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휴전협정 조인식에서 양측 군악대가 연주했던 곡은
역사가 주는 교훈 - 방심하면 당한다
7월 27일을 기억하라
Remember July 27th
1953년 휴전협정 조인식에서 양측 군악대가 연주했던 곡은 ( )이었다
미국은 역사상 독립전쟁, 남북전쟁, 미서전쟁, 제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 이라크전 등 많은 전쟁을 경험하였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날 미국이 경제와 군사적인 면에서 강대국이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전쟁은 어떤 전쟁일까요? 흔히들 제1차 세계대전이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28일 ~ 1919년 11월 11일)은 전세계의 경제를 두 편으로 나누는 거대한 강대국들의 동맹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한쪽 편은 대영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삼국협상을 기반으로 한 연합국이었으며, 다른 한편은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동맹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부르는 이유는 강대국들이 소유했던 식민지들 역시 본국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전쟁에 참전하였기 때문에 결국 32개국이 참전한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만약 미국이 참전한다면 어느 쪽 편을 들 것인가?”하는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전세계인이 모여서 이룬 다민족 국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1915년 5월 7일, 아일랜드 남쪽 해안에서 루시타니아호가 우현에 독일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고 18분 만에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고로 승객과 선원 1,198명 중 761명만이 생존하였으며, 사망자 중에는 123명의 미국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초기부터 진행 과정을 지켜보던 미국은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처음부터 ‘참전’한 것이 아니라 중간에 ‘개입’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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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미국 대통령이 1917년 4월 2일, 의회에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 |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 1일 ~ 1945년 9월 2일)에서도 미국은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기습을 당한 후, 하루 뒤인 12월 8일 미국의회는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도 반대했던 몬테나주 출신 지넷 랭킨 공화당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 전원의 찬성으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미국은 일본계 이민자들이 일본 편을 들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FBI까지 동원해서 일본계 이민자들을 따로 분류해 미국 본토 여기저기에 급조한 강제수용소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격리시켰습니다. 이렇게 강제 수용된 일본계 이민자들이 12만 명이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이 일본에 대해 행동으로 보여 준 가장 강한 강도의 조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미국은 처음부터 ‘참전’한 것이 아니라, 진주만 기습 후에 ‘개입’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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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기습으로 12척의 미해군 함정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403명의 군인 사상자와 68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 영화 <진주만> 중에서 |
자, 이제 그러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오늘날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가장 큰 힘을 실어준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을까요? 군사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한국전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기간 동안 유엔군이라는 이름 아래 참전하였지만, 참전국들 중 미국은 가장 많은 수의 군인들을 파병하였으며 총사령관 역시 미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139명에 달하는 장성 자녀들이 참전하여 이들 중에서 35명이 전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Korean War Veterans Parkway를 만들어 전쟁 중에 희생 당한 장병들과 참전한 용사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국민들과 후손들이 기념도로를 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새기라는 세 가지의 의미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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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주 스테턴 아일랜드(Staten Island)에 있는 Korean War Veterans Parkway |
미국의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는 10년 동안의 작업 끝에 출간한 그의 저서 『메타역사(Metahistory)』에서 인간의 망각을 ‘창조적 망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학부 위탁교육을 받았던 1987년도에 이 책을 처음 대하고 나서 당시에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헤이든 화이트는 인간의 망각을 굳이 ‘창조적 망각’이라고 표현했을까?”하는 것이 의문이었습니다. 이후 저에게는 그의 표현을 이해하는데 2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습니다. 어느 날 수업 발표 자료를 읽고 있다가 문득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우리는 대부분 정신이상자가 될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불필요한 부분들은 잊어버리고 적당한 양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고 오늘도 우리가 건강한 모습으로 살 수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72억의 인구 중에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살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는 잊고 지내지만 가끔씩 그 의미를 되새겨야 할 역사적 사건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리 민족은 반만년 역사 이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오래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이 후세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건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삼국통일, 조선건국,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한일합방, 8・15 해방 등등 많은 예를 들 수 있겠지요. 저는 그 중에 하나가 한국전쟁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오늘, 1953년 7월 27일은 한국전쟁을 매듭지은 휴전협정(Armistice Agreement)이 있었던 날입니다. ‘휴전(armistice)’이란 단어는 라틴어의 ‘arma(병기)’와 ‘stitium(중지)’의 합성어입니다.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입니다. 영문으로는 “Agreement between the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입니다. 우리말로는 정전협정(Ceasefire), 영어로는 Armistice (휴전협정)라고 하여 개념상의 혼동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정전협정보다는 휴전협정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휴전과 정전은 가끔씩 혼용하지만 내용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정전(停戰)은 ‘전투 행위를 완전히 멈추는 것’이며, 교전 당사국들이 정치적 합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전투 행위만 정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교전 당사국 사이에 이견이 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국제기관이 개입하는 경우 ‘정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반면에, 휴전(休戰)은 ‘적대 행위는 일시적으로 정지되지만 전쟁은 계속되는 상태’를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전쟁의 종료를 선언하는 강화조약(혹은 평화조약)의 전 단계입니다. 따라서 국제법상 ‘휴전’은 여전히 ‘전쟁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전쟁이 중단되면서 체결된 협정은 정전협정이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전협정에 정치적 합의 내용이 없으며 유엔이 협정의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박태균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정전협정을 ‘제한된 휴전’의 의미로 보면서 국제법 위반 없이 전쟁을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휴전협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분석하였습니다. 즉, 정전협정보다 휴전협정이 더 호전적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 체결에 반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휴전협정에는 중국군, 북한군, 유엔군 사령관만 서명하였습니다. 국제법상 평시의 조약 체결에는 당사국 의회 등의 비준이 필요하지만, 전시의 조약 체결은 군사령관의 서명만으로 비준이 완료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휴전협정에 서명한 후 악수도, 눈인사도 없이 헤어진 양측 대표단이 각자 입장하였던 문으로 퇴장하여 의장대의 사열을 받는 순간, 양측의 군악대가 연주한 곡은 바로 ‘아리랑’이었습니다. 서로 간에 사전에 어떠한 약속도 없었지만 그 중요하고도 긴장된 순간에 양측 모두 아리랑을 연주했다는 사실은 아리랑이 우리 민족 모두의 노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족이면서도 서로 적이 되어 전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서로가 아리랑을 연주하는 모습은 아리랑이 하나의 노래가 아니라, 사상과 이념을 떠나 마음을 하나로 이어주는 ‘끈’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휴전협정 체결에 따라 8월 5일부터 9월 6일까지 진행된 포로교환 현장에서도 아리랑은 양측 군악대의 단골 연주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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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인 윌리엄 해리슨 미육군 중장(왼쪽 테이블 중앙)과 북한·중국 대표인 남일 북한군 대장(오른쪽 테이블 중앙)이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
7월 27일, 미국에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집집마다 조기(弔旗)가 게양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2009년부터 이날을 ‘한국전쟁 참전용사 감사의 날’로 제정해서 정부와 모든 공공기관에서 조기를 게양하고 있습니다. 2009년에 ‘한국전쟁 참전용사 휴전일(National Korean War Veterans Armistice Day)’이라는 미국의 새로운 기념일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고 얼굴도 알 수 없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바쳤던 전사자는 물론, 참전했던 모든 용사들의 정신을 잊지않고 앞으로 한반도가 세계평화의 상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법안으로 제정된 것입니다.
7월 27일이 기념일로 제정된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현충일(Memorial Day, 5월 마지막 주 월요일)과 베테랑스데이(Veterans Day, 11월 11일)가 기념일로 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베테랑스데이가 11월 11일이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과 휴전협정을 체결한 것이 1918년 11월 11일 11시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의 영향력이 큰 미국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만을 위한 기념일을 제정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뜻있는 사람들이 「리멤버 7・27」을 조직하여 2년 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2009년 미 상하원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켜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법안이 통과된 후 한국과 미국에서는 왜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이 아니고 7월 27일이냐는 논란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쟁의 시작보다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는 휴전일을 상기시켜 아직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서 전쟁의 먹구름이 가시지 않은 대한민국에 평화의 종전을 선언하는 계기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당사자이면서 바로 저와 여러분의 삶의 터전이자 조국인 대한민국이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장(戰場 : battle fields)이었는데, 정작 우리는 한국전쟁을 애써 기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성인의 절반 정도는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전쟁에 대해서 역사 시간에도 대충 가르치고 시험에도 잘 나오지 않는, 우리 역사에서 그냥 스쳐 지나간 ‘천덕꾸러기인 한 사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먹고 살기도 바쁜데 아픈 기억을 굳이 되살려 무엇 하겠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에게는 소중한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우리 후손들에게 지금보다는 더 아름답고 정신이 건강한 사회를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에 3년 1개월, 1,129일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른 후 종전이 아닌 휴전협정을 맺고 지금까지 휴전 상태를 이어오면서도 제2차 세계대전 후 지원을 받던 국가에서 이제는 세계의 경제 대국으로서 지원하는 국가로 성큼 발돋움한 우리 자신 스스로가 지금 이 순간부터 풀어나가야 할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위에서 살펴 본 제1,2차 세계대전, 진주만기습, 한국전쟁, 특히, 최근 우리나라에서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였기 때문에 일어났던 가슴 아픈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이 안보의식이 해이해 진 우리 모두에게 남겨 준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방심하면 당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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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제2함대사령부 내 서해수호관에 전시되어 있는 천안함(ROKS PCC-772). 우리에게 안보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는 살아있는 교육 현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