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부처님께서 고귀한 전사a noble warrior 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수행자를 병사, 전투의 코끼리, 혹은 전마(戰馬)에 비유한 것을 보면 놀랍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종종 놓치는 점은, 부처님 또한 농경 문화의 일원이셨다는 것입니다.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부처님이 어릴 적, 아버지가 밭을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사촌들이 세속적 삶의 번거로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도 있는데, 그 중심에는 농사가 있습니다. 곡식을 수확하고, 다시 심고, 또 가꾸고, 다시 거두고… 이 일은 끝이 없습니다.
농사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 사람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떠올려 보면 의미 있는 통찰이 생깁니다. 농부가 되면 자연스레 배워야 하는 덕목 중 하나가 바로 ‘인내’입니다. 작물이 잘 자라도록 최선을 다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자라는 일은 결국 자연의 흐름에 맡겨야 합니다. 정성껏 돌보며 꾸준히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조급함이 아닌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벼 한 알을 심고 싹이 나자마자 더 빨리 크라고 당기면 助長, 그 식물은 결국 죽고 맙니다.
요리에서도 이와 비슷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어떤 음식은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익혀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불을 세게 올리면 오히려 음식이 타버립니다.
조급함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인내심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인내는 단숨에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를 배우는 것 자체가 인내를 요구합니다. Learning patience itself requires patience.
명상을 예로 들면, 우리는 끊임없이 호흡으로 돌아와야 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할지를 배워야 합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려 애쓰지만, 좀처럼 잔잔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스스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마음을 고요히 만드는 조건에 집중하고, 다시 그 원인으로 돌아오다 보면, 점차 그것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수행의 길에서 누구는 빠르게, 누구는 느리게 나아갑니다. 태국 숲 전통의 명상 스승 아잔 리(Ajaan Le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나나 나무 같아서 자르고 나면 몇 시간 만에 다시 자라납니다. 반면 어떤 나무는 한참을 지켜봐도 변한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빨리 자라든, 천천히 자라든, 중요한 것은 건강한 나무가 되는 일입니다. 그저 꾸준히 자신을 격려하며 나아가면 됩니다. So whether you’re going to be a fast tree or a slow tree, you can make sure that you’re a healthy tree. You try to keep encouraging yourself.
한 걸음 내딛는 것도 인내요, 그 인내를 지켜내는 것도 또 하나의 수련입니다.
이러한 자기 격려는 우리 안에 이미 자리한 미숙한 성향들과, 앞으로 키워나가고자 하는 긍정적 성품 모두를 다루는 데 필수적입니다. 미숙한 성향들은 단지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 상태 그대로 머물게 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현대의 많은 수행법에서는 모든 것을 수용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마음속에 싫증, 분노, 혼란이 자리 잡았을 때, 그것이 있다는 사실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상태를 ‘그대로 두기’가 아니라, 변화시키고자 해야 합니다.
이런 변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는 매우 깊고, 오래된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몇 생에 걸쳐 반복되어 온 익숙한 반응들이기에, 단번에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버리는 것에 기뻐하고, 기르는 것에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Buddha says to take delight in abandoning and delight in developing. 올바른 방향으로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스스로를 칭찬하고, 그 성취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반대로 실수했을 때는 “이건 단지 잠깐의 후퇴일 뿐” This is just a temporary setback. 이라고 말해줘야 합니다. 감정을 조율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 학교 상담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사건들을 1부터 10까지 점수로 매기게 합니다. 그런데 많은 아이들은 모든 사건을 ‘10점(즉 최악으로 평가)’으로 평가합니다. 형이 칼에 찔린 것: 10점. 데이트에 나갈 옷을 못 고르겠는 것: 10점. 모든 것을 위기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삶 전체를 위태롭게 만듭니다. 우리는 사건의 크기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작은 문제들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능력—다시 말해, 좌절을 위기처럼 여기지 않는 마음의 여유—는 수행자에게 매우 중요한 정신적 기술입니다. Your ability to make things minor—in other words, to see a setback as not such a big deal—is an important mental skill.
인내는 단순히 기다림이 아니라, 그 기다림 속에서 스스로를 다듬고, 마음을 훈련시키는 지혜로운 능력입니다.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글의 출처는 없지만 내용으로 보면, 타닛사로 스님의 법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태국 숲전통의 아잔 문스님의 직계 제자인 아잔 리 담마다로-아잔 조띠꼬-아진 타닛사로 스님으로 이어지는 법맥입니다.
니까야로 불교를 공부하는 대부분의 분들이, 심지어 대승을 공부하는 분들까지도 테라와다 불교를 말하거나 비판할때 그 근거로 삼는 것이 미얀마불교의 교학과 수행입니다.
태국의 불교수행을 대표하는 담마윳 전통은 미얀마와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는데도 그런 전통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입적하신 도*스님이나, 빤냐** 진*스님, 도*스님등은 태국에서 출가한 분들이지만 담마윳과는 무관하며, 태국에 진출한 미얀마의 마하시 전통이거나, 태국에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하는 대중 종단에서 계를 받은 분들입니다. 그렇다보니 태국의 수행 전통에 대한 오해나 무지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도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있으시지만, 아마 담마윳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것 같습니다. 카페에 다른 수행전통에 대해서도 가끔씩 자료를 올려주시기 때문에 참고하시라고 간단히 담마윳에 대해 말씀드려 봅니다.
잘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가 위빠사나수행이라고 하면 두개의 큰 흐름이 있습니다.
미얀마의 순수 위빠사나 수행이 그 하나입니다. 마하시전통이 대표적이며, 선정수행없이도 사띠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깨달음에 선정수행이 필요하다는 같은 미얀마의 파욱전통입니다. 선정상태에서는 외부감각이 차단되어 법관찰을 할수 없으므로 출정해서 해야하며, 호흡관찰의 집중지점이 코주변입니다. 그리고 사마타(선정)를 먼저 닦고 일정한 단계(네번째 선정)에 이르면 위빳사나를 닦는 단계로 전환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전통이 이 두 개의 전통이고 한국의 수행처는 거의 모두 이 두 곳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쉐우민전통은 마하시 계열로 볼수 있습니다. 마하시와 파욱은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바탕으로 근.현대에 만들어진 수행체계이고 따라서, 주석서를 경전과 동일시합니다.
마하시의 순수위빠사나 수행은 개인적인 비유를 들자면, 저는 개량한복처럼 이해합니다.
선정을 닦기 어렵기 때문에 찰라삼매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을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주석서와 경전의 일부 구절을 바탕으로 누구나 닦기쉬운 간편한 수행체계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까야를 공부하다 보면 과연 선정없는 깨달음이 가능할수 있는가 하는 계속되는 의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선정을 닦으라는 말씀을 수없이 하고 계시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서 선정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수 위빠사나 수행의 근거로 삼는 경전구절의 해석에도 의문이 갑니다.
파욱수행은 선정수행없이는 깨달을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수행의 핵심 원리가 경전이 아닌 청정도론이라는 주석서에 바탕함으로써 경전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태국 담마윳과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담마윳역시 깨달음에 선정수행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지만, 수행의 원리가 파욱과는 핵심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큽니다.
파욱은 외부감각이 차단되는 몰입삼매를 말하지만 담마윳은 깨어있는 삼매입니다. 외부감각이 차단되지는 않지만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선정 상태에서 법관찰을 하며,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동시에 작동합니다. 코주변이 아닌 말그대로 온몸관찰입니다.
까시나수행을 권장하지 않고, 호흡관찰을 통한 마음관찰이 목표입니다. 바와의 소멸이 열반이라고 하듯이, 바와에 대한 통찰이 매우 중요합니다.
선정을 통해 현재의 경험에 개입하는 상카라를 관찰하여 스스로 일으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열반에 이르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현재 순간 자체는 수행의 목표가 아닙니다. 현재의 경험을 형성(조작)하는 상카라를 관찰하려면 현재 순간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합일의 감각도 조건따라 일어난 상카라입니다.
이 과정에서 무상 고 무아라는 삼특상은 경전의 기술처럼 ,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사성제를 닦는 과정에서 쓰이는 열가지 산냐 중의 세가지가 됩니다. 갈망하고 집착하는 상카라를 내려놓기 위한 도구입니다.
미얀마에서처럼 삼특상의 통찰이 수행의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위빠사나수행이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만도 아닙니다. 해로운 상카라는 제거하고 유익한 상카라는 길의 끝에 이르기까지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태국 숲속전통은 미얀마처럼 모든 수행자들에게 통일된 수행 지도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또한 스승이 특정한 수행법을 따르도록 하는 방식도 아니기 때문에 스승에 따라서, 또 수행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아잔 문스님의 제자 중에서 아잔 리스님의 전통에 바탕한 것입니다.
주석서를 대하는 관점도 전체적으로는, 주석서는 주석서라는 입장입니다. 실제 수행 체험을 주석서가 아니라 경전에 비추어 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빤냣띠와 빠라맛타, 근접삼매나 본삼매라는 용어, 무상 고 무아를 3특상으로 부르는 것, 오감이 차단되는 몰입삼매가 바른 선정이라는 것, 선정에 들려면 빛니미따가 뜨는 것이 필수요소라는 것, 선정에서 출정해 법관찰을 해야 한다는 것..등 많은 것들이 주석서에 근거한 내용들입니다. 즉, 니까야에는 없는 내용들입니다.
빛니미따는 담마윳스님들의 선정에 관한 법문을 들어보면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단지 수행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고 길을 가다보면 만날수 있는, 길가에 핀 예쁜 풀이나 꽃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한 눈을 팔면 여정이 길어질 뿐이고 무심히 지나치면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한국에는 1989년?에 미얀마불교가 먼저 전래된 관계로 미얀마에서 가르쳐지는 교학과 수행이 테라와다 교학과 수행의 정통이고 전부인 것으로 아는 분들이 많습니다.
태국에 부처님 당시의 수행 전통과 환경을 그대로 지켜가고 있는 숲속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아잔 차스님은 담마윳 종단은 아니지만 아잔 문 스님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담마윳의 색채가 강합니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아잔 브람스님은 아잔 차스님을 스승으로 자주 언급하지만 수행법에 차이가 있습니다. 몰입삼매를 주장하고, 니미따를 선정의 필수요소로 보는 등 청정도론에 근거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스승이 특별히 수행지도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과정에서 영어로 잘 번역되어 있는 청정도론을 따라 수행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아잔 차스님의 정통 수제자는 아잔 수메도스님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순간을 보든, 아잔 문 스님의 경우를 보든, 선정에서 출정해 법관찰을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선정 상태였습니다.
니까야에는 비상비비상처와 상수멸정에서만 '출정'해서 관찰한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거나(비상비비상처), 인식이 모두 사라진 상태(상수멸정)이니 그 상태에서 법관찰을 못하는건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 경우에는 당연히 출정해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주석서나 수행전통, 수행법을 받아들이는 관점, 생각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다만,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안목을 넓혀야 선택지가 많아지고 바른 선택을 할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도, 하시는 공부와는 다르지만 초기불교를 이해하실 때, 미얀마 불교에만 머물지 마시고 태국의 담마윳 전통에 대한 이해를 가져보시면 초기불교를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실수 있지 않을까 하여 몇말씀 드려봤습니다.
마지막으로, 담마윳종단은 태국 왕실의 라마 4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 27년간 왕자신분으로 비구생활을 하면서, 부처님 당시의 숲속수행 전통의 복원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불교개혁을 단행할 때(1835년) 성립된 종단입니다.
라마4세는 '왕과 나'라는 영화속의 실제 인물이기도 합니다.
엄격한 두타행(두동), 탁발로만 공양하며, 1일 1식의 오후불식, 엄격한 계율, 선정수행 없이는 깨달을수 없다는 가르침, 개별 수행자에 맞는 도제식 수행지도, 포교하지 않는 전통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 불교 개혁운동은 당시 태국 불교에 만연해 있던 미신과 비불교적 요소를 타파해서 니까야에 나와 있는 부처님 당시의 수행전통과 수행 환경을 최대한 복원 계승해 간다는 불교 부흥운동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수행 종단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