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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오딧세이
내가 읽은 승효상과『빈자의 미학』
최 화 웅
지난여름은 무덥고 길었다. 그 여름이 물고 온 가을이 서둘러 하얀 겨울을 품기 시작했다. 나는 2018년 여름 동안 화진이 멀리서 권한 마쓰이에 마사시(松家仁之) 소설『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쉬엄쉬엄 읽었다. 모두 스물여섯 단락으로 이어 쓴 소설의 원제는『火山のふもとで』(화산 자락에서)다. ‘아침나절’이라는 뜻을 가진 아사마 산자락 한적한 숲 속 ‘무라이 건축 설계사무소’ 여름별장에서 펼쳐진 건축과 삶의 이야기다. 명석하고 막힘없는 필체로 사람을 위한 공간을 섬세하게 그려 나간『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제64회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한 소설이다. 쫒기는 일 없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사랑스런 외손녀 유나가 태어나 어느 틈에 옹알이를 시작했다. 가을 들어 문학도시에 실린 길동인 박영란의 수필평이 눈길을 끈다. 그녀의 북에세이『책이랑 연애하지, 뭐』의 출산을 기다리는 동안 간간이 기별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을에는 젊은 날 읽었던 승효상(承孝相)의『빈자의 미학』개정판을 펼쳤다. 내용 중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자코메티의 조각 ‘걷는 사람’이 울리는 감동이 새삼스러웠다. 자코메티의 작품은 참으로 가늘고 길며 유약한 구조가 나로 하여금 가슴 조이는 긴장과 연민의 정을 느끼게 했다. 건축가에게 가장 유효한 건축 공부의 한 방법을 여행이라고 한 승효성의 건축여행『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와 봉화산 부엉이바위 아래 풍경을 담은『노무현의 무덤』을 읽었다. 집과 책이 사람 사는 삶을 새롭게 하나보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와 승효상의 책들은 건축에 문외한인 나에게 건축의 의미를 제대로 바라보게 해준 고마운 책들이다. 승효상은 1975년 김중업과 함께 대한민국 현대 건축 1세대로 평가받는 김수근의 문하에 입문하면서 건축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는 15년간 공간건축에서 일하다 1989년 독립한 뒤로는 ‘이로재履露齋’, ‘이슬을 밟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공간건축의 수석 디자이너로 국립청주박물관과 새로운 형식의 교회 건축으로 마산 양덕성당과 서울 경동교회 등을 맡아 지었다. 그의 대표작은 이로재 사무소를 연 뒤에 지은 수졸당과 수백당, 쇳대박물관, 대전대 혜화문화관, 부산 구덕교회, 제주추사관 등이다. 그중에서도 유홍준의 집, 수졸당은 건축가 지망생들이 둘러보며 공부하는 곳이다. 승효상은 건축가이며 살아 있는 이 시대의 작가다.『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에서 필립 그뢰닝 감독이 연출 2009년 개봉한《위대한 침묵(La Grande Chartreuse)》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어쩌면 영화《위대한 침묵》은『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에 녹아 있는 승효상의 침묵이 시베리아 대륙을 넘어 그 맥이 통하고 있었다. 영화《위대한 침묵》은 알프스 산맥 해발 1300m에 자리한 카르투시오 수도회 산하 그랑드 샤르트뢰스 수도원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은 1688년 현재의 모습으로 지어진 후 일반인에게 첫 공개다. 수도자들의 금계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기에 영화는 러닝타임 3시간을 대사 없는 영상으로 이어갔다. 사운드도 발자국소리와 낙숫물 소리가 유일한 현장 효과음이었다. 영화 제목이 '위대한 침묵'인 이유가 이 때문일까? 제일 시끄러운 장면이라면 영화 후반부에 어떤 수사님이 구두 밑창을 고치기 위해 두들기는 망치 소리가 전부였다. 영화는 침묵의 메타포로 가득하다. 162분, 2시간 42분 동안 자연의 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 영화를 찍은 그로닝 감독은 1984년 촬영을 청원했다가 거절당한 뒤 15년 만에 조건이 붙은 촬영 허락을 득하였다. 그 뒤로 그는 6개월 동안 수도사들의 일상을 직접 촬영했다. 조건은 ‘인공적인 조명이나 사운드를 쓰지 말 것. 수도원에 대한 논평이나 해설을 하지 말 것. 스태프 없이 감독 혼자 들어올 것. 영화의 첫 공개는 영화제에서 할 것’ 등이었다. 스스로를 독방에 가두어 침묵과 은둔의 삶을 사는 수도원의 사계를 추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 12월 개봉하여 이태에 걸친 상영기록을 남겼다. 첫 관람은 영화의 전당에서 함께 보았고 두 번째는 혼자서 다시 보았다. 부산 출신 건축가 승효상의『빈자의 미학』에서 받은 느낌은 마당 깊은 집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그는 20세기를 주도한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빈자의 미학'이라는 압축된 주제를 건축의 중심에 두는 건축가다. 편집의 여백 또한 그의 공간과 시간의 삶을 말해주는 듯 했다. “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 중요하다.”는 그의 속삭임이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의 미학, 즉 절제의 미학이었다. 박노해 시인이 “고귀한 뜻을 품고 맑은 가난 속에서 좋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과 마을에서만 그의 건축이 가능하리라.”고 한 말에 동의한다.『빈자의 미학』에 이어 승효상의 건축여행『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를 읽는 동안 순례의 감동이 일었다. 그 책의 서시와 제목을 박노해의 시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를 그대로 빌려와 썼다. 미술사가 유흥준은 “건축가 승효상은 글을 잘 쓰는 문필가로 이름 높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글을 잘 쓰는 재주 못지않게 건축을 보는 안목이 높다. 그의 건축이야기는 언제나 인문정신의 핵심에 닿아 있고 승효상은 글을 잘 쓴다는 말을 듣는다.”고 했다. 시인 박노해는 “『빈자의 미학』. 이것은 건축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삶의 혁명’ 선언”이라고 했다. 건축가 민형식은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리얼리스트 승효상의『빈자의 미학』을 ‘선언적 철학서’라고 칭했다. 그는『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의 발문을 통해 “이 시대의 집과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빈자의 미학』은 건축 관련 전문서적이 아니다. 삶의 철학과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소개했다. 승효상.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 작가다. 나는 침묵으로 말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글에서 청정한 수도사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그는 역사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삶’ 그 자체를 만들어주는 것이 건축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사유하는 건축가 승효상은 노무현의 묘역 전체 공간을 디자인하면서 그를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를 넘어 우리 자신의 성찰을 청하는 장소, 모두를 위한 풍경이 되기를 소망했는지 모른다. 그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공간을 창조하며 겉으로 보기 좋은 건축보다 그 안에 사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늘 건축과 사람을 연결시킨다. 세계의 유명한 건축물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는 설계도와 자제, 인테리어 등에 대해 전문적인 용어로 화려하게 설명하기보다 그 건축물이 세워진 땅의 지형적 의미와 형상, 나아가서 건축물의 존재 이유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건축의 길을 정치 사회적 의미로 되짚어준다. 그는 건축물의 기능적 의미뿐만 아니라 건축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일에 천착(穿鑿)했다. 건축을 통해 세상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늘 인간과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고대 원시인의 동굴과 움막과 무덤이 건축의 효시가 아니던가. 서울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같은 대학원과 빈 공과대학에서 학습했다. 1974년 김수근의 문하생으로 공간연구소에서 15년간 일하며 건축사를 획득하고, 1989년 건축사무소 이로재를 설립한 뒤 수졸당(1993), 수백당(1998), 웰콤시티(2000), 대전대학교 혜화문화관(2003) 제주 추사관(2010) 등을 디자인했다. 30~40대의 건축가 모임인 4·3그룹에도 참여하여 한국 건축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2002년 미국건축가협회로부터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고 같은 해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어〈건축가 승효상전〉을 열었다. 이듬해에는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에서, 2004년에는 도쿄의 갤러리마에서 중국 건축가 장융허(張永和)와 2인전을 열었다. 2007년 미국 구겐하임 재단이 아부다비 사디야트 섬에 조성하는 구겐하임 문화지구에 들어설 비엔날레 파빌리온 19개 중 '파빌리온 17'의 설계를 맡기도 했다. 독일 베를린 구동독 지역의 페퍼베르크 미술관 건축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2008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의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았으며 2011년에는 제4회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공동감독을 맡았다. 저서로『빈자의 미학』(1996)과『지혜의 도시 지혜의 건축』(1999),『승효상 작품집』(2001),『건축, 사유의 기호(2004),『지문』(2009),『노무현의 무덤』(2010),『북위 50도 예술 기행』(2010),『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2012) 등이 있다. 승효상은 오래전부터 대학가에서 특강을 해왔다. 2015학년 2학기 이화여자대학교에서『노무현의 무덤』을 주제로 ‘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에 관한 문화예술특강을 했다. 젊은 후배 건축가와 제자들에게 “건축가는 다른 사람의 집을 지어야 하므로 세계를 객관화시켜 볼 줄 알아야 한다. 자기를 타자화(他者化)할 줄 알아야 하며 경계 밖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는 어느 틈에 7주기를 맞은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마지막으로 당부한 ”Stay Hungry, Stay Foolish(항상 갈망하고 언제나 우직하게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가라)고 한 축사에서 따온 “Stay Out, Stay Alone!' 즉 경계 밖에 머물고 혼자가 되라는 뜻의 말을 남겼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건축은 예술이나 기술이 아니라 인문학이다. 닥치는 대로 책을 남독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스티브 잡스의 말은 젊은 날에 매달린 스튜어드 브랜드의 지구백과사전에 수록된 말로 “지금 새로운 것일지 모르나 너희가 언젠가는 점차 낡아 사라질 것이다.”라는 뜻이다. 지난해 9월 동아대 석좌교수로 부임한 이후 매월 토크콘서트를 열어 동아대 학생뿐 아니라 건축과 문화예술에 관심 있는 부산시민들과 만난다. 승 교수는 11월 7일 오후 3시 승학캠퍼스 경동홀에서 ‘유토피아의 도시들’이라는 주제로 토크콘서트를 진행한데 이어 12월 4일 오후 3시 부민캠퍼스 김관음행홀에서 계속된다. 지난 9월 특강에서는 도시 공간 구조의 역사에 대한 개괄을 통해 이 시대의 도시를 성찰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10월 14일에는 부산시민공원 벽산홀에서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청중들과 마주했다. 11월 토크콘서트에서는 ‘유토피아의 도시들’이라는 주제로 권력과 이념, 종교 등 이상도시의 열망으로 태어난 도시들의 성장과 멸망을 짚어보았다. 12월에는 ‘현대의 도시와 미래’란 주제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으로 태동한 현대도시의 전개와 미래 전망을 나눌 예정이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때 도보다리에서 가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은 금세기 핫한 뉴스로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승효상은 5월 19일 중앙 Sunday 오피니언에서 “풍경, 바람과 빛의 아름다움”이라는 시평으로 그 뉴스를 되짚었다. 기사의 발문으로 “도보다리 끝에 마주 앉은 두 사내가 주고받은 진실은 들리지 않았지만 폭력·증오·불신 내려놓게 한 풍경 바람과 빛은 너무도 아름답게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었으니 바로 그게 풍경의 본질이었다.”고 뽑고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영어보다 우리말이 훨씬 아름다운 단어가 많다. 그 중에서도 풍경과 랜드스케이프(landscape)는 두 단어가 가지는 격조의 차이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일 게다. 랜드스케이프는 토지 소유권이라는 뜻이 그 어원이며 지금의 단어를 직역해도 땅의 모양이나 조건을 의미하는 것이라 서양인에게 풍경은 그냥 물적 대상일 뿐이다. 이를 바람과 볕을 뜻하는 풍경(風景) 혹은 풍광(風光)이라는 우리말의 의미와 견주면 마치 장사치와 선승이 쓰는 언어의 차이처럼 보인다.”고 쓰고 “8천 만 민족의 생명,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큰 세계의 운명을 짊어진, 그래서 절대 고독에 사로잡혀 있을 두 사내가 그 다리의 끝에 마주 앉았다. 다리는 이 순간을 위해 그 끝이 조금 넓혀지고 푸른색으로 깨끗이 칠해져 봄날 초록의 자연 속에 간결한 거주공간으로 나타났다. 그 속에서 두 사내가 주고받았을 진실, 들리지 않았지만 세계를 향해 절박했던 그들의 진정성 가득한 몸짓은 롱테이크로 줌렌즈에 잡혔고 되지빠귀·산솔새·청딱닥구리 같은 이름마저 예쁜 새들의 소리와 그 위를 지나는 바람소리가 지켜보는 이들의 숨마저 삼켰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 내재해 있을 폭력과 증오, 불신들을 내려놓게 한 이 풍경, 바람과 빛은 너무도 아름답게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었으니 바로 그게 풍경의 본질이었다.”고 평했다. 승효상의 글과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사회를 비추는 맑은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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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승효상...처음 듣는 분이네요...좋은 작가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저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건축가이자 작가인 승효상씨는 인간을 으뜸으로 생각하는 분이십니다.
수도승 같은 분이기도 하구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