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호남과 제주의 역사속의 인연
호남은 우리가 정착하여 살고 있는 제주에서 대략 100여 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제주의 가까운 이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며 제주와 호남의 역사속의 인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제주는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서 8개의 유인도와 55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주의 모양은 대략 동서간의 거리는 약 73km이고 남북간의 거리는 약 31km의 좌우로 긴 타원형의 형상으로서 섬의 외곽을 한 바퀴 도는 일주도로가 182km나 되는 그리 적지않은 크기입니다.
제주의 행정구역은 2행정시 7읍 5면 62개동(법정동 기준)으로 구성되 있고 도청소재지는 제주시에 있으며 인구 667,191(2018년 기준)명이고 면적은 1,850.㎢(서울시의 2.7배) 정도입니다.
제주의 행정구역 변경 이력을 보면 조선시대에 들어 1416년(태종 16)에 한라산을 경계로 북쪽에 제주목이 설치되고, 남쪽의 동부에는 정의현, 서부에는 대정현이 설치되었다가 1894년 시작된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이뤄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896년 그때까지의 전국 8도 행정구역 체제가 13도제로 편제될 때 기존의 전라도가 전라남북도로 재편되면서 전라남도 산하의 제주군·정의군·대정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방후인 1946년에 비로소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濟州道)로 승격되면서 북제주군 및 남제주군이 신설되었으며, 1955년에 제주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1956년에는 서귀면·대정면·한림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한경면이 한림읍에서 분리되었습니다. 그후 1980년에 애월면·구좌면·남원면·성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에 서귀읍과 중문면이 합병되어 서귀포시로 승격되었고 최종적으로 2006년 북제주군과 남제주군을 제주시와 서귀포시에 병합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의 제주특별자치도 체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주는 815광복 이후 1946년 제주도(道)로 승격되기 전까지 전라남도의 일부였을 정도로 오랜 세월 제주는 호남을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하여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주의 역사는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가 삼성혈(三姓穴)에서 용출한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탐라라는 국명으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교류했던 기록이 있고(삼국사기 백제본기 26권)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와 교류를 하였습니다.
삼국시대부터 탐라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나라'의 지위를 유지하여오던 제주는 고려왕조 때인 1105년 '탐라군'이 되었고 1295년에는 '탐라'라는 이름 대신 물건너(濟) 고을(州)이라는 뜻의 '제주(濟州)'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제주와 호남의 인연에 관한 역사속의 기록을 찾아보면 서기 280년 이전까지 소급됩니다. 중국 진수가 쓴 역사서인 삼국지의 기재내용 중에 탐라국 사람들이 탐진강 유역의 강진 해남지역과 배로 왕래하며 교역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가깝고 오래된 두 지역의 인연은 두 지역의 지명에까지 미치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지명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즉, 제주의 옛이름인 탐라(耽羅)와 전남 강진의 옛이름인 탐진(耽津)은 제주와 호남의 긴밀했던 교류의 상징입니다.
조선 개국 이후 태조 이성계의 명에 따라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 등이 편찬을 시작하고 세종의 명에 따라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 등이 보완하여 최종 편찬한 역사서인 고려사의 지리지 2 탐라현조(耽羅縣條)의 기록을 보면 “고을나(高乙那) 15대손 고후(高厚) 형제 3인 등이 배를 타고 신라에 입조하였는데, 읍호를 탐라(耽羅)라 하니 이는 그들이 올 때 처음에 탐진(耽津)에에 배를 대었기 때문이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조선 성종 때의 대제학 서거정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시문선인 동문선 43권에 보면 “제주의 시조성인 고을나의 15세손 고후가 그의 아우 고청과 바다를 건너 탐진에 닿아서 신라에 이르렀다. 임금은 그들을 반가이 대접하고 고후에게 성주라는 작위를 주고 고을의 칭호를 탐라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 37권 강진현 산천조에는 “탐라의 성자가 신라에 조회할 때에 여기에 머물렀으므로 이름을 탐진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위 기록들 중 어느 것이 맞는지 지금에 와서 그 선후를 규명할 수는 없지만 이런 기록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제주와 호남이 고대시대부터 구준하게 교류하여온 가까운 이웃임을 반증하는 확실한 근거임에는 분명해보입니다.
제주가 우리 역사에서 크게 부각된 계기는 1271년(원종 12) 삼별초(三別抄)가 제주도에 웅거하면서 몽골에 마지막까지 항쟁을 벌이다가 1273년에 패한 후 제주에 원나라 직할의 목마장이 설치되면서부터입니다. 그후 약 1세기 동안 제주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소속이 바뀌는 격변의 과정을 겪다가 1367년(공민왕 16)에 최영 장군에 의해 완전히 고려 영토로 회복되었습니다.
당시 최영 장군에 의한 제주 지배권 회복과정에 대한 역사기록을 보면 최영 장군은 군선 300여 척에 2만5천여의 병력을 거느리고 제주시 한림읍 명월포(현 한림읍 비양도 앞에 위치한 옹포리 해안)에 상륙하여 오늘날의 한림읍 상명리와 금악리, 애월읍 어음리와 봉성리 일대에서 대규모 격전을 치러 목호들을 제압하한 후 달아나는 목호들을 추격하여 서귀포시 예래동과 법환동을 거쳐 목호들이 최후적으로 도피한 서귀포 앞의 ‘범섬’을 포위 정벌하면서 제주를 고려 영토로 회복하였습니다.
제주와 호남의 교류과정을 보면 제주는 호남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중앙정부는 1512년(중종 7년)부터 제주 방어를 위해 강진병영성에 주둔하던 군인을 제주로 파견하여 왜구 등으로부터 제주를 방어했으며 제주의 석공들도 1620년(광해군 12년) 병영성 축성에 참여하여 병영성을 유지하는 데에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성에서 제주에 표착했던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일행이 1656년부터 1663년까지 억류되어 생활한 바도 있습니다.
제주의 문명 발달 과정을 보면 철광산이 없어서 철기를 제작할 수 없던 제주에 철기문화가 도입되고 오늘날까지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해남이나 강진에서 추자도까지 3일 밤낮이 걸리는 뱃길로 호남지역의 철이 공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또한 제주도민들의 생활사에도 큰 도움을 주었는데 황토 산지가 매우 부족한 제주도민들은 고려청자 등 도예지로 유명한 강진 등 전남지역으로부터 곡식을 저장하는 옹기를 수입하여 썼었습니다. 그때 옹기를 실은 배가 드나들던 포구가 지금의 화북포구와 신촌포구입니다.
당시 옹기 그릇은 농산물을 보관하거나 김장이나 간장 등의 저장식품과 식수 등을 보관하는 용도로서 제주도민의 실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물품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강진옹기가 인기가 많았고 그 수요는 냉장고와 플라스틱 용기들의 보급이 보편화되기 전인 지난 1970년대까지 이어졌었습니다.
호남인들이 제주에 본격적으로 들어와 살게 된 시기와 이유는 지난 1960년대 초 정부에서 제주도의 따뜻한 기온이 감귤재배에 적합하다는 판단에 따라 농가소득 향상을 목적으로 서귀읍 중문면 남원면 등의 남제주군(당시 행정구역 기준)을 중심으로 감귤재배를 장려하기 시작했고 1968년부터는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의 지원을 받은 <감귤증식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제주의 과수농가에 일손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반면, 당시 정부의 저곡가 정책으로 미곡가가 하락하면서 미곡생산이 주업이던 호남지역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 부산 등으로 이농하게 되면서 제주와 가까운 전남 해안지역의 시군 사람들이 고향에서 가까운 제주 감귤농가에서 일자리를 찾으려고 제주로 많이들어오면서부터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1970년과 1980년 당시 제주도민 인구조사 때 제주 이외의 지역에서 출생한 사람들의 비율에서 전남지역 출신이 42.2%와 42.9%를 점유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고, 1980년 이후 제주가 다시 관광으로 주목을 받으면서부터는 다른지역 출신도 제주에 많이 정착하게 되면서 그 비율이 다소 낮아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호남지역 출신이 제주도외 출신자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제주와 호남의 교류는 인적 물적으로 한층 더 깊어지고 넓어지리라 예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