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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반 특강[기후변화와 팬데믹 이후의 삶] 담론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 비인간적인 현실에 대응하는 꿈을 찾아서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현재의 기후 위기는 지구의 신이 보내는 옐로카드다. 기후변화는 지구의 미래를 위협하는 크나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이루어진 과학문명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기반을 둔 인간의 경제 시스템을 향해 던지는 기후변화의 '경고'는 공포스럽다. 지금 전 세계 인류를 고통에 빠트리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몰도 따지고 보면 환경파괴로 인한 재앙이다. 기후변화는 산업구조의 재편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탄소중립을 명령하고 있다. 우리는 기후변화의 원인이자 우리들의 욕망이 빚어 낸 결과인 '탄소'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 것인가와 코로나19 이후의 삶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과연 그 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II.
파리기후변화협약은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국제사회 약속이다.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국제사회가 합의한 것이다. 2030년까지 화석연료를 45%까지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하기로 하고, 탄소제로를 목표로 해서 유럽연합은 그린딜을 통해 7년 동안 천문학적인 돈 1천조 원을 쓰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독일은 재성에너지를 40% 수준까지 끌어 올렸고, 과감하게 화석에너지를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유럽 각국은 지구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고 국가적 차원에서 에너지 전환정책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간단한 것을 복잡하게 만들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언론인들은 ‘온실가스 배출중지’란 말보다 요즘은 ‘탄소중립’ ‘탄소제로’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오염 물질 배출의 근원지인 중국마져도 2060년까지 탄소를 제로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나라도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신재생에너지의 산업화가 절실한 실정이다.
지구의 위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 왔었다. 긴 장마를 비롯한 폭염과 쓰나미 등이 경고의 징표다. 이제 그린은 생존의 열쇠로 부각됐다. 우리나라 정부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그린뉴딜을 표방하고 있다. 신재생 에너지 산업 같은 환경 산업에 대한 대규모 공공 투자로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이다. 짧게는 경기 침체를 극복하려는 녹색 경기 부양Green Stimulus이고, 길게는 녹색 산업에 대한 투자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그린’정책은 마땅히 지향해야 하는 길이고, 이를 미래산업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미증유의 중국발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덮쳤다. 백신주권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이제 바이오산업은 안보영역 안으로 들어와 백신 자국우선주의가 백신 양극화를 불러오고 있다. 백신을 둘러싼 소리 없는 전쟁이 일어남으로써 이제 바이오산업은 국방만큼 중요한 분야로 떠올랐다.
기후변화 이야기를 쓴 이유진은 생태파괴지수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삶의 태도르 바꾸는 행동백신의 필요성이 더욱 요구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산업과 경제, 삶의 양식 전반에 대한 반성이다. 처절한 반성 속에서만 기후변화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의지와 전략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는 마법과 같은 '묘안'은 어디에도 없다. 거대한 지구에서 온실가스를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일 수 있는 기술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재생가능에너지는 아직 조금은 부족하다. 원자력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핵융합과 인공태양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이며, 가능성조차 불투명하다”.
결국 지금까지 삶의 자세를 성찰하고 자연과 공존할 수 있도록 현재 배출하는 온실가스 자체를 줄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 중 누구라도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당장 따뜻한 집, 편리한 자동차, 비행기 여행을 포기할 수 있는가? 지구온난화에 대한 해답은 선진국 국민들이 화석연료의 달콤함을 포기하는 '희생'을 하지 않는 한 답을 찾을 수 없다.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인류의 자연침범, 그리고 바이러스에게 역대 최고의 전성기를 제공하는 인구밀집, 지구온난화,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내었다. 이를 반성하고 고치는 것이 생태백신이다. 그리고 기후변화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행동백신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금 당장 일어나서 불을 끄고, 난방온도를 낮추고, 해외여행을 포기하는 행동에 나설 만큼 위기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생태백신과 행동백신 없이는 어떤 화학백신도 바이러스 팬데믹의 재발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 그린 도시, 그린 인프라의 구축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으로 전문가들은 공동체의 협력을 강조한다. 상생과 이익이 함께 가는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코로노믹스의 도래가 코앞이다. 지구인은 지금 백신에 희망을 걸고 있다. 미국의 화이자 백신을 처음 맞은 간호사 샌드라 린지는 코로나백신을 맞고 나서, 2020년 12월 14일을 ‘역사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끝나는 첫날’이라고 말했다.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진정한 회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던진다. 기후변화와 팬데믹이라는 지구 공동의 위기에서 우리는 모두 '당사자'이며,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행동만이 지구를 위기로부터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자연을 맞아들이는 생활방식, 즉 본향으로 돌아가서 자연과 친화적으로 지내야 할 것이다.
선진국들은 이러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하여 녹색기후기금을 통해 2020년까지 연간 1,000억 달러를 모금할 것을 목표로 했으나 실제적인 행동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기후변화 완화로 알려진 기후변화에 대한 또 다른 대응책은 온실 가스(GHG) 배출량을 줄이거나 대기에서 온실가스를 제거하는 정책을 말한다. 그러나 배출량을 효과적으로 감소시키더라도 기후변화 영향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에 불편함에 대한 적응이 매우 중요하다. 탄소중립의 문제도 문제지만, 지구촌 백신의 양극화도 심각하다. 뉴스는 미국의 흑인 거주 지역의 감염률이 백인에 비해 3배나 높다고 전하고, 바이러스가 만드는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는 백신중심주의로 갈 경향이 크다.
중심주의나 이분법은 협소한 가치다. 트럼프의 신자유주의나 자국중심주의는 이제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이다. 대통령선거에서 떨어졌다고 이런 가치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떤 조사에서 트럼프는 미국 최고의 인기 있는 남성으로 올라 있기 때문이다. 불안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백신의 양극화로 인도에서는 타지에서 앉아서 죽을 수 없다는 이주노동자들이 도시봉쇄로 삶이 망가지자 수백 킬로미터나 가야 하는 고향을 향해 매일 두 발로 걷고 있다. 각 국가는 나노미터의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 사람들은 자유를 제한하는 불편을 감수하지 못해 정부의 방역지침을 거부하며 시위에 나서고 폭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는 공동체 가치와 협력의 힘으로 K-방역이라는 성과를 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팬데믹으로 인해 선진국의 구조가 얼마나 허약한가도 드러났다.
스웨덴의 청소년환경운동가 툰베리는 미래세대를 위협하는 기후위기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촉구한다. 노벨평화상 후보까지 오른 것을 보면, 그녀의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탁월한 연설을 통해서 지구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으며 지구가 파괴되는 현상이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다고 하면서, 숲은 우리를 불태우고, 가뭄은 우리를 굶주리게 하고, 강은 우리를 익사시키고, 기업은 우리를 질식시킨다며, 기후변화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의 전 대통령 트럼프가 기후협약의 탈퇴를 선언하면서 거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툰베리가 뜻밖의 신선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작다고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건 아니라는 걸 몸소 실천해 보였다. 우리 문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어른들이 사랑하는 자식들 앞에서 미래를 훔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가 미래를 요구하는 것이 무리한 것인가요’ 라며 어른들과 권력자들에게 되묻기도 한다. 그녀는 2018년 8월 20일 스웨덴 의회건물 앞에서 ‘기후를 위한 등교거부’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에 나섬으로써 미래의 목소리를 내는 강렬한 이미지로 전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초등학교 4학년때 선생님으로부터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듣고 자신이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미래를 위한 금요일 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어 2015년 파리기후협약을 성사시켜내는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기후는 바뀌길 원하지 않는다며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바뀌어야 함을 설파했다. 그녀는 경제성장 같은 인기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기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면서 ‘기후정의’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위기를 위기라고 인정하지 않고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며 진정한 힘은 사람들에게 있다고 언명했다. 기후변화는 세대간의 문제로 부모가 회피해서 생긴 문제를 자식에게 떠맡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쳐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녀는 또 기후와 생태의 위기에서 권력자들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을 비판하며, 유엔 연설을 하러 가면서 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요트를 타고 갔다.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녀는 여론이 권력자들을 압박하면 대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면 이 대전환의 시대, 미증유의 팬데믹 시대, 지구가 중병을 앓고 재앙을 토해내고 있는 이 때, 우리 문학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지성인은 말로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가. 문학인은 인류의 교사여야 한다. 따라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필봉을 휘둘러야 되고, 문학을 위한 물음은 공동체를 향한 물음이어야 한다. 한 사회의 높이를 가늠할 때는 그 사회에서 문화나 철학이나 예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혹은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보기도 한다. 이것들의 가치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것들과 친하게 지내는 사회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이 이미 이것들이 제공하는 높이를 수용할 정도에 도달해 있다고 최진석 교수는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라는 책에서 말한 바 있다.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시대적 조건과 국내의 정치지형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문화를 핵심적 가치로 설정한 점은 가슴에 깊이 새길 만한 내용이다. 경제력이나 국방력도 문화력에서 나온다. 생명, 생태, 자유, 인권, 평화와 같은 덕목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가 바로 문화적이고 예술적이며 철학적인 사회다. 지금까지는 생태적 상상력이나 합리성을 바탕으로 지구를 살리는 운동에 매진했다면, 이제는 좀더 구체적인 개념으로 기후정의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날씨다’라는 구호다. 이제 ‘날씨’ ‘기후’는 위에 언급된 다섯 가지 덕목에 앞서는 키워드로, 대전환 시대의 아이콘으로 부각했다.
언어는 곧 우리의 무기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언어와 의식으로 무장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도 있지 않는가. 미국 템플대에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있는 제이슨 델 간디오 교수는 혁명은 가능하며,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는 저술가이자 활동가이다. 그는 2000년 봄 우연히 저녁 뉴스를 보다가 워싱턴에서 사람들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 항의하는 장면에 붙들렸다. 그 장면을 보고 그는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면 세계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뒤부터 활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소극적인 참여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선택했다. 우리 문인도 이제 펜을 들고, 행동을 때가 된 것 같다.
필자 역시 ‘Change your word, change your world.'를 외치는 사람이다. 대학원대학교에서 ’문학언어의 힘‘을 예비 석박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문학언어생태학자로서 ’언어는 파워다‘라는 생각으로 수사나 언어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채득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하며, 그것이 가능하려면 활동가와 조직가의 ’수사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경운동가 툰베리가 성공한 것은 그녀의 의지와 진정성도 중요하게 작동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공 요인은 그녀의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언술과 수사학이었다고 본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저마다 벗어나고 싶은 삶의 굴레가 있다. 누구나 밟고 싶은 생의 유토피아가 있다. 과연 그 바람을 이루는 신의 한 수는 무엇일까? 이제 우리 작가들은 답해야 한다.
스페인독감이 2차세계대전의 촉매제가 되고, 흑사병이 봉건제도를 붕괴시키고 자본주의에로의 길을 열어준 신호탄이었다면,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 다르다. 인간의 DNA는 생존율이 높은 것을 선택하기 때문에 신인류시대, 포노사피엔스가 온다고 하는 학자도 있다. 미증유의 코로나사태는 우리 삶의 통찰을 요구한다. 그 결과 스마트폰을 쓰며 사는 사람들, 포노사피엔스가 세상을 주도하면서 4차산업혁명을 앞당길 것이고, 4차산업은 우리 삶의 공간을 디지털플랫폼인 온라인 공간에 위치시킴으로써 언텍트 비대면 시대를 정착시킬 것이다. 우리는 디지털 문명에 익숙해져야 생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 전통사회에서 디지털문명의 사회적 분위기는 좋은 편은 아니다. 이는 ‘휴대폰 중독’이란 표현에서 드러난다.
이 지점을 구한말에서 한국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보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단발령’에 얼마나 통탄했던가. 인간은 문명사회 이래 공동체사회, 즉 휴면 사회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백신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팬데믹의 영향으로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넘어 ‘위드-코로나 시대’가 온다고 생각하니 두렵기만 하다. AI의 발전으로 로봇시대의 도래도 점쳐진다. 가상현실에 접속해서 노는 사람들, 로봇과 노는 사람, 심지어는 가족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로봇과 결혼도 하고, 로봇과 운우지정도 나누는 시대를 상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인구는 줄고, 비혼주의가 늘면서 인간의 자리에 로봇과 복제인간이 설지도 모른다. 영국의 작가 메리 셀리가 쓴 공상과학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처럼 실수로 만들어진 ‘괴물’ 같은 복제인간들이 나와 거리를 활보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III.
그렇다면 팬데믹 이후 우리 작가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문학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할까. 답은 가능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힘은 주먹보다도 손끝에서 나오는 언어일 것이다. 문학의 힘은 언어로부터 나오지만 단순히 개인을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나 김수영의 ’풀‘ 김지하의 ’오적‘ 등의 시들은 민중들로 하여금 독재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려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스토우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은 미국을 움직여 노예해방 전쟁을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진의 생태시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문학적 행위에는 본질적으로 비대면의 공간이 필수적이다. 모든 것은 양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팬데믹과 기후변화가 고통의 시간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순기능도 있다. 팬데믹으로 인한 ‘레이어드 홈’은 집의 기능을 다양화해서 창작의 열기를 복돋워 주기도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풀어나가는 데 민중의 정서적 힘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민중의 정서를 움직일 수 있는 힘도 바로 문학의 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 작가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문학의 힘은 단순히 언어적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독자의 정서에 울림을 주는 파도와 같은 것이다. 단순한 언어의 힘이 순간적이라면 문학의 힘은 오래 지속되는 정서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언어로 세상 바꾸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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