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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희가 새해 예배를 가족 예배로 드리는 두 번째 주일 예배가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모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지난달 우리 가족 예배 때 참석했던 모든 분들 청소년, 우리 어린이들까지 포함해서 교회 표어를 들었죠. 기억할 것인데 우리가 다시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화면에 있죠. 같이 한번 큰 목소리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바라라.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삶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 되어 꼭 이렇게 사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기에서 기뻐하다 사랑하다 바라라도 중요하지만 먼저 그 앞에 있는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했죠. 우리가 기뻐하고 사랑하고 바라는 하나님은 이슬람이나 힌두교나 다른 어떤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똑같은 신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는 복음의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중요해요.
반복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다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믿고 경배하는 하나님에게 고유한 이름이 있고 그가 하시는 일들이 고유하고 또 거기에 맞는 고유한 신학과 의미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한번 다음 문장을 가지고 우리가 테스트를 해보죠.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한번 다음 문장을 보고 테스트를 해보겠습니다.
다음 문장 나왔나요? 네 여기에 뭐라고 써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당신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맞는 말인가요? 틀린 말인가요?
조금 헷갈릴 수도 있죠.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고 이 말을 소개한 분이 이제 싱클레어 퍼거슨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인데 이 목사님이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이것이 틀렸다 하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예요.
그렇습니다. 이걸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신 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성경이 전하는 거하고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그래서 결국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하나씩 볼까요?
첫 번째로 이 말은 자세히 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하나님 사랑의 이유나 조건으로 생각하게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당신을 사랑한다 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이유와 조건이 될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틀린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알듯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이유나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전하듯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것이에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것이고, 그리스도는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서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입니다. 그렇죠.
두 번째로 이 말이 가진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게 한다 하는 것이에요. 이 말을 따르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근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내용과 내용적으로 같은데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말했다면 이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대속 사역에 근거하게 하시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아는 바 그렇지가 않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전하듯이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랑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나타난 사랑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신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 말이 정확하지가 않죠. 오해의 소지가 있죠.
또 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잘못 이해해서 오해하면은 결국은 하나님에 관해서도 잘못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전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잘못 이해된 하나님이고, 심지어는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부모의 것보다 못한 사랑이고, 결국에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기뻐하거나 사랑하거나 바라는 하나님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하나님을 정말로 기뻐하고 정말로 사랑하고 바라는 게 쉽지 않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아들을 보내시고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다 믿으시죠?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정말로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그 하나님의 사랑이 과연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 사랑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오늘은 세 가지를 얘기할 수 있는데 첫째로 무조건적인 사랑이에요. 영어로는 언컨디셔널이라고 할 수도 있고 언메리티디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은 우리 편에 어떤 조건이 있어서 어떤 그런 것에 근거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가 회개해서 우리가 믿음 안에서 깨끗하게 되어서 사랑하시는 사랑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를 우리가 상기해 볼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영어로 프로디글 선에 관한 비유인데 비유 속에 작은 아들이 있죠. 이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정말로 큰 죄를 범했어요. 일단 때가 되기도 전에 자기의 받을 유산을 받아서 요거를 했고 그거를 가지고 가서 마음껏 방탕하게 자랐고 그리고 가지고 있는 것 다 잃어버리고 먹을 것 없는 거지의 상태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를 생각을 하죠. 그리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환영을 해주는데 자 아버지가 언제 그렇게 합니까?
중요한 질문이요. 아들이 아직 뉘우침의 말을 하기도 전이에요. 아들 마음속에 뉘우치는 마음이 있는지 그것을 아직 모르는 때입니다. 몸에서는 냄새가 나는 상태고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아주 아주 불쌍한 상태, 미저러블한 상태입니다.
그때의 아들을 품으신 이 아버지의 사랑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 받은 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라 믿으시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둘째로 아낌없는 사랑이에요. 이 비유 속에 아버지가 종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렇게 말해요. 여기서 말하는 옷, 손에 끼는 가락지, 반지, 신발, 살찐 송아지 이런 것들은 2천년이 지나 사는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큰 감흥이 없는 것으로 들릴 수가 있어요.
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 잘 기억해야 되는 거는 그게 아니고 그때 표현하려고 했던 모 것 그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여기서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주 아낌없는 사람 당시에는 그것을 보고 큰 아들이 화를 낼 정도로 큰 아낌 없음 그것을 말하는 거예요. 그 그렇게 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지금 표현을 하는 것이에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로 아들을 환영해 주려는 아버지의 마음이죠.
그렇게 자신의 전부들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유일한 아들 독생자라고 하죠. 유일한 아들을 주셨고 그의 거룩한 영인 성령을 주셨어요. 그리고 그 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고 지금은 하나님 오찬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 우리의 대변인처럼 말씀하시고 있다 하는 것이고, 그의 영이신 성령은 어떻습니까?
우리와 함께하셔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지를 모를 때에 우리를 위해서 대신 간구하신다 라는 것이 복음이 전하는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거를 우리를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주셨다 하는 것입니다.
믿으시죠? 셋째로 영원한 사랑이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영원한 사랑, 이터널 러브가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해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이때는 사랑이고 저때는 사랑이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은 인니트너지 항상 사랑이시fk는 거예요. 그분이 주는 사랑이니 영원한 사랑이죠.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사랑이에요. 다른 말로 말하면 창세 전부터 그의 아들을 사랑하실 때 가지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확신 있게 말했죠. 38절 39절을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례일이나 능력이나 기쁨이나 높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그렇게 영원한 사랑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서 값없이 아낌없이 받았다 하는 겁니다.
그 사랑은 분명히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주신 것이에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죠 감사함으로 받아서 마음껏 누리는 사람이 있지만 또한 관심이 없는 사람, 그냥 어둠에 머무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거부하는 사람, 심지어 욕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랑에는 아직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보여지고 세상에 전파해야 할 측면이 있어요. 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우리를 통해서 역사할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전도를 해도 또 성경을 읽어도 이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요.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하지만 이 사랑을 몸소 보여주는 서로 사랑하는 교회를 통해서 또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성도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고 하나님께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곧 우리가 그 좋은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 사랑이 우리의 것이 돼야 돼요. 앞에서 말한 그 사랑이 우리의 것이 돼요.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전할 수 없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눌 수 없어요. 제 마음에 아무리 그렇게 주고 싶은 여러분 필요해서 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도 다 줄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사랑도 우리가 하는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과 비슷하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해서 우리의 사랑도 어떻게 해요?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 아낌없이 주는 사랑, 영원히 변함없는 그 사랑을 담는다는 것이에요.
나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또 옆에 있는 형제를 향해서 우리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갖는 사랑이 이런 사랑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양이 있죠. 이것이 잘 아실 어른들은 잘 아실 텐데 이 찬송을 지으신 분이 프레드릭 리만 리만이라는 목사님이에요. 근데 알아보니 그는 11살 때 시골길에서 우연히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을 해요. 하나님의 영광이 특별하게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11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누르고 있던 무거운 죄책감이 벗어지고 그리고 입에서 기쁨과 찬양 창가가 나오는 것을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바치고 평생 일처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찬송을 씁니다.
무슨 말인가요? 세 가지를 전하고 싶은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거 아시네요. 그분은 11살 때 경험했으니까 11살 소년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어린 친구들, 어린이부, 청소년부 어린 친구들 여러분들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어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요. 여러분도 다 이 하나님의 리 가장 빠르게 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년들 중에도 장년들 중에도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못 느낀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새롭게 경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꼭 그 사랑을 경험을 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진짜로 경험하면 사람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어요. 어둠에서 빛으로 바뀌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분노가 용서로 바뀌고, 불안과 공포가 평온으로 바뀌고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몸짓이 바뀐다 하는 겁니다. 11살 어린이도 경험할 수 있는 변화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평생을 사용을 해도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세상에는 보통 있는 것들이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어떻게 해요? 사라지죠 하지만 사용해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사용할수록 늘어나는 것들이 있어요.
뭐가 그렇습니까? 그중에 하나가 빛이에요. 비트 데트 이게 빛이 아니고 알죠? 돈은 쓸수록 사라져요. 그런데 빛은 쓸수록 어떻게 돼요? 늘어나게 돼 있어요. 죄도 그렇습니다. 죄는 사용할수록 늘어납니다. 줄어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다만 죄나 빛은 늘어날수록 인생이 불행하게 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사용해서 늘어날수록 인생을 행복하게 한다 하는 것이에요. 리만 이 목사님은 85세를 살으셨어요. 85세로 사셨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 사랑을 묵상했고, 그 사랑을 노래했고, 그 사랑을 전했고, 결국에는 그 사랑의 품으로 영원히 들어가셨습니다.
여러분도 살아있는 남은 기간이 85년이 안 될 겁니다. 남은 기간 여러분에게 부어진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묵상하고 노래하고 전하고 그 사랑 안으로 영원히 잠길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리스도인이라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르고 잘 사용하지 않거나 사용하더라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죠.
그런데 우리의 사랑은 너무너무 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조차도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정말로 아낌없는 사랑인데, 우리는 사랑하는데도 아끼는 것이 너무나 많아요. 아버지의 우리 사랑은 영원한 사랑인데,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쓰다가 버릴 물건을 사랑함보다 못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이 힘듭니다. 그래서 인생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도 사라지고 그리고 하나님과도 멀어지게 되고, 교회하고도 멀어지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데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 하나님이 이런 분이니 그분의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니까 다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혹시라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거나 알아도 잘못 사용하고 있었다면 앞으로는 그렇지 않기를, 이제부터는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향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해서 조건 없는 사랑, 아낌없이 주는 사랑, 변함없이 영원한 사랑, 그 사랑을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우리가 예배하고 경배하고 우리가 주라고 부르는 그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어떤 조건 붙이지 말고 어떤 이익 따지지 말고 그냥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처럼 순수하고 순진하고 순결하게 하나님을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