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똑똑하지 않아야 공부가 시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단테, 마키아벨리, 데카르트, 아퀴나스, 셰익스피어, 파스칼, 밀턴, 홉스, 스피노자, 칸트, 애덤 스미스, 헤겔, 톨스토이, 하이데거, 니체....
세인트존스에서 4년간 읽는다는 '고전 100권 리딩 리스트'를 보고 있으면 악 소리가 나온다.
정말 많은, 어려워 보이는 고전들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어야 하는 책들은 이게 다가 아니다.
리딩 리스트에 있는 책들은 고작 세인트존스 수업의 4분의 1인 세미나에서 토론할 때 필요한 리스트다.
나머지 4분의 3의 수업인 수학, 과학, 음악, 언어 수업에서는 유클리드, 아인슈타인, 맥스웰, 뉴턴 등의 책까지 읽어야 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4년간 한 권만 판다 해도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가 힘든 수준의 어려운 고전들인테 이것들을 다 읽고 토론한다고? 학생들이 얼마나 똑뚝해야 하는 거야?" 학교에 오기 전에 난 나만 빼고 다들 엄청 똑똑한 게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세인트존스 학생들이 특별히 똑똑한 건 아니었다.
똑똑해야만 뉴턴, 아인슈타인, 칸트, 헤겔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려운 고전을 읽고 배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똑똑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똑똑하지 않아야 배움이, 공부가 시작된다.
똑똑하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왜지?" 하고 끊임없이 질문하게 되고 그 질문을 통해 중요한 것이 길러진다.
스스로 '진짜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진짜 생각'을 하자
사실 난 입학하기 전에 리딩 리스트를 보긴 했지만 뭘 몰랐다.
한 번 쯤은 들어본 유명한 사람들, 책들이었기에 그저 멋져 보였다.
'오, 이 런 책들을 읽게 된단 말이지?'
그동안 받은 주입식 교육 때문이었는지 내가 읽어야 할 책이고 스스로 고군분투해서 배우는 게 당연한데도, 이 학교를 다니면 누군가가 그 어렵다는 고전의 방대한 지식을 내 머릿속에 넣어줄 것만 같았다.
그런 마음가짐이었으니 당연히 첫 책부터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입학을 하고 수업을 듣기 시작하자마자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자 4년 내내 노력해야 했던 문제는 내가 '진짜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진짜 생각, 그것은 무엇일까?
1학년 때는 책을 무작정 읽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렇게 읽고 나면 내 반응은 두 가지였다.
이해했다, 혹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가 됐으면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신이 우리를 보살피실 것이고 우리나라 만 만세라는 뜻이구나. 이해됐어.'
이렇게 이해하고 수업에 가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준비해도 여전히 수업은 어려웠고 나는 토론을 하지 못했다.
책을 읽고 '이해'까지 했는데, 그거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무언가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 부족했던 것이 바로 '진짜 생각'을 하는 과정이었다.
이걸 깨닫기까지 오래도 걸렸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분석하다 보니 나는 토론 수업 준비를 위해 책을 읽고 '이해하기'는 했지만 그 후에 해야 할 '생각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각하기' 역시 많은 뜻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생각하기'는 단순히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인식하는 수준의 생각하기가 아니다.
대신 스스로 관조해본다는 뜻의 생각하기와 비슷하다.
영어로 말하자면, 단순하게 현상만을 보고 인식하는 생각하기는 thinking, 더 깊이 골똘히 생각하기(심사숙고)는 contemplating이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거다.
길에서 똥 싸고 있는 개를 봤다.
당신은 생각한다.
'개가 똥을 싸네.'
이때 당신이 한 생각은 thinking 이다.
그리고 당신은 또 생각한다.
'아, 더러워.' 이때 한 생각이 바로 contemplating의 결과, 즉 내가 도달한 의견이다.
심사숙고는 각자만의 의견, 가치관을 낳는다.
'진짜 생각하기'란 똥이 더럽다는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해 나가는 생각의 과정이다.
나는 처음 독서를 하면서 이 심사숙고해서 진짜 생각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애국가를 읽고 "영원히 우리나라 만세'라는 뜻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며 넘어갔다.
그러고는 내가 읽은 구절을 '이해했다'고, '생각해봤다'고 믿었다.
수업에 가니 토론을 할 수가 없었던 건 당연하다.
나는 진짜 생각을 해보지 않고 생각해봤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면 오히려 낫다.
모른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으니 알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했고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거기서 배움은 멈춰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착각은 배움에 있어서 상당히 위험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조금 다른 면에서 위험하다.
고전을 읽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때가 많다.
나도 처음에는 '이게 무슨 외계어야?' 싶은 심정이었다.
소설 고전들은 이야기라도 있어서 재미있었지만 사상을 담은 철학책들은 한 문단, 심지어 한 문장을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이해는 안 되고 수업은 어렵고 해서 튜터들과 상담을 자주 했는데 백이면 백 다 그들은 딱 한 가지만을 요구했다.
질문하라는 것.
이건 나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세인트존스가 모든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수업에서는 매번 수업이 시작되기 전 테이블을 빙 돌아가며 모든 학생들이 질문을 하나씩 던지고 그 질문들을 모아놓은 채 수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왜 질문을 하라는 건지, 그 의미를 잘 몰랐다.
무슨 질문을 하라는 걸까?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이해가 되지 않아요." 라고 하면 튜터는 되물었다.
"어떤 부분이,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지?" 통째로 이해가 안 간다는데, 어떤 부분이 어떻게 이해가 안 가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무엇이 문제일까? 답답했고 당황스러웠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나는 첫 질문을 하게 됐다.
'나는 무엇이 어떻게 이해가 안 가는 걸까?'
이것이 바로 튜터들이 원했던 과정이고 질문이었다.
드디어 '진짜 생각하기'를 시작한 것이다.
게으른 생각이 배움을 막는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을 곱씹어보자.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만약 그 언어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
아랍어를 모르는 사람이 아랍어로 쓰인 책을 읽으면 정말 아무것도, 단 한 문장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어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모르기란 힘들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딱 두 종류가 있는데, 바로 아이들과 외국인이다.
애국가의 예시를 다시 보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 구절을 읽었을 때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외국인이나 아직은 세상의 많은 것들이 새로운 아이들이라면 이해를 못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해 안 되는 구절에 대해 수많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아이들: 동해물이 뭐예요? 백두산이 뭐예요? 물이 왜 말라요? 산이 왜 닳아요? 하느님은 뭐예요? 신은 뭐예요? 왜 신이 우리를 보살펴요? 우리나라는 어디예요? 만세는 무슨 뜻이에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조차도 이런 주옥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특히 이 질문들은 우리 어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넘어가버리지만 실은 근본을 건드리는 아주 좋은 질문들이다.
외국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국인: 동해물의 의미는? 많은 산 중에 왜 백두산일까? '내 나라가 아니고 '우리'나라인 이유는? 한국인들에게 '우리'의 의미는?
외국인으로부터 나오는 질문들 역시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때에만 나올 수 있는 좋은 질문들이다.
즉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서조차 이렇게 좋은 질문들이 나올 수 있다.
따라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은 무책임하고 게으른 말이다.
몸의 게으름이 아닌 생각의 게으름에서 나오는 말인 것이다.
그 대상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고 여전히 별로 고민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 된다면, 왜 이해가 안 되는지 '진짜 생각'을 시작해 봐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어디서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 는지, 어떤 이유로 막혔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고 질문하고 이야기할 때, 배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책을 읽고 이해했다고 착각해도 안 될 일이고,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게으른 생각을 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까?
그 답은 자꾸 반복하고 있듯이 모든 튜터들이, 그리고 세인트존스가 학생들에게 바라는 '질문하기'에 있다.
질문이 답이다
사실 질문이 왜 중요한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수만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여기서 '배움'에만 집중해보도록 하겠다.
질문은 배움을 가져온다.
그래서 중요하다.
질문은 배움을 얻기 위한 과정이고 단계이기 때문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읽고 다음의 친구들이 반응했다.
A: 그래. 우리나라 만만세!
B: 왜 한라산이 아니라 백두산일까?
C: 하느님? 나는 불교인데, 부처님이면 안 되나?
D: 왜 '우리'나라일까?
E: 아~ 하나도 이해가 안 돼.
똑똑한 A는 애국가 첫 구절을 이해하고 동의했다.
B는 산에 대한 질문을 함으로써 분단되기 전 한국의 시대상을 알 수 있었다.
C는 신에 대해 고찰해보면서 한국의 종교에 관해 배웠다.
D 역시 '우리'와 나'의 개념에 대해 고민해보며 한국의 민족주의적 성향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E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A, B,C, D,E 이 다섯 명의 학생들 중 배움을 얻은 학생은 B. C.D 이다.
그저 질문을 하나 던졌을 뿐인데 배움을 얻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반면 애국가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헛똑똑이 A, 생각하기를 포기한 게으른 E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실을 단순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헛똑똑이에 그치지 않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그 과정에서 다양한 '진짜 생각'들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진짜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사물, 현상,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과 의견을 바르게 확립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배움'의 의미이고 진짜 똑똑하다는 것의 의미다.
그리고 그것이 세인트존스가, 그리고 튜터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한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질문하라. 그리고 그 질문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 배움을 얻어라!"
세인트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 중에서
진짜 공부하는 법 배우기
조한별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