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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가운데 공관복음이 아닌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계신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빛의 근원이시고 또한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였습니다.
생명과 빛으로 창조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독생자의 영광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이 땅에 왔습니다.
성전에 임재하신 그 영광으로 그 백성 곁에서
백성의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하고 완전하게 계시하였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는 아들의 사역,
그것은 곧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이었습니다.
테초에 로고스 곧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였습니다.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말씀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사역을 하나님과 동역하였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왔습니다.
이 땅에 오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빛의 근원으로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
곧 독생자의 영광으로 아버지를 말씀으로 계시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자기 증거의 말씀으로 충만하며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음으로 백성의 하나님 곧 자녀의 아버지가 되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게 하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배경은 로고스에 대한 헬라 철학적 사상의 배경이 아니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지혜를 의인화한 잠언의 말씀이 그 배경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는 바로 그 말씀이
태초에 계신 말씀이요,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고 하였습니다.(시33:6)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8:22-31)
로고스에 대한 헬리 철학적 배경 이해는
로고스란 언어에 대한 차용이지 철학적 사상을 담은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로고스에 대한 헬라 철학적인 불완전한 이해에 대한
완전한 복음적인 선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고스에 대한 이성적 사유의 한계를
완전한 계시의 로고스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완전한 창조적 능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빛의 창조적 근원, 그 자체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선포한 요한복음은
생명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요, 은혜의 빛이요, 사랑의 빛이요, 생명의 떡이요,
또한 생명의 물이며 부활의 생명, 그 자체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듣는 말씀 곧 로고스로 복음화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증거의 말씀, 곧 전하는 말씀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로고스의 복음을 듣고
그 선포된 증거의 말씀을 믿음으로 전하는 주의 백성에게 구원의 생명을 은혜로 베풀었습니다.
그 말씀에 대한 은혜의소통.......
로고스로 복음화된 듣는 말씀은 전하는 증거의 말씀으로 은혜와 생명과 진리의 빛으로 소통됩니다.
로고스,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은
천지간의 소통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창조적 능력을 함유합니다.
믿음의 이데올로기적 이해는
로고스,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의 능력을 전혀 갖지 못합니다.
믿음은 로고스로 복음화된 그 말씀에 대한 생명과 빛과 진리를
은혜로 입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게 하고 구원의 능력과 증거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임하게 합니다.
이것이 역동적인 복음의 능력이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로고스, 그 말씀과 함께 역사하는 권능입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 신앙은
로고스로 복음화된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의 이해가 전혀 없는 자아 주체적 신념이요, 이데올로기입니다.
미련스럽게도 도올의 영어 강의 요한복음 강독을
모두 들었습니다.
로고스에 대한 헬라 철학적 사상의 배경 이해라는 관점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과 철학적 사유로서의 로고스 개념을 새롭게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불완전한 철학적 이해의 로고스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완성하였습니다.
참으로 요한 복음은 불완전한 철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와 같은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완전한 계시의 말씀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로고스에 대한 신비에 몰입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복음의 증거는 태초의 창조와 생명과 진리와 은혜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계시, 그 자체입니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20:30-31)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는
창조의 빛과 생명의 빛과 진리의 빛과 은혜의 빛과 사랑의 빛과 구원의 빛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도시의 밤하늘에 볓빛 쏟아지는 창조적 서정이 느껴지지 않듯
복음의 로고스가 사람들에게 그 은혜의 빛으로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의 뱐화도 없고 구원의 능력도 임하지 않는 것은
복음의 로고스적인 믿음의 이해가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가
복음의 파토스적인 이해와 에토스적인 이해로 변질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는 믿음을 낳지만
복음의 파토스적인 이해는 열정의 비전을 추구하는 의지적 신념을 낳았습니다.
또한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영광으로 가득하지만
복음의 에토스적인 이해는 물없는 샘이요,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욕망뿐입니다.
결과적으로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가 충만해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그 모든 은혜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파토스적이요, 에토스적인 이해는
다른 복음으로 이단과 사이비의 늪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적 기법으로
로고스와 파토스와 에토스를 사용하였습니다.
헬라 철학적인 이성으로서의 로고스는 논리학의 기초가 되었고
파토스는 수사학의 기초가 되었고 에토스는 윤리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인격적인 로고스가 아니라 활용수단의 지식적 사유 개념으로 로고스가 이용되면
헬라 철학의 사슬이 되고 맙니다.
신약 성경은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로 충만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찬양하고 찬송합니다.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는
사도들의 다양한 계시의 언어가 되어 선포된 말씀으로 전하여져서
거룩한 의의 열매를 생명의 구원으로 맺었습니다.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는
서신을 기록한 사도들의 복음적 계시의 언어가 되어
생명의 빛으로 가득한 말씀의 옷을 입은 증거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이라는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는
사도 바울이 즐겨쓰는 증거의 말씀이었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6:7)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엡1:13-14)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5)
야고보서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약1:17-18)
진리의 말씀에 대한 로고스적인 이해는
복음의 본질,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구원얻는 믿음을 갖게 하고
성령의 인치는 역사와 보증과 속량으로 그 나라에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합니다.
또한 부활의 첫 열메로 맺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게 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구원의 말씀이란 복음의 영감적인 언어는 신.구약 성경에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 데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선포된 말씀으로 증거하였습니다.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라고 하였습니다.(행13:2632)
바울은 구원의 말씀이라는 선포된 증거의 말씀으로
아브라함의 언약과 시내산 언약과 다윗 언약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로 성취하였다고 전하였습니다.
복음의 로고스적 이해는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 증거한 구원의 말씀으로 옛 언약 새 언약 성취라는 복음을 확실하게 증거하였습니다.
복음의 로고스적 이해로 복음의 말씀이란 영감의 언어는
사도행전에서 두 번 표현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전한 복음의 로고스적 이해는
복음의 말씀으로 천하각지에 전파되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고 하였습니다.(행8:6)
또한 예루살렘 총회에서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냐는 문제를 논의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로고스적 이해를 복음의 말씀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행15:5-9)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받은 두 사도 곧 바나바와 바울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 은혜의 말씀이고 증거하였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고 하였습니다.(행14:3-4)
또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3년 동안 밤낮 눈물로 훈계하며 가르쳤던 바로 그 복음의 말씀을 은혜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께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1-35)
또한 복음의 로고스적 이해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탈출 시키는 주의 사자가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고 하였습니다.(행5:18-23)
버울은 빌립보 교횡 보내는 서신에서
달음질 하는 사도적 사역을 생명의 말씀을 밝히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빌2:13-18)
요한1서는 요한복음의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를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생명의 말씀이라고 천명하였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
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요일1:1-2)
이 외에도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로
인내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과 믿음의 말씀과 예언의 말씀 등으로 복음의 영감적 언어로 증거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 예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 주의 말씀 등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복음으로 선포하며 증거하였습니다.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는
구원의 근원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듣는 말씀과 증거의 말씀으로 선포되고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말씀과 복음의 말씀과 은혜의 말씀과 생명의 말씀 등
다양한 영감의 언어로 증거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여 전능하신 주를 높이며 찬양하며
거룩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로고스의 그 말씀 안에 충만한 창조적 생명과 빛과 진리와 은혜는
선포된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경청하며 묵상하여 믿음의 말씀을 증거할 때
성령의 역사는 충만합니다.
오늘날..... 이렇게 충만하고 아름다운 복음의 그 모든 말씀을 다 갖다 버리고........
성공과 축복과 행복과 번영의 혼잡한 말씀이 설교되는 강단의 대세는
멸망과 심판과 파멸의 첩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고 .......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의 로고스적인 이해로 충만하여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영화롭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음과 듣는 귀를 새롭게 하여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선한 입술의 열매를 생명으로 맺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