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생 극성(宋生克誠)이 조부공(祖父公)의 묘소에 아직 글을 새기지 못했다면서 나에게 찾아와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그 행장(行狀)을 얻어서 살펴보건대, 성씨(姓氏)는 여산 송씨(礪山宋氏)로서, 고려(高麗)의 정당문학(政堂文學) 송숙문(宋淑文)으로부터 성대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대대로 의관(衣冠)을 배출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의 증조부인 휘 경(瓊)은 군수(郡守)로 판서(判書)의 증직(贈職)을 받았고, 조부인 휘 익손(益孫)은 정난 공신(靖難功臣)으로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으며, 부친인 휘 유(瑠)는 현감(縣監)을 지냈다. 모친 이씨(李氏)는 왕자(王子)인 덕원군(德源君) 이서(李曙)의 딸로, ①성화(成化) 임자년(1492, 성종23)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세지(世智)요, 자(字)는 화중(和仲)이다. 나이 30에 음관으로 벼슬길에 올라, 돈녕부(敦寧府)와 영숭전(永崇殿)과 현릉(顯陵)의 참봉(參奉)을 거친 뒤,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으며, 가정(嘉靖) 병술년(1526, 중종21)에 고양(高陽) 행주(幸州)에 안장(安葬)되었다.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판서 윤세호(尹世豪)의 딸로서, 공보다 몇 년 뒤에 죽어 부장(祔葬)되었으며, 모두 2남 1녀를 낳았다.
딸은 왕손(王孫)인 영천군(永川君) 이미수(李眉壽)에게 출가하였다. 장남 송려(宋礪)는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이고, 차남 송초(宋礎)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다. 손자인 송극성(宋克誠)ㆍ송극겸(宋克謙)과 고덕윤(高德潤)ㆍ이정춘(李廷春) 등에게 출가한 손녀는 사평(司評)의 소생이고, 손자인 모(某)와 윤민준(尹民俊)에게 출가한 손녀와 또 어린 손녀는 감찰(監察)의 소생이다. 외손녀는 현감 조윤희(曺胤禧)와 생원 민용(閔溶) 등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아, 공이 세상에 보여 준 자취는 과연 어떠하였던가. 내가 홀로 공의 평소의 행적을 들어 보건대, 공은 학업을 닦았어도 과거(科擧)를 보기 위한 공부는 하지 않았고, 벼슬을 하면서도 직위가 보잘것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가한 시간이 나면 으레 술을 들곤 하였는데, 마셨다 하면 반드시 크게 취하였으며, 이따금씩 거문고를 연주하고 시를 읊으면서 자신의 뜻을 유쾌하게 풀곤 하였는데, 손님이 와도 또 여전히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공은 또 있고 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특히 사람과 사귈 때에도 제한을 두지 않았으므로, 사람들 모두 공과 교제하는 것을 즐겨했다고 한다. 아, 이 정도면 공이 어떠한 분이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술을 좋아한다 하여 꼭 툭 트였다고는 못해도 / 愛酒者不必通
툭 트인 이는 으레 술을 좋아하기 마련이요 / 而通者必愛酒
시를 잘 짓는다고 해서 꼭 유아(儒雅)한 법은 없지만 / 能詩者不必雅
유아한 이는 반드시 시를 잘 짓기 마련이요 / 而雅者必能詩
음률을 잘 안다 하여 꼭 화평하다고는 못해도 / 善於音者不必和
화평한 이는 으레 음률을 잘 알기 마련이라 / 而和者必善於音
그런데 더구나 이 모두를 한 몸에 구비한 이 / 況兼焉者
세상에서 우연히 볼 수 있음이 아님에랴 / 非偶有之耶
툭 트인 데다 유아하고 / 通以雅
유아한 데다 화평한 분 / 雅以和
내가 공과 나누게 된 정신적인 이 교유 / 吾固得公於神交
당시에 공과 노닐었던 사람들보다 더 깊으리 / 深於當時之與公游
어쩌면 내가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더라도 / 而或不知之者
이 외에 또 다른 것을 물어볼 게 뭐 있으랴 / 寧問其它
① 성화(成化) : 홍치(弘治)의 착오인 듯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9
宋生克誠以其王父公墓無刻文。來言於余。乃得考其狀焉。則姓出礪山。自高麗政堂文學淑文而大。代有衣冠。爲公曾祖祖者。曰瓊。郡守。贈判書。曰益孫。靖難功臣。礪山君。而縣監諱琉。公考也。妣李氏。王子德源君曙之女。以成化壬子生公。諱世智。字和仲。年三十。以蔭仕。更敦寧府,永崇殿,顯陵參奉。三十五而終。葬于高陽之幸州。於嘉靖丙戌也。公室坡平尹氏。判書世豪之女。其終後公若干年。葬則附。凡生二男一女。女適王孫永川君眉壽。長男礪。掌隸院司評。次男礎。司憲府監察。孫男克誠,克謙。女適高德潤,李廷春等者。司評出也。男某。女適尹民俊及幼者。監察出也。外孫女。爲縣監曺胤禧,生員閔溶等a049_246b妻云。嗚呼。公之見於世者。何如也。獨聞公之生平。學不爲擧子業。仕亦不恥小官。其間居必有酒。飮必酣醉。往往彈琴賦詩。以愜歡適。客至復然。不以有無爲恤。尤不與人爲畔岸。人皆樂與之交。嗚呼。此足以觀公者矣。遂爲銘曰。
愛酒者不必通。而通者必愛酒。能詩者不必雅。而雅者必能詩。善於音者不必和。而和者必善于音。況兼焉者非偶有之耶。通以雅。雅以和。吾固得公於神交。深於當時之與公游。而或不知之者。寧問其他。
【 간이집 > 간이집 제2권 > 묘갈명 】
☛ 간이집(簡易集) : 조선시대 문인 최립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31년에 간행한 시문집.
☯ 최립(崔岦) :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東皐). 아버지는 진사 최자양(崔自陽)이다.
최립은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굴하지 않고 타고난 재질을 발휘했다. 1555년(명종 10) 17세의 나이로 진사가 됐고 1559년(명종 14)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여러 외직을 지낸 뒤에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1년(선조 14) 재령군수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에 힘써 임금으로 부터 옷감을 받았다. 그 해에 다시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최립은 1584년(선조 17)에 호군(護軍)으로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을 했다. 1592년(선조 25)에 공주목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전주부윤을 거쳐 승문원제조를 지냈다. 그 해에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고 1606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강릉부사를 지내고 형조참판에 이르러 사직했다. 그리고 평양에 은거했다.
최립은 당대 일류의 문장가로 인정을 받아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했다. 그리고 중국에 갔을 때에 중국문단에 군림하고 있던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했다. 그 곳의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최립은 초(草)·목(木)·화(花)·석(石)의 40여 종을 소재로 한 시부(詩賦)가 유명하다. 역학(易學)에도 심오하여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등의 2권의 저서가 있다. 그의 글과 차천로(車天輅)의 시와 한호(韓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시보다 글로 이름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도 소식(蘇軾)과 황산곡(黃山谷)을 배워 품격이 호걸스러우며 음색이 굳세어 금석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는 평을 들었다.
최립의 문장은 일시를 풍미했다. 당대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왕세정 일파의 문장을 따라 예스럽고 우아하며 간결하고 법도에 맞는 글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났기 때문에 평범한 산문을 멀리하고 선진문(先秦文)을 모방하여 억지로 꾸미려는 경향이 있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송설체(宋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최립의 문집으로는 『간이집』이 있다. 시학서(詩學書)로는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와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