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원이 한밭제일장로교회의 이영환목사가 쓴 ‘장자권의 회복과 누림’에 대한 책을 보내왔다.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평가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책을 읽어보니 문제점이 너무 많았기에 그 책에 대한 평가를 카페에 올렸다. 그 며칠 후 이영환목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이단연구가 두사람을 증인으로 하여 함께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영환목사는 잘못을 인정하고 책을 모두 수정하겠다고 제의를 하였고, 필자는 그 솔직한 자세에 오히려 감사하여 수정하여야 할 점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보내 주었다. 얼마 후 이영환목사는 정말로 책을 수정하여 보내왔다. 그런데 그 책을 읽어보니 일부는 책이 수정된 것이 사실이었지만, 중요한 문제점들은 수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필자는 다시 메일을 보냈는데, 고쳐야 할 점을 다시 지적하여 준다면 다시 책을 수정하여 보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물론 필자는 다시 문제점을 보내주고 기다렸지만 그 이후로 차일피일 미루면서 책을 수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는 그 책에 대한 문제점들을 다시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1) 성경이 말하는 장자권의 의미 '장자'(히:베코르, 헬:프로토토코스)라는 용어는 사람의 경우 '맏아들'을 말하며, 짐승의 경우 ‘초태생 수컷’을 말한다. 장자는 구약 시대에 가정의 가장과 공동체의 장(족장)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받았다. 특히 장자와 초태생은 하나님의 소유로 간주되었다. 성경에서 ‘장자’라는 개념은 (1) 문자적으로 ‘큰 아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또는 순서적으로 처음(초태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2)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였다거나 하나님의 소유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장자라는 용어보다는 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용어가 사용되며, (3) 예수그리스도에게 사용될 때에는 “God's Family”라는 개념으로서 신성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용어는 상황에 따라서 다른 상징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하지만, 우리가 장자권을 갖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보는데, 천국의 기업을 계승하였다는 구속사적인 의미로서 사용된다면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다고 보지만, 어떤 권세를 가진다는 의미로서 장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매우 많다. 성경에서 장자권에 대한 내용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자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로 불렸으며, 또한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처음 난 자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민 3: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민 3:41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태어난 자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태어난 것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이스라엘이 장자라고 하는 구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성경에서는 에브라임을 장자라고 비유하는 구절도 있다.
렘 31:9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에브라임은 형 므낫세와 함께 야곱의 양자로 택함을 받았다.(창48:5) 에브라임은 동생이었지만 형 므낫세보다 더 큰 축복을 야곱으로부터 받았다. 그 이유는 장자권이 르우벤으로부터 요셉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대상 5: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로 표현된 이유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개념 때문이며, 그러나 실제적으로 유일한 하나님의 장자는 예수그리스도였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 1:4-6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구약에서는 천사들도 간혹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졌으나,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맏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때때로 신성을 뜻하기도 한다. 인자(son of Man)가 인성을 말하듯이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은 예수님의 신성을 의미한다. 고대의 왕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졌으며, '하나님의 아들'(God's family)이라는 단어의 개념은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한 신적본질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였을 때에 그 용어가 곧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의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8)
또한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려졌으나,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맏아들이라고 불려졌다. 과연 성경에서 성도들을 장자라고 말한 곳이 있을까? 히브리서에 장자라고 하는 구절이 나타나지만, 구체적으로 성도들을 장자라고 말하는 내용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본문은 출애굽 당시 유월절에 인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는 집은 장자를 멸하였던 재앙을 뜻하며, 성도를 장자라고 말하는 내용이 아니다.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본문 역시 망령된 자의 예를 들기 위한 것으로 장자이면서 팟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던 에서와 함께 음행하는 자를 망령된 것으로 비판하기 위한 내용이다.
히 12:22-23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위 히브리서 본문은 우리가 장자라는 해석을 보편화하지 않으며, '장자들의 총회'라는 의미는 다양한 해석적 견해를 갖고 있다. 혹간은 ‘믿는 자들’을 ‘장자’로 비유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해석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데, ‘총회’라는 단어가 앞구절(22절)에서 언급된 것과 연관하여 "천만천사들과 장자들의 총회"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KJV와 NIV 영어성경과 표준새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은 모두 그렇게 번역하였다. '장자'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의 첫열매로서 구속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도 보편적인 견해로서, 예수님 당시에 구원을 받은 첫열매의 초대교회 교인들로 언급하기도 한다. 물론 예수그리스도와 연합된 구원받은 성도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라는 본문구절은 모든 믿는 성도를 살아서 장자라고 언급한다는 내용이 아니며, 성경에는 우리가 잃었던 장자권을 회복한다는 어떤 근거도 없다.
(2) 장자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구약에서 말하는 장자권이란 (1) 정치적인 권리: 가장의 권위 계승 (2) 경제적인 권리: 두몫의 재산 분깃을 상속 (3) 영적인 권리: 제사직분의 수행을 뜻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장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구속사적인 의미에서 우리 구원을 받는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 혹은 '장자'라고 비유적인 표현을 할 수는 있다고 본다.
엡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클레로오'라는 헬라어는 “기업을 얻다, 상속을 받다”는 뜻을 갖는다. 표준새번역은 상속자로 삼으셨다고 번역하였다. 즉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서 "상속자가 된다" 또는 "기업이 되었다"고 표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장자만이 상속을 받는 것은 아니다.
[표준새번역]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성경에서 야고보서는 "우리"를 첫열매로 언급한 적이 있다.
약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첫 열매’는 ‘프로토토코스’라는 단어 대신에 ‘아팔케’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첫열매에 대해서 호크마 주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모든 곡식의 첫 소산물이 하나님께 바쳐지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선택되어서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첫 열매가 된다. 혹자는 야고보가 '우리'를 사용한 것이 보편적인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고 하나(Hort), 중생한 자들이나 당시 초대 교회의 성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Burdick, Moo). 왜냐하면 야고보는 비교의 뜻이 담겨있는 '티나'를 사용하여 피조물과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Calvin).
위 야고보서 본문에서 '첫열매'라는 것은 '장자'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순서를 말한다. 본문은 야고보가 당시 초대교회 성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성경에서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사용되었다. 이것도 첫 부활이라는 순서적인 의미가 된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본문의 첫열매는 당연히 구원의 순서가 아니라, 부활의 순서로서 그리스도의 경우를 말한다. 또 이영환목사는 롬 8:29를 인용하여 우리도 예수와 같이 맏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본문은 그런 뜻이 아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예수와 한 형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 맏아들이 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본문에서 그(He)는 예수를 뜻한다. 그러나 이영환목사는 예수가 장자이므로 우리도 그 장자의 형상을 입었으니 우리도 맏아들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형상'이라는 단어를 '장자'라는 뜻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맏아들이라면 어떻게 형제가 될 수 있는가?
히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장자'라고 말할 수 없다. 유일한 하나님의 장자는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주장은 자칫 신성을 의미할 때에 매우 위험한 주장이 되므로 용어 사용에 신중하여야 한다. 다만 우리를 장자라고 비유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개념에서 우리가 천국의 기업을 상속받는다는 개념, 즉 구원을 받는다는 뜻에서 '상속자' 또는 '기업을 받는 자'라고 비유할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도 ‘상속자, 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면 충분하며 장자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더욱이 우리가 원래부터 장자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회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 특히 “누림”이라는 단어는 지방교회가 사용하는 용어로서 지방교회는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3) <장자권의 회복과 누림>의 책에 대한 문제점 이영환목사가 주장하는 장자권은 성경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상한 내용이다. 이영환목사가 주장하는 장자권은 소위 귀신축사, 대적기도, 선포기도와 같은 명령권과 선포권, 통치권을 갖는 권세를 뜻하며, 소위 다락방이 주장한 것과 같이 사탄결박권, 천사동원권, 기도응답권등의 하나님과 동일한 권세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러한 권세를 장자권이라고 말하지도 않으며, 이러한 장자권을 우리가 회복하여야 한다고 말하거나 누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위하여 성경을 짜맞추기로 시도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점이다.
1) 명령과 선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이며, 사람의 권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여, 인간도 말씀으로 명령과 선포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매우 이상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에는 하나님이 한탄하셨다는 구절도 있는데, 그렇다면 사람도 한탄하여야 하는가? (창6:6-7) 어느 성경에 사람이 말씀으로 무엇을 창조하거나 무엇을 선포한 내용이 있는가?
2)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다스리는 대리 위임권을 주신 적이 있지만(창1:28), 통치권을 주신 적이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구절이 많이 있지만, 사람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어떤 구절도 성경에는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대대로 통치하신다고 말하며, 참새 한마리가 떨어지는 것까지 섭리하시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다. (마10:29)
시 146:10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3)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이나 권세에 대해서 "장자권의 회복과 누림"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며, 사람은 장자권을 잃은 적도 없고 다시 회복할 권리도 없고 누릴 수도 없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한 맏아들이며 장자가 되신다. (롬8:29, 히1:4-6)
4) 구약에서 장자권이라는 것은 가장의 권위 계승, 두 몫의 재산 분깃을 상속, 제사직분의 수행을 뜻한다. 또 신약에서 '상속자'라는 구절은 천국의 기업을 잇는 구속사적인 표현으로 비유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을 쫓는 축사 또는 명령, 선포등을 할 수 있는 것을 장자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지방교회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갖게 된다는 뜻으로서 장자권의 회복과 누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기를 바라며, 이런 주장이라면 이단으로 정죄가 될 수 있다. 야곱이 에서에게 장자권을 사서 귀신과 사탄을 쫓아내거나 통치를 한 적이 있는가?
5) 이영환목사는 "예수님이 큰 소리로 외쳤다"는 일부 성경구절을 인용함으로서 우리도 명령과 선포를 큰 소리로 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웃을 수도 없는 해괴망칙한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논리가 옳다면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하라"(마6:6)는 성경구절을 적용하면 우리는 모두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하여야 하지 않는가? 또 예수께서 땀이 피방울처럼 간절히 기도하셨으니(눅22:44) 우리는 모두 항상 기도를 할 때마다 땀이 피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여야 하는가? 베드로가 지붕 위에서 기도하였으니(행10:9) 우리는 항상 지붕 위에서 기도하여야 하는가? 실제로 저자인 이영환목사는 골방에서 은밀히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성경에 단 한번 나와있으므로 보편적인 기도가 아니다"라고 무시하고 있다.(26쪽) 즉 자신의 주장과 같은 주장은 취하고, 자신의 주장과 다른 주장은 버리고 있는 셈이다. 성경에서 묵상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도 무시하여야 하는가?
6) 히브리어의 문학적인 강조 표현에는 반복적인 문법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표현적인 문법일 뿐이며, 명령과 선포를 반복하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어느 성경에 “있을지어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명령을 반복하였으며, 어느 성경에 이러한 반복명령을 장자권의 회복과 권세라고 정의하고 있는가? 이영환목사는 매 단락마다 “단순, 반복, 지속, 강행”이라는 구호를 열 번 복창하라고 주장하며, “있을지어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명령과 선포를 일곱 번 복창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구호를 외치면 장자권을 회복하는가?
7) 자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성경을 알레고리적인 해석과 일방적인 해석을 한다. 그의 책에는 잘못된 성경해석이 너무나 많이 발견되어 일일히 지적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조상죄를 물려받는 가계저주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알레고리적인 성경해석의 예를 들면, 선악과를 재물이라고 언급한 것(15쪽), 생기를 영으로 해석하고 생령을 영적존재로 해석한 것(10쪽, 13쪽), 시119:164(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를 인용하여 하루에 최소 일곱번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한다는 주장(24쪽), 시150:5(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을 인용하여 큰소리 나는 악기를 동원하여야 한다는 주장(25쪽), 말씀을 들으며 아멘 아멘 하여야 마귀가 우리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갈 수 없다고 하는 주장(31쪽), 계5:2, 5:12과 계7:2을 인용하여 천국에서는 소리가 모두 크기 때문에 우리도 큰 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33-43쪽), 창1:28(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를 인용하여, 땅에 기는 뱀이 사탄이므로 사탄을 다스릴 대상으로 해석하는 것(112쪽), 마귀를 ‘루시퍼’라고 말하는 것(116쪽), 고전9: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을 인용하여 영적싸움의 목표가 몸이라고 주장하는 이원론(120쪽),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육체의 정욕이 있다고 해석하는 이원론(121쪽), 벧전1: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을 인용하여 조상의 죄가 물려진다는 죄의 유전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본문은 “조상의 죄”가 물려진다는 뜻이 아니라 “조상에게 물려받은 헛된 생활”이라는 뜻이다. 이영환목사는 헛된 행실이 “원죄를 포함한 조상들이 지은 죄”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번역성경은 죄가 아니라, 헛된 생활(공동번역, 현대인의성경), 헛된 생활방식(표준새번역)로 번역하였다. KJV 영어성경은 tradition으로 NIV 영어성경은 the empty way of life로 번역하였다.(183-184쪽) 이외에도 이영환목사의 많은 성경해석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들이다.
8) 예수의 피는 어떤 기적을 갖는 피가 아니며, 어떤 신비한 능력을 갖는 피가 아니다. 예수는 우리와 동일한 피와 살을 가지셨다. 예수의 피는 그 피라는 물질에 어떤 주술적인 효과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흘리신 피라는 결과적인 사건에 기인한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의 피"라는 물질이 신령하며 신비한 능력을 가지신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9) 이영환 목사의 주장은 헬라적인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이 세상을 하나님과 사탄, 영과 육의 대결구도로 보고 있는 베뢰아의 사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사도운동에서 주장하는 대적기도, 선포기도 사상을 갖고 있다. 이 책은 마치 베뢰아나 다락방의 교재를 보는 것 같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이제는 이런 베뢰아식과 다락방식의 귀신축사가 지겹다. 이런 무속적인 귀신론을 성경의 본질적인 중요 멧세지로 보는 이런 황당한 주장을 이제 그만 둘 수 없는가? 아직도 이런 주장을 하는 목사들이 있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딜레마이며 비극이다. 베뢰아는 마귀를 멸하는 것을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고 주장하며, 사람을 창조한 이유가 마귀를 멸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이영환목사도 이러한 귀신축사를 장자권의 회복이라고 주장하며, 베뢰아와 동일하게 성도들을 '동역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역은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인 멧세지가 아니다. 더욱이 장자권의 회복과 누림을 그러한 개념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그 책의 저자가 베뢰아 사상이나 다락방의 사상과 동일하다는 증거가 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성경과 다른 매우 불건전한 책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믿음의 반석에 굳게 서 있는 한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장자권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귀신축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용어일 뿐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우리 개인 개인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것이 그 본질적인 사역이 되신다. 성령께서는 오직 신비한 현상과 기적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내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10) 부르짖는 기도, 대적기도, 선포기도, 호흡기도등을 주장하는 목사로서 정원목사가 있다. 이영환목사는 2014년 합신 총회에서 정원목사에 대해서 일년간 조사하여 발표하기로 결의한 바가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영환목사의 책을 수정을 하겠다는 제안에 너무나 감동을 받아 자세한 내용을 일일이 지적하여 보내주었다. 또 책을 발간하기 전에 원고를 보내준다면 직접 수정을 하여 주겠다는 제안도 하였다. 함께 동석한 이단연구가 2명이 “이인규권사는 돈을 주어도 받지 않는 사람이며, 그러나 진심으로 고치겠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한 것도 들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이영환목사가 말하는 장자권의 회복은 하나님과 같은 사단 마귀의 결박권, 대적권과 선포권, 통치권등을 뜻한다. 그것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 명령하고 선포하며 반복하므로서 그 권세들을 회복할 수 있으며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영환목사는 장자권의 회복과 누림이라고 부르는데, 그러한 주장을 성경적으로 증거하기 위하여 성경을 알레고리적인 해석으로 짜맞추고 있다. 이영환목사로부터 그런 세미나를 들었던 교회들은 실제로 교회에서 큰소리로 부르짖고 명령을 하고 선포와 대적을 함으로서 장자권을 회복하고 누리게 된 간증과 체험을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가난과 질병과 고난, 사고, 불행은 모두 마귀로부터 왔다고 보며, 장자권의 회복과 누림을 알게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이원론적인 주장으로서 다락방과 베뢰아의 주장과 같다. 이영환목사는 교회에서 윤석전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었던 적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몇가지 문제점 외에 본질적인 내용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것과 곧 수정하겠다고 하면서 차일피일 몇달간 미루었던 결과로 볼 때에, 어떻게 하든지 이단성 시비의 자리를 잠시 피해 보려는 것으로 판단되어진다. 필자는 이영환목사의 세미나에 대해서 책뿐 아니라 동영상도 이미 확보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 드린다. [출처] 이영환목사의 "장자권의 회복과 누림" 비판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작성자 dsmed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