달려 있지 않아 잡목마다 활인목이다. 후달달 내려 ┫자 갈림길 안부. 542m봉은 신
나게 내려 ┼자 갈림길 안부. 된고개다. 적막한 산중 “눈 솔가지/똑 똑 메아리로 부러져” 흠칫
놀라고 눈 뒤집어쓴다. 고갯마루 햇볕 가득한 공터에 자리 잡고 아침밥 먹는다. 사발면이다.
보온병에 담아온 뜨거운 물 부어 익는 시간이 4분 걸린다. 길다.
489m봉 오르내린 건 도로(徒勞). 긴 오름이 이어진다. 눈 쌓인 싸리나무숲이 영락없는 목화밭
이다. 이도 볼만하다. 진득하게 올라 △539m봉. 삼면봉이기도 하다. 서종면, 양서면, 옥천면
이 분점하고 있다. 삼각점은 판독불능. 안내판에는 ‘양수 471’ 이라고 한다. 눈길. 햇볕에 눈이
너무 부셔 고글을 가져왔더라면 눈 두기가 훨씬 편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말고개부터는 양평 한화리조트 관내다. 한화리조트에서 등산로를 산책로로 다듬었다. 노송
우거진 말머리봉을 쏟아 내렸다가 그 추동 살려 한바탕 바짝 오르면 옥산이다. 산책로 벤치에
는 눈이 수북하다. 바닥 칠 것처럼 뚝 떨어진 ┼자 갈림길 안부는 노루목이다. 통나무계단 올
라 497m봉 넘으면 농다치고개다. 옛날에 뒷양근으로 시집가는 신부가 고갯길이 너무 좁아서
장롱을 짊어진 짐꾼들을 앞세우며 ‘농 다칠라’ 조바심하여 농다치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농다치고개의 포장마차는 성업 중이다. 모름지기 산꾼이라면 이런 포장마차 난로 곁에서 점
심을 먹는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눈보라 속일지언정 산속에서 언 밥 씹는 맛이 각별할 터,
애써 지나친다. 한강기맥 소구니산은 데크계단 155개 오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파른 등로
는 밧줄 잡고 오르다 헬기장에서 숨 돌린다.
나도 걸음 멈추고 목 추기려 페트 물병을 들이키는데 어째 물맛이 쓰디쓰다. 물병이 아니라
일전에 소주를 담아놓은 페트병을 모르고 그냥 가져왔다. 낭패다. 갈증이 더 난다. 소구니산
은 두 사람이 올랐다. 내려오는 그들과 마주친다. 나에게 눈길을 난행(亂行)하여 미안하다고
한다. 별말씀을…. 도리어 인적을 보게 되어 반갑다고 사례한다.
가파른 사면을 가드레일 밧줄에 의지하여 트래버스 하고 ┬자 능선에 오른다. 소구니산 정상
은 오른쪽으로 0.2㎞ 정도 더 가야 한다. 소구니산 정상은 나무숲 둘러 조망이 좋지 않다. 이
대로 마유산(유명산)이나 올랐다가 그만 하산할까 하는 달콤한 유혹을 어렵게 뿌리친다.
10. 청계산 정상
11. 오른쪽이 중미산
12. 등로 주변, 목화밭 같다
13. 등로 주변
14. 마유산(유명산)
15. 왼쪽은 소구니산
16. 청계산, 왼쪽 너머로 형제봉이 보인다
17. 쉼터
18. 농다치고개에서 소구니산 가는 길
19. 소구니산 정상
▶ 중미산(仲美山, 834m)
시간이 빠듯하다. 줄달음한다. 농다치고개로 내리는 갈림길 지나고부터 아무도 가지 않았다.
이곳의 눈길은-앞으로도 그랬지만-여태의 눈길과는 사정이 딴판으로 다르다. 바람이 눈을
쓸어 등로인 능선마루에 수북이 모아놓았다. 무릎까지 빠지는 곳이 숱하다. 스패츠를 가져오
지 않은 것도 ‘파이널 데스티네이션’적 수상하던 일진의 진행이다.
눈이 깊어 함부로 지치기 어렵다. 다행인 것은 축축하지 않은 숫눈이겠다 목이 긴 중등화에
통이 좁은 바지를 입었기에 등산화 속으로 눈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소구니산에서 서너치고
개까지 1.7㎞. 26분 걸렸다. 양쪽의 산이 높고 골이 깊어 하늘이 서너 치 정도밖에 보이지 않
는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서너치고개의 포장마차도 성업 중이다. 별수 없이 포장마차에 들
어 500ml짜리 물병 한 개 사고 그만큼 별도로 배에 담는다.
이제 난코스로 여겼던 중미산이다. 간이화장실 오른쪽 풀숲으로 소로가 났다. 첫발부터 되게
가파르게 오른다. 소로는 금방 눈으로 묻히고 경사도 계량하여 그중 완만한 설사면 골라 트래
버스 한다. 내 미끄러지더라도 걸릴 나무를 보아두며 기어오른다. 중미산을 동계 초등하는 기
분난다. 색 바랜 산행표지기가 든든한 동무다.
바람맞이 능선 길은 얼었다. 1보 전진하려 2보 후퇴한다. 아이젠을 가져왔더라면 이게 무슨
문제일까. 아무튼 어렵게 오른다. 암벽 아래 터 만들어 점심밥 먹는다. 입맛이 쓰지만 기력을
보충해야 하니 산행의 한 과정으로 여기고 먹어둔다. 보온병에 커피 한잔 물은 남았다. 겨울
설산에서 마시는 따뜻한 커피의 맛이란? 딱히 비길 데를 찾지 못하겠다. 두고두고 그리는 맛
이다.
바윗길. 밧줄이 달렸다. 다시 날등 능선. 자세 낮추고 살금살금 간다. 이윽고 바위 숭숭 솟은
중미산 정상이다. 천지의 한가운데에 선다. 온 길 살피면 뿌듯하고 갈 길 살피면 가슴 설렌다.
가자! 중미산 정상에서 북동진하여 Y자 갈림길까지 0.2㎞는 릿지다. 긴다. Y자 갈림길 오른쪽
은 가일리로 간다. 큰 고통은 작은 고통을 구축하는 법. 릿지에서는 눈이 대수롭지 않더니 릿
지 지나자 슬며시 고통으로 다가온다.
능선마루의 깊은 눈 피하려고 바람맞이인 왼쪽 사면으로 비켜 잡목 헤친다. 팔심 부치면 다시
능선마루로 올라 눈 지치기를 반복한다. 리치칼튼컨트리클럽 골프장은 동면에 들어갔다. 절
터고개를 꼭 짚어내기 어렵다. 고만고만한 안부가 3곳이나 된다. 골프장 물탱크가 있는 곳일
까? 495m봉 내린 안부일까?
20. 마유산(유명산)과 소구니산(오른쪽)
21. 봉미산, 용문산을 봉황으로 보고 그 꼬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22. 중미산 정상
23. 백운봉, 그 앞은 마유산(유명산)
24. 오른쪽은 청계산, 왼쪽은 해협산
25. 멀리 오른쪽은 운악산
26. 중미산
27. 용문산
▶ 삼태봉(三台峰, 684m), 통방산(通方山, 650m)
중미산에서는 한달음에 오를 것 같던 삼태봉이 태산준봉으로 다가온다. 고도 200m 이상을
극복해야 한다. 짭짤하다. 어지간히 지치기도 했다. 쉬는 횟수가 점차 잦아진다. 갈지자 멀미
나게 그리며 오른다. 삼태봉 가운데 봉우리다. 삼태봉 정상은 왼쪽으로 좀 더 가서 실한 한 피
치를 올라야 한다. 삼태봉 정상은 노송 망부목이 고사목 되어 지키고 있는 암봉이다. 사방 무
제로 조망 좋다.
서산의 해는 한 뼘 남았다. 이정표에 삼태봉에서 통방산 넘어 명달리 정곡사까지는 3.94㎞라
고 하니 1시간은 넘게 걸릴 것. 급하다. 등로는 황혼 빛으로 한층 소연(蕭然)하다. 발밑의 눈은
어는지 사각거린다. 삼태봉 3봉(678m) 내리막이 뜻밖의 난관이다. 10여 년 전에도 이랬던가?
외길. 절벽이다. 눈길 헤쳐 밧줄을 찾아내고 레펠 흉내 내다가 아등바등 트래버스 한다.
거의 안부에 이르도록 밧줄이 달렸다. 통방산 가는 길은 완만하지만 나이프 릿지를 닮았다.
밧줄 잡고 슬랩도 오른다. 통방산 정상. 돌탑과 정상표지석이 다정하게 낙조를 지켜보고 있어
나도 끼어든다. 하산! 비로소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려 한다. 북진. 그리고 나중에
안 Y자 분기봉인 600m봉. 왼쪽 능선을 얼핏 살폈더니 암릉이다. 오른쪽으로 내리쏟는다.
가파른데도 여느 내리막길에서처럼 밧줄이 보이지 않아 미심쩍었다. 600m봉으로 뒤돌아가
서 주변 정찰을 다시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관성 붙은 발걸음을 제동하지 못했다. 목
에 건 나침반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보았더라면 방향착오인 줄을 알아챘을 텐데 막연히 면계
따라 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곧 명달리 정곡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리라 예상했다. 등로를
크게 벗어나 엉뚱한 데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해는 졌겠지. 산그늘이 짙어진다. 내리막이 절벽으로 막혀 지능선을 갈아탄다. 낙엽송숲 사면
을 내린다. 길을 잘못 들었다 해도 이제는 별도리가 없다. 저 아래 불 밝힌 도로 가로등이 보
인다. 차가 쌩쌩 달린다. 너덜지대 지나자 대천이 나온다. 벽계천이었다. 건너편 도로로 오르
려면 이 대천을 건너야 한다. 어디로 건널까? 왔다갔다 야단한다.
징검다리로 삼을만한 돌은 얼음으로 덮였다. 하는 수 없이 첨벙첨벙 건너 버린다. 곡달산 기
슭 바위절벽 아래다. 물길 따라 천변 너덜을 내린다. 산기슭 느슨해지자 생사면 치고 올라 도
로 살피니 춘천고속도로 천안터널 앞이다. 고속도로 위로 일반도로(프리스턴밸리골프클럽에
서 나오는 도로였다)가 보이는데 그리로 가려면 이천 제2교 아래로 고속도로 밑을 지나 산을
올라야 한다. 지나는 차를 히치 하려거나 동네로 걸어가려면 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거기
로 올라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다.
쪽팔리고 체면구기는 일이지만 집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 건다. 춘천고속도로 천안터널 앞이
니 부디 데리러 오시라. 갓길 옆 헤드램프 불빛을 보면 알아볼 수 있을 것.
벽계천 건너느라 젖은 발이 시리다. 나뭇가지 모아 수로로 내려가서 불 피워 발 녹인다. 더듬
어 보면 통방산 지나 Y자 분기봉인 600m봉에서 지도와 나침반을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 뼈아
픈 실수였다.
28. 삼태봉 정상, 표지석 오른쪽 뒤로 멀리 보이는 산은 운악산
29. 오른쪽 멀리는 운악산
30. 앞은 삼태봉 3봉, 오른쪽은 곡달산, 왼쪽은 통방산, 그 너머는 화야산
31. 삼태봉 3봉, 오른쪽은 곡달산
32. 왼쪽 뒤가 청계산
33. 봉미산
34. 통방산 정상
35. 청계산, 황혼녘이다
36. 등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