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축(奉祝)
임인년 부처님오신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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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신라 전래 및 전개
새화랑유치원
설립자 김영호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수십 년 늦게 불교가 전해졌다. 그것은 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대륙으로부터 소통이 없었고 문화적으로 뒤떨어졌기 때문이라 한다.
신라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제13대 미추왕(味鄒王: 재위 262~284) 2년(263)때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둘째, 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 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러 불교를 선양했다는 설,
셋째, 21대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자(侍者) 3인과 같이 모례(毛禮)의 집에 있다가 아도는 먼저 가고 시자들은 포교했다는 설,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로부터 들어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善山)) 에 있는 불교 신자 모례(毛禮)의 집을 중심으로 은밀히 교화(敎化)를 폈다는 설 등이 있으나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민간의 승려가 들어와 공식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했다는 점이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 전래와의 차이점인데, 이런 점에서 쉽게 토착화(土着化)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셈이다. 그러나 그 전래는 완고(頑固)하고 배타적(排他的)인 집권계층의 반대에 부닥쳐 커다란 저항을 받았다.
법흥왕(재위 514~540)은 불교를 백성들에게 복(福)을 가져오게 하고 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확신하여 즉위 초부터 국가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고심했다. 그러다가 불교의 젊은 신하인 이차돈(503~527)의 순교(殉敎)로 인해 법흥왕 14년(527)에 비로소 불교가 공인(公認)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일으켰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관제(官制)를 정비하고 율령(律令)을 공포하고 연호(年號)를 세우고 문물을 개발하는 등 훗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왕이었다.
왕은 불교 신앙(信仰)을 통해서 백성들이 선량(善良)한 국가적 관념을 가질 수 있고, 신라의 문화가 향상 · 발전될 수 있다고 내다보았던 것이다.
법흥왕에 의해서 시작된 신라 불교가 특색을 지니게 된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 때부터로, 이는 왕 자신의 신앙심과 불교 정책에 의해서였다.
진흥왕 5년(544)에 선왕 때부터 짓기 시작한 흥륜사(興輪寺)가 낙성되고, 그해 3월에는 뜻이 있는 자는 승려(僧侶)가 되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일반에게 출가(出家)를 허락하였다.
만년에는 진흥왕 자신도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 이름 짓고 수도하였으며, 왕비도 영흥사(永興寺)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진흥왕은 또 불교이념에 의거한 청소년 수양단체인 화랑도를 창설하여 국민정신의 함양에 크게 이바지했다.
신라는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 때에 이르러 당나라의 원조를 받아 마침내 삼국통일(676)의 대업을 성취했다. 겉으로는 당나라를 모방한 듯했지만, 안으로는 평화가 깃들어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문화는 눈부시게 뻗어갔으며, 불교도 크게 융성했다.
신라의 승려들은 뒤를 이어 당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불교 교학을 배워 왔다. 그래서 한국의 불교사상 유례가 없는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 진흥왕과 불교 정책
신라에 처음 불교가 공인(公認)된 것은 법흥왕(재위 514~540) 때부터였으나 불교를 진흥, 발전시켜 국가종교로까지 이끈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에 의해서였다. 왕의 치세(治世) 중에서 불교 진흥을 위한 업적은 괄목(刮目)할만한 것이었으며, 자신도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여 말년에 사문(沙門)이 되어 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고. 왕비(王妃) 역시 영흥사(永興寺)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의 재위 동안의 불교 업적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
. 왕 5년(544)에 흥륜사(興輪寺)가 완공되었고, 3월에 비로소 출가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하였다. 황룡사(皇龍寺) · 지원사(祗園寺) · 실제사(實際寺) 등 여러 사원들을 계속 새로 세웠으며, 왕 27년(566)에 낙성된 황룡사는 13년 동안에 걸쳐 조성된 거찰(巨刹)이었다.
. 왕 10년(549)봄에 각덕(覺德)을 위시한 유학승(留學僧)들이 계속 귀국하였고, 이때 불사리(佛舍利)와 함께 경전(經典)을 들여왔다.
. 왕 11년(550)에 대서성(大書省)과 소년서성(少年書省)을 설치하여 불교의 제반 업무를 관장케 하였으며 안장법사(安藏法師)를 대서성으로 삼았다.
. 왕 12년(551)에는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승 혜량(惠亮: fl. 551)을 승통(僧統)으로 임명, 교단을 지도 · 육성케 하고 이 승통 밑에 대도유나(大導唯那) · 도유나랑(都唯那娘) 등을 두고 승관제(僧官制)를 정비하였다.
왕 12년(551)에 승통(僧統)인 혜량(惠亮: fl. 551)에 의해 인왕백고좌법회(仁王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가 시작되었다.
인왕백고좌법회는 《인왕호국반야경(仁王護國般若經)》의 내용에 따라 국가의 안태(安泰)를 기원하고 내란(內亂)과 외환(外患)을 소멸시키기를 비는 법회였으며, 팔관회는 본래 하루하나의 계(戒)를 닦는 법회였으나 신라에서는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였다는 점에서 인왕백고좌법회와 함께 팔관회는 국가의 현실적인 의도와 이익에서 베풀어진 법회들이었다.
. 왕 26년(565)에 진(陳)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귀국할 때 1700여 권의 경전을 들여왔다.
. 왕 35년(574)에 황룡사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주성(鑄成)하였다.
. 왕 37년(576)에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중국에서 돌아올 때 인도의 승려 비마라(毘摩羅) · 농가타(農伽陀) · 불타승가(佛陀僧伽) 등이 그를 따라 입국하였고 이때 《능가경》·《승만경》 등 발전된 대승경전을 왕에게 바쳤다.
이 밖에도 진흥왕은 재위시 신라 국민사상의 총화를 이룬 화랑도(花郞道)를 제정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 다. 이러한 일련의 불교진흥책은 진흥왕으로 하여금 정교일치(政敎一致) 정책을 써서 불국토(佛國土)를 신라 사회에 현실화시키려 했고, 왕 자신도 정법(正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념에 심취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신라 사회에서의 불교 발전은 진흥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 신라 불교의 특징
신라의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경향이 강하여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이후 신라는 불교정신에 입각하여 국민을 단합시켰던바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팔관재회(八關齋會), 백고강좌(百高講座), 황룡사 9층탑(九層塔) 건립, 사천왕사(四天王寺) 건립등이 있으며, 특히 세속오계(世俗五戒) 등은 모두 불교정신에 의해 민족을 단합하고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뜻을 담고 있다.
팔관재회는 불교를 배우기 위한 범국민적 집회였으며, 백고강좌는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의 호국적인 사상을 익히는 법회였으며, 황룡사 9층탑 건립은 자장(慈藏: 590~658)이 중국에 가서 본국의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여성으로서의 연약한 면을 보좌하고 국가 권위를 세울 것을 암시받고 돌아와 인접 9개국을 진압한다는 의미로 9층탑을 세웠다고 한다.
사천왕사(四天王寺)또한 불교를 보호하는 동서남북의 사천왕(四天王)이 신라를 호위함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원광(圓光: 542~640)의 세속오계는 호국의 표준이념이 되었다. 또한 원승(圓勝), 혜숙(惠宿: fl.600[15]), 혜공(惠空: fl. 7세기 후반) 등 많은 고승들이 나와 능히 삼국을 통일(676년, 문무왕 7년)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을 길러 왔다.
* 자료출처: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