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박은(朴誾, 1479-1504) |
국가 |
한국 |
분야 |
시 |
해설자 |
홍순석(강남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인문대학장 ) |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는 조선 연산조의 시인 박은(朴誾)의 시문집으로 4권 2책, 목판본이다. 이 책이 처음 간행된 것은 박은이 갑자사화에 희생된 지 3년 뒤인 중종 2년(1507) 때로, 박은의 친구 이행(李荇)이 여러 친구들에게 흩어져 전해오던 것을 한데 모아 엮은 것이었다.
≪읍취헌유고≫는 초간본 간행 이후 서너 차례에 걸쳐 중간을 거듭해 왔으며, 정조 대에 이르러서는 어제본(御製本)으로까지 간행되었다. 그리고 중간할 때마다 수록 작품 수도 증가하였다. 초간본 간행 때는 시 작품이 100여 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어제본에는 148수가 실렸다. 체재도 처음에는 단순히 작품을 연대기 순서에 따라 나열했을 뿐이었는데, 기축년 간행 때에는 고시ㆍ절구ㆍ율시ㆍ연구 등 각각 유형별로 구분해서 편간하였다. 어제본에는 총목ㆍ목록ㆍ부록 등을 갖추고 어제 서문까지 권수에 두어 시문집으로서의 체재를 완전히 갖추었다. 1938년에 ≪규장각총서(奎章閣叢書)≫ 제3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초간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간행 당시 수집된 작품의 수는 잘 알 수 없으나, 뒤에 간행된 운각본(芸閣本)이 ≪천마잠두록(天磨蠶頭錄)≫ 소재의 작품 21수를 포함해서 125수의 시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약 100여 수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의 작품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 것도 이행의 적극적인 노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이행은 박은에게 시를 지으면 일일이 자신에게 보내주기를 부탁하여 신명(神明)과 같이 귀중하게 여겼다. 심지어 유배지에 가서도 소중히 보관하여 훗날 ≪읍취헌유고≫를 간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읍취헌유고≫에 이행과의 화답시가 많이 있으며, ≪속동문선≫에 실린 박은의 작품이 이인로ㆍ이규보ㆍ이색ㆍ서거정ㆍ김종직 다음으로 많은 것도 바로 이행의 노력에 힘입은 바다.
그 뒤 아들 공량(公亮)이 흩어져 있는 시문을 다시 수집하여 명종 3년(1548)에 ≪천마잠두록≫을 별고로 엮었다. 이 책은 ≪천마록≫과 ≪잠두전후록≫을 합친 것이다. ≪천마록≫은 연산군 8년(1502)에 박은ㆍ이행ㆍ혜침(惠忱)이 개성 천마산에서 놀며 화창(和唱)한 것을 박은이 편집한 것이다. ≪잠두전후록≫은 같은 해 7월 기망(旣望)에 서울 잠두봉(남산) 아래에서 지은 시와 10월 보름에 소동파(蘇東坡)의 적벽고사(赤壁故事)를 흠모하여 마포(麻浦) 선상(船上)에서 화창한 시를 남곤이 편집한 것이다. 이행이 ≪읍취헌유고≫를 간행할 때 이 기행 시편들이 빠졌으므로, 박공량이 홍문관에 청하여 갑인자(甲寅字)로 간행하였던 것이다. 권수(卷首)에는 신광한(申光漢)의 서문이 있다.
다음으로 간행된 판본은 손자인 유(愈)와 무(懋)가 간행한 것으로, 초간본과 ≪천마잠두록≫을 합하여 상, 하 2권으로 엮고, 심수경(沈守慶)의 발문을 첨부하였다. 이 판본도 전하는 바가 없어 자세히 살필 수 없으나, 선조(宣祖) 연간에 간행되었으며, 바로 뒤이어 간행된 운각본 체재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판본이 초간본과 ≪천마잠두록≫을 합한 것이라고는 하나, ≪천마잠두록≫ 소재의 시 33수를 전부 수록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후에 간행된 운각본에도 21수만 실려 있고, 어제본 편찬 때 ≪천마잠두록≫ 중 실리지 않은 작품 12수를 증보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이 합본 편찬 때에는 21수만이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초간본과 ≪천마잠두록≫의 합본이 간행된 이후 판본으로 현존하는 것은 운각본, 기축년, 계묘년 간행본, 어제본 등과 필사본 2종을 들 수 있다.
운각본은 본래 그 판본 글자가 운각인서체자(芸閣印書體字)로 쓰여 있기 때문에 필자가 임의로 지칭한 명칭이다. 정두경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오준(吳竣)ㆍ조석윤(趙錫胤)ㆍ채유후(蔡裕後)ㆍ박장원(朴長遠)ㆍ심택(沈澤) 등이 호남 완산에서 간행한 판본을 말한다. 운각본은 권 1의 서문, 묘지명 등과 권 2, 권 3의 시 작품, 권 4의 행장, 기 등 산문으로 구별되어 엮어져 있으며, 시 작품의 배열은 다른 판본과 달리 연대기적인 순서로 나열되어 있다. 구체적인 예로 어제본에는 오언고시 2수, 칠언고시 1수, 오언율시 1수 등으로 구별해서 수록된 <계축이주(癸丑移舟)>라는 시 작품을 운각본에서는 <계축이주 4수>로 한데 묶어 수록하고 있다. <만리뢰(萬里瀨)>, <송택지조연(送擇之朝燕)>, <의영통구령(依靈通舊令)> 같은 작품도 이러한 예다. 그러나 연구(聯句)만은 시간적인 순서와 관계없이 별도로 권 3의 맨 뒷부분에 배열하였다.
운각본 다음으로 간행된 판본은 숙종 35년(1709)에 정홍좌(鄭弘佐)가 간행하고 유득일(兪得一)이 서문을 쓴 기축년(己丑年) 간행본이다. 이 판본은 운각본을 대본으로 하여 고시ㆍ율시ㆍ절구ㆍ행장ㆍ기 등이 뒤섞여 있는 것을 유형별로 분류하고, 또 연구 중 흩어져 있었던 것을 권말에 붙이는 등 편집 자체를 새롭게 하였으며, 글자 모양과 판의 둘레도 좀 더 크게 하여 다시 판각한 것이다. 운각본이 4권 1책, 10행 20자로 되어 있음에 비해, 이 판본은 2권 1책, 10행 18자로 짜여 있다.
정조(正祖) 7년(1783)에 김학언(金學彦)ㆍ이병순(李柄純) 등이 간행한 계묘년 간행본 역시 당시 판각한 것을 다시 인쇄한 것이다. 기축년에 간행하기 위하여 판각한 책판이 정조 때까지 진남대(鎭南臺) 이 충무공 사당에 전해져 왔으며, 계묘년에 간행된 판본은 바로 이 책판을 보수하여 인쇄한 것이다. 권수에 이행이 쓴 서문에서부터 권말의 <인로명행기(仁老名行記)>까지 글씨 모양과 크기, 판각의 크기, 어미(魚尾) 등이 똑같아 계묘년 간행본과 기축년 간행본이 같은 책판으로 인쇄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김학언의 발문이 권말에 첨부되어 있다는 점뿐이다.
계묘년 간행본은 <묘지명>이 유득일의 서문 다음에 놓여 있으며, 권말에 <읍취헌유고발(挹翠軒遺稿跋)>이 첨부되어 있다. 운각본이 운문과 산문으로 구별한 것처럼 기축, 계묘년 간행본도 크게는 운문과 산문으로 구별한 다음, 운문을 다시 형식별로 구분하였다. 현재 규장각에 전해지는 기축년 간행본(규 3700)의 주변(周邊) 위에 2.5×8∼10센티미터 정도의 저지(楮紙)로 된 쪽지가 붙어 있는데, 바로 이 책을 어제본 간행 당시 대본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쪽지가 붙어 있는 작품은 모두 ≪천마잠두록≫에 소재한 작품으로, 어제본 편찬 때 추보(追補)된 것들이다. 쪽지의 내용에 따라 순서대로 편차를 맞추어보면 곧 어제본의 편차와 일치됨을 확인할 수 있다. 운각본이 연대기적인 순서로 편간되었음에 반해, 기축년 간행본은 형식별로 구분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으며, 바로 정조 때 편간한 어제본의 대본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축, 계묘년 간행본 다음으로 간행된 판본은 어제본이다. 정조는 우리나라 많은 시인 가운데 특히 박은과 박상(朴祥)의 시를 가장 아끼어 우리나라 제일이라고 격찬하였으며, 이들의 문집을 규장각 학사로 하여금 중간케 하였다. 어제본은 정조 19년(1795) 4월 순천에서 증간(增刊)하였으며, 현재 전하는 판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판본이다.
어제본은 기존 판본에서 누락된 ≪천마잠두록≫ 12수, ≪허암집(虛菴集)≫ 2수, ≪해동묵적(海東墨蹟)≫ 2수, ≪용재집(容齋集)≫ 1수, ≪속동문선(續東文選)≫ 1수 등 18수를 보완하였다. 어제본은 본래 3권 3책으로 엮고 어제 서문을 제(題)하려 하였으나, 실제 순천에서 간행할 당시는 4권으로 엮고, 어제 서문을 권수에 두었다. 어제 서문은 정조가 친히 지은 것을 당시 규장각 제학 심환지(沈煥之)가 전교를 받들어 쓴 것이다. 부록으로 추록된 <묘표>는 8세손 박경진(朴敬鎭)이 묘갈을 세우기 위하여 김원행(金元行)에게 부탁하여 지은 것이다.
≪읍취헌유고≫는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 1은 부(賦)ㆍ시(詩), 권 2∼3은 시(詩), 권 4는 기(記)ㆍ제문(祭文)ㆍ행장(行狀) 및 부록을 수록하였다. 이행이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읍취헌유고≫에 수록된 시는 교우들 사이에 산재해 있던 것을 일일이 수집해 정리한 것으로, 박은이 22세 때부터 26세까지 지은 불과 5년간의 작품이다. 현재 전하는 시가 대부분 교우와 관련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읍취헌유고≫ 소재의 작품을 유형별로 정리해 보면 화답시가 61수, 기행시 57수, 송별시 10수, 제시 3수, 기타 17수로 화답시, 기행시가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기행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러 교우와 함께 어울리면서 지은 것이 교우들에게 보관되어 전해져 온 이유도 있겠지만, 박은 자신이 23세 때 파직된 후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그때마다 흥취를 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박은의 시 작품은 23세 때 억울한 죄목으로 파직된 사건을 계기로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파직 이전의 작품에서 연산군의 폭정에서 느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살필 수 있다면, 후기 작품에선 정치적 패배 의식으로부터 야기된 정신적 방황, 현실 초극에의 노력, 체념, 달관 등의 양상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25세 때 아내 신씨의 죽음을 계기로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아내의 죽음 이전 시에서 현실 초극에의 노력을 살필 수 있다면, 이후 시에서는 체념과 달관의 경지를 살필 수 있다. 박은의 시에서 살필 수 있는 ‘웃음’은 각기 자조(自嘲), 체념, 달관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같은 경향을 시사해 준다.
박은은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시재로 일찍이 중국 사람들까지도 놀라게 하였다. 허균ㆍ신위ㆍ김만중ㆍ홍만종ㆍ이수광 등 여러 대가로부터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박은은 조선 초기의 학소(學蘇) 일변도의 경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 강서파(江西派)의 시풍을 수용하여 성공한 해동강서파의 맹주로 일컬어진다. 박은은 정조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당조송격(唐調宋格)’이라는 독자적인 시풍을 모색하였다. 박은의 이 같은 시풍은 조선 초기의 송시풍(宋詩風)에서 중기에 이르러 당시풍(唐詩風)으로 변모하는 과도기에서 교량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