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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있었던 것들에 관하여
제 1 장 태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창세기 1장 1절
이경순 노인은 열여섯 살부터 새벽
네 시에 눈을 떴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고무신 소리가 그를 깨웠고, 그 다음에는 아이들의 울음이, 나중에는 습관이 그를 깨웠다.
여든두 살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눈꺼풀이 들리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몸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였다.
문 너머에서 서울이 잠들어 있었다.
반지하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라고는 가로등 한 개분뿐이었지만, 그는 그
빛도 낭비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창가 의자에
앉았다. 가을이었다. 창문 유리에
이슬이 맺혀 있었고,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누군가의 발목과 신발
밑창뿐이었다.
"여기 있구나."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혼잣말이
아니었다. 습관적인 확인이었다.
나는 여기 있다. 숨을 쉬고 있다.
아직은 죽지 않았다.
이 확인 의례는 아내 순이가 죽고 난 뒤 육 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안도감에서 비롯되었다가 나중에는
의심에서 비롯되었다가 이제는 다시
무언가 다른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다른 것의 이름을 그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 재민에게 전화가 온 것은 바로
그날 오전이었다.
"아버지, 저번에 말씀드렸던 거 생각해보셨어요? 요양원 자리가 났거든요."
경순 노인은 잠시 수화기를 귀에서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요양원이라는
단어가 귀 안에서 이상하게 울렸다.
마치 어릴 때 조개껍데기를 귀에 대면 바다 소리가 나듯이, 요양원이라는
단어를 귀에 대면 어떤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끝이 없는 복도의 소리였고, 모든 문이 같은 문인 소리였고,
시간이 멈추는 소리였다.
"생각해봤다."
"그래서요?"
"가지 않겠다."
재민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의
무게를 경순 노인은 정확하게 알았다. 그것은 걱정의 한숨이었지만, 또한
지침의 한숨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돌보는 일에 지쳐 있는 아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 어딘가가 오래된 나무가 썩듯이 조용히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창가에 다시
앉았다. 발목과 신발 밑창들이
지나갔다. 구두도 있었고, 운동화도
있었고, 슬리퍼도 있었다.
그는 각각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그 사람들의 삶을 상상했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오락이었다.
그때 창문 밖으로 은행잎 한 장이
떨어졌다.
노란 것이었다. 아직 완전히 노랗지
않고, 초록과 노랑이 섞여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로등 빛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 경순 노인은 숨을 멈췄다. 노인이 숨을 멈춘 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폐가 알아서 멈춘 것이었다.
마치 너무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호흡조차 사치가 된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았던 것처럼.
그 은행잎은 어디로 갔을까.
그는 그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그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제 2 장 깊음이 있었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 창세기 1장 2절
박명순 교수는 예순여섯 살에 퇴직했고, 예순일곱 살에 처음으로 혼자 시장에
갔다. 사십 년 동안 구약학을 가르쳤지만, 파를 고르는 법은 몰랐다.
뿌리 부분이 단단해야 하는지,
잎 부분이 싱싱해야 하는지, 그것조차 몰랐다. 그의 아내 현숙이 이십 년 전에 떠난 뒤로 식재료는 항상 조교들이
가져다주었고, 은퇴 후에는 대형마트
배달을 이용했다.
그런데 그날은 왜인지 시장에 가고
싶었다. 소명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만큼 강한 충동이었다. 노령의 학자가 시장 앞에서 소명을 느낀다는 것이 우습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그래서 더 갔다.
시장 안은 혼돈이었다.
창세기 1장 2절의 그 단어,
토후 바-보후(tohu wa-bohu).
혼돈하고 공허하며. 사십 년 동안 그
단어를 가르쳤지만, 명순 교수는 그날 처음으로 그 단어의 감각을 느꼈다.
생선 비린내와 깻잎 향기와 누군가의
향수가 섞였고, 상인들의 목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고, 모든 것이 제자리인 듯하면서도 제자리가 아닌 듯한,
그 이상한 활기. 그것이 혼돈이었다.
그러나 무서운 혼돈이 아니라 생명이
들끓는 혼돈이었다.
"뭐 찾으세요?"
채소 가게 아주머니가 물었다.
예순 안팎으로 보였다. 명순 교수보다 조금 젊었지만, 그 손은 훨씬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파를 만지고 열무를 다듬고 상추를 묶는 손. 일한 손이었다.
"파를... 고르는 법을 모릅니다."
그는 정직하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잠깐 그를 바라보았다. 학자인지 아닌지,
무엇을 평생 했는지 모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이 마음에 들었다.
판단이 없는 눈이었다.
"이렇게요."
아주머니는 파 한 단을 집어 뿌리를
보여주었다.
"뿌리가 촉촉하면서 흰 부분이 길어야 해요. 잎이 너무 시들면
안 되고, 너무 뻣뻣하면 오래된 거예요. 향이 나야 해요. 맡아봐요."
명순 교수는 파 단을 코에 가져다 댔다. 날카롭고 청량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무언가를 건드렸다. 어머니의 부엌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삼십 년이 되었는데, 그 냄새는
삼십 년을 기다렸다가 지금 그를
찾아왔다.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와 파를 냉장고에 넣으면서
그는 오래 생각했다. 오늘 그는 무엇을 배웠는가.
파를 고르는 법을. 그것뿐인가.
아니었다.
그는 혼돈이 악한 것이 아님을 배웠다. 에누마 엘리시에서는 혼돈이 살육의
어머니였지만,
창세기에서는 혼돈이 창조의
자궁이었다. 그것을 사십 년 동안
가르쳤지만,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파 향기가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 * *
명순 교수와 경순 노인이 처음 만난
것은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같은 동에 살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가,
어느 날 아침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경순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뛰어들어왔다.
두 노인은 서로를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6층에서 문이 열렸다.
명순 교수가 내렸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사람 모두 그날 집에 돌아와 오래
그 짧은 인사를 생각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너무 오랫동안 자신이 섬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륙과 연결된다는 것을,
비록 엘리베이터 한 번의 짧은
인사라도, 그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 3 장 빛이 있으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창세기 1장 3절
세 번째 만남은 일주일 뒤 공원
벤치에서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그 공원의 벤치가 너무 작았다.
명순 교수가 먼저 앉아 있었고,
경순 노인이 나중에 왔다. 남은 자리는 같은 벤치뿐이었다.
"앉아도 됩니까?"
"앉으세요."
가을 오전의 햇살이 은행나무 잎을
통과해서 벤치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노란 빛과 초록빛이 섞인,
명순 교수가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한 빛이었다.
빛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능력은 어느
순간 잃어버렸었는데, 정확히 언제 잃어버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내가 떠난 뒤였던 것 같기도 하고,
교수직이 지겨워진 뒤였던 것 같기도
했다.
"칼뱅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경순 노인이 물었다.
명순 교수가 놀란 것은 내용 때문이
아니라 방식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노인이 아무런 전제 없이 칼뱅의 이름을 꺼내는 것.
그것이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뭐라고 했습니까?"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이 전시되는
극장이라고."
경순 노인은 은행나무를 바라보았다.
"나는 신학을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교회 오래 다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뜻입니까?"
경순 노인은 잠시 생각했다.
"저 빛이 그냥 빛이 아니라는 뜻
아닙니까.
저 빛이... 저 빛이 원래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있다는 뜻.
있지 않아도 됐을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 이미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다는 뜻."
명순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 자신의 사십 년 연구를 단
세 문장으로 요약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신학을 배우지 않았다고 했지만, 신학은 결국 이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있지 않아도 됐을 것이 있다.
그 있음이 말을 건넨다.
두 사람은 한동안 은행나무를
바라보았다. 말이 없었지만 대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빛이 나뭇잎을 통과하면서 흔들렸고,
그 흔들림이 두 노인의 얼굴 위에서
일렁였고, 그 일렁임이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한 무언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 * *
명순 교수의 이름이 박명순이고
경순 노인의 이름이 이경순이라는 것을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 것은 그날
헤어지기 직전이었다.
"박명순입니다."
"이경순입니다."
"교수셨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말씀하시는 것이."
"아, 직업병이 남았군요."
두 사람은 웃었다. 오랜만에 웃었다.
웃음의 모양이 달랐다. 경순 노인의
웃음은 얼굴 전체로 퍼지는 웃음이었고, 명순 교수의 웃음은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두 웃음 모두 오래된 것이었다. 오래 쓰지 않아 녹이 슨 것처럼
어색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진짜였다.
"내일도 여기 오십니까?"
명순 교수가 물었다. 먼저 물어본
자신이 조금 놀라웠다.
"날씨가 좋으면."
"내일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날 밤, 경순 노인은 일기장을 꺼냈다. 십 년째 쓰지 않은 일기장이었다. 첫 페이지를 펼쳐 이렇게 썼다.
'오늘 이상한 교수를 만났다.
그가 나에게 칼뱅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상하게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은행잎 빛이 아름다웠다.
왜 저것이 있을까.
왜 저것이 있고 나는 여기 있을까.'
제 4 장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창세기 1장 31절
두 사람의 공원 만남은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날씨가 흐린 날에도
두 사람은 나왔다.
처음에는 날씨가 좋으면 나오겠다고
했지만, 날씨와 무관하게 나오게
되었다.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어느 날 명순 교수가 책을 들고 나왔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들을 엮은 얇은
선집이었다.
한국어 번역본이 아니었다.
영어 원서였다.
경순 노인은 영어를 읽을 수 없었다.
"읽어드려도 됩니까?"
"부탁드립니다."
명순 교수는 안경을 고쳐 쓰고 읽었다.
에드워즈가 숲을 거닐며 번개와 천둥
속에서 하나님의 장엄함을 보았다는
구절이었다.
영어로 읽고 바로 한국어로 옮기며
읽었다. 영어 단어 하나하나를 찾으며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먼저
파악하고 그 의미를 한국어로 다시
표현하는 것이었다.
사십 년의 연습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경순 노인은 눈을 감고 들었다.
에드워즈는 자연의 모든 것이
상징이라고 믿었다.
태양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라고.
빛이 진리를 가리키는 그림자라고.
봄의 새싹이 부활을 가리키는
그림자라고.
경순 노인은 눈을 감고 그 말을 들으며 오래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십 년 동안 닫혀 있던 서랍이
천천히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선생님."
경순 노인이 말했다.
둘 사이에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자리 잡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명순 교수도 자신이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강의실이 아닌 공원 벤치에서, 학생이 아닌 동년배
노인에게서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이
오히려 더 진짜 같았다.
"제 아내가 말이지요."
경순 노인은 잠시 멈추었다.
"제 아내가 마지막 몇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 창문으로 하늘을
봤습니다.
아무것도 못 하는데,
말도 잘 못 하는데,
그냥 하늘을 봤습니다.
그때 저는 이해를 못 했습니다.
그냥 아파서 멍하니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아내가 뭔가를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못 보던 것을."
명순 교수는 책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에드워즈는 그것을 영적인 눈이라고
했을 겁니다.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지각.
우리의 감각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그렇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그것이 꼭 신학적인
언어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이 끝에 가까워질수록 처음 보는 것처럼 세상을 봅니다.
아이처럼.
오염되지 않은 눈으로.
어쩌면 사모님이 그러셨던 것이
아닐까요."
경순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다시 감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에드워즈의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내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병원 창가에서 하늘을 보던 얼굴.
그 얼굴이 고통스러운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
그것이 경탄의 얼굴이었다는 것을.
* * *
그 무렵, 재민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요즘 매일 공원 나가신다고요? 누구 만나십니까?"
"이웃 사람."
"어떤 이웃이요?"
"교수."
"교수요?"
"구약 가르쳤던 사람."
재민은 잠시 침묵했다.
뭔가 걱정의 계산을 하는 침묵이었다.
"괜찮으신 분이에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좋은 사람이야."
경순 노인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재민은
그것을 알았다.
"그렇군요. 잘됐다."
이번에는 재민의 목소리에서 지침의
무게가 조금 빠져 있었다.
제 5 장 주어진 것들에 관하여
현상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허용하라. 그 앞에서 당신은 받는 자가 된다.
— 장-뤽 마리옹,
《주어짐에 관하여》
열한 번째 만남이 되던 날,
날씨가 흐려서 공원 대신 명순 교수의 아파트 거실에서 만났다.
경순 노인이 처음으로 타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내가 죽고 난 뒤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 들어간 것이 처음이었다.
명순 교수의 집은 책들이 사람 대신
살고 있는 집이었다. 거실 벽 전체가
책장이었고, 책장에 들어가지 못한
책들은 바닥에도 있었고 창가에도
있었고 소파 위에도 있었다.
그러나 어수선하지 않았다. 어떤 질서가 있었다. 책이 많은 집 특유의 포근한
먼지 냄새와 함께, 그 안에는 오래된
사유의 온기 같은 것이 있었다.
"커피 드시겠습니까?"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명순 교수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경순 노인은 책장을 살펴보았다. 독일어 책들, 프랑스어 책들, 히브리어 책들.
경순 노인이 읽을 수 있는 것은 한국어 책들뿐이었다.
그러나 책들의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이 전달되었다.
한 사람이 한 평생 탐구한 것의 무게.
"이 분이 누굽니까?"
두꺼운 프랑스어 책 한 권을 들고
물었다. 표지에 Jean-Luc Marion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커피를 들고 온 명순 교수가 그 책을
보고 잠시 표정이 달라졌다. 오래된
친구를 보는 표정이었다.
"마리옹이라는 철학자입니다.
프랑스 사람.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현대 철학자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합니까?"
명순 교수는 커피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했다. 대학원생에게 설명하듯 설명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표정에서 보였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기를,
우리가 세상을 본다고 합니다.
주체인 내가
객체인 세상을 바라보는 거라고.
그런데 마리옹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사실 세상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낸다고.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여진다고.
선물처럼 주어진다고."
경순 노인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났다.
좋은 쓴맛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그냥 받으면 됩니까?"
"그렇습니다. 마리옹은 그것을
'주어진 자'라고 불렀습니다.
선물을 받는 자.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가 아니라,
세상이 주는 것을 받는 자."
경순 노인은 창밖을 보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그 빗방울 하나를 눈으로
따라갔다. 위에서 아래로. 직선이
아니라 비선형으로. 다른 빗방울들을
만나고 합쳐지면서.
"선생님."
"네."
"나는 평생 받는 일을 못 했습니다.
항상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해야 하고, 벌어야 하고, 돌봐야 하고. 받는 것은 게으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구해야
하고, 써야 하고, 가르쳐야 하고.
세상을 이해하려 들었지,
세상이 나에게 말 걸어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두 노인은 잠시 빗소리를 들었다.
"마리옹은 말하기를, 어떤 현상들은
우리의 이해력을 압도할 만큼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포화된 현상이라고 불렀는데,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넘쳐흐르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계시가 그렇고,
타인의 얼굴이 그렇고,
위대한 예술이 그렇다고."
"그리고 빗소리도?"
명순 교수가 잠시 경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이번에는 한쪽 입꼬리만이 아니라
양쪽이 다 올라간 웃음이었다.
"그렇습니다. 빗소리도."
* * *
그날 경순 노인이 집에 돌아와 일기장을 열었다. 그리고 썼다.
'비가 왔다. 교수 집에서 처음으로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제대로 보았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 빗방울이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빗방울을 본 것이 아니라.
받는다는 것.
나는 여든두 살이 되어서야 받는 법을 배우고 있다. 너무 늦지는 않았기를.'
제 6 장 태초는 매일 아침
창세기 1:1은 박제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매일 아침 뜨는 태양과 우리가 내뱉는 숨결 속에서 새롭게 경험되어야 할 현재진행형의 신비이다.
— 본문 중에서
겨울이 왔다. 공원의 은행나무들은 모두 잎을 떨구었다. 앙상한 가지들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경순 노인은 이제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뿐이었다.
재민이 집에 왔다. 한 달 만이었다.
재민은 아버지가 달라진 것을
알아보았다.
눈이 달랐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아프지 않아 보였다.
그것을 넘어서 무언가가 있었다.
"아버지, 좋아 보이세요."
"그래?"
"네. 정말로요."
경순 노인은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리옹이 말했다.
타인의 얼굴은 포화된 현상이라고.
우리의 이해력을 압도할 만큼
풍성하다고.
재민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경순
노인은 그것을 느꼈다.
이 아이의 얼굴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있는가.
아이였을 때의 얼굴이 있고,
청년이었을 때의 얼굴이 있고,
지금의 얼굴이 있고,
앞으로의 얼굴이 있고.
그리고 그 안에 어딘가, 경순 노인이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알 수 없기에 더 귀한 것들이.
"교수님 오늘도 나오셨어?"
재민이 물었다. 어느새 재민도
명순 교수를 '교수님'이라고 불렀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을.
"응. 오늘은 커피 대신 차를 마셨어."
"뭐 이야기 하셨어요?"
경순 노인은 잠시 생각했다.
오늘 이야기한 것.
우주의 나이가 백삼십팔억 년이라는 것.
그 백삼십팔억 년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흘러왔다는 것.
양성자의 질량과 전자의 질량의 비율이 조금만 달랐더라도
DNA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여기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주 역사
전체의 정확한 설계 위에 놓여
있다는 것.
"별 이야기."
"별 이야기요?"
"응. 별이 얼마나 정확하게 만들어져야 우리가 살 수 있는지.
그 정확도가 얼마나 인지.
과학이 그걸 알아냈는데,
그 숫자를 들으면 무섭다.
무서울 정도로 정밀해."
재민은 잠시 아버지를 보았다.
"그게 왜요?"
"그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감사한 것이라는 걸 이제 알겠어."
* * *
명순 교수는 그해 겨울, 오 년 만에
처음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은퇴 후 논문은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더 이상 쓸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쓸 말이 생겼다.
논문의 제목은 '경탄으로서의 신학 —
창조 교리와 일상적 현상학의 접점'
이었다.
논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이 논문의 영감은 공원 벤치에서 왔다.'
학술 논문의 첫 문장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썼다.
그것이 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경순 노인은 그 문장을 읽었다.
명순 교수가 직접 읽어주었다.
"제가 영감을 드렸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신학을 배운 사람이 아닌데."
"신학은 배우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살면서 깨닫는 것일 수 있습니다."
* * *
그해 마지막 날, 두 노인은 공원에
나왔다. 새해 전날이었다.
영하의 날씨였다.
공원에 사람이 없었다. 가로등만
켜져 있었고, 은행나무 앙상한 가지들이 빛을 받아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선생님."
"네."
"나는 오래 살면서 이상한 것이
뭔지 압니까."
"뭡니까?"
경순 노인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서울 하늘이라 그랬다.
하지만 별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알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젊을 때는 모든 것이 당연했습니다.
밥이 나오는 것도,
해가 뜨는 것도,
사람들이 있는 것도.
근데 이제는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밥 한 그릇이 있다는 것이,
내일 해가 뜬다는 것이,
선생님이 여기 있다는 것이.
그게 다 이상합니다.
이상하게 감사합니다."
명순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오늘 쓴 논문의 한 구절을 옮겨 적어
온 것이었다. 읽어주었다.
"'창세기 1장 1절은 시간의 시작을
선언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모든 현재의 의미를 선언하기도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면, 지금 이 순간도 그 창조의 연속 안에
있다.
경탄은 태초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시선이 아니다.
경탄은 지금 이 순간 안에서 태초를
발견하는 시선이다.'"
경순 노인은 그 말을 들으며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그 입김이 가로등 빛 안에서 잠깐
보이다가 사라졌다.
"저도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명순 교수가 말했다.
"나는 사십 년 동안 창조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창조를
가르치면서 정작 창조된 것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식이 경이를 가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과
이야기하면서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뭐가요?"
"모든 것이."
두 노인은 앙상한 은행나무 가지들을
바라보았다. 봄이 되면 저기에 다시
잎이 날 것이었다.
처음 보는 것처럼 초록색이
나올 것이었다. 그것을 두 사람 모두
볼 수 있을지는 몰랐다.
여든두 살과 예순일곱 살,
두 노인에게 내년 봄은 약속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도 괜찮았다.
지금 이 순간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로등 빛이 있고, 은행나무 그림자가 있고, 하얀 입김이 있고, 옆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있지 않아도
됐을 것이 있다는 경이로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 * *
경순 노인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
그해 마지막 날에 쓴 것.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나는 오늘에야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이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오늘 이야기다.
지금 이야기다.
내가 숨을 쉬는 이야기다.
내가 경이(驚異)라고 부르기로
한 것이 있다.
있지 않아도 됐을 것이 있다는 것.
나는 있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있다.
선생님도 있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있다.
이 가로등도, 이 나무도,
이 추위도. 있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있다.
그것이 경이다.
그것이 감사다.
그것이 어쩌면 기도다.
여든두 살에 기도를 배우고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 * *
이 소설은 창세기 1장 1절로부터 왔다. 정확히는, 그 한 문장이 인류의 역사에서 어떤 혁명을 일으켰는지, 그리고 그 혁명이 지금도 매일 아침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는지에 대한 오래된
사유들로부터 왔다.
칼뱅은 우주를 하나님의 극장이라
불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연의 모든 것이
영적 진리를 가리키는 모형이라 했다.
장-뤽 마리옹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자신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현대 우주론은 우주의
기본 상수들이 면도날처럼 정밀하게
조정되어 있어야만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있다고 증언한다.
오래 살수록 당연한 것이 사라지고,
당연한 것이 사라질수록
모든 것이 기적처럼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나이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일 것이다.
경탄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