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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 하나가 / 조상호 목사
영국의 어떤 교회에서 5살 밖에 안 되는 한 어린 소년이 선교헌금을 드렸습니다. 헌금 액수는 1페니였습니다. 미화로 환산하면 20센트 정도 되는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이렇게 적은 돈을 헌금하면서 봉투에 ‘이 돈으로 신약성경을 사서 인도에 보내달라’고 지정했습니다. 교회는 이 어린아이의 뜻을 존중해서 교회에서 돈을 보태어 작은 신약성경 한 권을 샀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아이가 이름을 적고 사인하도록 한 후 인도로 보냈습니다.
그 일이 있은 2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교회의 목사님이 인도의 어떤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은 다른 마을과 달리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이 든 그 목사님이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감동적인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옛날에 선교사님 한 분이 자기 마을에 들어와 전도 하면서, 조그만 신약 성경 한권을 주고 간 것이 그 마을 복음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귀하게 잘 보관하고 있는 그 성경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다 떨어지고 남루한 자그마한 신약성경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마지막 표지를 들춰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20년 전 자기 교회의 5살 어린아이의 사인이 있는 성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한 사람의 영향력’이라고 말합니다. 한 어린아이의 헌신이 마을 전체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힘은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한 사람을 통해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어머니 헬레나가 영국에서 집정관(consul) 생활을 할 때, 가정부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된 어머니의 영향으로 아들 콘스탄틴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나중에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는 이름 모를 한 가정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름 모를 한 가정부 한 사람 때문에 기독교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한 사람을 통해 주위에 큰 변화가 나타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사실은 한 사람의 영향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병에 걸려 고생을 하던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씩 들어갔다 나왔더니 나병이 고쳐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보통 본문을 대할 때, ‘나아만 장군의 순종을 배우라’, ‘엘리사 선생의 말대로 일곱 번씩 요단강에 들어갔던 나아만처럼 순종하되 끝까지 순종하라’, ’믿음으로 순종하면 기적을 체험한다‘는 식의 교훈을 받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본문을 통해 순종을 배울 수 있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다른 차원에서 오늘 본문을 대하려고 합니다.
나아만이나 엘리사 선지자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나이 어린 한 소녀에게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소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이름 모를 한 소녀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크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지나치기 쉬운 소녀입니다.
그러나 이 소녀를 빼놓으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본문이 주는 교훈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습니다.
2절을 보면, 이 소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2절을 보겠습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으매 그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북쪽에 있는 아람나라의 침략을 받아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나이 많은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나이 어린 아이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소녀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아람 나라로 끌려 왔습니다.
그리고 종이 되어 나아만의 아내를 섬기며 살았습니다. 정든 고향 땅을 떠나 사랑하는 부모님과 이별하고 친척들과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고 이방 나라에서 쓸쓸하게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섬기고 있는 주인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기가 섬기고 있는 부인의 남편이 나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1절). 비록 그가 아람 나라를 구원하는 큰 공을 세운 군대장관으로서 왕에게 크게 신임을 받은 용사였지만,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권세와 명예와 재물과 지식을 모두 얻은 사람이었지만,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당시에 나병은 저주 받은 병으로 여겼습니다.
추측컨대 나아만도 나병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권력과 돈으로 자신의 나병을 고치려고 힘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병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율법에 의하면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나아만 역시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외롭게 따로 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식이 그 집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어린 여종에게 들린 것입니다.
이 소녀 입장에서 볼 때, 나아만이 나병에 걸려 죽게 되었든지,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비참하게 따로 살아가든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자기 조국을 어렵게 하고 자기를 포로로 끌고 간 원수의 나라인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이 나병에 걸려 죽게 된 것을 더 좋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같이 3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이 한 절 말씀을 통해서 어린 여종의 장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여종으로부터 몇 가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1) 확신을 가지라
첫째로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불확실한 시대라고 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불확실합니다.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30년을 한 세대라고 했지만, 지금은 3개월만 지나도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만큼 변화가 심합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됩니다. 반대로 오늘의 친구가 내일에는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승곡선을 그리던 경제가 어느 날 갑자기 곤두박질을 치고, 밑바닥으로 떨어져 수년 내로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던 경제전문가들을 비웃듯 경제가 짧은 시간 내에 회복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기도 하고, 그렇게 잘 나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실직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정말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확신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어제 저녁 채널 3의 7시 뉴스 마지막 Closing 코너에 한 인물이 등장한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복싱 선수 출신입니다. 그가 무명의 권투 선수로서 챔피언과 시합을 앞두고 소감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난 세계 최고의 복서이다” 사람들은 그를 건방지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합에서 그는 승리를 했습니다. 그 후 그는 경기를 할 때마다 상대방을 몇 라운드에 KO 시키겠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 마다 그의 예상이 적중을 했습니다. 그러자 기자들은 그 선수를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누구인 줄 아십니까? 무하마드 알리입니다. 알리는 그때부터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를 세계적인 선수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자기 확신’이었습니다.
알리는 지금 파스킨 병으로 온몸이 떨리는 마비 증상을 갖고 있지만, 지금도 자선 사업을 하면서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현역 시절 무하마드 알리의 복싱 실력이 뛰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실력도 확신 때문에 더 빛을 발한 것입니다. 어떤 상대 앞에서도 당당하고, 어떤 살인 펀치를 가진 선수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난 세계 최고다, 나는 너를 이길 수 있다, 나는 너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제너럴 일렉트릭 회장 및 CEO를 역임한 적이 있는 잭 웰치의 <승자의 조간>에 보면,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젊은이들은 흔히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 야망,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꽉 차있으면서 모든 것을 날려 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망설이곤 한다. 두려움 극복에 필요한 것은 자기 확신이다. 이 문제에 관한한 용기는 중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자기 확신이다. 그것 없이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확신’입니다.
확신이 없으면 아무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종에게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자기에게 물어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나 몰라‘ 하며 입 다물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주인의 피부에 나병이 생겼든지, 발에 무좀이 생겼든지, 소화불량에 걸렸든지, 주인집에 근심이 쌓였든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종은 자기 주인에게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시면, 주인의 나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매우 위험한 말입니다.
차라리 말하지 않은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났지만 그가 나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포로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물건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을, 그것도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났지만, 나병을 고치지 못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종은 죽음을 각오하고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시면, 주인의 나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여종이 죽을 것을 각오하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확신 때문입니다. 이 여종에게는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면 지금까지 고치지 못하던 나병도 거뜬히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나라 잃고 포로로 잡혀 왔지만, 남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믿음만은 확실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확신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이 어린 여종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확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확신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확신하는 사람은 말이 길지 않습니다.
긴가 민가 하는 사람은 구구절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느라 말이 많아집니다. 희미하게 믿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를 들어보면, 복잡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기도를 해도 간단하지만, 힘있고 분명하게 기도합니다. 전도를 해도 확신 있는 사람은 짧지만 설득력 있게 말합니다. 여러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도 바울과 같은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어린 여종처럼, 확신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뢰를 받으라
둘째로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에 ‘신뢰(Credibility)’라는 단어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시중에 이런 유머가 유행하겠습니까?
의처증이 심한 남편이 아내만 남겨둔 채 해외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아파트 경비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출장간 사이 누가 찾아온 사람 없었죠?” 경비 아저씨가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없었는데요! 아 참 자장면 배달 청년이 이틀 전에 왔었어요.” 남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휴~~우 안심이군요.”
그러자 경비아저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아직 안내려 왔어요.” 요즘 남편과 아내의 ‘신뢰’가 깨어진 가정이 많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하고,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내는 직장에 간 남편을 의심하고, 남편은 집안에 있는 아내를 의심합니다.
직장에서는 직장동료 간에 서로 의심을 하고, 학교에서는 친구 간에 신뢰가 깨어져서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만나서 대화를 하고 함께 밥을 있지만, 신뢰가 깨졌기 때문에 진정한 교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뢰가 회복되지 않고는 이 땅에서 복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신뢰가 깨어진 사람과 함께 교제해 보셨습니까? 신뢰가 깨어진 사람과는 진정한 교제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제품을 구입하려고 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회사와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약국에 가서 약을 사고, 신뢰할 수 있는 있는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신뢰할 수 있는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먹습니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현대에서 이 ‘신뢰’는 돈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신뢰 때문에 사람을 얻을 수 있고, 신뢰 때문에 돈도 벌 수 있고, 신뢰 때문에 사업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어린 여종은 주인에게 신뢰를 받았습니다. 사실 가까운 사람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1년 12달, 365일을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사는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여종은 여주인으로부터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시면, 주인의 나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여종의 말을 자기 남편인 나아만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만은 부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여종의 이야기를 왕에게 직접 보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람 왕으로부터 이스라엘 왕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친서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린 여종은 나아만이 그의 말을 믿고 왕에게 직접 보고할 만큼 신뢰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 어린 여종처럼 신뢰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자녀는 부모님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업장에 신뢰받는 크리스챤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고 있는 이 시대에, 믿을만한 사람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희망을 전하라
셋째로 희망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옛날에 나병은 사람이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요즘이야 의학이 크게 발달해서 치료할 수 있습니다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고쳐주지 않으시면 나병을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희망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엇습니다.
나아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으로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나병에 걸리자 그에게서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부하들을 호령할 수 없었고, 더 이상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없었고, 더 이상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여종으로부터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만나시면, 주인의 나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이 말은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절망 가운데 있던 그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결국 나아만 장군은 여종이 전해준 희망의 메시지를 통해 사마리아에 가서 엘리사 선지자를 만난 후,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근 후 나병이 깨끗하게 치료되는 역사를 체험을 합니다. 이 어린 여종은 희망의 메신저였던 것입니다.
군의관이었던 에반스 박사의 글 중에 보면, 한 병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병사가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에 실려 왔는데, 소생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의관이 이 환자를 두고 무심코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이 친구 내일 새벽까지 죽지 않으면 희망이 있어요." 죽음 앞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병사는 그 군의관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희망이 있어요. 내일 새벽까지 죽지 않으면....' 의미 없이 던진 군의관의 한 마디 말에 희망을 걸고 그 병사는 죽지 않으려고 밤새도록 몸부림을 쳤습니다. 죽음이 점점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죽음에게 저항한 것입니다.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의 희망을 붙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드디어 긴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자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낫습니다. 소생 가능성이 없었던 그가 살아난 것입니다. 결국 그 군의관의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죽어가던 그 사병을 살린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희망이 없는, 희망이 사라진 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부정적으로 말할지라도 긍정적으로 말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절망하고 있어도 희망을 노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한 소녀는 나라를 빼앗긴 채 부모님과 친구들과 이웃들을 떠나 아람 나라에 끌려와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힘도 없고, 신분도 천하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여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은 단순히 ‘나아만 장군이 이름 모를 여종이 전해준 말을 듣고 엘리사 선지를 찾아가서 나병이 치유되었다’는 것만을 가르쳐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 이름 모를 여종이 엘리사 선지자를 소개해 주었기 때문에 나아만 장군의 나병이 고침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린 여종이 시리아 제국을 복음화 시키는 위대한 일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린 여종이 아람 나라의 국방장관 나아만를 살렸고, 그에 따라 아람 왕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아람 나라를 변화시켰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운동을 일으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아람나라였던 곳에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이름 모를 어떤 여종을 통해 니느웨에 하나님이 증거 되었고, 200년이 지난 후 요나 선지가가 그들에게 가서 다시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도록 회개를 촉구했던 것입니다. 한 어린 아이의 전도를 통해 앗수르의 역사가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이방인이었고 이방종교를 섬기고 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바로 한 어린 아이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놀라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한 마을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던 5살 난 어린 아이처럼, 전도의 불씨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치게 한 나이어린 여종처럼,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희망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다음 달 25일과 26일을 2009년도 홈커밍데이로 정했습니다. 친구나, 가족, 친척, 동료, 이웃 중에서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홍35 콘서트’를 합니다. 이 홈커밍데이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영혼들을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홈커밍데이는 예년에 진행하던 주일 오전이 아닌 주말 저녁이기 때문에 더 많은 분들을 모실 수가 있습니다. 또 콘서트와 드라마, 댄스 등의 문화를 통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번 기회를 활용하여 희망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 자리에 본문에 등장하는 어린 여종보다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포로로 잡혀서 종살이하던 그 어린 아이와 달리, 우리에게는 나라와 조국이 있습니다. 강제로 가족과 친척과 이웃을 떠나 살던 그 아이와 달리, 우리는 가족도 있고 친척도 있고 이웃도 있습니다. 나이어린 그 아이와 달리, 우리는 나이가 더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 아이처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여종처럼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람 왕과 아람 나라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던 어린 아이처럼, 가정과 이웃과 크라이스트처치와 남태평양과 세상 끝까지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