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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질 민국, 갑질 사회] 이른바 ‘갑질 공화국’의 ‘이카로스 역설’
한국인은 ‘전쟁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를 입증해 줄 수많은 통계가 있지만,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만으로도 그 전쟁의 참혹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쟁터에선 오직 힘만이 정의다. 그런 힘의 관계를 가리키는 갑을(甲乙)관계와 그 관계에서 벌어지는 갑의 못된 횡포, 곧 ‘갑질’은 곳곳에 만연해 있다. 경향신문의 사설이 잘 지적했듯이, “지금 대한민국은 수많은 ‘을’의 눈물로 가득 찬 ‘갑질 민국’”, 곧 ‘갑질 공화국’이다.
2015년 1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60세 국민 1천 명을 대상으로 사흘간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95%의 응답자는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갑질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데 매우 동의(44%)하거나 동의하는 편(51%)이라고 밝혔다. 이른바 ‘갑질’이 “모든 계층에 만연해 있다.”는 응답은 77%로 “일부 계층에 해당된다(20%).”와 “몇몇 개인에 해당된다(3%).”를 크게 앞질렀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정작 흥미로운 건 자신이 갑인지 을인지 묻는 말에 대한 답이었다. “나는 을이다.”라고 답한 사람이 85%에 이르렀다. 이들 가운데 “항상 을이다.”는 17%, “대체로 을이다.”는 68%였다. 반면 “항상 갑이다.”라는 응답은 1%에 불과했다.
과연 그럴까? 갑질은 결코 많은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저지르는 게 아니다. 그건 상대적이거니와 다단계 먹이사슬 구조로 돼 있어 전 국민의 머리와 가슴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삶의 기본 양식이다. 이른바 ‘억압 이양의 원리’에 따라, 상층부 갑질의 억압적 성격은 지위의 높낮이에 따라 낮은 쪽으로 이양되는 것이다.
‘전쟁 같은 삶’의 기원, 6·25 전쟁
‘갑질 공화국’에서 벌어지는 ‘전쟁 같은 삶’의 기원은 멀리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그것이 최고조에 이른건 6·25전쟁 시절이었다. 이 전쟁이 한국인의 삶의 철학과 기본자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한국인은 아직도 ‘죽느냐 사느냐?’식의 처절한 삶을 살고 있다. 6·25도 끝났고 ‘보릿고개’도 끝났지만, 그 시절을 살던 정신은 아직 살아있다. 살인적인 대학입시 전쟁이 그걸 잘 보여주고 있잖은가.
6·25는 한국인에게 오직 재앙이요 저주이기만 했는가? 꼭 그렇진 않다는 데에 역사의 아이러니, 아니 잔인함이 숨어있다. 인류역사에서 전쟁은 늘 참혹했지만, 동시에 늘 수혜자를 만들어내고는 했다. 세계의 강대국이나 선진국치고 전후 ‘전쟁의 축복’을 누리지 않은 나라가 없다. 무엇보다도 전쟁은 기득권 세력을 와해시켜 대대적인 제도개혁을 가능케 한다. 인간 세계의 근본 모순인 셈이다.
인명과 고통의 관점에서 보자면, 6·25는 악마의 저주로 간주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6·25가 그 어떤 혜택을 가져왔다면? 박명림 교수(연세대학교)는 그런 곤혹스러움을 비켜가고자 ‘분단의 역설’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는 분단의 역설 중 가장 크고 비밀스러운 역설은 그것이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역설일 것이라고 말한다.
흔히 ‘지옥’으로 묘사된 전쟁의 참상이 불러일으킨 그 어떤 정신적 자세, 곧 ‘6·25 심성’은 생존경쟁, 물질만능주의, 개인주의, 경쟁과 같은 가치들을 촉진했다. 물론 이 가치들은 자본주의 이념의 심층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곧,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발생한 평준화 의식과 상승이동의 기회 균등화가 사회발전에 이바지했다는 뜻이다.
하긴 혼란으로 하루아침에 지위와 신세가 뒤바뀔 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너나 내가 다를 게 무엇이냐? 너는 어쩌다 출세를 했을 뿐이니 나도 운만 따르면 출세하는 건 시간문제이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이런 사고방식이 뜨거운 교육열로 이어지면서 긍정적으로 작용한 점도 있을 것이다.
‘6·25 심성’의 일상화로 구현된 갑질
‘6·25 심성’의 일상화로 구현된 갑질 또한 마찬가지다. 갑질이 나쁘기만 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게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하면서 기승을 부리긴 어려웠을 것이다. 갑질 역시 한국인의 전투력을 키워준 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윤태성 교수(한국과학기술원)는 「한 번은 원하는 인생을 살아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갑질을 당하면서 느낀 모욕감은 내가 성장하는 데 비료가 되었다. 나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갑질을 당하는 것은 내가 약한 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증언이 말해 주듯, 갑질을 당한 한국인 대부분은 자신이 당한 갑질을 성공을 위한 비료로 삼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영국의 언론인 다니엘 튜더는 한국의 그런 두 얼굴을 다룬 책의 제목을 아예 「한국 : 있을 수 없는 나라」라고 붙였다.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그런 양면성을 실감 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물론 그 또한 답을 잘 알고 있다. “한국을 가난에서 구제하고 마침내 우뚝 서게 한 그 경쟁의 힘이, 오늘날 한국인을 괴롭히는 심리적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6·25 심성’은 우리에게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한 동시에 ‘전쟁 같은 삶’을 초래하고 말았다. 물론 심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한국이 ‘갑질 공화국’이 된 이유는 매우 복합적이다.
서로 맞물려 있거니와 각기 위상이 다르긴 하지만, 단순하게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무수히 많은 요인들이 얽혀 있다. ① 압축성장의 부작용(황금만능주의 등). ② 효율을 기하려는 1극 중심주의가 낳은 서열주의. ③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 down effect)’ 중심의 정책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위계화. ④ 수출지향형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은 기업사회 구축. ⑤ 부정부패와 출세주의. ⑥ 법치의 실종. ⑦ 연고주의, 정실주의, 패거리주의. 그런데도 이 모든 요인을 그대로 내버려두거나 감내케 한 주요 원인이라는 점에서 ‘6·25 심성’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학생들에 대한 ‘갑질 교육’을 인정하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나는 갑질의 가해자일 수 없다.”는 예외 의식에 대한 성찰이다. 곧 갑질은 특정 권력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의 방식에 내재된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야 갑질을 일회용 분노로 소비하고 넘어가는, 그래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 현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다. 먼저 우리는 학생들에게 사실상의 ‘갑질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걸 인정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학력과 학벌에 따른 임금 차이는 매우 높다. 살인적인 입시전쟁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나 역대 정권들은 학력 · 학벌 간 임금 격차 해소라고 하는 답을 외면해 왔다. 더디 가도 좋으니 올바른 길로 나아갔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런 임금 격차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입시전쟁과 사교육 문제에 대해 입시제도를 바꾸는 미련한 방법으로 대응해 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걸 온몸으로 겪고 봐왔을 학부모가 자식의 전투력 강화에 일로매진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본디 전쟁의 공포는 증폭되기 마련이다. “너 대학 못 가면 뭔 줄 알아? 잉여 인간이야, 잉여 인간! 인간 떨거지 되는 거야!”와 같은 폭언은 전국 방방곡곡 각 가정의 일상에서 각종 변주를 거치며 수시로 만들어지는 말이다.
신경정신과 의사 이나미는 「한국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에서 “한에 울던 한국인, 이제 욕망 때문에 운다.”고 했다. 그는 그런 욕망에 짓눌려 ‘자녀를 범죄자로 만드는 부모들’을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똑똑하고 경쟁적인 일부 부모들은 ‘기죽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설령 네가 잘못해도 꼭 사과할 필요는 없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남을 이겨라(커닝이나 폭력 정도는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 ‘남 신경 쓰지 말고 네 것만 챙겨라(약하고 아픈 사람 도와줄 필요 없다).’와 같은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보내 자녀들을 냉혹하고 지능적인 범죄자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어디 그뿐인가. 가정, 학교, 사회는 삼위일체가 되어 대학 서열제와 더불어 직업 서열제를 가르친다. 2012년 노동부와 교과부가 한국직업능력개발원과 공동으로 고등학교 교과서 7개 과목 16종을 분석한 결과 직업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강화하는 등의 불합리한 기술이나 표현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이를테면 “교사와 의사 등의 직업과 같이 ‘선생님’으로 불리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직업 집단 사이에는…”, “명문대 법대를 수석 졸업한 김 변호사는 이제 한국의 최상위층이 되었다.”는 식이다.
교과서에 기술된 직업 빈도도 전문직에 치중되어 있고, 이들에 대해서는 긍정적 묘사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반면 단순 노무직, 판매직, 기능직, 농·어업 종사자 등은 기술 빈도도 낮을뿐더러 부정적 묘사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무거운 짐을 진 그림과 함께 “중학교밖에 못 나왔으니… 이런 일밖에 하지 못하네.”라고 기술한 부분까지 있었다. 이렇게 갑질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해 한 단계 발전된 갑질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놀랄 일이 아니다.
‘대학서열 중독증’은 ‘능력주의’ 이념
갑의 갑질이 얼마나 추악하고 비열한 지는 당해본 을만이 안다. 그런데 갑을관계의 진짜 비극은 갑의 갑질보다는 갑질을 당한 을이 자신보다 약한 병에게 갑질과 다를 바 없는 ‘을질’을 한다는 데에 있다. 병은 또 자신보다 약한 정에게 갑질 · 을질과 다를 바 없는 ‘병질’을 한다.
이런 먹이사슬 관계를 온몸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이들이 놀랍게도 아직 갑을관계의 본격적인 현장에 뛰어들지 않은 대학생들이다. 사회학자 오찬호가 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은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을 실감나게 고발하고 있다.
오찬호는 대학의 수능점수 배치표 순위가 대학생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전국의 대학을 일렬종대로 세워놓고 대학 간 서열을 따지는 건 다만 재미를 위한 일이 아니다.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인정 투쟁이자 생존 투쟁이다. 대학서열은 수능점수나 학력평가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아예 노골적인 인간차별로 이어진다. 왜? 수능점수는 ‘진리의 빛’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서열이 한두 개 차이 나는 대학을 ‘비슷한 대학’으로 엮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서열이 앞선다는 대학의 학생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며 흥분한다. 오찬호는 이런 의식과 행태는 아파트 시세 하락을 염려해 주변에 복지시설이 들어오면 결사반대하고 범죄사건이 일어나도 쉬쉬하는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대학생들의 ‘대학서열 중독증’은 선의로 해석하자면 이른바 ‘능력주의’ 이념이다. 능력주의의 구호는 “억울하면 출세하라.”이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허구이거나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은 주로 학력과 학벌에 따라 결정되는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주로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학력과 학벌의 세습은 능력주의 사회가 사실상 이전의 ‘귀족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물론 모든 능력을 다 세습의 산물로 볼 수는 없으며, 그런 시각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지금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정반대의 것, 곧 모든 능력을 세습되지 않은 재능과 노력의 산물로 보고 그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격차를 정당화하는 견해, 곧 능력주의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의 차이가 점차 우연과 예상하지 못한 선택에 좌우되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그런 우연을 필연인 것처럼 가장하는 게 시대의 유행이 되고 있다.
이카로스 역설에서 벗어나자
지금 우리는 이른바 ‘이카로스 역설(Icaros Paradox)’의 함정에 빠져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로스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상황에서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그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태양에 가까이 감으로써 목숨을 잃고 만다. 우리도 이카로스처럼 태양에 점점 더 근접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한국인이 빠져든 이카로스 역설은 이른바 ‘경로 의존’의 산물일 수도 있다. 경로의존은 한 번 경로가 결정되고 나면 그 관성과 경로의 기득권 영향력 때문에 길을 바꾸기 어렵거나 불가능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한 번 길이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그 길로만 다닌다. 그 길을 따라 수많은 건물이 세워진다. 그 뒤에 아무리 더 빠르고 좋은 길을 찾아낸다 해도 이미 엄청난 ‘기득권’을 생산한 길을 포기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 좋은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길을 바꾸는 게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전혀 원치 않는 길을 따라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
지금 우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도래한 절망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아니다. 가혹한 투쟁은 ‘을’에게만 해당할 뿐, 모두에게 다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청년유니온 초대위원장 김영경의 말처럼, “힘들어도 참으면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식의 ‘자기착취’를 중단하고, 사회적 약자들끼리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든든한 ‘빽’을 만들”어야 한다.
태양을 향해 계속 날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관성과 타성에 따라 계속 나아가고자 한다면, 곧 전쟁 같은 삶의 토대 위에서 번성한 ‘갑질 공화국’ 체제 아래에서 ‘지금 이대로’를 고수한다는 건 이른바 ‘생각하지 않는 범죄’가 될 것이다.
[ 갑질 민국, 갑질 사회] 영화 ‘컴플라이언스’를 통해 본 갑을관계의 심리학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된 성폭행
모든 것은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되었다. 패스트푸드 매장의 여성 매니저에게 경찰한테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경찰은 매장 직원이 손님의 돈을 훔쳤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며 직원 가운데 금발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 마침 그때 매장에는 금발의 아르바이트생 베키가 주문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일을 잘했던 18세의 소녀. 매니저는 매장에 있던 베키를 작은 창고 방으로 데려간다.
전화기 너머 그 경찰은 매니저에게 당장 베키의 몸을 수색하라고 명령한다. 매니저가 머뭇거리자 경찰은 당장 몸수색을 하지 않으면 그녀를 자기들이 검거해서 유치장에 가둔 상태에서 조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고 울먹이는 베키. 매니저가 몸수색을 주저하자 경찰은 그녀를 바꾸라고 요구한다. 경찰은 베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소리친다. 경찰에 체포되어서 유치장에 갇힌 상태에서 조사를 받든지, 아니면 지금 당장 몸수색을 받든지.
감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 베키는 그 순간부터 전화기를 통해서 전달되는 경찰관의 명령에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경찰의 요구에 따라 매니저는 그녀가 옷을 모두 벗도록 만든다.
결국 베키는 나체 상태에서 매니저의 몸수색을 받는다. 그녀가 돈을 훔쳤다는 증거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경찰은 베키를 계속 의심한다.
앞치마 한 장으로 몸을 겨우 가리고 있는 베키는 곧 자신의 혐의가 풀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체로 몸수색까지 받았고, 훔쳤다는 돈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경찰의 요구사항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녀를 감시하는 사람을 남자로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매니저는 자신의 약혼자를 부른다.
매니저를 창고에서 내보낸 경찰은 매니저의 약혼자에게 상상을 초월한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다. 중년의 남자인 약혼자가 보는 앞에서 베키의 앞치마를 벗게 한 뒤, 나체 상태에서 팔 벌려 뛰기를 하라고 지시한다. 몸에 숨겼을 동전이 떨어지게 해야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말도 안 되는 명령에 약혼자도 처음에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며 머뭇거린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식은땀을 흘리며 전화기를 통해 전달되는 경찰의 명령에 복종하기 시작한다. 경찰은 약혼자에게 나체 상태인 베키의 엉덩이를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때리라고 명령하기까지 한다. 결국 4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이 사건은 성폭행으로 이어지고 만다.
전화 속 가짜 경찰의 명령
크레이그 조벨 감독의 2012년작 ‘컴플라이언스(Compliance)’는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는 90분 동안 패스트푸드 매장의 작은 창고 안에서 일어났던 악몽을 냉정하게 기록하고 있다. 매장에 온 손님들이 평화롭게 햄버거를 먹고 있는 동안 바로 옆에 있는 창고 안에서는 성폭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매장 매니저와 그녀의 약혼자는 가짜 경찰이 지시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명령에 따라 어린 소녀에게 성적 폭력을 가했고, 베키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폭력을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다.
‘보이스 강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사건 속의 인물들은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18세의 소녀에게 참혹한 폭행을 가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사건이 베키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32개 주에 있는 70개의 레스토랑에 이런 전화가 걸려왔고, 그곳의 매니저들도 전화 속 가짜 경찰의 명령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권력, 관계의 역할을 결정한다
우리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현실세계의 인간관계는 평등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상황과 맥락에 따라 분명히 지각할 수 있는 권력이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이스 강간 사건에서 경찰은 매니저보다, 그리고 매니저는 아르바이트 직원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권력관계를 인지하고 이에 따라 자신이 어떤 태도와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관계에서 두 사람의 역할을 결정하는 것은 권력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보다 권력이 약한 상대에게 지시를 내리는 역할을 한다. 곧, 관계에서 강자는 약자에게 요구하고 명령한다. 반대로 약자의 위치에 선 사람은 강자의 지시를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강자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약자를 야단치고 훈계한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욕하고, 위협하고, 심지어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들은 보통 어른이 아이에게 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행동이다. 따라서 관계에서 자신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강자라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려고 강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갑질’이라고 부르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대에게 명령하고, 야단치고, 훈계하고, 언어와 물리적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과 상대의 권력관계를 자신과 상대,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명확히 인식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약자는 강자의 이런 행위에 저항하기 힘들다. 강자의 요구가 비합리적이어도, 강자가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해도 저항은 매우 어려운 선택이 된다. 강자가 가지고 있는 권력 때문이다. 강자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거나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약자에게 처벌을 가하거나 제재를 가할 수 있다. 이것이 강자가 관계에서 가지고 있는 권력의 핵심이다.
아르바이트 직원이 명령을 거부했을 때 매니저는 바로 해고라는 처벌을 내릴 수 있다. 매니저의 비합리적인 요구와 폭력에 저항했다가는 실직이라고 하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관계에서 약자들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합리적인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다.
약자 또는 ‘을’의 기본권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제도가 확립되지 않는 한 약자는 강자의 불합리한 ‘갑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갑을’ 논란에서 가장 먼저 세워야 할 대책이 ‘을’의 권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견고하고 단호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자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다. 영화 ‘컴플라이언스’에서 베키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실제 사건의 피해자는 심리치료 과정에서 자신이 저항하지 못했던 이유를 자신이 살아오면서 늘 겪어왔던 경험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어른들에게 “말 잘 듣는 아이가 착한 아이”라고 들으면서 자랐던 경험이 자신에 대한 폭력을 스스로 수용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착한 사람이 되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배우면서 자란다. 울지 말라고 했는데도 “우는 아이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주신다.”고 노래한다. 그 마음씨 좋아 보이는 산타 할아버지조차도 말을 듣지 않는 아이한테는 냉정한 것이다. 말 잘 들어야 착한 사람이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만든다.
사실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조금씩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다른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는 데 있다. 착한 사람은 말을 잘 듣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비합리적인 요구도 당당하게 거절하지 못하게 만든다. 너무 아니다 싶어서 거절하고 나면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냥 내가 참고 말걸.’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그래서 복종의 습관이 길러지고, 거절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제는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명령도 거절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을’을 힘겹게 하는 다른 ‘을’들의 비난
착한 사람 콤플렉스의 최악의 형태는 강자들의 비합리적인 행동에 저항하는 약자들을 비난할 때 나타난다. 우리 사회에서도 ‘갑’의 횡포에 맞서는 용기 있는 소수의 ‘을’들이 간혹 출현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을’은 ‘갑’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권력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정작 용기 있는 ‘을’을 가장 힘겹게 하는 것은 다른 ‘을’들의 비난이다. 용기를 낸 ‘을’들은 보통 “대가 세다. 보통은 넘는다. 조용히 살지 왜 나대는지 모르겠다.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와 같은 다른 ‘을’들의 비난에 직면한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용기 있는 ‘을’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갑’의 권력에 굴복한 결과는 생각보다 참혹할 수 있다. 거절하거나 저항했다면 제거되었을 작은 악의 씨앗이 시간이 지날수록 몸집을 키우기 때문이다. 베키가 매니저나 가짜 경찰의 명령을 처음에 단호하게 거절하고 저항했다면, 이 사건은 하나의 장난 전화로 끝났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침묵과 복종의 습관이 작은 악을 악마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 착하기만 한 사람들밖에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는 사회인지도 모른다.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작은 악에 복종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의 희망은 사라진다. 너무 말을 잘 듣는 착한 사람들만 있는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기 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용기 있는 ‘을’은 보호받아야 한다. 최소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착한 사람 콤플렉스로 ‘갑’과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을’을 끌어내리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들의 용기 덕분에 조금씩 합리적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갑질 민국, 갑질 사회] 하느님의 통치를 부정하는 ‘갑질’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다스리시는 그만큼, 사회생활은 보편적인 형제애, 정의, 평화, 존엄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80항).
‘갑질’은 사회생활에서 “보편적 형제애, 정의, 평화, 그리고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하찮은 가치로 전락했는지를 보여준다. ‘부조리한 지배 종속 관계’의 고착화는 하느님의 통치를 부정하는 ‘죄의 실재’, ‘죄의 구조’라 할 수 있다.
완벽하고 거룩한 관계, 그리고 관계의 훼손
하느님께서는 손수 창조하신 세상을 두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거듭 밝히신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관계는 그야말로 완벽한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심으로써 이 관계를 ‘거룩함’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모든 인간이 존엄한 이유와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의 근거는 바로 ‘하느님’과 맺은 관계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다. 이는 인간과 사회, 인간과 모든 피조물 사이의 올바른 관계 맺기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소명임을, 곧 신앙의 길임을 보여준다(창세 1,26-27).
그러나 창조에 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창세 1-11장 참조)에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세상과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 ‘죄의 실재’를 잊지 않는다.
성경은 이 ‘죄의 실재’가 그 규모에서나, 성격에서도 점점 더 확장 악화됨을 고발한다. 뱀과 여자, 여자와 남자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놓고 하느님과의 그 거룩한 관계를 훼손한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지키는 사람”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죽임으로써 ‘형제 관계’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사람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두고,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을 정도로 ‘죄의 실재’는 확장된다. 마침내 사람들은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은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고 뜻을 모은다. 이를 두고 주님께서는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죄의 실재’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셨다. 정의의 심판과 사랑의 돌봄이 바로 하느님의 응답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지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만든 두렁이” 대신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주셨다.” 카인에게는 “짊어지기에 너무나 큰 형벌”을 내리셨지만,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위험에 놓인 그에게 “표를 찍어주셔서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타락한 세상”,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시고 홍수로 벌하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당신과 영원한 계약을 세우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셨다.
또 하느님께서는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고”,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과 “복”을 약속하신다.
‘죄의 실재’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탈출 사건’에서 절정을 이룬다. 야곱의 집안이 이집트에 들어가 “번성하고 더욱더 강해져서, 그 땅이 이스라엘 자손들로 가득 차”(탈출 1,7)게 된 배경에는 물론 야곱의 열두 아들들 사이의 왜곡된 관계가 있다(창세 37장). 이집트 땅에서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탈출 2,24).
하느님께서는 불의를 바로 잡으시는 분이다. 탈출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생생한 필체로 소개한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 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3,7-10). 물론 이 파스카가 이스라엘에게는 해방이지만, 파라오와 이집트에게는 재앙이었다.
새롭고 영원한 관계
하느님께서는 이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그분과 함께 새롭게 하시고 완성하신다. 철저하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희생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 백성에게 참된 생명의 길, 참된 행복의 길, 참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며 모범이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을 형제애로 격상시켰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 이웃은 더 이상 남이 아니라, 바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형과 아우, 누이와 오빠, 외아드님의 벗이 된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의 지체가 된다.
그럼에도 복음에서는 한 몸의 지체이고, 형제이며, 벗인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또 하느님의 통치와 사회생활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을 가르자면, 한편에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수석사제와 대사제, 카야파와 헤로데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군중이 있다. 이 두 집단 사이의 관계는 양을 돌보지 않는 삯꾼과 ‘목자 없는 양’, ‘길 잃은 양’의 사이로 비유된다. 물론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착한 목자로서의 사명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한편에는 온갖 무거운 짐으로 신음하는 대다수의 ‘사회적 약자’가 있다. 질병으로, 더러운 영으로, 굶주림으로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초주검이 되어 내버려진 사람과 라자로가 등장한다.
다른 한편에는 무거운 짐을 지게 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이들, 가난한 과부를 등쳐 먹는 이들, 곳간을 헐어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자기 곡식과 재물을 모아두려는 이들,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사는 이들, 초주검이 된 이를 보고도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 버리는 극소수의 ‘사회적 강자’가 있다. 그렇게 형제 관계 또는 벗의 관계 대신에, 힘이 센 소수와 무력한 다수 사이의 지배라는 왜곡된 관계가 있음을 복음은 보여준다.
이 왜곡된 관계는 하느님의 통치마저 부정한다. 안식일 법과 성전 규정을 내세워서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마저 훼손시킨다. 성전마저도 강도의 소굴로,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다. 마침내 이 불의는 하느님 나라에 폭행을 가한다. 포도밭 주인의 상속재산을 빼앗으려 아들까지 죽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의를 드러내신다. 그분은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에 함께 앉으심으로써 당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셨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실현하신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셨지만, 부활로써 하느님 통치가 죽음의 권세를 물리쳤음을 고백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 공동체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복음”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며 ‘비움과 버림’, ‘가난과 박해’의 예수님의 길을 따라나선다(「교회헌장」, 8항 참조). 오늘까지 그리스도 제자 공동체는 곳곳에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복음화 사명을 수행한다(마태 28,19-20).
‘갑질’과 ‘죄의 구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공동체에 부여하신 이 인류 복음화 사명을 하느님 백성은 ‘경신’(신앙고백과 전례와 기도, 하느님 사랑)과 ‘인간 존엄함’의 수호와 사회의 ‘공동선’(이웃 사랑)의 실현으로 드러낸다(「교회헌장」, 「사목헌장」;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3편 ‘그리스도인의 삶’; 「간추린 사회교리」 참조).
‘갑질’을 두고 사회교리는 ‘죄의 구조들’이라 한다. “하느님의 뜻과 상반되고 이웃의 선익에 위배되는 행동과 태도들, 또 그러한 행동들에서 비롯되는 [이 죄의] 구조들은 오늘날 두 가지 범주로 나타난다.
한편에서는 이득을 향한 강렬한 욕망이며, 다른 편에서는 자기의 의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다. 혹자는 여기에 ‘무슨 수를 다해서라도’라는 한마디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죄의 구조는 “점점 커지고 확산되어 인간의 행동을 제약함으로써 또 다른 죄의 원천”(「간추린 사회교리」, 119항)이 되며, “폐쇄된 지배 집단”(406항)을 형성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 강화하려 한다.
그 때문에 교회는 기득권을 가진 ‘갑’에게 ‘을’을 도와주어야 할 연대성의 의무, 불균형을 개선해야 할 정의의 의무, 갑의 발전이 을의 발전을 방해해서는 안 될 보편적 애덕의 의무를 요구한다(「민족들의 발전」, 44항 참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갑의 을(사회적 약자) 배제’ 사회와 ‘무관심의 세계화’를 신랄하게 고발하며, 보편 형제애와 연대의 세계화를 호소한다. ‘갑질’은 탈인간화의 길(「복음의 기쁨」, 51항 참조)이기 때문이다. ‘갑질’보다 더 높은 수준의 ‘연대, 정의, 애덕’, 그리고 ‘형제애’의 삶이 시급하다.
한국교회의 교회다움에 도전하는 갑질
“어느 누구도 종교는 사회생활과 국가생활에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사회제도의 건전함 여부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고,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의견을 밝힐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종교는 오로지 사생활의 내적 지성소의 영역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복음의 기쁨」, 183항).
프란치스코 교종의 ‘2015년 평화의 날 담화’에서 ‘갑질’에 맞설 실질적인 지침을 찾아보았다.
첫째, 인간의 존엄함과 사회의 공동선을 수호해야 할 정치 공동체의 올바른 역할이 절실하다.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는 입법 활동을 펼쳐야 한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인권을 수호하며, 인권이 유린될 경우 이를 회복시키는 올바른 법들이 필요하다. 그런 법들에는 반드시 피해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고, 그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하며, 부패와 부정의 여지를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 효과적인 사법 수단도 포함되어야 한다.”
둘째, ‘갑질’의 세계화 현실을 고려한다면, 다양한 수준의 정부 간 기구들 사이의 협력이 필요하다. ‘갑질’을 극복하려면 “보조성의 원리를 지키면서… 다양한 수준의 협력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국내외 기구와 국제기구, 시민 사회 단체와 재계가 포함된다.”
셋째,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도 필요하다. “갖가지 형태의 종속화가 분배 사슬 속에 비집고 들어오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시민 사회 단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사람의 양심을 일깨우는 임무, 노예 문화와 맞서 싸우고 이를 근절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면 무엇이든 촉진시키는 임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교회와 신앙인은 “악의 공범”이 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자유와 존엄을 빼앗긴 형제의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몸을 어루만질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교회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진리를 증언하고, 불의를 고발하며, [공정, 통합, 참여, 지속 가능의] 참된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교회가 정의를 증언한다면, 교회는… 다른 사람 눈에 정의롭게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행동 규범, 재산, 생활양식 등을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1971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세계 정의」, 38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