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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와 통찰로 이르는 투명한 깊이의 세계
----이병연의 시세계)
김병호 (시인)
무명으로 살다가 사후 랭보와 더불어 프랑스 상징파의 선구자로 평가받은 로트레아몽(Le comte de Lautreamon, 1846~1870)은 “시는 만인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말로도 유명하다. 이 발언의 맥락과 전후 사정을 살펴야 진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에게는 충분히 경청하고 새겨야 할 만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여겨진다.
요즘의 시가 지나치게 독자와 멀리 떨어져 있고, 일군의 시인들은 그것을 하나의 지위로 견고화하려는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특히 밀교적인 자아 중심적 시세계를 좇는 현대 시인들에게 로트레아몽의 150여 년 전 발언은 뜨끔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시는 결국 독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우리 시단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병연의 시는 더욱 신선하고 귀하다. 우선 그의 시는 일관되게 인간의 가장 비근한 정한(情恨)에 근거하고 있다. 연인에 대한 연민, 어머니와 이웃에 대한 애정, 운명에 대한 순정. 비근하고 보편적인 제재가 그의 시 핵심 부분을 이루고 있다. 시에 대해 별다른 조예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런 게 시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과 그의 시가 딱 맞아떨어지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또한 이병연의 시는, 시의 원시적 상태를 유지하며 자기 세계를 개진하고 있다. 발상의 형식에서도 소박성이 갖추고 있어, 그의 시를 읽으면 자신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모호하게 포장하지 않고, 정감의 솔직한 토로로 독자에게 다가서려는 시적 자세의 빤히 들여다보인다.
시의 원시적 상태를 시 세계로 포착하여 직정(直情)적 음률화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병연의 시적 궤적은, 등단 이후 두 권의 시집을 출간하고서도 퇴색하지 않았다는 것이 여간 대견스러운 일이 아니다. 새롭고 낯선 것만을 민첩하게 자랑하는 오늘날의 시대사조나 감각에 맞서,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세계를 지켜내고 있다.
40여 년 교단생활을 한 이병연 시인의 작품에는, 학생을 바라보듯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늘 희망을 신뢰했던 첫 시집 『꽃이 보이는 날』이나,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자연과 인간의 삶을 애정 어린 시각으로 바라본 두 번째 시집 『적막은 새로운 길을 낸다』도 각각 이러한 시적 맥락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인간과 자연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며 사랑받아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그래서 시를 통해 사랑과 꿈을 심어 주고 위로와 위안을 주려고 한다. 이번 세 번째 시집 은 이병연 시인의 이런 시적 세계관을 더욱 견고하게 확인해준다.
제재의 보편성 그리고 평이한 가락, 이러한 시의 원시적 상태가 이병연 시의 기반이 되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는 우리 생활감정에 밀착된 모국어의 표현에 수완을 보이고 있으며, 평이한 가락으로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진솔하고 소박하게 표현하며, 독자에게 ‘시의 맛’을 선사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낚싯대 하나 들고
제주 바다를 여러 날 거닐었다
수시로 입질이 왔다
질펀히 내려앉은 바위
이름 없이 산 것들 줄지어 낚는다
널뛰는 파도를 품었다 놓느라 울퉁불퉁한데
움푹 팬 가슴엔
햇살과 바람과 눈물이 머물러 있다
허공에 힘껏 줄을 던져
깎아지른 절벽을 낚는다
정을 쪼듯 내리치는 물살에 새겨진 문신
상처가 깊을수록
지느러미의 골이 빛난다
덜컥 입질이 왔다 이번엔 정말 크고 센 놈이다
머리를 하늘로 치켜올리고 기둥처럼 떼로 서 있는 놈
하늘이 같이 끌려 온다
낚싯대가 휘청인다
함께 쉽게 사는 법은 없어서
세로로 그어놓은 금이 햇살에 도드라진다
몸에 새겨진 저마다의 사연
바다에서 낚은 것을 바다로 돌려보내고
당신의 마음이 닿지 못하는 날
바위 낚시를 떠나야겠다
「바위를 낚다」 전문
객관적인 시선으로 차분히 생을 응시하는 이병연 시인의 시적 태도는, 심화된 시적 성찰의 경지로 나아간다. 작품 내내 내성적 목소리로 진술되다가 “당신의 마음이 닿지 못하는 날/ 바위 낚시를 떠나야겠다”라는 마지막 연에서 내면 독백은 보다 객관화된다. 이러한 진술은 내면 독백이 단순히 감상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고 화자의 내면 독백이 개인적 삶의 감정을 넘어 일반 독자 모두가 흔히 느끼는 보편적 감정으로 확산되는 역할을 한다. “파도를 품었다 놓느라” “움푹 팬 가슴엔” “햇살과 바람과 눈물이” 머문, 바위에 시인의 시선이 고정된다. “물살에 새겨진 문신”을 보며 시인은 “몸에 새겨진 저마다의 사연”에까지 마음을 밀어 넣는다. 하지만 “함께 쉽게 사는 법은 없어서” 당신의 마음이 닿지 못한다. 당신과 나만의 운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 이런 운명에 놓여 있다.
하늘을 향해 기둥처럼 서 있는 바위의 “움푹 팬 가슴”과 ‘깊은 상처’ “세로로 그어놓은 금”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생을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자연물을 통해 한층 진실되게 전달된다. 이 작품은 시인이 궁극적으로 ‘바위’라는 이미지 표현에 의해 자신이 생각하는 삶을 전달하는 효과를 갖고, 그 이미지 표현이 환기하는 시적인 정서가 독자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머물게 한다.
삶과 운명에 대한 시인의 성찰은 ‘낚시’라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감상에 빠지지 않는 객관적 시선을 확보하고, 다시 ‘바위’라는 구체적 사물에 대한 이미지 표현을 통해 보다 진실한 감동을 주고 있다. 마치 일기를 쓰듯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적 태도, 자신의 내면을 수사적으로 장식하지 않고, 맑고 투명한 언어로 고백하여 진실한 감동을 주는 시적 표현 방법은 내성적인 목소리와 투명한 서정의 언어가 어떻게 시로 완성되는 지를 보여준다. 이병연 시인은 감상적으로 치부되는 감정에 내재된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자신의 시적 능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꽃은 눈이 멀도록 눈부시게 왔다 간다
황홀한 순간,
꽃은 사진 찍듯 저장되지
세상이 텅 빈 공갈빵 같은 날
오래된 기억을 클릭해
내가 삭은 식혜 속 밥알 같은 날
잊고 지내던 나를 불러내
꽃은 빛깔만 고운 게 아니야
화심에 맺은 순정
부르기만 하면 잠근 문을 열고 맨발로 기어 나오지
사는 것 잠깐이라
사랑을 안고 갔다는 꽃의 말
장롱에 오래 넣어둔 옷처럼
접혔던 꽃잎이 허공을 밀어내며 피어나
한 생이 저만치 갔다가 돌아오는 거야
-「꽃의 말」 전문
이병연 시인은 자신 혼자만을 위해 감정을 소비하는 시인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문제, 생의 본질을 앞에 두고 고민하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항상 삶의 누추한 변방을 서성이면서도 가장 순수한 영혼의 바탕을 유지하려고 스스로를 가다듬는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꽃’ ‘벌’ ‘숲’ ‘바위’ ‘식물’ 등 자연에 대한 관심이 넓게 분포되어 있는데, 자연 자체의 미감이나 생명감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연’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실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시인은 자연의 순환구조처럼 인간의 육체성, 삶 또한 순환되는 자연의 일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존재 탐구의 상상력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태도를 그 기저에 깔고 있다. 꽃이 빚어내는 황홀한 순간에 대한 인식 역시 자연으로서의 인간,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의 인간을 자각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작품의 시작은 시인(화자)의 작은 흥겨움이 느껴지는 읊조림과 같다. 작품을 지배하는 기조는 일상의 자잘하고 기본적인 욕망 충족에서 행복을 느끼며 사는 현대인의 소박한 생활 정서에 근거한다. “세상이 텅 빈 공갈빵 같은” 일상에서, ‘나’는 “삭은 식혜 속 밥알” 같은데, 순정한 ‘꽃’이 피고, 꽃은 내게 황홀의 순간을 선사한다.
꽃의 은유적 의미는 비단 이 작품에서만 드러난 것은 아니다. “긴 장마에 빛나”는 나리꽃(「장마에 나리꽃은 피고」)이나 “검정 배낭 속에 꽂힌 파(꽃)”(「배낭에 꽂힌 파다발」), “눈이 닿는 곳마다/ 아픈 땟물/ 죽죽 빠져나”가는 꽃(「때죽나무꽃」), “선홍빛 백일홍”(「기약」), 봄볕에 “팝콘처럼 펑펑 쏟아져 나온 꽃”(「봄날에는」), “누군가 할퀸 적 있다고 귀띔하고 싶”은 매발톱꽃“(「매발톱꽃」) 등 구체적 이미지로 시집 전반에 두루 활용되고 있다.
시인이 소박한 생활인으로서 내비치는 발언들은 아주 평명(平明)한 언어로 표출되어 시의 표현과 형상을 위한 별다른 시적 의장이 구사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이 평명한 언어들에 내재된 미묘한 의미작용에 힘입어, 생기 있는 시의 언어로 거듭나는 매력이 있다. 세상 사는 일은 잠깐의 순간이어서 “사랑을 안고 갔다는 꽃의 말”은, 꽃의 말이 아니라 시인의 말이다. 구어체를 적극 활용하여 사태의 진술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느낌의 중심이 놓이기를 의도하는 화법은, 독자에게 각별하게 호소된다. “잊고 지내던 나를” 꽃이 불러내는 것처럼, 새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기본적 인식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게 된다.
꽃이 이 세상에 다녀가는 황홀의 순간 대신 사랑의 영원을 간직한다는 것은, 시인이 우리의 삶을 어떤 가치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 생이 저만치 갔다가 돌아오는 거야”라는 읊조림의 시구는 의미의 차원뿐만이 아니라 강한 호소력까지 겸비하게 된다. 사진을 찍듯 저장되고, 클릭해서 소환하는 ‘순간’ 대신, 호명하면 맨발로 뛰어나오는 ‘순정’의 가치를, 시인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생기 있게 환기한다. 실제로 시인이 지닌 이러한 인식은 “아름답게 사라지는 것들이/ 허무의 몸집을 키우네”라며 “잠시 왔던 것들이 돌아가는 이승에서/ 눈꽃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다/ 예고 없이 녹아내”리는 풍경을 그린 「아름다운 사람」에서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원수산에서 내려오는 길
제멋대로 내지른 바위와 돌의 위험 신호
몸이 좌우로 쏠려 긴장한 발아래
들려오는 소리
길이 험하구나. 조심해서 내려와.
나는 지팡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구부정한 할머니가
달팽이처럼 따라오는 아들에게 하는 소리
길이 보이지 않아도 길을 내며
몸이 닳도록 꼿꼿이 중심을 세우는 지팡이
한평생 아들의 지팡이였을 어머니
기우뚱거려도
끝까지 아들의 지팡이로 남고 싶은 마음
험한 바위와 돌길을 뚫고
산 아래 내려와 가쁜 숨 몰아쉬며
갈라진 논바닥 같은 손으로
다시 한번 힘껏 지팡이를 쥔다
-「지팡이」전문
21세기 현대의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이전의 자율성을 상실하고 제도에 더욱 얽매여가고 있다. 시 역시 거대한 자본의 물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전의 고유한 가치들이 훼손당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시의 역할은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지켜내고 현실을 성찰하며 삶의 올바른 지향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병연 시인은 자기 삶의 경험에 투사된 세계를 전체적으로 통찰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현대에서 소용되는 보편성이나 합리성과 달리 그는 시인이 감수하는, 가장 절실한 삶의 감각과 진정성에 대한 예리한 촉수를 내장하고 있다.
물신화된 삶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그것을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로 환산되고 개개인의 독자성과 기존의 인간의 본래적 가치는 무시된다. 이병연 시인은 인간을 소외로부터 지켜내고 인간이 온전히, 제대로 살 수 있게 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보여준다. 바로 “한평생 아들의 지팡이였을 어머니”이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권능이 훼손된 현대사회에서 시인은 ‘어머니’를 통해 구체적인 지각과 경험을 재현하면서 정서적 파급력까지 갖춘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몸이 닳도록 꼿꼿이 중심을” 세워 아들의 길을 내는 어머니의 마음. “길이 험하구나. 조심해서 내려와./ 나는 지팡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라고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인간의 보편적 진실과 삶의 진정성을 지켜내는 소중한 가치이며 지표가 된다. 단지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모성으로 치부하기보다는, “끝까지 아들의 지팡이로 남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시인 고유의 섬세하고 구체적인 감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은 “병든 노모와 다섯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용수철」)나 “어린 새끼들 데리고 구불구불 먼 길 가느라/ 날기를 포기해 버린 어머니”(「그녀의 날개」), “평생 자식을 자랑으로 여긴” 어머니(「커다란 양푼」), “줄행랑치는 나를 발이 닳도록 쫓아다닌 어머니”(「구멍이 난 양말」), “쓸모를 다한 기둥처럼 기울어진 노모”(「눈 온다」), “괜찮다는 말을 / 입에 달고 산” 엄마(「속」) 등의 모습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물론 어머니의 이런 마음이 수렴되는 지점도 이 시집은 놓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내 시보다 아름다운 아이”(「진정한 시인」)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비에 흠뻑 젖은 아이”(「비 맞은 아이」),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며 훌쩍이는 어린아이(「내 안의 역」), 텃밭 옥수수 모종에서 핀 알곡에서 보는 “반짝이는 아이”(「옥수수」)를 바라보는 시선에 투영되어 있다.
시집을 통독하면 바로 알 수 있겠지만, 이병연 시인은 고도의 직관력과 통찰을 통해 현대의 삶을 가로지르는 가치를 제시한다. 그는 우리의 서정시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온건한 외형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보여주는 신선한 표현과 은유적 사유는 이병연 시의 동력이 되며, 그의 시가 한없이 새로워질 수 있는 내면에 긍정적 작용을 하고 있다.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비비며
누룽지에 물을 붓는 아침
물이 누룽지 사이로 들어가
딱딱한 근육을 말랑말랑하게 풀어주고 있다
굳게 닫힌 문을 열고 풀어헤치는
저 유들유들한 몸짓
쓸데없는 아집을 내려놓듯
견고한 껍질을 깨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유영하는
누룽지의 눈물겨운 투항
머리가 누룽지처럼 뻣뻣해질 때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고 문을 굳게 닫고 싶을 때
누룽지를 끓여야겠다
-「누룽지를 끓여 먹는 아침」 전문
그렇다면 물신화된 삶으로 인해 손상된 가치는 무엇일까. 앞선 시에서 찾은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다. 물질적 욕망은 인간성을 쉽게 박탈해 간다. 계량화할 수 없는 주관적 영역은 물질적 삶의 질서를 방해하는 골칫덩이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 ‘당신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 ‘얼어버린 마음’ ‘부러진 마음’ 등 시집 『바위를 낚다』에는 수많은 양태의 마음이 등장한다. ‘마음’이 구태의연한 감정의 표현으로 인식되는 현대사회에서 ‘마음’만큼 직접적으로 대상을 감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기쁨’이니 ‘슬픔’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마음의 작용은 대상을 향수할 수 있는 주체의 능동적 역할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인간 고유의 현상은 현대사회의 물신화 기조에 역행하는 주관과 정서의 창조력을 내장하고 있다. 이병연의 시들은 바로 이러한 섬세하고 정밀한 내면의 기록인 동시에 자기 성찰의 과정이다.
밥 대신 물에 만 누룽지를 먹는 아침, 시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이치를 깨닫는다. ‘딱딱한 근육’과 ‘견고한 껍질’의 아집과 사고(思考)를 버리고, 물에 불은 누룽지처럼 ‘유들유들’ “굳게 닫힌 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유영”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스스한 얼굴로” 아침을 맞는 까닭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누룽지의 눈물겨운 투항”처럼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무엇인가 마저 지우진 못했다.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마음과 일이 세상살이 곳곳에 무슨 함정처럼 놓여 있다. 그것이 함정임을 빤히 알고 나아갈 때, 아니면 최후의 결전이라도 되는 듯 “문을 굳게 닫고 싶을 때”의 속내를 시인은 잘 알고 있다.
무심치 못해서 혹은 버텨서 지켜야 하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겪게 되는 마음의 움직임은 상처나 소외의 구석진 자리로 흐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마음의 행로를 쓸쓸하고 건조한 눈길로 좇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고, 자기만의 지혜를 만들어낸다. 이병연 시인의 좋은 시들은, 이렇게 삶의 경험을 잔잔히 녹아내면서 축적된 삶의 지혜와 가치를 담아내는 절창이 다수이다. 그는 누구보다 마음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멀다 멀리 먼
발음을 하면 음이 떨려 나온다
멀다라는 말
사람의 마음을 외롭게 하는 말
마음에 빈 공간을 인정사정없이 공격하는 말
아예 멀리 가버려 결코 볼 수 없는 사람이 생긴 뒤로
멀리라는 말은 눈물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아예 가 버렸다는 말에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있다
멀리라는 말은 가까이라는 말의 이음동의어
멀리 있어 가까이하고 싶다는 말이다
가깝다 가까이 가까운
발음을 하면 음이 자박자박 엉겨 나온다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먼이라는 말은
삶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바라보는
별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떨려 나오는 말」 전문
이 시집은 자기 고백적 성격이 강한 편이다. 전통 서정주의자로서 타고난 시인의 기질 탓일 것이지만, 시인이 고전적인 절제의 기율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들이 곳곳에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내면의 자아와 밀착된 ‘말’의 이미지가 인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병연 시인은 다른 시편들과 달리 이 작품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내면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다. ‘멀다’ ‘멀리’ ‘먼’의 단어들을 발음하면서 자기 ‘슬픔’에 대한 도저한 의식을 보여준다. 내면에 자욱한 외로움과 슬픔으로 인해 스스로 침잠하는 풍경은 마음의 거처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아의 모습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시인은 ‘가깝다’ ‘가까이’ ‘가까운’이란 말들을 상대어로 찾아내, 바닥을 보이는 심연의 거울에서 ‘삶의 무게’를 들여다보게 된다.
처절한 고백과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닿게 되는 시적 인식의 결정체는 마지막 연이다. “먼이라는 말은/ 삶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바라보는/ 별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별의 또 다른 이름”을 발견하기까지 삶의 고통과 지루한 고독의 무게,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의 중압감을 시인은 온몸으로 실감한다.
시인은 이러한 깨달음으로 영혼의 승화에까지 이르기 위해 힘겨운 진통의 과정을 겪은 것이다. 마음을 외롭게 하고, 마음을 공격하는 말, 눈물의 다른 이름인 ‘멀리’는, 시인의 고통과 상처를 압축하는 선명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이 지점이 바로 이병연 시의 수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소 감정에 치우쳤던 정조는 ‘가까이’라는 말로 응축되어 다시 담백하게 건조해진다. 이는 자기 내면을 치열하게 응시하며 자아를 투사하는 방식으로 획득한다. 그는 언어의 심연을 획득하며 삶의 본질을 발견한다. 외로움과 슬픔이라는 감정의 무게와 나약한 존재의 내면을 재현하면서 군더더기 없이 압축된 묘사와 탁월한 비유, 효과적 리듬으로, 시인은 감정을 조절하며 ‘별’의 또 다른 이름 ‘먼’을 명명할 수 있었다. 삶에 대한 철저한 자기 응시를 통해 시어의 내재적 가치와 질서를 발견해내는 이병연 시인만의 조형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병연 시인은 삶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탐구를 행하는 천성적 시인이다. 그의 시선을 거치면 어떤 밋밋한 풍경이나 하찮은 사물도 유의미한 삶의 징표가 된다. 그는 과장된 수사나 거친 목청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절박하고 처절한 삶을 재현해낸다. 첫 시집 이후 지속적으로 삶에 대한 끝없는 응시와 통찰을 보여주는 그를 깊이의 시인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의 시는 다양한 진폭으로 펼쳐지기 보다는 일정한 주제를 두고 반복적으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삶을 증명하는 자연과 어머니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자기 삶의 방식과 지혜를 온순하게 보여준다.
그는 시를 통해 과장이나 왜곡을 허락하지 않는,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정직한 응시가 우리의 본질을 투시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집 『바위를 낚다』는 시적 대상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존재의 ‘깊이’에 대한 이병연 시인의 성찰의 역정을 보여준다. 앞으로 그의 어떤 길을 보여줄지 자못 궁금하다. 존재의 심연에 대한 탐색을 새로운 각도에서 추구할지, 지금의 투명하고 단순한 시학으로 자신만의 깊이를 만들어낼지. 『바위를 낚다』 다음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