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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4월 8일에 최이가 연등회(燃燈會)를 하면서 채붕(綵棚)을 가설하고 기악(伎樂)과 온갖 잡희(雜戱)를 연출시켜 밤새도록 즐겁게 놀게 하니 도읍 안의 남녀노소 구경꾼이 담을 이루었다. 또 5월에는 종실(宗室)의 사공(司空) 이상과 재추들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산처럼 높게 채붕을 가설하고 수단 장막과 능라 휘장을 둘러치고 그 안에 비단과 채색 비단 꽃으로 장식된 그네를 매었으며 은과 자개로 장식한 큰 분(盆) 4개를 놓고 거기다가 얼음산을 만들었고 또 큰 통 4개에다가 10여 종의 이름 난 생화들을 꽂아 놓아서 보는 사람의 눈을 황홀케 하였다. 그리고 기악과 온갖 잡회를 연출시켰는데 팔방상 공인(八坊廂工人) 1천 3백50여 명이 모두 성대히 옷차람 하고 뜰로 들어와서 주악(奏樂)하여 각종 악기소리가 천지에 진동했다. 최이는 8방상(八坊廂)에 각각 은 3근씩 주었고 또 영관(伶官)들과 양부(兩部)의 기녀(伎女) 및 재인(才人)들에게 금과 비단을 주어 그 비용이 거만(鉅萬)에 달하였다.
33년에 최이가 임금을 위하여 연회를 배설하면서 큰 상 여섯에 7보로 새긴 그릇을 바쳐 음식을 차려 놓았는데 지극히 풍부하고 사치스러웠다. 이때 최이가 스스로 자랑하여 말하기를
“다시 오늘과 같은 날이 있을까?”라고 하였다. 이렇듯 최이는 연회하고 놀기를 즐겨서 무시로 모여서 술을 마셨다. 어느 때는 3품 이상을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연회를 배설했고 혹은 재상들과 문무관 4품 이상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하여 연일 노래 부르고 풍악을 잡혀서 밤중이 되어야 파하는 일도 있었다. 어느 때 재추들과 장군들 도합 46명을 초대해서 연회를 배설하였는데 술이 한창 돌자 어사 중승인 장군 임재(林宰)가 술잔을 잡고 광대 차림을 하고 춤을 추었다. 보는 사람들이 야비하게 여겼다.
또 양부(兩府)와 장군들을 초대하여 무한히 즐기면서 악사(伶人)들에게 당악(唐樂)을 연주시키고 있을 때 하늘에서 별안간에 천둥 번개가 일어났다. 최이가 공포를 느끼고 중지시켰다.
최이는 36년에 죽었는데 조정에서는 3일간 철조(輟朝)하고 광렬(匡烈)이란 시호를 주었다. 장삿날에는 의식이 심히 성대했으며 후에 강종(康宗)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최이는 적자가 없고 기생첩 서련(瑞連)의 몸에서 만종(萬宗)과 만전(萬全) 형제를 낳았는데 당초에 최이가 병권을 김약선(金若先)에게 전해 줄 생각을 가지고 두 아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둘 다 송광사(松廣社)로 보내서 삭발시키고 선사(禪師) 칭호를 주어 최만종은 단속사(斷俗寺)의, 최만전은 쌍봉사(雙峰寺)의 주지로 있게 했다. 둘이 다 무뢰한 중(僧)을 모아서 문도(門徒)로 만들고 오직 재산 늘이는 것으로 일삼아서 금과 비단이 누거만으로 되었으며 경상도에 축적한 쌀만 해도 50만 석에 달하였다. 그들은 이 쌀을 대여하고 변리를 받았는데 추수가 시작되면 성화 같이 독촉하여 혹독하게 받아들였으므로 백성들에게는 낟알이 남지 않았고 따라서 늘린 조세를 자주 못바치게 되었다. 또 문도(門徒)들은 각처의 큰 절에 웅거해서 세를 믿고 제멋대로 횡행했으며 안마와 의복 장식이 모두 달단을 모방했고 서로 관인(官人)이라고 부르면서 유부녀를 강간하거나 혹은 역마를 제 것처럼 타고 다녔다. 또 주, 현 관리를 멸시하고 기만하였으며 기타의 승도(僧徒)들도 살찐 말을 타고 좋은 의복을 입고 만종, 만전의 제자라고 거짓말하며 도처에서 주민들의 재산을 침해하고 불의한 행위를 하였으나 각처 주, 현에서는 무서워서 감히 간섭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해서 형부상서 박훤(朴暄)이 최이에게 진언하기를
“지금 북방의 강병이 매년 침입해서 인심이 동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은혜와 위신으로 위무해도 오히려 무슨 변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는데 이제 두 선사(禪師)의 문도들이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여 참으로 큰 원망을 사고 있다. 만약 남녘 땅이 소요해지고 북방의 강병이 졸지에 침공한다면 서로 호응하여 변고가 생길 염려가 있다”라고 말했다. 최이가 이 말을 듣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경상도 순문사 송국첨(宋國瞻)이 편지를 보내 같은 내용의 말을 하였으므로 최이가 박훤에게 말하기를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라고 하니 박훤이 말하기를
“공이 만약 두 선사를 소환하고 순문, 안찰사에게 명령하여 무뢰 승도들을 가두어서 민심을 위무하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즉시 어사 오찬(吳贊)과 행수(行首) 주영규(周永珪)를 쌍봉과 단속에 보내서 있는 돈과 곡식을 모두 임자들에게 반환해 주고 빚문서를 불사르고 문도들 중에서 악행한 놈을 잡아 가두었으므로 국내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경축했다.
만종과 만전이 서울로 와서 그의 누이인 송서의 처와 함께 최이에게 울면서 호소하여 말하기를
“아버님이 생존하실 때에도 이처럼 핍박하는데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 형제는 언제 죽을 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니 최이는 후회하고 도리어 박훤이 자기 부자를 이간시켰다 하여 그를 흑산도(黑山島)로 귀양 보내고 송국첨을 동경 부유수(東京副留守)로 강직시키고 문도들을 모조리 석방했으며 만전을 환속(還俗)시켜서 최항(沆)으로 개명케 했다.
최항은 첫 벼슬로 좌우위 상호군 호부상서(左右衛上護軍戶部尙書)를 했는데 종친들과 재상들이 모두 그 집으로 가서 축하하였다. 최이는 대제(代制) 임익(任翊)과 수서 시랑(授書侍郞) 권위를 붙여 최항에게 예의 범절을 습득시켰다. 그리고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최항의 벼슬을 올리고 가병 5백여 명을 나누어 주었다.
최이가 병석에 눕게 되자 최항은 군대를 데리고 부(府)로 들어갔다가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즉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최이가 죽으니 지 이부사 상장군 주숙(周肅)이 야별초(夜別抄)와 내외 도방(內外都房)을 영솔하고 정권을 다시 왕에게로 돌릴 생각을 가지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전전(殿前) 이공주(李公柱), 최양백(崔良伯), 김준(金俊)등 70여 명이 최항에게로 넘어갔으므로 주숙도 최항에게 붙고 말았다.
최항은 합번(合番)의 호위를 받으면서 2일간 상복을 입고 제복(除服)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그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제 아비의 여러 첩들을 간음하고 있었다.
왕은 최항에게 은청광록대부 추밀원 부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 태자빈객(銀靑光錄大夫樞密院副使史兵部尙書御社大夫太子賓客) 벼슬을 주었고 이어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를 겸하게 했으며 또 교정별감으로 삼았다. 최항은 지 추밀 민희(閔曦)와 추밀 부사 김경손(金慶孫)이 여러 사람의 인심을 얻고 있는 것을 꺼리어 그들을 섬으로 귀양 보냈으며 또 좌승선 최환(崔恒), 장군 김안(金安), 지유 정홍유(鄭洪裕)와 최이의 첩 30명을 귀양 보냈다.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나의 아버지가 등극한 때부터 내가 즉위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진양공 최이가 곁에서 보필(輔弼)하였으므로 온 나라가 그를 부모처럼 우러러보더니 지금에 갑자기 세상을 버리니 내가 의지하고 신뢰할 곳을 잃었다. 그런데 그 아들 추밀원 부사 최항이 대를 이어 진정(鎭定)하니 최항의 벼슬을 뛰어올려 상(相)의 직위를 준다”라고 하였다.
그 다음해에 왕이 최항의 모친에게 정 안택주(靜安澤主) 칭호를 추증했다.
최항은 무당들을 성 밖으로 내쫓았다.
최항은 교정별감의 공문으로 청주(淸州)의 설면, 안동(安東)의 사사(璽絲), 경산(京山)의 황마포(黃麻布), 해양(海陽)의 백저포(白紵布) 등의 여러 가지 별공(別貢)과 금주(金州), 홍주(洪州) 등지의 어량선세(魚梁船稅)를 감면하고 또 각 도의 교정수획원(敎定收獲員)을 불러들이고 그 임무를 안찰사에게 위임하는 등으로 인망을 거두었다.
전에 최이가 나득황(羅得璜), 하공서(河公敍), 이경(李瓊), 최보후(崔甫侯)를 선지사용별감(宣旨使用別監)으로 임명하여 각 도(道)로 파견했는데 이 자들이 제각기 가렴 주구를 일삼아서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는바 최항은 칭찬을 사기 위해서 그자들을 모두 다 파면했다. 그러나 몇 해 안 지나서 다시 임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통분하고 한탄했다.
왕은 조서를 내리어 최이의 식읍 진주의 세포(稅布)와 요공을 녹전차로 운반해서 직접 최항의 집에 바치라고 지시했으나 최항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루는 최항이 갑옷을 입고 군사를 데리고 장봉택(長峰宅)으로부터 말을 달려서 견자산(見子山)에 있는 진양부(晋陽府)로 이사하였는데 동편 협문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아마 사람을 무서워한 것이다.
최항의 전처는 대경 최온의 딸이었으나 병이 있어서 버리고 좌승선 조계순(趙季珣)의 딸을 재취했는데 왕은 견룡 중금 도 지 순검(牽龍禁都知巡檢), 백갑(白甲)과 내시다방위(內侍茶房衛)에게 명령해서 어좌 견여(御座肩與)와 등촉(燈燭)을 보내 주고 또 황금 경대와 화장 용구를 주었으며 여러 종친과 재상 고관들도 모두 금, 은과 폐백을 선물 주고 축하의 뜻을 표시했다.
왕이 명령하여 최충헌의 화상(眞影)을 창복사(昌福寺)로 옮기고 최이의 화상을 선원사(禪源社)로 옮겼는바 참상(參上) 참외(參外) 별감과 문무관이 각각 20명이 길잡이로 따라갔다. 이것은 태조의 화상을 옮길 때의 의장과 같은 것이었다.
최항이 중으로 있을 때 보주 부사(甫州副使) 조염우(趙廉右)와 도강 감무(道康監務) 박장원(朴長源)에 대한 악감이 있어서 정권을 잡자 그들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시어사(侍御史) 이선이 평소부터 그 두 사람과 친근한 사이였으므로 이선이 경상도 안찰사로 되었을 때 고성(固城)에서 두 사람을 불러 가 연회를 열었다. 이때 현령 권신유(權信由)도 참석했다. 그런데 후에 중(僧) 한 놈이 권신유를 최항에게 무고하기를
“이선과 권신유가 조염우 등을 가만히 불러다가 반란을 모의했다”라고 하였으므로 최항은 이선 등 4명을 강물 속에 던져 죽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슬퍼했다.
왕은 최항이 중성(中城)을 축성한 공로가 있다 하여 문하시중으로 임명했다. 또 진양후로 봉하고 부(府)를 설치해 주었으나 최항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루는 달(月)이 상상(上相)을 범하였으므로 사천대(司天臺)에서 왕에게 보고하기를
“달이 상상을 범하였는데 점(占)에 일으기를 임금에 우환이 생긴다 하였습니다. 상상이 침범당하면 난신(亂臣)이 생겨 신하가 임금을 대신합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왕이 장차 몽고 사신을 마중하러 제포궁(梯浦宮)으로 가려 하였으므로 사천대에서는 왕이 그 행차를 정지하고 신변을 보살피라는 의도였다. 최항은 밀봉한 그 보고문을 보고 불쾌히 여겨서 어사대를 사촉하여 사천대가 성변(星變)에 대하여 허망한 보고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탄핵하게 하고 판 사천대사(判司天臺事) 최윤단(崔允旦)과 태사승(太使丞) 오안거를 파직시켰다.
최항은 지난 때에 계모 대씨(大氏)가 김약선의 아들 김미를 도와 주고 자기 편을 들어 주지 않아서 깊이 원한을 품었던 까닭에 대씨의 택주(澤主)란 작위를 박탈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야별초 황보 준창(皇甫俊昌) 등을 시켜서 대씨의 전남편의 아들인 장군 오승적(吳承績)을 바다에 던져 죽이게 했으나 마침 캄캄한 칠야였고 또 조수가 퇴조되는 때라서 오승적이 살아 나와서 머리를 깎고 개골산(皆骨山)으로 숨어 들어가 있으면서 모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집 종(家奴)이 밀성(密城)까지 와서 비밀을 누설했으므로 부사(副使) 이서(李舒)가 듣고 최항에게 알렸더니 최항은 대노해서 오승적을 잡아다가 바다에 던져 죽이고 황보 준창 등 6명을 목 베어 죽였다. 대씨는 섬으로 귀양 보냈다가 독약을 먹여 죽이고 대씨의 족당과 노비 70여 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그리고 이서는 그 공으로 군기감(軍器監)으로 특별 진급되었다.
최항은 참언(讒川)을 잘 믿고 듣는 까닭에 그저 사감(私憾)이 있으면 반란을 음모한다고 무고(誣告)해서 상을 타 먹었는데 막상 국문해 보면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최항은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서 김경손(金慶孫)을 바다에 던져 죽였는데 그것은 오승적의 사돈(姻親)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을 남도(南道)로 파견해서 유배된 사람들의 과반수를 바다에 던져 죽였다.
주숙(周肅)의 본명은 주영뢰(永賚)이고 그의 천성이 덜렁대고 허풍선이었으나 최이의 동서로 되어서 심복 노릇을 했다. 매양 참소(讒訴)가 있으면 최이는 반드시 그에게 위임해서 처리했는데 주숙은 최이의 뜻을 맞추느라고 진상은 규명치 않고 죽였으며 또 최이의 지시에 의해서 교위(校尉)를 감선(監選)하였을 때는 뇌물의 다소에 의해서 선발했으므로 조정 내외에서 이를 갈고 있었다. 최이가 죽은 후에는 선참으로 자기 편에 붙었다 하여 최항은 대단히 후하게 대접해 주고 일일이 그에게 자문(咨問)하였다. 그런데 최항이 견자산(見子山) 집으로 이사할 때 주숙에게 알리지 않아서 비로소 이때부터 서로 의심하고 꺼리게 되었다. 최항은 낭장 임경(林庚)을 파견해서 주숙을 압송하여 섬으로 귀양 보내다가 웅천(熊川)에서 바다에 던져 죽였는데 주숙은 장군 김효정(金孝精)이 허구, 중상한 까닭이라고 억측하고 죽을 무렵에 임경에게 말하기를
“김효정이 나와 함께 정권을 임금에게 복귀시킬 음모를 했다”라고 하였다. 임경이 돌아가서 그 말을 최항에게 고하니 최항이 김효정을 귀양 보냈다가 이어 죽였다. 그리고 주숙의 사위 장군 최종필(崔宗弼)과 나주 부사(羅州副使) 이균을 귀양 보냈다.
이 해에 왕은 최항을 후(侯)로 봉하고 부(府)를 설치할 것을 명령했으나 최항은 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39년에 이현(李峴)이 몽고로 사신이 되어 갔을 때 최항이 이현에게 말하기를
“저편에서 만약 출륙(出陸)에 대하여 묻거든 금년 6월에 나온다고 대답해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현이 몽고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동경 관인(東京官人) 아모간(阿母侃) 통사(通事) 홍복원(洪北源) 등이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할 것을 청원해서 황제가 이미 허락했다.
이현이 도착하니 원나라 황제가 묻기를
“너희 나라는 출륙했는가?”라고 하였으므로 이현은 최항의 말과 같이 대답하였더니 황제는 또 묻기를
“너희들을 이곳에 억류하고 다른 사신을 보내서 조사해 보고 거짓이 판명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대답하여 이현은 말하기를
“내가 정월에 길을 떠났는데 그때 벌써 승천부(昇天府) 백마산(白馬山)에 궁실과 성곽(城廓)을 건설하고 있었소. 내가 어찌 허망한 대답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이현을 억류하고 드디어 다가(多可) 아토(阿土) 등을 파견하면서 비밀히 명령하기를
“네가 그 나라에 도착해서 국왕이 육지로 마중 나오면 비록 백성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더라도 무방하다. 그렇지 않으면 속히 돌아오라. 너희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서 군대를 보내서 토벌하겠다”라고 하였고 이현의 서장관(書狀官) 장일(張鎰)이 다가를 수행하여 오면서 비밀리에 그것을 알고 왕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이에 대하여 왕이 문의하니 최항은 대답하기를
“상감이 경솔히 강화 밖으로 나갈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며 재상 대신들도 모두가 최항의 뜻을 맞추어 주고자 반대하였으므로 왕은 그 의견에 따라서 신안공(新安公) 전(佺)을 내어 보내서 다가 등을 마중하여 제포관(梯浦館)으로 청해 들인 후에 가서 보았는데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다가 등은 왕이 황제의 명령에 복종치 않았다는 이유로 노해서 승천관(昇天館)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식견 있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최항이 천박한 식견으로 국가 대사를 그르쳤으니 금후 몽고병이 반드시 침공할 것이다”라고 했다. 얼마 안 가서 과연 몽고병이 와서 고을들을 도륙하고 지나는 곳마다 잿더미만 남겼다.
40년에 왕은 문하시중 판 이부 어사대사(門下侍中判史部御史臺事) 벼슬을 주었으며 최항은 자기 집에서 사은(謝恩) 요배(遙拜)했다.
또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내가 즉위한 지 41년이 되었는데 병자 신묘년 이래 이웃의 적이 침입해서 환란이 계속되었다. 그 환란 가운데서 전적으로 진양공 최이의 힘에 의존하여 유지해 왔다. 그는 충성을 다하여 사직을 보위하고 전략을 세워 사변을 제어하였으며 심지어는 몸소 승여(乘與)를 받들고 바다를 건너 국도를 옮겼다. 그 공로와 업적으로써 사직을 편안히 모시게 되었으니 자손 만대에 그 공훈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 아들 문하시중 최항이 가업(家業)을 이어 받아 시세에 호응하여 임금을 높이 받들고 백성을 보호하였다. 그리고 법령을 일신하여 중흥(中興)을 이룩하였다. 그 공훈은 실로 막대한 바 있다. 마땅히 특별히 은사하여 전국의 참수(斬首) 교수(絞首) 형(刑) 이외의 죄수는 특사할 것이며 최이에게 작위 칭호를 더 추증하고 최항은 후(侯)로 봉하고 부(府)를 세워 주며 그의 모친에게는 봉작(封爵)을 가하여 준다”라고 하였다.
최항은 구요당(九曜堂)을 대궐 서쪽에 창건했는데 낙성되자 왕이 가서 보고 최항의 친시(親侍) 20명에 대하여 초입사(草入仕)로, 구사(丘史) 20명과 진배파령(眞拜把領) 20명에게도 초입사로 만들었다. 공사 감독판 상장군 박성자(朴成梓)의 아들 1명에게 진배파령을 허여했으며 공쟁이들에게는 각각 공로에 따라 상을 주었다.
천도한 이후 몽고는 출륙(出陸)을 독촉하면서 군대를 풀어 놓아서 침략과 약탈을 감행하여 왔다. 영녕공(永寧公) 왕준이 몽고군 병영에서 최항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르기를
“지난해 가을 황제가 국왕이 물을 건너와서 사신을 영접치 않은 것을 노엽게 생각하고 군대를 발동하여 문죄(問罪)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황제에게 ‘내가 황제의 명령을 가지고 본국을 설복하여 옛서울로 국도를 다시 옮기며 자손 만대 길이길이 번병(蕃屛)의 직분을 지키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더니 황제는 나에게 말하기를 ‘너는 너희 나라 재신(宰臣)들과 같이 너희 나라에 돌아가서 나의 명령을 가지고 설복하여 출륙케 하라’라고 하였다. 내가 6월 초하루에 야굴 대왕(也窟大王)에게로 와서 그 말을 하였더니 군대와 함께 동시에 출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금 야굴 등 17명의 대왕(大王)과 태자들이 각각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몽고족, 한족, 여진족, 고려 사람들을 뽑아 가지고 남북계(南北界)에서 둔전(屯田)을 하고 있으며 몽고의 정병(精兵)을 가지고 국내 산성(山城)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황제가 대관인(大官人)에 명령하기를 ‘만약에 고려 국왕이 마중 나오거던 즉시 퇴병하라!’라고 하였으니 지금 나라의 운명이 이 한 번 결정에 달려 있다. 만약 출영(出迎) 못하겠으면 모름지기 태자(太子)와 안경공(安慶公)을 파견하여 출령케 하라! 그러면 반드시 철병할 것이며 나라가 유지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될 것이고 당신도 또한 장구히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상책이다. 이래도 만약 철병치 않거든 나의 일문을 멸족하라! 바라건대 의심하지 말고 잘 처리하여 이 시기를 잃고 뒷날에 후회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현도 몽고군과 함께 와서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내가 2년 동안 억류당하여 있으면서 그 동정을 살펴보니 전에 듣던 바와는 판이하다. 그들은 살인을 즐기지 않으며 생명을 아낀다. 또 작년 이래 조서로써 부과된 조건은 그리 곤란한 것이 아닌데 어째서 출영하지 않는가? 황제가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나의 애호하는 뜻을 모르는 까닭에 군사를 보내 문죄(問罪)한다’라고 하였소! 우리 나라의 운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한두 명을 내보내서 항복하는 것이 그다지 아까운가? 이제 태자(東宮)나 안경공(安慶公)이 출영하여 청원한다면 퇴군할 듯도 하니 당신의 좋은 처결을 바란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재추 회의에서 모두 다 ”출영이 옳다”라고 말하였으나 최항이 말하기를
“춘추의 조공도 궐한 바 없는데 전에 3차에 걸친 사신일행 3백 명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출영하여도 아마 무익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태자나 안경공(安慶公)을 잡아가지고 성 밖에 와서 항복을 강요하면 어떻게 처리하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그제는 모두 말하기를
“시중(侍中)의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출영 문제는 중지되었다.
41년에 최항은 자기 집에 각 고관들을 초대하고 연회를 하면서 격구(擊毬)를 구경했는데 마별초(馬別抄) 중에는 금으로 안장의 아래끝을 장식하고 금엽(今葉)으로 만든 꽃을 말 머리와 꼬리에 꽂은 자도 있었다.
최항은 일찍이 하루 동안에 여러 차례 종친들과 재추들, 승선 문, 무 4품 이상의 관원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바 이때부터 연회가 때 없이 벌어졌다.
그 다음해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옛날에 주공 단(周公旦)과 소공 석(召公奭)이 주나라(周)를 도왔고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한나라(漢)를 도왔는데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지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진양공 최이는 나의 선친이 왕위에 있을 때에 그리고 내가 즉위한 이후 충성을 다하여 사직을 보위했고 보좌의 사명을 다했다. 신묘년에 변방의 장수가 국토를 수비 못해서 몽고병이 침입했을 때에는 현명한 전략을 홀로 결정하고 뭇사람의 시비를 물리치면서 몸소 승여(乘與)를 받들고 터를 잡아 천도하였다. 그리고 수년 사이에 궁궐과 관아를 모두 건설했으며 국법을 진흥시켜 우리 나라를 다시금 바로잡히게 하였다. 또 역대로 전해 내려오던 진병 대장경(鎭兵大藏經) 판각이 적병에 의하여 모두 불타 버리고 나라에서는 사고가 많아서 다시 만들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최이는 도감(都監)을 따로 두고 자기 재산을 바쳐서 판각 조각을 거의 절반이나 완료하여 나라에 복을 주었으니 그 공적은 잊기 어렵다.
그 아들 시중(侍中) 최항은 가업(家業)을 이어 임금을 돕고 국난을 제어하였으며 대장경에 대하여는 재물을 내놓고 역사를 감독해서 완성하고 봉납(奉納)의 식전을 거행함으로써 온 나라가 복을 받게 하였다. 또 수도 요해지이 병선을 배치했고 또 강 밖에 궁궐을 건설하였으며 강화 도읍의 중성(中城)을 축성함으로써 견고한 요새를 더욱 견고히 하였으니 만대에 길이 그 힘을 입게 될 것이다. 황차 태묘는 초창이라 미비된 것이 많아서 실로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본의에 어긋나서 나의 마음이 불안했는데 최항은 문객 박성자를 시켜서 태묘 건축을 감역했고 모든 비용을 다 자기 재산에서 지출하여 며칠 사이에 준공되니 그 제도가 적절하다. 이것은 실로 세상에 드문 큰 공이다. 내가 심히 가상히 여겨 유사(有司)에 명령해서 최항에게 부(府)를 세워 주고 식읍을 더 주며 그 부모에게 관작(官爵)을 더 추증하고 두 아들의 직품을 올려 주노라!”라고 했다. 박성재 이하 공쟁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그러나 최항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목차: 최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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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구에 최항은 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되어 국사(國史)를 감수(監修)했다.
새로 급제(及第)한 곽왕부(郭王府) 등이 최항을 방문하니 최항은 누상(樓上)에 올라서 화주(花酒)를 주었다.
43년에 최항에게 제중 강민 공신(濟衆康民功臣) 칭호를 주었다.
전 서해도 소복별감(蘇復別監) 송극현은 낭실 3백80 곡(斛)을 거두어 최항에게 뇌물 주고 즉시로 어사(御史)로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낭실 어사’라고 별명 지었다.
전 학록인 정성(鄭珹)이 최항에게 참소하기를
“하동(河東) 감무 노성(盧成)이 그 고을 사람 이규(李珪) 이창(李昌)과 결의 형제가 되어 협주 부사(陜州副使) 설인검(薛仁儉), 남해 현령(南海縣令) 정고(鄭皐), 급제 유여해(兪汝諧), 중명취(明就) 등을 불러다가 일상 술을 마시며 즐길 뿐만 아니라 국정을 비방했다. 그리고 그들이 연회할 때에는 “천자지 문 제 빈 막입(天子之門諸賓莫入-천자의 문이라 다른 손님은 못들어온다는 뜻)”이라는 여덟 자를 각 문에 써 붙이고 외객은 못오게 하고 각각 마음 속 회포를 시로써 주고 받고 했는데 그 중에는
“어진 선비는 가슴 치며 슬퍼하는 날이며
영계 새끼들은 득의해서 노래 부르는 때로다” (賢土槌胸日 倡雛得意秋)라는 시구(詩句)가 있다”라고 했다. 최항은 노해서 노성, 이규, 이창을 저자에서 목 베어 죽이고 설인검, 정고 등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 그래서 그때의 사람들이 정성을 사람을 잡아 먹는 놈(食人者)이라고 손가락질했다.
44년에 최항의 병이 위독하였으므로 왕이 옥에 가둔 죄수를 석방하였다.
최항은 병든 몸을 일으켜 후원의 작은 정자에 올라
“도화 향기는 만호 장안을 감싸 들고
비단 장막은 십 리 벌판에 구름인 양 나부끼는데
난 데 없는 모진 광풍 이 속에 불어 들어 붉은 꽃잎 휘몰아다가 장강을 건너가네!”라는 시 한 수를 읊고 침실로 돌아가서 갑자기 죽었다.
왕은 최항에게 진평공(晉平公)으로 추증했다.
최항은 당초에 중(僧)으로 있을 때 송서의 여종과 간통해서 최의를 낳았는데 본처에게는 자식이 없어서 최의가 대를 잇게 되었다. 최의의 용모가 아름답고 양손에 희미한 금색(金色)이 보였으며 천성이 침묵을 좋아하고 수줍어했다.
최항은 경림(景淋)과 사예기(師芮起)를 시켜 시(詩)와 글씨를 가르치고 권위와 임익(任翊)을 시켜 정사를 가르치고 정세신(鄭世臣)을 시켜 예법을 가르쳤다. 왕은 최의를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로 임명하고 붉은 띠를 주었다.
일찍이 최항이 선인열(宣仁烈)과 유능(柳能)에게 최의를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잘 보도(輔導)하여 성취한 후 가업을 계승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대들의 덕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최항이 병들자 선인열과 유능을 불러서 그들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대들이 이 자식을 보호하여 주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라고 하였다.
최항이 죽자 전전(殿前) 최양백(崔良白)이 최항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칼을 집고 시비들을 꾸짖어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선인열과 더불어 모의한 후 최항의 말을 문객들에게 전하였다. 대장군 최영(崔瑛), 채정(蔡楨)과 유능 등이 야별초, 신의군(神義軍), 서방(書房) 3번(番), 도방(都房) 36번을 집합시켜 최의를 옹위한 후 최항의 사망을 발표했다.
왕은 즉시로 최의에게 차장군(借將軍) 벼슬을 주고 교정별감(敎定別監)으로 임명하였으며 조정의 백관이 모두 그 집으로 와서 최항의 죽음을 조상하고 최의의 출신을 축하하였다.
최항의 애첩 심경(心鏡)은 용모가 아름답고 영리하였는데 최의가 일찍이 사통하였으며 최항이 죽는 날로 데려다 자기 첩으로 삼았다.
최항은 본래 어미가 기생이었고 최의도 어미가 천인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책이나 문서를 읽다가 ‘창기니 천비’니 하는 문구가 나오면 꼭 휘(諱-꺼리고 숨기는 것)했다. 그래서 원수진 사람이 있으면 최의에게 당신의 외가가 천하다고 했다고 참소하기만 하면 최의는 모조리 죽였다.
최의는 나라의 창고 문을 열고 기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해 주고 여러 영(領)과 부(府)의 군사들에게 각각 30곡(斛)씩 주었다.
왕은 최의에게 추밀원 부사 판 이병부 어사 대사(樞密院副使判史兵部御事臺事)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리고 최의는 연안택(延安宅)과 정평궁(靖平宮)을 왕부(王府)에 다시 귀속시키고 자기 집 쌀 2천 5백70여 석을 내장택(內莊宅)에 바치고 포백(布帛), 기름, 꿀을 태부시(太府寺)에 바쳤으며 또 그 해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자기 집 창고에서 식량을 내어 권문(權務), 대정(隊正), 체장(遞仗)과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교위(校尉) 이하의 군인과 동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왕은 그 후 곧 추밀원 부사 벼슬을 다시 주었으나 최의는 역시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므로 고쳐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임명하였다.
그때에 민칭이란 자가 몽고로부터 도망쳐 돌아와서 그가 차고 있던 금패를 최의에게 바치고 말하기를
“내가 몽고에 있을 때 대신들이 비밀히 하는 의논을 들었는데 금후 다시는 동방을 정벌하지 않겠다고 합디다”라고 하였다. 최의는 기뻐서 그에게 집과 미곡 의복을 주었고 또 산원 벼슬까지 주었다.
45년에 최의는 장군 변식(邊軾)과 낭장 안홍민(安洪敏), 산원 정한규(鄭漢珪)를 강화 수확사(江華收獲使)로 임명하고 욕심대로 백성을 수탈해서 원한의 목소리가 자자했다.
옛제도로는 노비(奴婢)는 비록 큰 공이 있어도 돈과 포백으로 상 주고 관직과 작위는 주지 않았는데 최항이 처음으로 그의 종 이공주(李公柱), 최양백(崔良伯), 김인준(金仁俊)을 별장으로, 섭장수를 교위로, 김승준(金承俊)을 대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종들이 최의에게 말하기를
“이공주는 한 몸으로 3대를 섬겨 연로하고 공이 있으니 참직(參職)을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그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다. 노예에게 참직을 준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최의는 나이가 젊고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성품이 용렬해서 어진 선비들을 예의로써 대우할 줄 몰랐으며 그의 친신자(親信者)들인 유능, 최양백 따위의 무리는 모두 용렬하고 경박하였다. 그의 장인 거성(巨成) 원발(元拔)과 애첩 심경은 안으로는 참소나 하고 밖으로는 세도를 부리면서 끝없이 재물을 탐내었다. 또 그 해에 기근이 들었으나 창고의 좁쌀을 대여하지 않아서 인심을 크게 잃었으며 또 송길유(宋吉儒)를 강직시킨 후로는 유경(柳璥), 유능, 김인준 형제 등과도 교분이 악화되어 서로 만나지도 않았다.
신의군(神義軍) 도령(都領) 낭장 박희실(朴希實)과 지유(指諭) 낭장 이연소(李延紹)가 비밀히 유경, 김인준, 김승준, 이공주, 장군 박송비(朴松庇), 도령 낭장 임연(林衍), 대정 박천식(朴天湜), 별장 동정(同正) 차송우(車松祐), 낭장 김홍취(金洪就), 김인준의 아들 김대재(大材), 김용재(用材), 김식재 등과 말하기를
“최의는 옳지 않은 소인들을 친근히 하고 참소를 잘 믿고 남을 잘 꺼리니 일찍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가는 우리들도 아마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4월 8일 연등회(燃燈會)를 계기로 거사(擧事)하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중낭장 이주(李柱)가 그 일을 알고 견룡 행수(牽龍行首) 최문본(崔文本), 산원 유태(庾泰), 교위 박의(朴瑄), 대정 유보(兪甫) 등과 더불어 서면으로 최의에게 밀고하였다. 또 최양백은 김대재의 장인인바 김대재가 박희실 등의 밀모를 최양백에게 고하니 최양백은 거짓으로 응낙하는 척하고는 그것을 최의에게 고발했다. 그래서 최의는 급히 유능을 불러다가 계책을 의논하였다. 그때는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유능은 말하기를
“어두운 밤에 어찌 하기 어려우니 청컨대 글로써 야별초 지유 한종궤(韓種軌)에게 지시해서 내일 새벽에 이일휴(李日休) 등을 불러 군사들을 동원하여 김인준 등을 토벌해도 늦지 않을 것이요”라고 하니 최의도 그것을 옳게 여겼다. 그런데 그때 김대재의 처가 곁에서 듣고 그것을 김대재에게 고하였다. 김대재는 김인준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일이 급해졌으니 속히 손쓰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김인준은 제자들을 데리고 신의군으로 가서 박희실, 이연소를 보고 일이 누설되었으니 우물쭈물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어 전일에 공모한 사람들과 별장 백영정(白永貞), 대정 서정(徐挺), 이제(李梯), 임연(林衍) 등을 소집했다. 그리고 임연과 지유 조문주(趙文柱), 오수산(吳壽山)을 시켜서 한종궤를 잡아 죽이고 또 지유 서균한(徐均漢) 등을 불러서 사청(射廳)에 삼별초를 모아 놓고 사람을 시켜서 거리로 돌아다니며 “지금 공(公-최의를 가리킴)이 죽었다”라고 외치게 했더니 듣는 사람이 모두 모여 왔다. 유경도, 박송비 등과 함께 왔으므로 김인준이 말하기를
“이 같은 대사에 주장하는 사람이 없을 수 없으니 대신으로서 위신과 덕망이 있는 분을 추대해서 뭇사람을 영도하게 하자” 라고 하고 곧 추밀사 최온을 초청했더니 최온이 왔으며 또 박성자도 맞아다가 의논했다. 김인준은 최양백을 불러 왔는데 미처 마루에 오르기도 전에 별초병이 횃불로 입을 지지고 드디어 죽였으며 또 임연은 이일휴를 그 집에서 죽였다.
김인준은 최의의 집 문지기 군사에게 밤 시각을 알리지 말라고 해 놓았다. 광장(廣場)에서 대오를 정비하면서 관솔불을 대낮같이 켜 놓고 뭇사람들이 떠들었으나 마침 짙은 안개로 해서 최의의 가병(家兵)은 한 명도 알지 못했다. 동틀 무렵에 야별초가 최의의 집 벽을 허물고 들어갔는데 원발은 장사라 사변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놀라 일어나서 칼을 빼 들고 문을 막아 서니 군사들이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원발은 혼자서 이기지 못할 것을 깨닫고 최의를 업고 도망쳐 피난하려 했으나 최의가 살이 찌고 무거워 그렇게 못하고 부축해서 옥구에 올려놓고 되돌아와서 문을 막고 섰다. 이때 오수산이 뛰어들어오면서 내리친 칼이 원발의 이마에 맞았다. 그래서 그는 담을 넘어서 도망갔는데 별초가 추격하여 강안에서 죽였으며 최의의 유능을 수색해서 모두 죽였다. 그리고 유경, 김인준, 최온이 궁중으로 들어가니 백관들이 모두 태정문(泰定門) 밖에 모였다.
양부(兩府)와 유경 김인준이 편전(便殿)으로 가서 정권을 다시 임금에게 바쳤다. 왕은 최의의 창고를 열고 곡식을 꺼내어 태자부(太子府)에 2천 곡(斛)을 위시하여 여러 종친, 재추(宰樞)들, 문무 백관들로부터 서리에 이르기까지의 관리들, 군졸들, 조예들 동리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는바 최저가 3곡이었다.
또 여러 종친 재추로부터 권무(權務), 대정에 이르기까지 포목과 비단을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고 최의가 기르던 말은 문무관 4품 이상에게 나누어 주었다. 3품관에게는 더 주었다.
그리고 낭장 박승개(朴承盖)를 경상도로, 내시 전종(全琮)을 전라도로 보내서 최의와 만종의 노비(奴婢), 전장(田莊), 은백(銀帛), 미곡(米穀)을 몰수했다.
재추(宰樞)들이 왕에게 말하기를
“최충헌은 극악한 대죄인이요 최의는 국권을 전제하고 지시 명령을 독단으로 한 자이니 마땅히 그의 화상(圖形)을 삭제하고 그의 묘정(廟庭) 배향(配享)을 철폐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의견을 승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