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피이잉- 퍽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을 울리며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기괴하게 꺾어
들어오는 봉의 끝부분이 카슈베엘루울라 경의 턱을 무자비하게 가격하
였다. 카룰라는 동급의 바바리안들과, 또는 심지어 트롤급 이상의 몬
스터와 맞대결을 벌일 때도 이 정도의 타격은 별로 겪어 본 경험이 없
었기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룬의 쥐새끼들을 너무 하찮게 여겼구나. 전사여 너의 이름은
무엇인가?”
카룰라는 고통이 심한지 그렇지 않아도 험상궂은 인상을 더욱 험악하
게 일그러뜨리며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말을 뱉었다. 방금 전의 공격
은 생각보다 충격이 컸던 듯 카룰라의 왼쪽 입가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루나스 제7기병대장 루안이라고 하오만.
그래, 그 이름을 기억하마. 내 이태껏 네가 나약한 인간임을 감안하여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만 이제부터는 조금 다를 게다. 명복을 빌어라
, 인간... 우오오오-
평균적인 인간 몸집에 두 배쯤 될만한 거대한 말을 타고 있는 기골이
장대한 바바리안 전사는 말굽에 박차를 가하며 루안을 향해 짓쳐 들어
갔다. 말 두 마리와 마상의 전사들이 휘두르는 무기에 의하여 건조한
모래바람이 자욱하게 일고 있었다.
불칸 연방의 카슈베엘루울라 경이 룬 공국에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천
명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사유 능력이 왕성한 생명체 가운데 가장 무
력적 능력이 강한 바바리안 답게(트롤이나 오우거 등은 지적인 사유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므로 논외로 치고) 카룰라 경은 선전포고를 천명
한 당일 날, 룬과의 공식 중재 회의 장소였던 라임 성을 빠져 나와 부
러 하루의 유예기간을 룬 공국에 선사하였다. 만약 이러한 일이 인간
의 국가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공성전을 치르는 쪽이 매우 우둔하
다고 할 수 있겠으나, 바바리안들이 기습을 잘 하지 않는다거나 전쟁
에서 여유를 부리는 것은 그다지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것의 의미는 인간족들이 말하는 소위 ‘기사도’ 류의 생각은 아니
다. 말하자면 적에게 기회를 주고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은 ‘예(禮)
’가 아니라 우월감이다. 바바리안들이 다른 이종족을 무력적으로 얕
잡아 보고 우습게 여기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뿌리깊은 잠재적 의식
이었다.
여하간에 선전포고 바로 다음 날 새벽 0시부터 불칸의 파상적 공세는
바로 이루어졌다. 룬의 라임성 수성을 맡은 사람들은 기존의 방어 병
력 외에 베다교의 주신관 헤르탈로치와 최초에 중재회의를 맡기로 했
던 부신관 필리이와 그 수행기사 루안, 그리고 이들을 호위코자 대동
하였던 100여 명의 최정예 군사들이었다. 물론 라임 또한 여타의 국경
지대가 그렇듯 산발적 외침이 잦았던 탓으로 이곳의 병력들이 상시 준
비태세가 돼있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룬 측의 안일한 상상과는 달리 라임 성은 불칸의 수뇌부가 주
도하는 2만여 병력에 불과 나흘을 견뎌내지 못했다. 라임 성이 룬의
국경 지방을 지키는 방어선 중 최대규모의 성들 중 하나임을 감안하면
이 사실은 룬공국의 지도층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핫, 오른쪽이 비었다. 인간.”
카룰라 경이 휘두르는 장창은 엄청남 파공성을 울리며 보이지 않을 정
도로 빠르게 회전하며 루안의 몸통을 노리고 들어왔다.
‘탕타당탕당타다당’
무기끼리 부딪는 소리는 불꽃을 일으키며 연속적으로 타올랐다. 바바
리안의 최고권력자가 휘두르는 창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루안 역
시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5단으로 접혔던 너클을 순식간에 일자로
결합시키며 휘어 들어오는 창을 퉁겨내었다. 루안의 너클은 그 자신만
이 쓸 수 있는 무기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아예 그의 수족처럼 보였다
.
“크하핫, 즐겁구나. 네 놈이 휘두르는 그 괴상한 쇠막대기는 무어냐.
즐겁구나. 즐거워.”
‘퍼억’
카룰라 경이 너무 여유를 부린 것은 아니었을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
게 루안의 너클은 몇 단으로 분리되어 수 차례 꺾이면서 방어를 위해
무의식적으로 내민 카룰라의 창을 뱀처럼 타고 올라와 다시 한번 바바
리안의 이마를 강타했고 그 바람에 그의 투구가 날아가 버렸다.
순간 카룰라는 흠칫했다. 방어 무장이 안된 상태로 방금 전의 타격을
맞았다면 기절해 버렸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던 것이다. 잠깐의 순
간에 바바리안의 연방 대표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고 그 기분은 바
로 분노로 이어졌다.
“이런 쥐새끼 같은 인간 놈이 정말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내 네
놈의 팔뚝을 분질러서 네 놈 아가리에 처넣어 주마!”
그것은 단순한 욕지거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카룰라는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수많은 상대들을 자신이 했던 말처럼 잔인하게도 산 채로
상대의 팔을 뜯거나 찢어버리곤 했던 것이다.
“언제든지 와라.”
루안의 표정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그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목
숨이 오가는 실전에서도 실실거리며 전투에 임하던 평소의 모습이 절
대 아니었다.
라임성이 함락되기 하루 전,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을 실감한 베다교
의 대신관은 1차적으로 루안과 필리이를 대동하고 일부 병력을 철수할
것을 명하였다. 내용에 관계없이 헤르탈로치의 직계 하급 인사인 필리
이는 명을 따랐고, 루안 또한 그러했어야 함에 불구하고 그는 항명을
하였다. 감히 룬공국의 실제적 최고위급 인사에게.
루안이 주장한 것은 죽을 각오로 라임에서 항전하여 후속부대의 증원
을 받아 끝까지 국경선을 사수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냉정히 따지자
면 루안의 견해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어버린 오판이었다. 후속부대의
증원을 고려했다면 중재 회의단이 출발한 시점이나 바로 그 직후에 부
대가 이동 증편되었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수 십년간 전면전을 치르
고 있는 국가와 소소한 국지전을 제외하면 평화에 안주하고 있던 국가
의 차이다.
상황을 돌이키기엔 엎질러진 물이었다.
창대의 길이는 자신의 키처럼 2미터가 훨씬 넘으며(그 공격 범위와 사
정 거리가 엄청나다.)
창날만도 그 면적이 보통 인간의 몸통 만한 자신의 거대한 무기를 그
야말로 쥐새끼처럼 피하는 인간 기사 때문에 카룰라는 핏대가 올랐다.
그러면서도 바바리안은 비등한 적수를 만나서 자웅을 겨룰 때만이 느
낄 수 있는 투사 본연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바바리안족의 평균 수명이 160살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48세라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칸의 영웅은 정말 셀 수도 없는 숱한 전투를 겪어 온 백
전불굴의 투사였다. 나이 16세 때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지금은 룬 국
토 면적의 열 배가 넘는 광활한 불칸 평야를 평정한 그다. 투쟁에서
피가 끓고 투쟁에서 인생을 느끼며 투쟁에서 희열을 느끼는 전사의 피
.
‘퍽-, 콰악’
루안은 한 마리 포효하는 야수와도 같은 무한의 에너지원처럼 힘이 넘
치는 상대에게 시간이 갈수록 점차 체력적으로 불리할 것임이 피부로
느껴져 왔다. 역시나 바바리안의 영웅은 그가 겪어 보았던 여느 적들
과는 차원이 달랐다. 루안은 접는 횟수가 커질수록 변화하는 궤적과
그 살상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자신의 무기 너클을 5단으로 접고서
도 작금의 상대에게 커다란 부담감을 느꼈다. 그가 단독 대결에서 이
렇게 고통스러워 보기는 1년 전쯤에 신분을 알 수 없는 검은 도복과
복면의 떠돌이 검객을 만났을 때뿐이었다.
긴장이 미세한 순간이 풀렸는지 모른다. 불칸의 영웅은 타고 난 투사
였다. 카룰라는 루안의 너클을 고의로 몸에 맞으면서 순간 너클의 궤
적을 읽고 회수되는 무기의 끝을 붙잡아 버렸다. 루안은 크게 당황했
다. 몬스터가 아닌 이상에 자신의 무기를 몸통으로 받아내는 상대는
처음이다. 사람이라면 박살이 났을 것이다.
‘뼈가 끊어진 듯 아프구나, 젠장할’
바바리안은 루안의 무기를 홱 잡아챈다. 누가 힘으로 바바리안을 대적
할 것인가. 인간 기사는 순식간에 몸의 평형을 잃으며 균형이 적에게
급격하게 쏠렸다. 카룰라의 다른 쪽 손으로부터 섬광처럼 창이 날아왔
다. 루안은 찰나의 순간에 본능적으로 바바리안에게 당겨지는 방향으
로 몸을 날리며 붙잡힌 너클의 나머지 부분을 크게 꺾었다가 카룰라의
안면에 작렬시켰다. 바바리안의 창은 인간 기사의 왼쪽 다리 장딴지
부분을 스치고 지나 루안이 타고 있던 말을 두 동강 내버렸다.
‘털썩’
지면에 루안과 루안의 무기가 동시에 떨어졌다. 카룰라의 안면은 피범
벅이 되었으며 일시적인 경직 상태에 빠진 것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인간 기사로서는 그 짧은 순간이 천우의 기회였건만 연타를 가할 수
가 없었다. 간신히 무기를 추스른 것이 고작였을 뿐. 창이 스친 것일
뿐인데도 왼 다리에 절절한 고통이 밀려왔다. 두 명의 전사는 각각 마
상과 지면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서로를 타오르듯 노려보기만 했다.
룬공국의 수뇌부가 라임 성 사수를 포기하고 떠난 다음 날, 국경 수비
대는 겉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고 바바리안의 지도층은 극도로 기민
하게 사태를 처리했다. 역습을 방지하고자 대부분의 병력을 새로운 점
령지에 재빠르게 주둔시켰으며, 가장 발 빠른 전사들만을 선발하여 추
격대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간격은 급속도로
좁혀 들어갔다.
반면에 베다교의 대신관 또한 한 국가의 상징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매
우 현실적인 회피책을 강구해냈다. 만약 헤르탈로치가 그 자리에서 붙
잡힌다면 룬은 돌이키지 못하고 주저 않는 것이었다. 베다교의 대신관
은 퇴각 행렬을 일단 세 방향으로 분산 시켰다. 우선은 필리이가 이끄
는 소수의 병력을 ‘정령의 숲’ 방향으로 보냈고, 신관 자신은 가장
뛰어난 정예요원 몇 명만을 대동하고 최단거리의 도피 루트를 택했으
며, 마지막 남은 대부분의 병력을 루안에게 맡기고 후미를 지키게 하
였다. 예상대로 불칸의 추격대는 두 부류로 나뉘었고 크리슈나 대공이
필리이를, 트러그코니이크 카슈베엘루울라 경이 루안을 쫓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룬 측의 생각대로 편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쫓기는 삼
일 동안 루안은 정말이지 지옥 같은 악몽의 추격전을 겪었다. 불칸의
연방 대표는 매우 잔인하고 지능적으로 루안을 괴롭혔다. 절대 전력으
로 도망자들을 몰아치지 않았으며(물론 자신이 무너지면 대신관이 잡
히게 될 것을 아는 루안이 목숨을 걸고 추격대를 막은 때문이기도 했
지만) 몇 시간을 주기로 한 명씩 심각한 부상자를 만들기만 했다. 최
초에 부상자가 한 둘이었을 때, 루안은 여전히 전 인원을 이끌어 가려
했지만 그것이 바로 카룰라가 노린 것이었다. 추격의 간격은 점점 좁
혀져 갔고 위기를 깨달은 루안은 별 수 없이 부상자들을 냉정하게 내
칠 수밖에 없었다. 쫓기는 남은 병력은 점점 공포에 지쳐갔다. 그리고
추격 삼일 째, 루안의 부대는 32기에서 18기로 줄었고 쫓는 자들은 40
기를 헤아렸다. 마침내 루나스 제 7기병단장은 최후의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인간, 대단하구나. 내게 이 정도의 피를 흘리게 한 것은 드래곤을
제외하고 네 놈이 최초이다. 이제 결말을 보자꾸나.”
불칸 연방의 대표와 룬의 기병 대장 배후를 각각 지키고 있던 양쪽의
병사들은 두 영웅이 맞대결을 벌이던 처음부터 끝까지 숨소리도 죽여
가며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룬과 불칸 연방의 전
체적 전황에 어쩌면 기나긴 파급 효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카슈베엘루울라는 자신의 거대한 창을 오른쪽으로 느릿하게 휘둘러 정
면의 루안을 가리켰다. 제 7기병단장은 자신에게 명예를 가져다 준 너
클을 생애 최초로 6단으로 접어들고 가뿐 호흡을 들이키며 바바리안의
영웅을 똑바로 응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