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은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음악이다. 한국 사람이 힙합의 정신을 제대로 아는 건 불가능하다. 백인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을 법하다. 그런 의미에서 에미넴, 곧 백인 래퍼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단순히 백인이라서가 아니라, 백인치고는 너무 랩을 잘 해서 그랬다. 게다가 에미넴의 음악에는 흑인 아티스트들의 힙합과는 분명히 다른 정신이 담겨 있었다. 흑인들의 힙합을 흉내 내는 차원을 넘어서, 인종을 초월한 감정과 이슈를 음악에 담아내고 있다는 평가였다.
1972년생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정확히 ‘아재’ 세대의 핵심 연령층인 에미넴은 1998년에 첫 앨범을 발표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데뷔 앨범의 대성공 이후 3집을 발표하는 2002년까지, 에미넴은 그야말로 팝음악의 역사를 새로 썼다. 기록적인 앨범 판매량이나 공연 수익과 함께 평단의 지지도 함께 얻었다. 에미넴의 등장 전까지 힙합은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음악이었으나 더 이상은 아니었다. 그는 단단히 채워져 있던 검은 족쇄를 풀고 힙합을 모든 사람들의 품으로 보내주었다. 멀리 바다 건너 우리나라에까지.
그 시기가 마흔 전후의 아재·언니들의 20대와 일치한다. 많은 아재·언니들에게 에미넴은 ‘힙합’과 동의어였다. 말한 대로 흑인들의 정통 힙합은 음악의 정신이나 가사의 벽이 너무 높았다. 에미넴의 음악은 인종을 불문하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힙합이었고, 덕분에 라디오에서도 TV에서도 그의 노래가 종종 흘러나왔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나스Nas, 닥터 드레Dr. Dre, 아이스큐브Ice Cube의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어볼 수 없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3집 앨범 발표 이후, 에미넴은 긴 슬럼프를 겪는다. 특히 약물중독의 터널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했다. 여러 장의 앨범을 발표했으나 전성기의 쫄깃한 리듬, 날선 래핑, 대중적인 멜로디 라인은 온데간데없었다. 평단도 대중도 외면하는 가운데 그의 시대는 끝이 나는 듯 싶었다. 목화씨를 전해준 것만으로 문익점의 이름이 오래 기억되듯, 힙합을 대중화시킨 데 기여한 공로만으로도 그의 이름은 팝 역사에서 지워지지는 않으리라는 정도의 위안.. 그런데!! 2010년 타이틀부터 의미심장한 <리커버리Recovery> 앨범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그리고 여전히 현역 아티스트로 독설을 뱉어내고 있다.
힙합만큼 세대를 타는 장르도 없다. 극소수의 힙합 마니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성세대에 편입될 즈음부터 약속이나 한 듯 힙합을 듣지 않는다. 힙합이라는 장르의 속성 자체가 선동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성세대에 침을 뱉고 주먹을 들이대는 음악이니, 공격당하는 대상으로서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힙합 음악을 듣는 행위는 지금의 10대, 20대와 공감할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방법이다. <쇼 미 더 머니>로 대표되는 ‘가요 힙합’은 기성세대에 대한 공격보다는 젊은 세대의 사랑과 고민, 꿈을 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아재들은 겁내지 말고 힙합을 들으면 된다. 뭘 들을지 도통 모르겠다면, 에미넴의 노래에 도전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에미넴은 1997년 랩 올림픽Rap Olympics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유명 프로듀서 닥터 드레의 눈에 띄어 1999년 메이저 데뷔 앨범 <The Slim Shady>를 발매한다. 여기 실린 'My name is'는 에미넴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린 앨범의 타이틀 곡으로 에미넴의 또 다른 예술적 자아인 슬림 셰이디Slim Shady를 소개하는 노래다. 기존의 랩보다 기술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진화된 형태를 보여준다는 평론가들의 호평을 들었다. Clean, Explicit, More Explicit라는 세 가지 버전이 있을 정도로 신랄하고 거침없는 노랫말이 돋보이는데, 에미넴이 직접 마릴린 맨슨, 빌 클린턴 같은 유명인의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뮤직비디오도 화제를 모았다.
힙합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앨범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에미넴의 2000년 앨범 <The Marshall Mathers>다. 미국에서만 2200만 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한 이 앨범은 그래미에서 최우수 랩 앨범 상을 받았다. 특히 타이틀 곡 중 하나였던 'Stan'은 영국의 싱어 송 라이터 다이도Dido의 'Thank you'를 샘플링한 곡으로, 가사의 서사적 완결성과 대중성, 다이도의 매력적인 피처링이 환상적인 조합을 이룬 명곡이다. 'Stan'은 슬림(에미넴)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스탠'이라는 팬의 이야기다. 스탠은 슬림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답을 받지 못하고 자살하게 되고 뒤늦게 편지를 본 슬림은 스탠에게 답장을 쓰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엔딩을 맞게 된다는 내용이다. 에미넴의 천재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 곡은 전문가와 팬들이 최고의 힙합으로 주저 없이 손꼽는 곡으로 문학작품에 비유되기도 한다.
흥겨운 리듬으로 유명한 'Without me'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곡이다. 전 세계적으로 200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와 3년 연속 그래미 최우수 랩 어워드의 영광을 안긴 에미넴의 정규 앨범 3집 <The Eminem Show>에 수록된 이 곡은 발매 즉시 빌보드를 비롯해 유럽의 각종 차트의 상위권을 차지했다. 신나는 리듬과 귀에 꽂히는 라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랩이 어우러진 'Without me'는 제45회 그래미 최우수 단편뮤직비디오상을 받았다. 에미넴은 이 곡의 가사에 자신의 어머니를 비롯해 딕 체니 부부, 림프 비즈킷, 모비 등을 등장시켜 특유의 거침없는 표현을 쏟아냈다.
2010년 발표한 앨범 <Recovery>는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미국 음반시장에서 100만 장의 판매고를 거둔 것은 물론 각종 차트를 휩쓰는 등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으며 화제를 모은 음반이다. 그 중 리한나Rihanna와 함께한 'Love the way you lie'는 연인들의 애증을 폭발하는 에너지와 시적인 가사로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각자 가슴 아픈 사랑을 했던 에미넴과 리한나는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질감 덕분에 이 곡을 더욱 잘 소화해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연인들 간의 다툼과 화해의 반복, 이후 이별로 치닫는 사랑이 에미넴 특유의 거칠고 강렬한 랩과 리한나의 매력적인 보컬로 표현됐다. 이 곡은 리한나의 앨범 <Loud>에서는 리한나의 보컬을 중심으로 완전히 새롭게 재탄생하기도 했다.
에미넴은 뮤지션뿐만 아니라 영화 <8 Mile>을 통해 배우로서도 호평 받았다. 이 영화는 디트로이트의 빈민촌에 사는 주인공이 힙합에서 희망을 얻고 랩을 통해 꿈을 키운다는 내용으로, 에미넴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돼 더 화제를 모았다. 이 작품으로 에미넴은 MTV 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최고 남자배우상을 받았고, 주제가인 'Lose yourself'는 아카데미에서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세상을 향한 울분과 현실의 비참함을 절규하면서도 기회를 잡고자 하는 주인공의 심정을 토로한 이 곡은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는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공감을 얻으며 각종 차트에서 1위를 석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