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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기자의 종착지는 삼신산이 있던 낙랑조선
<당일행산하양융도=唐一行山河兩戎圖>

지금까지 중국에서 제작된 고지도에 예맥조선이 기록되어있는 사료를 본적이 없었다.
더구나 물길을 다스리던 우공이 태행산맥을 거쳐서 영평 벌판에 이르러 난하의 앞바다 안에까지 도착
하게된 경로를 따라서 종점을 표시하여 두었다.
그동안 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을 놓고지긋지긋하게 실랑이를 벌리던 진나라가 쌓았다는 만리장성의
동단은 이곳이라고 확인하고 정의를 내린다.
그것은 영평지역이 예맥조선이라는 명문이 있기 때문이다.
은나라를 떠난 기자는 5000여명의난민을 대동하고 중산국을 경유하여 둘째아들을 남겨 선우국을
지키게 하고(예맥조선의 제후국) 고죽국이 있던 영평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귀국후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능원 방면을 돌다가 그곳에 청동제기들을 묻고 다시
한동안을 유랑한다.
진번조선이 있던 광령땅으로 건너가 수년간을 농잠등을 지도하다가 은나라를 떠난 9년만에야 산융족
에 밀려 삼신산이 있던 낙랑조선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한서>지리지>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입니다. 그는 낙랑조선에서 범금 8조를 만들어 백성들을 계도하였습니다.
<玄菟、樂浪,武帝時置,皆朝鮮、濊貊、句驪蠻夷。殷道衰,箕子去之朝鮮,
眞番朝鮮. 樂浪朝鮮 其民以禮義,田蠶織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相殺以當時償殺;相傷以谷償;>
(谷은 穀의 오자인듯, 필자주)
현도와 낙랑은 무제때 설치되었다. 예맥과 구려만이는 모두 조선이다.
은 나라가 쇄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다. 진번조선과 낙랑조선은 그 백성들이 예의가 있었고, 밭을
가꾸고 누애를 쳐서 비단을 짯다.
낙랑조선에는 백성들에게 범행을 방지하기 위한 범금 8조가 있었는데 살인자에게는 사형을, 상해를
입힌자에게는 곡식으로 보상하게 하였다.
위에 올린 지도는 당일행산하양융도(唐一行山河兩戎圖)입니다.
예맥조선의 위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常山之右乃東循塞坦至濊貊朝鮮>상산의 오른쪽에서 동쪽을 돌아 평탄한 요새에 이르면 예맥조선이다.
따라서 지도의 그림을 따라가면 산줄기가 영평을 지나 바다에 이르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종점을 바다안에 그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추적하여 오던 바다안에 있던 갈석산 위치입니다.
두번째 사진은 등주의 봉래성에서 바다 건너로 보이는 장도다. 낙랑조선으로 추정이 되는곳이다.
공자가 뗏목으로 건너기를 희망하였던 불사국이요 군자국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곳을 일명 삼신산이라 하고 뒷날 진시황과 한무제등도 건너길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보이는 물이 옛날에는 지금보다 폭이 좁았고 물살이 더욱 세여 어떤 배라도 직접 건널수가 없었다.
기자 역시 가까운 경로를 택하지 않고 돌아서 왔다는것도 이유가 있었다.
다음은 왕부의 《잠부론》을 통하여 영평에서 산동반도로 이동하여 사문도까지 건너게 된 기자의
행적을 살펴본다.
“漢王符著《潛夫論 志氏姓》中亦有對韓侯的記載: ‘昔周宣王亦有韓侯, 其國也近燕,
故《詩》云: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위의 책, p; 13.]
“箕子遂率族衆先遷居于原孤竹國的舊地. 不久, 可能因爲山戎族的南下和欲遠離周王室的統治,
箕族又開始大規模的遷徙,
其中的一部分人繼續南遷, 最後到過了山東半島, 而主要族衆則隨箕子東遷至朝鮮半島北部古朝鮮之地,
建立了箕氏朝鮮.”
[위의 책, p. 8.]
'한왕부저"《잠부론 기씨성》부에는 한후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옛 주선왕때 역시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나라와 가까운곳에 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옛 한성은 연나라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그 후 한의 서쪽에 역시 한씨의 성을 가진 (준왕)의 조선을 위만이 치자 준왕은 바다로 옮겨갔다.
[기자는 드디어 부족을 거느리고 본디 고죽국 옛터로 가서 살았다.
얼마 뒤에 산융독이 남하하자, 주나라의 왕실의 통치로부터 멀리 떠나고자 기씨부족은 또 대규모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일부는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마지막에는 산동반도에 이르렀지만, 많은 백성들은 기자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조선반도 북부의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기씨조선을 세웠다.]
*그들은 산동반도의 창락을 경유하여 바닷길을 통하여 조선반도가 아니라 등주에서 동쪽으로 약 40
여리 떨어져있던 삼신산(사문도)으로 이동한 흔적이 《우공추지》<권4>와 《 창락현 속지》에 기록
으로 남아있다.
다음글은 기자의 행방에 대한 시비를 가리기 위하여 구산이 2005년도에 발표하였던 글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천년 전에 있었던 은나라의 태 사였던 기자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 산(箕 山)을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 올라가서 기자의 묘는 찾지 못하고 허 유(許由)의 묘 만 발견하고 돌아 왔다고 하였습니다.
기자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기에 천년전의 영향력이 사마천을 현장까지 출동하게 하여 진실여부를
확인하게 하였을까요. 그리고 그는 기자의 흔적이 완전히 중국에서는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조선인으로
인정하여 사기의 세가나 열전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리고도 미련이 남아 송 미 자 세가에 얹어서 기자에 대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기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사기>권 130 태 사공 자서
" 아 깝 도다 기자여! 아 깝 도다 기자여! 바른말이 체납되지 않더니, 마침내 미치광이로 가장하여
노예가 되었다....... 미 자가 책봉될 때, 태 사 기자에게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던 일을 찬미하여
"송 세가 " 제 8을 지었다. 고 하였습니다.
기자가 남긴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법을 집행하는 임금자신이 지켜야 하는 자연의 가르침과 요구입니다.
즉 하늘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세와 그 하늘의 요구를 알아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입니다.
이것이 큰 법 즉 "홍 범 구주" 일 것이고,
두 번째는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르쳐준 여덟 가지의 기본 행동법규입니다. 이것이 8조 금법입니다.
이렇게 큰 두 가지의 틀을 마련한 기자는 이미 은나라의 존경받는 성인이었음에도 불행은 그를 동반
하고 있었습니다.
은이 망한 뒤 주 무왕과의 관계며 벼슬의 유혹을 뿌리치고 돌아갔던 조선의 어정쩡한 대접 때문에
그는 8개년을 고 죽 국 이 있던 요 서 지방을 방황하다가 장도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와의 모든 연락을 끊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말많은 세상이 싫었으면 섬에 들어가 있으면서 농사일에만 전염하였을까요 이러한 본심을
모르고 그 후손들 마 져 진실을 오해하여 혈연관계마저 끊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황망 스럽기 짝이 없는 일 이지만 그들만을 나무랄 수 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기자의 묘가 어디에 있다고 하더라는, 근거가 에매한 후문이 사마천 때까지 이르자
<사기>를 쓰던 사마천은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현장까지 출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양 나라의 두 예가 주석으로 주장하였던 하남의 몽 성 근처에서는 이렇다 할 유물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이 형구 교수의 고고학적인 증언도 있었습니다.
후대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풍문들이 몇 군데 기록으로 남아 사실을 확인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습
니다. 이에 우리 후학들은 몇 가지 기준을 설정하고 기자의 진실을 확인하여야 될 줄 압니다.
* 기자가 동쪽 조선으로 떠난 뒤 소식을 끊었다는 기록을 믿는다면, 중국 내에서의 기자 묘에 대한
유적 설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왜 기자가 수유(須臾)로 들어가 외부와의 소식을 끊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는지를 새겨봐야 합니다.
그리고 동쪽조선을 한반도로 단정짓는 미숙한 견해를 버려야 합니다.
수유가 중국 땅에 있다는 설은 기자와는 무관한 모두 가짜입니다. 기자는 이미 중국 땅을 떠났다는
기록을 믿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기자가 들어간 수유는 조선입니다.
이 조선이 멀고 먼 황해바다를 건너야 갈수있는 한반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 한반도 평양에 기자가 들어온 사실을 확인 할 수 없다면 그것은 기자가 들어간 평양과는 관계가 없는
한반도는 가짜 평양이란 사실을 알고 진짜평양을 찾아 야 합니다.
기자가 들어간 평양이 아니라면 위만의 왕 험 성이 될 수 없고, 또한 한나라의 낙랑군이 될 수 없고
고구려의 펑양성이 될수 없습니다.
기자의 조선 입국을 부인하면서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학자들의 양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낙랑조선(기 자 조 선 이 아님) 과 위만의 왕 험 성과 한의 낙랑 군은 따로따로 나뉘어 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혼돈하지 말아야 됩니다.
백이숙제의 평양왕래설과 창락의 이제묘(夷齊廟)
창락 수양산삼림공원 2008년
<동서강목><부록>상권 하의 잡설에서 오운(吳澐)이 말하기를,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에 ‘고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다.’ 하였고, 상고하건대 고죽국이 뒤에
요서(遼西)의 땅에 이르렀으니, 그 강역(疆域)이 멀리 뻗어 지금의 요심(遼瀋) 지대가 된다.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차지하였으니 배구의 말도 믿을 만하다.
이첨(李詹)은 지금의 해주(海州)라 하고, 본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나왔다.
《여지승람》에는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하가 지극히 넓은데 《수서》가 어찌 낭설을
지어내 하필이면 한 모퉁이의 고려를 가리켜 고죽국이라고 하였겠는가.
전해오는 속담에도 백이ㆍ숙제가 수양산(首陽山)으로부터 평양(平壤)에 찾아와 기자를 방문하곤
하였다는 말이 있다.
수양산이 지금의 해주에 있으니, 이 말이 비록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천백년 이상의 일을 어찌 반드시
애매한 것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상은 오씨(吳氏)의 말이다.
상고하건대 《여지승람》에서 이 사실을 부인한 것은 《일통지(一統志)》에 ‘영평부(永平府)에
고죽국이 있고 거기에 3군(君)의 무덤이 있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동(河東)의 수양산에 또 이제묘(夷齊墓)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반드시 하나는 진실이요 하나는 거짓일 것이다.
중국의 책도 이처럼 믿지 못할 것이 있는데, 우리 나라 수양산이 어찌 백이ㆍ숙제가 천명(天命)을 지킨
곳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은 이 사실이 중국의 기록에 나오지 않았다 하여 우물거리며 감히 사실을 들어 잘라
말하지 못하니, 중국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염려스럽다.
그러나 중국이 은(殷)ㆍ주(周)의 시대에 즈음하여 문헌(文獻)이 또한 몹시 흩어져 없어져서 그 기록이
대부분 후인들의 추문(追聞)에서 나왔으니, 중국의 기록이라 하여 하나하나 다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증거를 댈 만한 사실이 있다.
백이가 일찍이 주(紂)를 피하여 북해빈(北海濱)에 살았는데, 지금 중국에는 북해가 없고 요해(遼海)가
중국의 동북쪽에 위치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 양서(兩西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를 가리킨다)의 바다가 요해와 잇닿았으니,
통틀어 북해라고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백이가 주(紂)를 피하여 북해에 살았으니, 주(周)를 피하여 옛날에 숨어 살던 곳에 돌아왔을 것이 필연
적인 사실이다.
백이가 의리로 주(周) 나라를 섬기지 않았으니 마땅히 고상한 뜻으로 멀리 떠나기를 기자가 조선으로
나온 것같이 하였을 것이다.
어찌하여 기내(畿內)가 가까운 하동(河東) 땅에 방황하며 가지 않았겠는가?
석만경(石曼卿)의 시에,
탕무가 싸움하던 곳에선 살기가 부끄러워 / 恥居湯武干戈地
서로 사양하던 당우의 땅에서 죽으련다 / 來死唐虞揖遜墟
하였으니, 이것은 특별히 문인(文人)들이 교묘하게 꾸며 만든 것이라 하겠으나 그 사실이 실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영평(永平)은 옛 요서(遼西)로서 주(周) 나라와 몹시 격원하고 또 우리 나라 땅과 가깝다.
생각건대 백이ㆍ숙제가 이미 중국을 떠난 터이라, 만약 향국(鄕國)으로 돌아가면 다시 혐의가 있을 것
같으므로, 백이ㆍ숙제가 처음 나라를 사양하고 도망하였기 때문이다.
고국(故國)으로부터 동쪽으로 나와 기자와 상종하며 우리 나라 수양산에서 죽었는데,
뒤에 고국에 귀장(歸葬)하며 수구(首丘)의 뜻을 이루었을 것이 사리에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민속에 유전되는 말이라 하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무왕(武王)이 기자를 신하로 삼지 않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절의와 명성이 당대에 울려 찬란
하였다. 주(周) 나라를 도망친 선비가 기자를 버리고 어디로 돌아갔겠는가?
【안】 공자(孔子)의 말에, “소련(小連)과 대련(大連)은 동이(東夷)의 아들이다.” 하였다.
대개 은(殷)ㆍ주(周) 시대에 동이로서 중국에 들어가 산 사람이 많았으니, 만약 선행(善行)이 있어
칭찬할 만하다면 성인(聖人)이 반드시 버리지 않았으리라.
일찍이 청인(淸人) 연국주(連國柱)의 저서를 보았는데, 그는 요(遼)의 광녕(廣寧)사람으로 이련(二連
소련ㆍ대련)의 후예가 되며, 삼한(三韓)으로 자호하였으니 그 뜻은 우리 나라를 취한 것이다.
광녕이 기자(箕子)의 봉역(封域)에 있었으니, 이련(二連) 또한 기씨(箕氏)의 백성인가 싶다.
[주D-001]수구(首丘) : 고향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제가 살던 큰 언덕으로 돌린다[狐死首丘]는 말이 있다. 《禮記 檀弓上》
백이ㆍ숙제가 수양산(首陽山)으로부터 평양(平壤)에 찾아와 기자를 방문하곤 하였다는 말이 있다.
백이숙제는 창락의 수양산(고산 孤山)에서 은거하였다는 기록이 밝혀지고 있다.
이곳은 기자가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장도로 건너가기 위해서 머무르던 곳이다.
창락읍지에는 백이숙제가 머물렀던 얘기가 기자 얘기와 함께 소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창락에서는 고대신문자(古代新文字)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이름은 고산이지만 옛날에는 수양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당시의 문자들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대략 짐작이 간다.
기자 얘기는 창락읍지 뿐만이 아니다.
《서경(상서)》에서도 볼수가 있다. 기자가 주 무왕의 권유를 뿌리치고 산동의 청주에서 배를 탔다는
기록까지 조작된 얘기라고 부정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孤山古称首阳山,山体险峻,“横看成岭,侧观成峰,山势突兀,险峻陡峭”,山顶有庙一座,相传为
伯夷、叔齐避难之处。<창락 성급수양산공원 간개>
孤山(수양산)은 창락현의 북쪽 해안가에 있다. 바로 바다를 건널수 있는 해변에 있었다.
일설에는 자주 기자를 찾아서 평양을 내왕하였다고 하였지만 실재로는 기자가 있던 사문도로 건너
갔기가 더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현재는 산이름을 고산으로 바꾸고 실재는 수양산이었던 창락현의 수양산이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수 있고 만약 이들이 기자가 있던 사문도로 건너갔다면 굶어죽을 이유가 없는것이다.
公园主体部分以孤山、方山两大山系25个山头组成。方山系主峰方山,海拔318米,东北南三面分别环
绕有独鲁山、马山、钓鱼台、东山、仙烟山等,山脉为东南西北走向,岩石组成系第三系玄武岩;孤山
系主峰孤山,海拔266.6米,有牛山、谢家山、花山、草山合为一脉,东西走向,沿城东胶济铁路蜿蜒
东伸,主要为石灰岩,地质年代系寒武纪上统。
森林公园规划区内林木资源丰富。现有有林地总面积22000亩,宜林地面积23000亩,其中国有有林地
面积12000亩,具体情况为:侧柏林分6000亩,刺槐林分5000亩,经济林面积1000亩;集体所有有林
地面积10000亩,其中用材林4000亩,经济林000亩。公园规划区域内森林覆盖率为48.9%。公园内树
木种类丰富,主要树种有侧柏、桧柏、雪松、黄栌、五角枫、苦楝、臭椿、刺槐、杨树、泡桐、麻栎、
国槐、银杏、楸树、车梁木、苹果、桃、杏、李子、柿子、樱桃等50余种。
公园内自然、人文景观丰富多彩,森林生态旅游资源开发潜力巨大。方山山体高大,山上怪石嶙峋,
树木葱郁,山西坡有始建于元朝年代的方山庙一处,院内有碑林一处,殿宇两座,神像9尊,庙下坡有
“寿”柏古树群一处,庙四周有4000余株树龄在100年以上的侧柏古树,其中有距今700多年的元柏,
也有距今600多年的明柏,树高林深,蔚为壮观。孤山古称首阳山,山体险峻,“横看成岭,侧观成峰,
山势突兀,险峻陡峭”,山顶有庙一座,相传为伯夷、叔齐避难之处。昌乐古八大景观中的“龙洞云开、
马山雪霁、孤峰夕照、方水朝烟”等四大景观全部分布于公园规划区内,另“剧城春晴、营丘夜雨、白
石飞花、黄村秫熟”等四大景观与公园相邻。近几年新发现的罗圈山溶洞群位于公园李家山林区,洞内
空间广阔,可容纳千余人,洞中乳石千奇百怪,绚丽多彩。经省地矿厅、省旅游局勘察证实,该溶洞
群极具开发价值。另外方山西南10公里为著名的昌乐古火山群,现已申报成为国家级地质公园。同时,
公园内蓝宝石资源丰富,方山为昌乐蓝宝石主产区。
公园内古文化遗址较多。孤山附近现已发现古文化遗址55处,有太玄吕望初封之都,尧帝之子朱车后
墓地;有“伯夷避乱居此北海之滨”的避乱采微处;有姜太公传说中的钓鱼台、马蹄泉、仙人坑;有韩
信卸甲乘凉的卸甲山,练兵演武的插旗台和汉代王侯古墓等等。方山西南有鲁智深旧居桃花山等。
公园四周水资源丰富,丹河、白浪河、于河、桂河四大水系分别流经公园四周。方山是于河、桂河
的发源地,于河沿方山以东流经5.5公里长度汇入潍城区域内的白浪河;桂河沿孤山以东向北流经17公
里长度汇入寿光市域内白浪河。小丹河沿公园以西横跨方山、孤山两大山系。公园内有中小型水塘多处。
公园地处昌乐县城郊,交通条件优越,区位优势明显,胶济铁路、注青高速公路、309国道、高等级大
沂路、潍临路、胶王路分布在公园四周,林区内道路可通车辆。
김창업의 연행록중에서 <고죽성을 지나며>
노룡현 우측으로 물이 두갈래로 갈라진곳에 고죽성이 있습니다.
산해관의 관문성과 주변성벽. 이 관문을 지나야 고죽성에 이를수 있습니다
고죽성의 근거리에 있던 기자의 조선성입니다. 성벽에는 옛날의 역사를 그린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조선성의 서문
이 글은 김창업의 연행록중에서 고죽성을 예방한 대목입니다.
당시 지성의 눈으로 살펴본 고죽성과 이제묘 그리고 백이숙제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감상하시기 바랍
니다.
21일(경오)
맑다. 영평부에서 출발하여 20리를 가서 이제묘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또 32리를 가서 사하역(沙河驛)에 이르러 잤다.
동틀 녘에 출발하였다. 지나는 곳마다 패루가 겹겹이 있었다. 거리 서쪽에 석탑이 있었으나 날이 어두워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남문을 나오니 옹성 밖에도 성이 있어 문을 막고 있고 그 밖으로 또 중문이 있었다.
문은 모두 3중인데 길이 서로 휘돌아 있었으니, 이런 제도는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것이었다.
제3문 바깥엔 또 매우 깊은 호가 2중으로 되어 있고 호마다 석교가 있었다. 좌우엔 인가가 즐비했다.
1리쯤 가니 강물이 있었는데, 이른바 청룡하(靑龍河)였다. 목교가 놓여 있었고 강물의 크기는 우리나라의
금강만 하였다.
강 언덕엔 많은 재목들이 쌓여 있었으니, 변방에서 흘려 내린 것들이었다. 굵기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길
이는 모두 길어서 짧아도 수십 척 이하는 없었다. 호부 관원이 나와서 세금을 거둔다고 하였다.
이 강을 지나 1리쯤 가면 작은 동산이 있고 동산 밑에 인가와 점방이 예닐곱 집 있으니 마을 이름이
남구장(南坵莊)이었다. 이곳을 지나 1리쯤 가면 또 강이 나오는데, 바로 난하(灤河)다.
강은 크고 맑고 흐름이 빨랐으며 깊은 데는 삿대[篙]가 반쯤 들어갔다.
물 밑은 흰 자갈이 깔렸고 강둑의 모래밭은 넓고 평평하였다.
다리를 건너 반 리쯤 가면 또 하나의 물이 있고 역시 다리가 있으니, 난하의 지류이다.
강을 지나면서부터 땅은 모두 모래땅이었고 들판이 다시 펼쳐지며 산들은 모두 멀리 바라보여서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큰길을 제쳐 놓고 강을 거슬러 곧장 서북쪽으로 향하였으니, 이제묘를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이때 해는 솟았으므로 영평부를 돌아보니 성안은 아침 연기로 가득하였다.
10리쯤 가니 한 촌락이 나오는데 대추나무가 많았으며 대문 밖에는 껍질을 벗긴 나뭇가지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흡사 닥나무같이 생겨는데 물어보니 뽕나무라고 하였다.
이 뽕나무를 밭두둑에 심어 두고 해마다 가지를 쳐서 잎은 누에를 먹이고 껍질은 종이를 만들며 나무는
광우리, 채롱 등을 만든다고 하였다. 《농서(農書)》에 지상(地桑)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마을 서쪽에 거친 산이 하나 있으니, 바로 수양산인데 높이는 수십 길에 불과했다.
산쪽으로 다가가니 더욱 북향이었고 2, 3리 앞에서 바라보니 솔숲이 울창하였다. 이르러서 보니 돌과
벽돌로 쌓은 작은 성이 있는데 매우 옛 제도였다.
문 위에 ‘현인구리(賢人舊里)’ 4자가 장구(章丘) 양선(楊選)의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성에 들어가 100여 보를 가니 사당이 있고 앞에 패루가 있는데, 편액(扁額)을 ‘칙사청절사(勑賜淸節祠)’,
‘만력갑오이이서(萬曆甲午李頤書)’라 하였다.
패루의 남쪽에 토장(土墻)을 쌓고 담벽에 큰 글씨로, ‘청풍백대(淸風百代)’란 4자를 썼는데, 획의 크기가
사람의 다리만 하였다.
숭정 계미년(1643, 인조 21) 진태래(陳泰來)의 글씨였다. 패루의 좌우에 각각 비석이 섰는데 동쪽 비석은
‘충신효자(忠臣孝子)’라 새겨졌으니, 숭정 계미년에 세운 것이며, 서쪽 것은 ‘도금칭성(到今稱聖)’이라
새겼으니 만력 갑오년(1594, 선조 27)에 세웠는데, 이이(李頤)의 글씨였다.
패루는 이곳에 비로소 문이 있고 문 위에 누각이 있었으며, 누각 위에 석비 하나를 세워 ‘백이숙제(伯夷
叔齊)’란 4자를 새겼다.
누각의 바깥 편액에도 역시 ‘백이숙제’란 4자를 썼으며, 그 위에 ‘상고일민(上古逸民)’이란 4자를 썼다.
문 좌우에 각각 작은 협문이 있고 왼쪽 문에 ‘천지강상(天地綱常)’, 오른쪽에 ‘고금사범(古今師範)’이라고
각각 씌어 있었다. 안에 들어가니 3칸 집이 있고 복판에 세 비석이 섰는데,
가운데의 비에는,“공자가 이르기를, 백이와 숙제는 구악을 생각하지 않았다. 원망이 이 때문에 적다.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엇을 원망하리요.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으되 백성들은 지금까지
그를 칭찬한다.[孔子曰 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 求仁得仁 又何怨 餓于首陽山 民到于今 皆稱之]”
라 새겼으며,
동쪽의 비에는,“증자는 이르기를, 백이와 숙제는 밭이랑 사이에서 죽었다.
[曾子曰 伯夷叔齊 死于溝澮之間]”라 새겼다.
또 서쪽의 비에는,“맹자는 이르기를, 백이와 숙제는 성인으로서 맑은 분이다.
[孟子曰 伯夷叔齊 聖之淸者也]” 라 새기고, 그 옆에 쓰기를, ‘가정(嘉靖) 18년 여름 4월 기망에, 영평
지부(永平知府) 후학 장빈(張玭)은 삼가 적는다.’고 하였다.
좌우 뜰에 각각 종고루(鍾鼓樓 종과 북을 달아 둔 누각)가 있고 비옥(碑屋)을 지나면 또 문이 있는데
이것이 제2문이다.
제2문엔 편액은 없고 좌우에 각각 협문이 있으며 동족 협문에 ‘염완(廉頑)’, 서쪽에 ‘입나(立懦)’라고
썼다.
이 문을 들어서면 비로소 정전인데, 안쪽 편액에 ‘윤상사범(倫常師範)’, 바깥 편액에 ‘만세표준(萬世
標準)’이라 썼다. 정전 뒤에 또 하나의 중문이 있고 안팎 모두 편액을 달았는데, 바깥 것은 ‘인현조적
(仁賢肇跡)’, 안 편액은 ‘평란상경(平灤上境)’이라고 하였으며, 역시 장빈의 글씨였다.
문 좌우로 또 협문이 있는데 동쪽은 ‘관천(盥薦)’ 서쪽은 ‘재명(齋明)’이라 하였다. 또 문안에 3칸 집이
있으니 읍손당(揖遜堂)이다.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 5)에 세운 것이었다.
그 뒤에 벽돌로 축대를 쌓았는데 높이가 한 길 남짓, 가로가 6, 7장 되었으며 양옆은 담에 붙이었으니
청풍대(淸風臺)다. 이 대 위에 3칸 집이 있고 편액에 ‘산고수장(山高水長)’, ‘심광신이(心曠神怡)’ 등의
문자가 있으며, 양옆에 각각 작은 홍예문(虹霓門)이 있으니,
동쪽은 ‘고도풍진(高蹈風塵)’, 서쪽은 ‘대관환우(大觀寰宇)’라고 썼다.
이 대를 오르려면 모두 이 홍문을 통한다. 홍문 안엔 벽돌을 쌓아 층계를 만들어 놓았다.
담을 끼고 오르면 대의 동서에 각각 문이 있다. 동쪽 문은 ‘백대산두(百代山斗)’, 서쪽은 ‘만고운소(萬古
雲霄)’라 했다. 이 대의 북쪽엔 짧은 담이 있고 담 바깥은 강이다.
패루로부터 이곳까지는 1백 수십 보, 동서는 40여 보였으며 주위는 담으로 둘려 있고 담 밖은 4, 50묘
(畝)의 평지다. 이제묘의 위치나 규모의 훌륭함은 다른 묘당의 유가 아니었다.
우리들 일행은 패루 밑에 이르자 모두 말에서 내렸으며, 제2문에 이르러 백씨는 의관을 갖추었다.
나는 해진 옷을 벗고 도포를 입은 뒤 정전으로 나아가 재배례를 드렸다. 백이와 숙제는 면복(冕服) 차림
으로 단상에 앉아 있었다. 좌우엔 8개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명 나라 홍치(弘治) 11년 무오년(1498,
연산군 4) 여름에 세운 것이요, 하나는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 2) 가을에 세운 것이며, 하나는 만력
계묘년(1603, 선조 36) 가을에 세운 것이며, 하나는 가정 경술년(1550, 명종 5) 여름에 세운 것이며,
하나는 성화 10년 갑오년(1474, 성종 5) 봄에 세운 것이며, 나머지 셋은 다 순치, 강희 연간에 세운 것이
었다.
왼쪽 단상에 또 한 비가 있는데 근년에 세운 것이었다. 전각의 기둥에 쓴 글은 모두 여문(儷文)이었는데
기억할 수 없다. 읍손당에 오니 벽에 고금인(古今人)들의 시가 매우 많았으며 서쪽 벽엔 왕세정(王世貞)
의 ‘조백이부(弔伯夷賦)’를 돌에 새겨 벽을 파고 붙여 놓았다. 당 뒤에 두 비가 있는데,
하나는 제사의 법식[祀典式]을 기록한 것으로, 성화 9년 계사년(1473)에 세운 것이었다.
법식은 대개,“매년 봄, 가을 중월(中月)에 영평 지부는 상의 명을 받들어 희생과 단술을 갖추고 와서
잔을 드린다.” 하였으며
축문은,“나라를 사양함은 인을 온전히 함이요, 정벌을 간함은 의를 보존함일세.
성인 중에 청(淸)이 되셨으니, 천고에 짝이 없네, 뛰어난 덕을 의지하고 우러러보니, 돈독해져 잊지
못하리. 이러므로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려, 길이 강상의 모범을 삼나이다.
[遜國全仁 諫伐存義 爲聖之淸 千古無二 依仰高風 曰篤不忘 庸修祀事 永範綱常]”라 하였다.
예전엔 집[屋]이 있었다는데 다 퇴락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상고해 보건대,
“고죽군(孤竹君)은 은(殷) 나라 탕왕(湯王) 18년 3월 병인에 우왕(禹王)의 후예로 봉해졌다.
성은 묵태씨(墨胎氏)다. 일설에는, 고죽군의 성은 묵(墨)이요 이름은 이초(台初) 이(台)의 음은 이(怡)다.
《공총자(孔叢子)》의 주석. 라고도 한다. 당 나라 현종이 의사(義士) 8인을 제사 지낼 때, 백이ㆍ숙제
두 사람도 8인 중에 넣어 봄 가을에 날을 가려 제사를 드렸고, 송 나라 진종(眞宗)은 분음(汾陰 산서성
(山西省)에 있다.
한 무제가 보정(寶鼎)을 얻은 곳)에 제사할 때 하동부(河東府)에 머무르면서 이제묘에 들러 제사 지낼
것을 명했으며, 또 휘종(徽宗)은 정화(政和) 3년(1113, 고려 예종 8)에 백이를 청혜후(淸惠侯)로, 숙제
를 인혜후(仁惠侯)로 각각 봉했고, 원 나라 세조는 지원 18년(1281, 고려 충렬왕 7)에 백이를 소의
청혜공(昭義淸惠公)으로, 숙제를 숭양 인혜공(崇讓仁惠公)으로 각각 추봉(追封)하였다.
명 나라 성화 9년(1473, 성종 4) 영평 지부 왕새(王璽)는 명을 받들어 제사하고 누상(樓上)에 비를
세웠다.”고 했다.
청풍대에 오르면 강산이 절경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들은 대로였다.
강물은 서북쪽에서 흘러 청풍대 앞에 이르러 두 갈래로 나뉘고 그 중간에 생긴 작은 섬은 청풍대와
마주한다.
청풍대 위에 고죽군의 사당이 있고 대 밑은 절벽이 가파르다. 물이 이 절벽 밑에 와서는 동서의 폭이
수백 보 되는 못을 이룬다. 이 못 위아래로 여울돌[磯石]이 수면 위로 솟아 있는데 높은 것은 한 길
남짓하고 낮은 것은 조금 낮다.
동북쪽 연안에 일대의 촌락이 있는데 모두 어부들의 집으로 우리나라의 저자도(楮子島)와 비슷하면서
그보다 넓다.
눈을 북쪽으로 돌려 100리 밖을 바라보니 멀리 산이 중첩하여 가로 뻗고 장성이 아물아물 보였다.
동쪽문으로 나와 바깥으로 나오니 수십 그루의 장송이 강 언덕을 덮고 있다.
돌층계를 걸어 내려와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고죽묘(孤竹廟)에 이르니, 사당은 황폐하여 문은 기울어
넘어졌고 담도 무너졌는데, 고죽군의 소상만이 엄연히 앉아 있고 탁자 위에는 박쥐 똥이 수북하였다.
백씨와 부사 및 서장관도 왔다.
이곳에서 청풍대를 바라보니 은은히 솔숲 사이로 보여 그윽한 풍경을 새삼 느끼게 하였다.
드디어 사당으로 돌아왔다. 서쪽 담 밖에 한 채의 집이 있고 승려 2, 3명이 거처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당을 지키고 있는 모양이다. 당엔 불상을 모셨고 실내는 자못 정결하였다.
벽엔 한 그림병풍이 걸려 있는데, 꽃과 새, 수선화, 매화를 그렸는데 필치가 썩 훌륭하였다.
마침 장기가 있기에 승려에게 두게 하고 말 가는 것을 구경하였다. 상(象)은 용(用) 자로 가고,
포(包)가 적방(敵方)을 취하는 데는 사다리를 사용했으며, 졸(卒)은 앞으로 나가기만 하고 옆으로
가지는 못하였다.
물고기를 팔러 오는 자가 무척 많았다. 쏘가리, 누치, 붕어 등이 모두 있고 우리나라에 없는 것도 많았
는데, 대개가 뱅어 종류였다. 이곳에 오면 주방에서 마른 고사리로 국을 끓이는 것이 상례인데 이날도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우스웠다.
밥을 먹은 뒤 드디어 출발하였다. 지나는 마을마다 대추나무와 밤나무가 제일 많고 배나무도 가끔
있었는데, 모두 종류별로 줄을 지어 매우 정돈되어 있었다. 밭두둑엔 모두 뽕나무를 심어 가는 줄기가
떨기를 이루어 들판을 두루 덮었으며 간혹 이미 가지를 벤 것도 있었다.
상고해 보건대,
“고죽군(孤竹君)은 은(殷) 나라 탕왕(湯王) 18년 3월 병인에 우왕(禹王)의 후예로 봉해졌다.
성은 묵태씨(墨胎氏)다. 일설에는, 고죽군의 성은 묵(墨)이요 이름은 이초(台初) 이(台)의 음은 이(怡)다.
《공총자(孔叢子)》의 주석. 라고도 한다. 당 나라 현종이 의사(義士) 8인을 제사 지낼 때, 백이ㆍ숙제
두 사람도 8인 중에 넣어 봄 가을에 날을 가려 제사를 드렸고, 송 나라 진종(眞宗)은 분음(汾陰 산서성
(山西省)에 있다.
//한 무제가 보정(寶鼎)을 얻은 곳)에 제사할 때 하동부(河東府)에 머무르면서 이제묘에 들러 제사 지낼
것을 명했으며, 또 휘종(徽宗)은 정화(政和) 3년(1113, 고려 예종 8)에 백이를 청혜후(淸惠侯)로, 숙제를
인혜후(仁惠侯)로 각각 봉했고, 원 나라 세조는 지원 18년(1281, 고려 충렬왕 7)에 백이를 소의 청혜공
(昭義淸惠公)으로, 숙제를 숭양 인혜공(崇讓仁惠公)으로 각각 추봉(追封)하였다.
명 나라 성화 9년(1473, 성종 4) 영평 지부 왕새(王璽)는 명을 받들어 제사하고 누상(樓上)에 비를
세웠다.”고 했다.
위 문구로 보아 한무제나 송나라는 고죽국을 산서성 방면으로 본 것 같습니다.
물론 하동부(河東府)는 은허였던 안읍(安邑)과 가까운곳입니다. 그곳 수양산을 어떤 지도에는 백이숙제의
은신처로 표기한데도 있습니다.
산서지역의 태원주변으로는 동이족들이 이동하여 터를 잡고 화하문명의 모태가 된 동이문명을 꽃피운
흔적들이 차츰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때 영평에서 제사지내고 비를 세운 것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인용된 당대(唐代)의 괄지지
(括地志) 문구,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요서군(遼西郡) 조, 한서보주(漢書補注) 문구를 보고 고죽국의
위치를 노룡 방면으로 본 것 같습니다.
고고죽국과 고죽국 이동예상
백이.숙제가 있었는 고죽국은 중국의 사서에 동이족 나라인 商을 세운 탕왕이 원년 정월 또는 3월에
일족을 고죽군으로 봉하여 땅을 분봉해 준 것으로 나옵니다.
이 무렵 분봉해 준 제후의 땅은 보통의 경우 사방 100리 정도였으므로 큰 나라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탕왕 때 은나라 수도가 淇縣이고, 영역이 대략 지금의 산서성, 하남성 방면을 중심으로 한 황하 중.하류
방면이었습니다. 뒤에 은허로 수도를 옮긴 후에도 은나라의 영역은 큰 변동이 없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중국학자들은 애써 부인하려 하지만 은나라는 동이족의 나라입니다.
동이족이 하북성, 산동성 방면이라면 몰라도 왜 황하 중.하류 방면까지 진출하여 나라를 세웠는지 의문
이나, 고대에 청동무기나 철기가 발달하기 전에는 농경족보다 기마족의 무력이 강하였으므로 무력이
기마족이 농경족 지역으로 진출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기자의 箕나 伯夷는 동방에서 온 무리를 뜻합니다.
즉 중국의 산서성, 하남성 일대로 먼저 이주하여 은나라를 세운 무리나, 뒤에 은나라 지역으로 부족을
거느리고 이주해간 箕나 伯夷 선조 무리는 모두 동이족으로 보입니다.
먼저 이주해간 殷나라 무리가 뒤에 이주한 箕 무리나 伯夷 선조 무리에게 기자 또는 고죽군으로 봉
하고 공존한 것은 이들이 이주하기 전 원래 지역이 막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으
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주나라가 일어나 은나라를 멸망시키자 기자족 무리는 원래 터전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고죽국도 백이.숙제의 비협력적인 태도로 보아 주나라가 제후국으로 그대로 인정해 준 같지는
않고, 무왕이 죽고 은나라 잔존 무리인 무경의 난이 일어났을 때 모두 숙청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무렵 고죽국 무리들도 산동 방면 내지 요서로 향하여 이동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기자족 무리나 고죽국 무리가 원래 그 선조들이 살던 터진인 난하나 대릉하 방면으로 돌아온 시기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주나라가 일어난 후 주나라에 협력치 않은 기자족이나 고죽국은 봉지가 회수되었을
것이므로, 아마도 곧 이동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적어도 춘추시대가 도래하기 전 원래 터전인 조선 지역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여러 사서나 서적에 나오는 백이.숙제의 행동반경을 보면 은나라 멸망 이전의 행동반경은 주로 하남,
산서성 방면이고, 북으로 피신했을 때도 북해(발해) 바닷가를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기자족 무리나 고죽국 무리가 난하 대릉하 방면에 도착한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이 조선 지역으로 돌아온 후 조선 지역 내에 흩어져 촌락국을 여러 곳에 세우고 살았습니다.
이때 고죽국 무리나 기자족 무리가 조선 지역으로 온 후 이들이 흩어져 거주한 곳을 고죽국이니 기자국
이니 부르는데, 잘못 이해하면 혼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때의 고죽국, 기자국은 조선 지역내에 여러개가 흩어져 있었고, 이 나라의 성격은 촌락국가 성격의
제후국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이 흩어져 거주한 곳이 한두곳이 아니므로 조선 지역 내 기자죽, 고죽국이 여러 곳이 되었을 것입
니다.
중국의 서적에는 난하 방면에 고죽국과 이웃하여 주무왕이 봉한 기자국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고죽국, 기자족 무리가 거주한 곳이 난하 방면, 대릉하 방면, 객좌 방면 등 여러 곳에 있습니다.
중국의 사서를 잘못 해석하면 난하 방면에 고죽국이 있고, 대릉하 방면에 고죽국이 있으니 고죽국은
난하와 대릉하 방면을 모두 어우르는 거대한 나라로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죽국, 기자죽은 중국에서 이주한 무리들이 조선 지역에 흩어져 여러 곳에 기자족, 고죽의
촌락을 두고 그 촌락을 고죽국, 기자국이라 불렀고, 그러한 기자국, 고죽국이 난하 방면이나 대릉하
방면 등 여러 곳에 았었다고 봐야 합니다.
사서상으로는 춘추시대에 상곡, 북경 이동에서부터 요동반도까지는 조선 지역입니다.
그 조선 지역 안에 기자국이 나오고, 고죽국이 나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이 고죽국, 기자국은 조선 지역 안에 중국에서 이주해 온(되돌아 온) 무리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작은 촌락국을 형성하고 살면서 전에 중국에서 부르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춘추시대에 조선은 산융의 세력권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부여의 원 조상인 산융이 조선 지역을 세력권에 넣고 있었다는 것은 춘추시대에 산융이 만주 지역의
강자였고, 조선은 산융의 번국 정도였며, 조선 지역 안의 고죽국, 기자국은 조선 지역 내 기자족, 고죽
무리들이 각지에 흩어져 있는촌락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백이.숙제의 고죽국이나 태원 등지의 기자국은 주나라가 일어나고 주나라에 협력한
무리들은 생존하고 주나라에 협력하지 않은 부족 무리들은 주나라에 의하여 무경의 난을 전후하여
모두 멸망하였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그리고 난하, 대릉하 방면에 보이는 기자국, 고죽국은 중국에서 되돌아 온 무리들이 촌락이라는 점을
영유하면서 살아간 아주 작은 촌락국을 기자국, 고죽국 등으로 불렀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영역을 조선, 기자국, 고죽국이 삼중으로 영유하고 있었다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孤竹은 忠,義,孝의 모범의 상징으로 사용된 용어입니다.
아마도 나라 이름이 고죽국이 아니고 백이.숙제가 죽은 후 붙여진 이름으로, 사서를 쓰면서 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적은 것으로 생각되고, 고죽국의 원래 명칭은 伯夷, 箕 등 동이족을 뜻하는 용어로
지어졌을 것입니다.
중국의 사서를 보면 고대에 중국대륙 깊숙히까지 만주 기마족이 침범해 들어갔습니다.
맹자(孟子) 이루장구(離婁章句) 하(下)를 보면 [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鳴條 諸風負荷明條 東夷
之地 舜東夷之人也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이사하였으며, 명조에서 죽었다.
제풍, 부하, 명조는 동이의 땅이다. 순은 동이 사람이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 서경(書經) 우서(虞書) 순전(舜傳)에는 사근동후(肆覲東后)라는 말이 나옵니다.
[世二月 東巡守 至于岱宗 肆覲東后 그 해 이월 동쪽을 순수하고 태산에 이르러 동쪽의 임금을 찾아
뵙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요임금은 舜을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맡기니, 순은 선대 제왕들의 신하들의 후손을 찾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태평성대를 계속하자 요임금은 순이 등용된지 20년이 지나자 순을 섭정으로 삼고 은거하
였고, 8년 후 요임금이 사망하자, 순은 요임금의 아들 단주(丹朱)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변방에 은거
하였으나 백관과 백성들이 은거한 순을 찾아와 조회를 보고 재판을 치르자 천명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돌아와 왕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순임금은 왕위에 즉위한 신하들을 전문적인 직분에 따라 임명하였으며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회유하여 넓은 강역에까지 통치가 미치게 되었으며,
특히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이하여 우(禹)를 등용하여 마침내 치수에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우의 성공적인 치수로 농토가 증대되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순임금의 뛰어난 인재 등용을 칭송하자
순임금은 우를 치하하며 그에게 구슬을 하사하였고, 우의 공로가 뛰어나자 순임금 재위 22년 만에
우를 하늘에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았다고 전해집니다.
요임금이 단군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고, 요임금을 순임금이 이어받았으니 순임금은 단군조선의
태자 부루와 같은 시기 인물로 추정됩니다.
환단고기에 태자 부루가 치수의 방법을 우에게 가르쳐 주어 순임금은 치수에 성공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순임금은 동쪽으로 구려분정(회,대지역)에 와서 동쪽의 后(임금)을 찾아뵙다고 나옵
니다. [순임금이 조근한 동쪽의 임금은 단군의 아들 부루를 말하는지?
아니면 구려분정 제후를 말하는지? 不明임)에게 조근하였다고 나옵니다. .
그후 禹의 夏나라를 지나 기원전 1600년경 湯의 商나라(殷나라)가 세워질 때까지 중국의 동쪽인 淮岱
지역은 구려분정이, 하남성, 산서성 방면은 상나라(은나라)가 존재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동이족이 동쪽과 중원을 나누어 동쪽은 구려분정이, 중원은 은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나라 시대에 단군조선과 충돌이 생겨 단군조선이 은나라 수도를 점령하고 회,대 지역을 보존
하였고, 그후 남국과 고죽군 무리들이 다시 은나라 지역을 침범하여 은나라 제후들 사이에 정착하게
하였습니다.
은나라 지역에 고죽국이 생긴 시기는 이때가 아닌가 생각되나,
중국의 사서에는 은나라 시조 탕왕 18년(워년?) 정월(3월?)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고기에 의하면 은나라 지역에 고죽군 무리들이 침범해 들어가 정착한 시기가 단군 색불루 때로
보이고, 은나라는 은나라 지역 일부를 차지한 고죽군을 제후로 봉하여 현실화 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
입니다.
이 고죽국은 주나라가 은나라를 정벌하였을 때 주나라에 협력하지 않아 멸망한 것으로 보이고,
고죽국 무리들은 원래 터전인 요서로 되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태원 등지로 이주한 무리들은 전에 은나라로 부터 箕 작위를 받았으나(이것 역시 고죽군처럼
점령을 현실화 시켜 준 조치일 것입니다),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에 협력치 않고 원래 터전인 요서로 되돌아온 것 같습니다.
요서의 고죽국 무리들은 노룡 방면과 조양 방면 등지에 거주한 것 같습니다.
또 주나라가 세워진 후 중국에서 돌아온(동래한) 기자는 주무뢍으로부터 조선후로 봉 받았다고 하는데,
조선후로 봉 받은 지역은 고죽국이 있는 곳과 아주 가까운 지역입니다.
「永平府十五里 有孤竹君國所封之地 又曰朝鮮城在永平府境內 箕子受封之地以此 有與孤竹國爲鄰
영평부 15리에 고죽군이 나라를 봉 받은 땅이 있다. 또 말하기를 조선성이 영평주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 받은 곳이 이곳이라 한다. 고죽국과 이웃하고 있었다.」 大明一統志
위 문구를 보면 영평부 경내에 기자가 봉 받은 곳이 있고, 이웃에 고죽군이 봉받은 나라가 있다고
적혀 있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인용된 당대(唐代)의 괄지지(括地志)에는 "고죽고성(孤竹古城)이 노룡현
(盧龍縣) 남(南) 12리에 있다고 하였고,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요서군(遼西郡) 조에는 영지(令支)에
고죽성(孤竹城)이 있다고 하였으며, 한서보주(漢書補注)에는 고죽성(孤竹城)이 영지(令支),비여(肥如)
경(境)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난하 방면에 등장하는 고죽국(孤竹國)은 기자의 소봉지(所封地)와 아주 인접해 있는데, 아주 인접해
있다는 것은 고죽국이던 기자의 소봉지(所封地)던 규모가 아주 작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규모가 커다면 바로 인접하여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고죽국이나 기자의 소봉지(所封地)인 노룡 방면은 당시 조선의 영역 안에 있었고, 당시 조선의 영역은
진개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는 상곡, 북경 동쪽 계 방면에서부터 요동반도까지 만주 남부지역이었습
니다.
즉 고죽국이나 기자의 소봉지(所封地)는 조선의 영역 안에 있었고, 이 무리들이 거주한 곳은 조선의
영역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으며, 조선 지역을 통치한 사람은 조선왕이지 중국에서 이동해 온 기자
나 고죽국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춘추시대에는 만주남부 지역이 산융의 세력권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소위 조폭들의 나와바리로 표현하면, 산융은 전국구이고, 조선은 시,군구이고. 고죽국, 기자
소봉지는 동네구 나와바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이때 요서지역에 나오는 고죽국은 은나라의 후국인 고죽국과 나라 성격, 위치 등이 전혀 틀리는
것입니다.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국은 북쪽으로 가면 북해(발해) 바닷가로 갈 수 있는데, 노룡이나 조양에서는
복쪽으로 가면 초원지대만 나올 뿐입니다.
또 요서의 고죽국은 조선지역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촌락국이지만 조선에 속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백이.숙제의 고죽국은 조선에 속한 나라가 아니고 은나라에 속한 나라였습니다.
만약 고죽국이 조선에 속한 나라였다면 백이.숙제가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굶어죽었다는
소리는 웃기는 소리가 됩니다.
혹자는 요서의 고죽국 사당과 묘를 가지고 은나라의 후국인 고죽국이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은나라 때 자기 나라 영역도 아닌 곳에 어떻게 후국을 둘 수 있으며, 요서의 묘에서 발굴된 유물은
은나라 때 유물도 있지만 함께 발굴된 것 중에는 진,한 대 유물 더러는 그보다 훨씬 후대 유물도 나옵
니다.
도대체 중국에서 발표된 고고학 논문에 대하여 조그마한 지식이라도 있다면 고죽국의 묘에서 나온
다른 유물은 모른체하고 은나라 시대의 유물만 가지고 묘에서 은나라 시대의 유물이 나왔으니 은나라
의 고죽국은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제왕세기>중증설 상략...墨台氏在接受商汤分封之前是出自东方先商族与夏族的重合族,而在“汤特封
墨台氏于孤竹”之后,也逐渐与殷人融为一体,成为地道的殷族,并世为殷王的臣属,一向忠实地服务
于殷王朝。 <墨台氏在接受商汤分封之前是出自东方先商族与夏族的重合族,>
*묵태씨는 은나라 탕왕으로부터 분봉받기 전에 동방의 선상족(고조선?)으로 부터 합류한 하족의 중합족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동이족에서 은나라와 손을 잡았으므로 혼합족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제왕세기>에서 묵태씨를 동방에서 합류한 선 상족이라고 하였는데 그 선 상족이란 바로 번한(번조선)
이었습니다.
묵태씨는 탕왕의 즉위식때 번한의 축하사절로 은나라에 갔었고 또 번조선은 탕왕이 하나라의 걸왕을
치고 상나라를 건국할때 지원군을 보내어 도왔다는것입니다.
그리고 상나라건국 18년후에 묵태씨가 직접 상나라의 영향력있는 제후국으로 참가한것입니다.
<환단고기>의 번한세가 (상)에는 묵태씨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도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고죽국이 조선의 제후국이었다는 얘기가 되네요.
그리고 군사력은 당시 은을 압도하였고, 중략---
갑오년에 장군 치운을 파견하여 탕을 도와 걸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에 묵태를 파견하여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했다.
소전이 죽고 갑자년에 아들 사엄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동생 서한이 즉위했다.
서한이 죽으니 정축년에 아들 물가가 즉위했고 그가 죽은 뒤 신사년에 아들 막진이 즉위했다.
막진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진단이 즉위했다. 이해 은나라 왕 태무가 찾아와 서 특산물을 바쳤다.
그가 죽으니 계유년에 아들 감정이 즉위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소밀이 즉위하였다.
계사년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이 이에 사죄하였다.
소밀이 죽자 아들 사두막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죽으니 계부 갑비가 즉위했다.
갑비가 죽고 경신년에 아들 오립루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아들 서시가 즉위했다.
그도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안시가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아들 해모라가 즉위했다.
해모라가 죽고 단군 소태 5년 우사를 조정으르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제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에 은나라왕 무정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를 듣고 상장 서여와 함께 이를 격파
하고 추격하여 색도에 이르매 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한뒤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탕왕은 요순의 제후였던 상의 시조 설의 14세 손입니다.
그가 번한(번조선)의 군사력을 지원받아 하나라를 물리치고 독립국인 상나를 세운것입니다.
상나라는 반경(盤庚)때 국호를 은(殷)으로 바꾸고 무을(武乙)때 국도를 조가(朝歌)로 옮겼다가 주왕때
주나라 무왕에게 망합니다. 탕왕 이후 28대 기원전 1122년경입니다.
기자와 천문
그동안 우리들은 동양의 성인 기자의 진가를 너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명색이 "역사"라는 학문을 논한다고 하는 후생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문은 너무나도 폭이 좁았으니까요.
겨우 강역찾기에만 급급하여 특히 <지리지>등에만 중점을 두고 하늘을 올려다볼줄은 몰랐습니다.
오행천문지등을 등한시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하늘같은 기자의 존재를 과소평가할수 밖에
없었지요.
그렇게도 중국인들이 하늘처럼 모시던 공자께서 기자를 성인으로 모시던 내력을 우리들은 모르고 있었습
니다. 근래에 와서야 그 내용을 조금 알고 보니 그것은 기자가 천문학의 달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떠한 일도 천문을 모르고서는 감히 시도할 꿈도 못꾸었지요.
대강, 농사, 전쟁,항해등의 성공여부가 모두 천문에 달려있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이같은 하늘의 얼굴을 인식하였으면 그 뜻을 전달받은 지도자는 지체없이 대책을 강구하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이 역활의 분담은 천왕(天王)이 맡았고 하늘의 노여움을 달래는 위무행사는 주로 천녀(天女) 즉
신녀(神女)가 맡았습니다.
이같은 제천행사는 보통 소도(蘇塗)에서 이루어 지고 그러한 국가급 소도를 모신 장소를 상(象)으로 불렀
습니다. 상(象)은 천상(天象)을 뜻하고 오늘날은 이러한 기관을 관상대(觀象臺)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집단무(集團舞)가 이루어지던 장소를 신시(神市)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서>권 26 천문지에 조선의 위치를 말하기를 한무제가 공격하였던 조선은 멸한뒤 낙랑과 현도
군을 만들었는데 그 조선은 바다가운데 있었고, 건너다 보이는 상(象)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은 북쪽에 사는 호 지역이라고 하였는데. '胡'자를 보통 어찌호로 해석을 하지만 <강희대옥편>에는
오래살 호로 나온것으로 보아 <사기>봉선서에서 불사국으로 기록한 예를 차용한듯합니다.
<창락현 속지>에는 '胡'를 仙人과 같은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호지역야(胡地域也) 즉 장도는 신선들이 사는 불사국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元封中,星孛於河戍,占曰:「南戍為越門,北戍為胡門。」其後漢兵擊拔朝
鮮,以為樂浪、玄菟郡。朝鮮在海中,越之象也;居北方,胡之域也。>
<원봉중(전 110~105 한무제)에 하(河)자리에 있는 별의 색이 변하는것을 보고 점을 쳤는데 남쪽의 월문
과 북쪽의 호문에 별고가 있음을 나타냄으로 그 후에 한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쳐서 뽑아버리고
낙랑군과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조선은 바다 가운데 있었는데 건너다 보이는 象(신시)이었다. (그러니까 별자리에서 남쪽을 지키는 월문
(越門)이란 남쪽으로 바다로 막히고 북쪽을 지키는 호문(胡門)이란 불사국의 소도라는 뜻으로 해석이 됩
니다. 더 명쾌한 해석이 있으면 지도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한나라가 조선을 치기 위해서 별점을 쳤는데 당시 별점의 상태를 해설한기록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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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 서합 괘(噬嗑卦)의 상(象)에, “천하의 사람을 모으고, 천하의 물자를 모아 들여서 서로
교환해 가서 각기 자기의 생활을 누리게 한다.” 한 것이 대체로 성문(星文)에서 뜻을 생각해 낸 것이다.
<성호사설><천지문>
알쏭달쏭한 단어들이 너무도 궁금하여 추적해봤더니 하늘과 관계되는것을 천상(天象),그리고 땅과 관계
되는 것을 (地象)이라하고 임금중에서도 특별한 천손으로 추앙받고있는 주몽(朱蒙)을 상해(象解)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桥南约里许,当河之冲,怪石嶙峋,水激石鸣,涛声震崖谷。这一段河谷,就是县志记载的有名的仙人
胡同。仙人胡同窄而深,河水断流的时候,山里拾柴的孩子背着花篓刚好可以穿过。(출전: 창락현속지)
<就是县志记载的有名的仙人胡同>。胡라는 뜻은 仙人과 같다고 하였네요.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도 주석으로 기록이 되어 있지만 <심당 전서>에 <象>자는 코키리 상자
입니다.
이 코키리를 인도에서는 신(神)처럼 인식한다고 합니다. 70년대에 수입된 인도영화중에는 신상(神象)이
라는 영화도 있었던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기타 보통 형상등은 상(像)으로 표현합니다.
이 월지상(越之象)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단재선생께서는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제동을 걸기 시작하여
바닷가운데 있다고 기록된 많은 나라들의 위치가 방치되어 왔습니다.
천손족과 신시의 어원에 대한 내력은 대략 이쯤으로 소략하고 천문의 달인이셨던 기자에 대해서 약간의
도움말과 실재로 응용된 별들의 기록을 보시겠습니다.
방대한 서토, 일명 중국대륙은 주나라가 종주국, 은나라를 제거하면서 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한 변화는
천지개벽처럼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난세일수록 영웅은 나타나는 것이어서 이때 등장한 사람들이 주 무왕과 패전국의 태사였던 기자, 그리고
충신의 사표인 백이와 숙제 였음을 우리들은 대충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운데 사학자 일부는 알량한 민족자존심을 앞세워 그를 은국인으로 매도하며 배척할 궁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조선이 자랑할수있는 천문학의 비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비록 조금은 순서가 바뀌었으나 무엇이 기자의 진 면목인지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천문(天文)은 하늘의 인상(印象)즉 천상(天象)을 판독하고 길흉의 예고에 대비하는 학문이지요.
거기에는 백성들의 생사와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천문학을 얘기하자는게 아닙니다.
천상(天象)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것은 신시(神市)와 천손족(天孫族)의 어원이 어떻게 왔는가를 알아보고
청구국, 한수(漢水) 북두칠성등을 땅에 그린다면 우리들의 강역은 어떤 위치에 그려질것인가를 기왕에
기록으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해동역사>권 17 성역지(星歷志)의 성야(星野)로 부터 시작합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17권
성력지(星曆志) 성야(星野)
○ 창룡(蒼龍) 7수(宿)에는
미수(尾宿)ㆍ기수(箕宿)가 있으며, 저수(底宿)가 가슴이고 방수(房宿)가 배인데,
이는 기수(箕宿)가 똥을 눈 것이다. 기수 4성은
현도(玄菟)가 그에 응한다. 《성경(星經)》
○ 유향(劉向)이 말하기를, “지분(地分)에 있어서 연지(燕地)는 미수와 기수의 분야이다.
미수 4도(度)에서부터 두수(斗宿) 6도까지를 석목(析木)의 성차(星次)라고 하며, 연(燕)의 분야이다.
어양(漁陽)ㆍ우북평(右北平)ㆍ요동(遼東)ㆍ요서(遼西) 등의 지역이 여기에 해당되며,
낙랑(樂浪)ㆍ현도(玄菟)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한서》
○ 위(魏)나라 태사 영(太史令) 진탁(陳卓)이 말하기를,
“미수(尾宿) 10도에서부터 남두(南斗)
11도에 이르기까지는 석목(析木)의 성차가 되는데, 간지(干支)에
있어서는 인(寅)에 해당되며, 연(燕)의 분야이다.
살펴보건대, 비직(費直)은 석목의 성차가 미수(尾宿) 9도에서 시작된다고 하였고, 채옹(蔡邕)은 미수 4도
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요동ㆍ요서는 미수 10도에 들어가고, 발해는 기수 1도에 들어가고, 낙랑은 기수 3도에 들어가고,
현도는 기수 6도에 들어간다.” 하였다.
○ 기수(箕宿)의
기(箕) 4성은 맥이(貊夷)를 주관한다. 천한(天漢)은 동방(東方)에서 일어나 미수와 기수의
사이를 지나는데, 그것을 일러 한진(漢津)이라
한다. 《이상 모두 진서》
○ 일행(一行)은 ‘천하 산하(山河)의 상(象)은 남북(南北)의 양계(兩戒)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운한(雲漢)
의 처음과 끝을 추론하여 말하기를, “미수와 기수는 석목의 성차이다. 인(寅)에 해당되며, 처음은 미수 7도
이고, 2750분 21초 4분의 1이다. 중간은 기수 5도이며, 370분 67초이다. 끝은 두수(斗宿) 8도이다.
그 분야는 발해(渤海)ㆍ구하(九河)의 북에서부터 어양(漁陽)ㆍ우북평(右北平)ㆍ요서(遼西)ㆍ요동(遼東)ㆍ
낙랑(樂浪)ㆍ현도(玄菟), 옛날의 북연(北燕) 지역, 고죽(孤竹)ㆍ무종(無終) 및 동방(東方) 구이(九夷)의
나라가 모두 석목의 분야이다.
미수는 운한(雲漢)의 말류(末流)에 해당되며, 북기(北紀)가 다한 곳이다.
기수는 남두(南斗)와 서로 가까우므로 그 분야가 오(吳)ㆍ월(越)의 동쪽에 있다.” 하였다.
《구당서》《신당서》에는, “석목(析木)은 운한(雲漢)의 말파(末派)로, 산하(山河)가 다한 곳이다.
그러므로 그 분야가 북하(北河)의 말파(末派)에서부터 북기(北紀)의 구석이 다한 곳으로 동북(東北)으로
바다를 등지고 있는 곳이 석목(析木)이 된다. 바다를 등지고 있다는 것은 운한(雲漢)의 남쪽이기 때문이다.
기수(箕宿)는 남두(南斗)와 서로 가까워서 요수(遼水)의 북쪽에 해당되며, 조선(朝鮮)ㆍ삼한(三韓)의
지역을
다 포함한다.” 하였다.
○ 미수(尾宿) 3도에서부터 두수(斗宿) 2도까지는 석목(析木)의 분야이다. 영평부(永平府)는 미수의
분야
이고, 난주(灤州)는 미수와 기수(箕宿)의 분야이고, 요동지휘사(遼東指揮司)는 미수와 기수의 분야이고,
조선(朝鮮)은 기수의 분야이다.
《대명청류분야지서(大明淸類分野之書)》
○ 조선은 분야에 있어서 기성(箕星)에 해당되며 석진(析津)의 성차(星次)에 있다.
《청일통지(淸一統志)》
살펴보건대 《반계수록(磻溪隨錄)》에는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비록 미수(尾宿)와 기수(箕宿)의 분야에
속하여 연(燕)과 분야가 같기는 하지만, 남쪽 지방은 또 오(吳)ㆍ월(越)의 분야에 해당된다.
대개 두수(斗宿) 8도는 미수ㆍ기수와 같이 석목(析木)의 성차에 들어간다.
그리고 《구당서(舊唐書)》 천문지(天文志)에는 이르기를, ‘기수와 남두(南斗)는 서로 가까우므로 그
분야가 오ㆍ월의 동쪽에 있다. 또 정관(貞觀) 19년(645)에 달이 남두(南斗)를 가리자, 점치는 자가 기수와
두수 사이의 은하수는 고려(高麗)의 지역에 해당된다고 말하였다.’ 하였다.
그러니 우리나라는 두수(斗宿)의 분야에까지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충청도 이상의 여러 도는 모두 미수와 기수의 분야에 해당되고,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은 마땅히 기수와 두수의 분야에 해당되는 것이 옳다.” 하였다.
* 청구(靑丘) 7흑성(黑星)은
진성(軫星)의 동남쪽에 있으며, 동방의 삼한국(三韓國)을 주관한다.
《천문류초(天文類抄)》
○ 구국(狗國) 4성은 건성(建星)의
동남쪽에 있으며, 삼한(三韓)ㆍ옥저(沃沮) 등의 나라를 주관한다.
《송양조천문지(宋兩朝天文志)》
○
《천하산하양계고(天下山河兩戒考)》에는, “구국(狗國) 4성(星)은 건성(建星)의 동남쪽에 있다.
서북성(西北星)의 거리는 거극도(去極度)로 1백 20도이며, 두수(斗宿) 18도에 들어간다.
감씨(甘氏)가 찬하기를, ‘구국(狗國)은 선비(鮮卑)ㆍ오환(烏桓)ㆍ옥저(沃沮)를 주관한다.’
하였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구국은 남두 18도에 들어가는데, 두우(斗牛)는 동남쪽에 있다.
그러므로 이 성이 주관하는 것
역시 동남쪽의 조이(鳥夷)와 만맥(蠻貊)의 사람들일 뿐이다.
[주D-001]창룡(蒼龍) 7수(宿) : 동방(東方)의 7수를 말하며,
각수(角宿)ㆍ항수(亢宿)ㆍ저수(氐宿)ㆍ
방수(房宿)ㆍ심수(心宿)ㆍ미수(尾宿)ㆍ기수(箕宿)가 여기에 속한다. 28수의 별자리를 창룡(蒼龍)ㆍ
백호(白虎)ㆍ주작(朱雀)ㆍ현무(玄武)의 4령(靈)으로 나누어 각각 동ㆍ서ㆍ남ㆍ북으로 정한 다음 7수씩을
속하게 하였다.
[주D-002]성차(星次) : 천문학자들이 임의적으로 여러 별들을 묶어서 한 단위로 만들어 기억하기에 편리
하게 한 것으로, 모두
12개의 성차로 나누어져 있으며, 12궁(宮)과 서로 비슷하다.
[주D-003]한진(漢津) : 성차(星次)의 이름이다. 미수(尾宿)와
남두(南斗)의 사이에 있다.
[주D-004]양계(兩戒) :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산하(山河)의 계한(界限)을 말한다.
[주D-005]구하(九河) : 우(禹) 임금 때 황하의 아홉 지류(支流)를 말한다.
[주D-006]고죽(孤竹) : 은(殷)나라
때의 나라 이름이다.
[주D-007]무종(無終) : 춘추 시대 때 산융국(山戎國)의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옥전현(玉田縣)에
있었다.
[주D-008]거극도(去極度) : 북극(北極)에서 어느 별까지의 각거리(角距離)를 말한다.
[주D-009]감씨(甘氏) : 제(齊)의 사관(史官)인 감덕(甘德)을 말한다.
천문(天文)과 점성(占星)을 잘하였으며, 위(魏)의
석신부(石申夫)와 함께 감석(甘石)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주D-010]두우(斗牛)
[주D-001]창룡(蒼龍) 7수(宿) : 동방(東方)의 7수를 말하며, 각수(角宿)ㆍ항수(亢宿)ㆍ저수(氐宿)ㆍ
방수(房宿)ㆍ심수(心宿)ㆍ미수(尾宿)ㆍ기수(箕宿)가 여기에 속한다. 28수의 별자리를 창룡(蒼龍)ㆍ
백호(白虎)ㆍ주작(朱雀)ㆍ현무(玄武)의 4령(靈)으로 나누어 각각 동ㆍ서ㆍ남ㆍ북으로 정한 다음 7수씩을
속하게 하였다.
<청구(靑丘) 7흑성(黑星)은 진성(軫星)의 동남쪽에 있으며, 동방의 삼한국(三韓國)을 주관한다. 《
천문류초(天文類抄)》
*신시가 포함된 묘도군도의 섬 배열모습이 마치 북두칠성 형태입니다.
이 북두칠성은 광개토대왕의 국강상(國崗上)의 崗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주D-007]무종(無終) : 춘추 시대 때 산융국(山戎國)의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옥전현(玉田縣)
에
있었다.
[주D-010]두우(斗牛) :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을 말한다.
일설(一說)에는 남두성(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을 가리키기도 한다.
*견우성을 섬의 이름으로 기록한 사례가 재승<齋乘>의 사문도 설명에서 볼수
있습니다.
沙門島〔海市附〕
○登州北海中九十里上置巡檢司海艘南來轉帆入渤海者皆望此島以為表誌其相聯屬則有鼉磯島牽牛島大竹島
小竹島歷歷海中蒼秀如畫海市現滅常在五島之上海市之名始見江鄰幾雜璡坡詩序或謂類南海蜃樓蛟蜃噓氣所
成殆不然欽嘗至登州海上訪之葢海市常以春夏晴和之時杲日初升東風微作雲腳齊敷于海島之上海市必現現則
山林城闕樓觀旌幢氊車駝馬衣冠人物凡世閒所有象類萬殊或小或大或蹔或久或變現終日或際海皆滿其為靈怪
赫奕豈蜃樓可擬哉葢滄溟與元氣呼吸神龍變化浩不可測如佛經所謂龍王能興種種雷電雲雨居于本宮不動不搖
山海幽深容有此理欽以中秋後至海濱大已微寒知州事李述之詩人也亦相與禱于廣德王之祠越二日忽報云今晨
風色雲氣海市當現同登賓日樓候之日初出大竹島上橫一巨艘長餘百尋述之指以示
<鼉磯島 牽牛島 大竹島 小竹島>
(九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