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에서 오후 7시 10분 출발하여 청령포 유원지 리버텔에 11시 도착했고
영화 라디오스타 촬영지 별마루 천문대에 도착하니11시 50분 되었다
숙소에 들어오니 새벽1시다
잠잘려고 하는데 질주님이 닭도리에 이슬이를 부르니 새벽4시30분이다
6시30분에 기상하여 7시에 들꽃민속마을에 도착했다
8시까지 촬영을 끝내고 리버텔가든에서 식사한후 자유시간에 배타고 여의주님과
청령포에 들어갔다 .9시20분까지는 나와야한다
9시30분에 장릉으로 출발하여 행사장에서 자유 촬영에 들어갔다
오후 2시에 장릉을 출발하여
신선이 노닐었다는 선돌을 찍고
한반도를 쑥 빼다 박은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을 촬영하고 서울로 향했다
첫번째 촬영지 영월 봉래산의 별마로천문대
별마로란 이름은 별(star)과 마(정상을 뜻하는 마루)와 로(한문 고요할 로)의
합성어로 오염원이 없이 고요하고 조용한 봉래산 정상에서 별을 보고자하는 소망과
그런 순수한 마음을 공간개념으로 표현하여 영월 별마로 천문대 특성을
은유적으로 상징화 한 것이다.
별마루 천문대는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로
국내 최대급인 80cm 카세크레인식의 반사 망원경이 장착된 8m 주돔과
10대의 보조 망원경이 설치된 슬라이딩돔 등 관측 시설에다
주간에도 영상물을 통해 천체 관측 경험을 할 수 있는 60석 규모의
플라네타리움 및 모형 체험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두번째 촬영지 옛스러움에 대한 추억 들꽃민속마을
영월군 남면 서강변에 위치한 들꽃민속촌은 우리의 옛 생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곳이다
정원에는 연못과 장승,맷돌,장군석 등이 있으며,
내실에는 각종 생활 도구와 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번째 촬영지 단종 유적지 청령포淸怜浦
청령포 나루터에 도착하니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왕방연의 시조비다
단종이 먹을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의 신분이었다
그 직책이 죽어도 싫었겠지만 세조의 명을 수행해야 하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그는 그의 심경을 시조로써 후세에 남겼다
천만리 머나먼 곳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6대왕위에 올랐던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의 모함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영월의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영월에서 남서쪽으로 4km지점에 위치한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뒤쪽은 66봉이란 층암절벽에 무성한 송림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유약한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천연의 유배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1456년 6월 28일, 조선조 6대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군사 50명의 호송아래
이곳 청령포로 유배되어 약 2개월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지금 이곳은 단종의 슬픔을 간직한 채 휴양지로 개발되고 있다
수려한 절경으로 인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청령포,
단종의 비화가 내 가슴을 적시며
강에 떠있는 작은 모래섬 같은 아름다운 청령포가 어쩐지 더 애잔하게 느껴진다.
네번째 촬영지 단종문화제
영월하면 단종애사端宗哀史가 회상되는 고장이다.
영월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좌를 빼앗기고 어린나이에 유배되어
마침내 비운의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조선 제6대 왕인 단종(1441~1457)에 관한
유적이 많이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6호로 지정된 장릉이다.
영월읍 영흥리에 위치한 동을지산에 있는 장릉은 17세의 어린나이에 사약을 마시고
비참한 최후를 마친 조선 제6대 단종의 능이다.
단종은 왕좌에 오른지 3년만에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로 유배된다.
이곳에서 2개월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뜻하지 않은 홍수로 시내 관풍헌으로 거소를 옮기고
약 1년여의 세월을 보낸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사육신의 역모에 가담하였다 하여
사약을 받고 마침내 그 한많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단종의 시체는 동강물에 버려졌지만 후한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부터 충성심이 지극했던 호장 엄홍도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을지산으로 모셔갔고 산중턱에 노루 한마리가 앉아있던 자리가 하늘이 점지한 묘소라 생각하여
그 자리에다 시신을 암매장 하였다.
그 후 수양대군이 물러나고 세상이 뒤바뀌어 암매장 되었던 노산묘를 찾아
묘소의 형태를 갖추게 되니 이때가 1516년 12월 15일 입니다.
단종이 복위된 때부터 118년이 지난 1698년 노산군의 신호가 단종으로 복위되자
이 묘도 장릉으로 추봉되어 왕릉의 예우를 받게 되니
이는 단종이 승하한 지 241년이나 지난 후이다.
낙락장송의 울창한 송림에 둘러쌓인 장릉에는 현재 엄홍도의 정려각,
제사지낼때 제수를 차려놓는 배식단, 제사를 지낼 때마다 수량이 풍부해진다는 우물 영천,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들의 위패를 봉안해 놓은 충신각 등이 남아 있고
칼든자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하여 무인석 없이 문인석만 쓸쓸히 서 있다.
해마다 단종을 추앙하는 단종문화제가 이곳에서 거행되며
올해는 단종서거 550년만에 치러졌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이곳 장릉 주위의 소나무들이 단종의 비애를 알기나 하는 듯
모두 능에 절을 하는 모습으로 묘하게 굽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섯번째 촬영지 소나기재 정상의 선돌
소나기재 정상부위에서 50m쯤 들어간 곳에
서강 으뜸 경관인 이름하여 선돌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물길과 산자락의 조화가 빼어난 영월땅의 경관을 대표할 만한 절경으로
일명 신선암이라고도 불린다.
영화 '가을로' 에서 선돌 조망대에 유지태가 서있었다
"때로는 조금 높은곳에서 보는 이런 풍경이 나를 놀라게해
저 아래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펼처지거든..."
선돌은 높이 70m 정도의 큰바위로 마치 큰칼로 절벽을 쪼개다 그친 듯한 형상을 이룬 입석이다.
두개의 암벽사이로 크게 호를 그리며 흘러가는 서강 물줄기가 내려다 보인다.
푸른 강물과 평화로운 농촌모습이 층암절벽과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니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절경이다.
특히 일출과 일몰시에는 주변의 산자락과 어울려 장관을 이룰것 같으며
봄,가을 기온차가 심할때 운해 깔린 선돌을 보노라면 신선 노는곳이 바로 이런곳이구나!할것같다
이곳에는 순조(1892) 때 영월부사를 지낸 홍이간이 새겨놓은 운장벽이라는 글귀가 남아있다.
여섯번째 촬영지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
선암마을의 한반도 지형은 삼면이 바다인 우리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으로 서강변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강을 끼고 동쪽은 높은 절벽에 나무가 울창한 반면 서쪽은 경사가 완만한 평지에 가깝다
또한 북쪽으로 백두산 남쪽으로 포항의 장기곶과도 같은 산과 곶이 오묘하게 자리하고 있다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쳐지기 전 강물이 크게 휘돌아 치면서 만들어진 이 특이한 지형은
촤근 서강 살리기 일환으로 전망대 주변에 무궁화 나무도 심어 놓고 널리 알리고 있다
무궁화가 자라 무궁화 꽃이 피면 앞쪽에 깔고 렌즈에 담으면 보기 좋을것 같다.
별마루 천문대
들꽃 민속 마을
청령포의 소나무
550년만의 端宗國葬의 大與(국장때 쓰는 큰 상여)
상복 행렬
행전 행렬
莊陵에서 거행하는 궁중 제례의식
궁중 제례의식인 육일무
일무란 궁중의 제례의식에 추어지는 춤으로 일(佾)은 춤의 벌어진 줄이란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여섯줄 육열씩 36명이 6일무를 추었다
단종의 천도를 기원하는 의미로 모형 말인 ‘죽안마’를 불태우고 있다
충신단 제향 모습
선돌
선암 마을 한반도 지형
영월군 서면 옹정리 선암마을 앞에 위치한 옹정리 산 180번지
|
첫댓글 출사님의 출사기는 항상 감동적입니다. 그날 다녔던곳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게 하는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즐감합니다. 몇해전 세번정도 다녀왔는데 기억이 새롭습니다. 영월에 갔을때보다 더 상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유익한 자료 감사합니다.
무심결님 세번이면 많이 다녀 오셨네요,사실 저는 영월을 꼭 한 번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야 있었지만 가보지 못하다 이번에 기회가 되어 처음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