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박지현 시집,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 출간
황박지현(본명: 박지현) 시인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고, 199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2017년 재미시인협회 신인상으로 등단했고, 현재 재미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황박지현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인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은 단어 하나와 토씨 하나에도 묵향이 배어 있는 선비의 정신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등 푸른 생선의 ‘서늘한 유언’과도 같은 이타적이고도 무오류성인 ‘사랑의 노래’로 울려퍼지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칼을 들어/ 머리를 치려는데/ 깊고 푸른 눈동자가/ 나를 쳐다본다// 조심해/ 죽고 사는 게 한 끗 차이야/ 사방이 덫이고 아차 하면 나락이야// 나도 한때는 잘나갔었어/ 등 푸른 생선 가문에 태어난 데다/ 윤기 흐르는 매끈한 몸매에/ 눈빛까지 깊고 그윽하다고 인기가 하늘을 찔렀지/ 나 때문에 물 만난 물고기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니까// 세상은 넓고/ 어디든 갈 수 있다 믿었어/ 뭐든 내가 하고픈 대로 다 했었지// 내가 아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 지금 칼자루 잡고 있다고 그게 영원할 거라 착각하지 마/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누가 언제 도마 위에 오를지도// 이른 아침 도마 위에서/ 고등어가 내게 남긴/ 서늘한 유언
----[고등어의 유언] 전문
황박지현 시인의 [고등어의 유언]은 “등 푸른 생선 가문”, 소위 지배계급의 회한이 담겨 있는 시이며, 자기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며 ‘함부로 권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금언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나도 한때는 잘 나갔”고, “나 때문에 물 만난 물고기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등 푸른 가문에서 태어난 데다가 윤기가 흐르는 매끈한 몸매와 함께, “눈빛까지 깊고 그윽하다고 인기가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다. 요컨대 세상은 더없이 넓고, 어디든지 다 갈 수가 있고, 이 세상에서 모든 일들을 다 할 수가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내가 아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고, 그 결과, 도마 위에 놓인 고등어의 신세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 지금 칼자루 잡고 있다고 그게 영원할 거라 착각하지 마/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라는 [고등어의 유언]은 때늦은 후회와 때늦은 만각, 즉, 그의 뼛속까지 파고드는 회한의 소산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배신과 변절의 역사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권력은 좋은 것이고, 눈앞의 이익은 더욱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무리를 짓는 동물들의 특성상, 만인들 위에 군림을 하며 명령을 내린다는 것도 즐겁고 기쁜 일이고, 권력의 본보기로서 타인들의 재산을 빼앗고 괴롭히는 일도 즐겁고 기쁜 일이다. 순간을 영원하다고 믿으며, 이 권력자의 망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비록, 배신과 변절의 역사 속에 도마 위의 고등어처럼 난도질을 당하게 될지라도 더욱더 즐겁고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있고, 세계가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자기 중심사상이 이기주의의 토대가 되고, 이 이기주의를 통해서 그의 권력욕망이 싹튼다. 권력은 약이면서도 독약이고, 이 권력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자는 전인류의 스승인 사상가일 수밖에 없다.
황박지현 시인의 [고등어의 유언]은 등 푸른 생선의 ‘서늘한 유언’이며, 우화로서의 최고급의 지혜의 소산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돈과 명예와 권력, 배신과 변절, 사생결단식의 승리와 패배----.
대부분의 권력은 인류의 아편이고, 너무나도 어리석고 크나큰 파멸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어느 각도에서 어디를 보아도/ 참 반듯하고 단아한 자태// 네모는 네모의 정석/ 동그라미는 동그라미의 정석/ 어떤 장식도 허용하지 않는다// 휘어짐 없는 꼿꼿한 선은/ 선비가 따로 없고/ 일정하고 가지런한 간격들은/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말라는/ 관계의 철학을 설파한다// 일생 가까이 두고 벗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친구//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 동그랗고 네모난 노랫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맑은 고딕체] 전문
선비란 누구인가? 선비란 자기 자신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위하여 단 한 걸음도 생략할 수 없는 걸음으로 묵묵히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을 말한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는 공자의 말이 그것이고, “명예와 생명은 하나이다”라고 명예를 위해 살고 명예를 위해 죽겠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이 그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자기 자신의 철학을 위하여 에페소스의 왕위를 거절한 바가 있고, 아인시타인 역시도 ‘권력은 짧고 물리학은 영원하다’라는 말과 함께, 이스라엘 대통령의 직을 거절한 바가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 니체, 마르크스 등도 진정한 선비의 길을 걸어갔고,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순자, 부처, 예수 등도 진정한 선비의 길을 걸어갔다.
재미교포인 황박지현 시인의 시를 읽으면 그의 뿌리인 조국, 즉, 우리 대한민국의 선비정신이 그의 단어 하나와 토씨 하나에도 배어 있고, 그 이타적이고 무오류성의 사랑의 노래가 천리, 만리, 아니, 머나먼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유교사상의 본고장인 대한민국으로 역류해 들어오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찍이 맹자는 “나는 천하의 광거에 살고, 천하의 정위에 서며, 천하의 대도를 걸어갈 것이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그것을 실천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나 홀로 그것을 실천하겠다. 어떤 부유함도 나를 타락시킬 수 없고, 어떤 가난도 나를 비굴하게 할 수 없고, 어떤 권력도 나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역설한 바가 있다. 황박지현 시인의 [고등어의 유언]은 등 푸른 생선이 아닌 그의 서늘한 유언이며, 이 최고급의 유언이 그의 첫 번째 시집인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어 하나와 토씨 하나에도 묵향이 배어 있고, 시구와 시구 사이에도 묵향이 배어 있으며, 이러한 묵향이 [선풍기를 보며], [맑은 고딕체], [너와 나의 속도] 등의 최고급의 선비정신(시인정신)으로 승화된다.
“어느 각도에서 어디를 보아도/ 참 반듯하고 단아한 자태”이고, “네모는 네모의 정석/ 동그라미는 동그라미의 정석”으로 그 “어떠한 장식도 허용하지를 않는다.” 선비정신--시인정신은 꾸밈이 없는 정신이며, 순수함이 순수함으로, 진실함이 진실함 그 자체로 드러나는 ‘무기교의 기교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휘어짐 없는 꼿꼿한 선은/ 선비가 따로 없고”, “일정하고 가지런한 간격들은/ 너무 가까이도 멀리도 말라는/ 관계의 철학을 설파한다.” [맑은 고딕체]는 선비와 선비의 관계와도 같고, 이 선비의 관계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의 철학과도 같다. 선비와 선비, 한평생 “가까이 두고 벗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친구”들, 즉, 글자와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 “동그랗고 네모난 노랫소리가” 너무나도 청아하게 영원히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나는 빛의 속도로 너에게 가고/ 너는 달팽이의 속도로 나에게 온다// 너를 만나러 갈 때 나는/ 아무것에도 눈길 주지 않고/ 발길을 재촉하지만// 너는 나를 만나러 오면서도/ 꽃도 보고,/ 하늘도 보고,/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고// 그래도 나는/ 행여 너를 지나칠까/ 부지런히 부지런히 너에게 간다// 네가 천천히 오고 있으니까/내가 더 빨리 가야지// 너에게로 가까이/ 더 가까이
----[너와 나의 속도] 전문
나는 빛의 속도로 너에게 가고, 너는 달팽이의 속도로 나에게 온다. “너를 만나러 갈 때 나는/ 아무것에도 눈길 주지 않고/ 발길을 재촉하지만”, “너는 나를 만나러 오면서도/ 꽃도 보고/ 하늘도 보고/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한다. 나는 ‘사랑은 주는 것이다’라는 매저키스트가 되고, 너는 ‘사랑은 받는 것이다’라는 사디스트가 된다. 이 매저키스트와 사디스트의 싸움에서 늘 손해를 보는 것은 매저키스트 같지만, 그러나 모든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정의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나, 즉, 황박지현의 사랑이 최종적인 승리를 얻게 된다. “너는 나를 만나러 오면서도/ 꽃도 보고/ 하늘도 보고/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행여 너를 지나칠까/ 부지런히 부지런히 너에게로 간다.” “네가 천천히 오고 있으니까/ 내가 더 빨리” 가서 너를 기다리고, 그 ‘기다림의 미학’을 통해서 [너와 나의 속도]를 동일하게, 아니,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의 속도’로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너의 물질적 토대가 되고, 너는 나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나는 돈을 벌고 너는 예술을 하고, 이 암수 한 몸, 혹은 이 성聖과 속俗의 사랑의 속도는 관계의 속도이며, 이 차이 속의 조화를 인정하지 않으면 너와 나의 사랑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황박지현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인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은 그의 시, [고등어의 유언]에서처럼, 그의 삶의 철학이자 시인정신의 진수라고 할 수가 있다. 너와 나, 우리와 우리 사이에 어떤 꾸밈이나 장식이 없는 선비의 정신, 즉, ‘맑은 고딕체’의 정신이 살아 움직이면, 너와 나의 암수 한 몸과도 같은 이타적인 사랑의 노래가 ‘삶의 철학’으로 울려 퍼진다.
그렇다. 사랑은 주고 받음을 따지기 이전에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한평생 “나도 너처럼” “누군가에게/ 푸르른 바람 한 점/ 날려” 주는 것이고, 그 ‘사랑의 황홀함’으로 “원할 때/ 원하는 방향/ 원하는 세기로”([선풍기를 보며])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것이다.
----황박지현 시집, {글자 사이로 바람이 불면},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