存齋 魏伯珪 先生 銅像 建立 推進 計劃
1. 개요
長興에 들어서면 忠烈里 小公園에 長興을 象徵하는 동상을 만납니다. 이 동상이 바로 湖南이 낳은 3대 실학자 중의 한 분이시며, 동아시아 實學 思想家 99인 중 한 분이신 실학의 거두 存齋 魏伯珪(1727~1798)公이십니다. 선생은 文學 ․ 政治 ․ 經濟 ․ 歷史 ․ 天文地理 ․ 醫學 등 문학과 경학에 미치지 않는 分野가 없으며, 公의 벼슬은 비록 옥과 현감에 그쳤지만 생전에 100여권의 著述을 남겼습니다. 그 저술 가운데「정현신보」와「만언봉사」는 문란한 社會秩序를 바로잡기 위한 改革思想으로 茶山의「경세유표」나「목민심서」에 비견되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 地域이나 後孫은 존재공의 입상을 건립하였고, 다암공의「존재집」간행, 덕운공의「지제지」및「정현신보」국역본 發行 등의 追慕 事業이 있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평생에 걸친 학문적 업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지역사회나 후학의 탐구와 선양사업이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存齋 사상에 대한 연구와 보급은「長興의 精神 宣揚」이라는 관점에서 폭 넓은 시각을 가지고 전개해야 합니다. 장흥 출신의 실학자 정도가 아닌 장흥의 正體性을 이야기 할 수 있는 核心 요체로서 존재의 학문과 사상을 살펴야 합니다.
이에 존재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활동에 들어가고 있으나, 장흥군이 1986년 1월에 제막한 존재공의 입상은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 재 건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장흥군번영회, 존재기념사업회, 장흥위씨도문회는 존재 위백규 선생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동상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2. 추진 계획
1) 설립 추진자 :
장흥군번영회, 존재기념사업회, 장흥위씨도문회로 구성된
存齋 魏伯珪 先生 銅像建立推進委員會
2) 설립 장소 : 장흥군 장흥읍 충렬리 장흥실내체육관 입구
3) 동상 형태 : 좌상
4) 동상 방향 : 장원봉을 배산으로, 천관산을 안산으로 하는 남향
5) 좌대는 화강암으로 하고, 상은 동으로 제작
6) 설립 경비 : 장흥군의 지원과 헌성금
존재 위백규의 생애와
동상재건수의 전말
선생의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 계항(桂巷), 옥과(玉果), 본관은 장흥이다. 시조는 당(唐) 관서홍농 태생으로 한림학사인 경(鏡)이다. 그는 선덕여왕의 청에 따라 638년(戊戌) 도예지사로 동래(東來)해 벼슬이 아찬(阿飡)이르렀다. 고려 예종 때 문하시중과 삼중대광을 역임하고 졸 후 「충렬(忠烈)」의 시호와 함께 예종 묘정에 배향된 계정(繼廷)은 5세조이다. 여말 합문판사와 선초에 별시위패두를 거친 충(种)은 14세조이다.
선생은 영이재(詠而齋) 문덕(文德)과 평해 오씨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1727년 5월 15일 방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종조 춘담공(春潭公)에게 글을 배웠다.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는 ‘존재집’ 서문에서 ″2세에 육갑을 외웠고, 6세에 시를 짓고, 8세에 ‘주역’을 공부했다. 10세 후는 제자백가와 천문·지리·복서,율력·선불·병법·의약·관상학·배와 수레·공장 등 백과에 수준이 높게 이르렀으니 참으로 천재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는, “25세에 병계 윤봉구 선생에게 집지(執贄)하고 제자가 된 뒤 잡다한 예전의 학문을 버리고 성리학에 침잠했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벼슬할 생각보다는 수양에 치중하는 학문에 힘썼다“고 했다. 마침내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건질 방책까지 강구하여 체용(體用)이 구비된 학문에 통달했으니, 대표적인 저서가 ‘정현신보(政絃新譜)’라고 했다. 이외에 환영지(寰瀛誌)등 10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남겼다.
특히 선생의 연시조와 가사작품은 조선후기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궁경독서기(41세~54세)의 강회(講會)는 덕산수학기의 우울에서 벗어나 탁월한 문학적 자질을 발산했다. 이때 보리연작, 농가구장, 년년행 등 주옥같은 연시조 작품이 산출됐다. 이중 농가구장은 2003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도 했다. 또한 어버이의 희생을 그리며 불효를 뉘우치는 가자작품 ’자회가’는 감칠맛 나는 구어(口語)능력을 발휘했다.
말년에 정조에게 만언봉사를 올렸는데, 이를 보고 옥과(玉果)현감으로 제수했다. 부임 직후 향약을 설행하는 한편 화속지, 삭지, 공물, 삭망어 등의 적폐를 혁파했다. 이어 삼품(三品)요역도 5분의 4로 덜었다. 감사는 선생으로 인해 상납이 끊기자 치적을 「下考」로 평가했다. 임금은 감사를 문책하고, 경직인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와 경기전령(慶基殿令)으로 제수했으나 노령과 풍비(風痱)를 이유로 고사하고 1년여의 환로를 마감했다.
귀가해 신병을 치료했으나 1798년 11월 25일 72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후손과 유지들은 선생의 학문적 위업을 계승하기 위해 1985년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 당국의 도움으로 1986년 1월 충렬리 소공원에 입상을 건립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매 낡아 붕괴가 우려됐다. 이에 존재기념사업회와 위씨도문회는 2016년 8월 「동상재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해서 자부담과 장흥군청의 지원을 받아 이 동상을 세운다.
2017년 12월 일
存齋記念事業會
(2017년 11월 4일 위정철)
3. 설계도 정후면 모형
(공사 내역)
① 좌대 공사
• 높이 2.0m 윗부분 가로 3m 아랫부분 가로 4m로 정면에서 보았을 때 사다리꼴 모양으로 안정감을 주도록 함
• 석판의 크기는 가로 1m 세로 50cm 두께 10cm의 돌을 쌓아 올리도록 함
• 전면을 공사하는데 필요한 석판은 16장이 필요하며, 뒤 부분까지 합하면 32장이 필요함
② 존재 선생 좌상 공사 : 좌상의 높이 230cm
• 가로 2m, 세로 2m, 두께20cm 동상의 좌대 위에 상을 설치
• 머리에는 정자관을 쓰고 있는 모습
• 눈은 멀리 천관산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 왼 손에는 책을 들고, 오른 손은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
• 의복은 도포를 입고 있는 모습
③ 동상 앞에 의식 행사 때 진설을 할 수 있는 상석 :
가로 90m, 세로 60cm, 높이 30cm 밑에 북석
4) 측면도
(공사 내역)
① 좌대 공사
• 높이는 2m 가로의 길이 3m로 직사각형 모양
• 석판의 크기는 가로 1m 세로 50cm 두께 10cm의 돌을 쌓아 올리도록 함
• 측면을 공사하는데 필요한 석판은 한 쪽면이 12장이 필요하며, 두 면을 합하면 24장이 필요함
② 존재 선생 좌상 공사
• 상의 높이는 230cm
• 측면에서 본 좌상은 앉은 의자 모형이 뚜렷하게 보이도록 함
5) 평면도
(단위 : m)
(공사 내역)
① 바닥 공사
• 둘레는 가로 6m, 세로 8m의 장방형 사각형
• 바닥 돌 가로 150cm, 세로 50cm, 두께 10cm의 돌 22장
• 바닥 돌 가로 200cm, 세로 50cm, 두께 10cm의 돌 28장
② 사방 돌 울타리
• 네 뒤퉁이에 높이 50cm의 기둥을 세우고,
1.5m 간격으로 보조 기둥을 세움
• 보조 기둥 사이에는 3단으로 돌 울타리를 함
• 기둥의 규격 가로 30cm, 세로 30cm, 지상높이 60cm 4개
• 보조 기둥 가로 20cm, 세로 20cm, 지상높이 50cm 16개
• 울타리 돌 길이 160cm 3단으로 54개
• 기타 공사 일지 제막식 팜프릿 참조
4. 예상 견적서 : 100,090,000원
5. 2018년 11월 3일 10:30 제막식(참석인원 약 250여명)
축사의 골자 : 정종순군수 이곳「충렬소공원」을 「존재공원」으로 조성하겠다. 황주홍국회의원 군수가 이곳을 「존재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했는데, 나는 공원조성에 필요한 교부세를 따오겠다. 그리고 존재기념사회의 회비를 내는 회원 100여명을 확보하겠다. 위등 군의회의장 이미 군수와 이곳을 「존재공원」으로 조성하기로 대체적인 합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