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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샘통신 11/190915]질라래비 훨훨!
모처럼 엊그제 이틀에 걸쳐 솔찬히 ‘준수한’ 우화(偶話)소설 한 편을 읽었다<김종록 지음/은섬 그림/266쪽, 다슬기 펴냄/14,900원>. 따끈따끈한 신간, 광화문에 나간 김에 교보문고에서 샀다. 십수 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글쓴이는 50대 중견작가로서 그동안 ‘혁혁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29세때 ‘삼성문학상’을 받은 3권짜리 <풍수>(최근에 나남출판사에서 ‘소설 풍수’(5권)라는 제목으로 펴냈다)는 당시 1백만권이 팔려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그때 거액의 인세(印稅)를 받아 바이칼, 카일라스 등 세계 영성(靈性)지역을 순례했다고 한다.
현재 진안 정천면에 있는 ‘진안고원 치유숲’에서 작품을 집필하고 있는데, 그의 꿈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거대한 환타지소설을 쓰는 것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작가 중에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내공의 소유자임을 단언한다. 작가라기보다는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인문학자라는 지칭이 더 맞겠다.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한국문화대탐사> 등은 소설이 아닌 역량있는 인문학서이다. <붓다의 십자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드라마 방영) <근대를 산책하다> <바이칼> <현장 인문학> <달의 제국> <금척> 등 화제의 작품이 즐비하다. 그가 쓰는 우화소설이 무척 궁금했다. 초면(初面)일 때, 그를 알아봐 대학도서관에서 그의 작품을 모두 읽었기에, 그를 조금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가 보름 전쯤 불쑥 임실 고향집에 나타났다. 그날따라 어쩐지 오고 싶은 생각이 불쑥 났다는 거다. 툇마루에 앉아 앞에 툭 트인 전망을 보고, 남쪽의 소나무동산 등을 일별하더니 무릎을 친다. 집터가 너무 좋단다. 이제껏 살면서 몰랐던 앞산의 이름도 알려준다. 옥녀봉, 수리산, 문필봉. 문장가가 태어날 자리라고 하니, 혹시 내가? 아니 내 아들, 손자가? 흐흐. 이것 참 사람 기분좋게 하는구만. 그러지 않아도 상량 문구를 “心誠伏願 立春花發文章樹 建陽日出壯元峰”이라고 친구가 써주었는데. ‘엎드려 진실된 마음으로 바라오니, 입춘날 꽃은 문장나무에서 피고, 건양의 해는 장원봉에 솟게 하소서’라는 뜻인데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패철(佩鐵)을 꺼내놓고 앞산과 뒷산, 방향을 보더니 대문을 자기가 정해준 대로 세우라고 한다. 그가 지정한 곳에 쇠말뚝을 박았다. 그는 풍수(風水)의 작가답게 풍수에 조예가 아주 깊다. 젊은 시절, 비싼 ‘수업료’를 주고 대가(지창룡이라고 찾아보시라. 그의 스승이다)에게서 직접 배웠다고 한다. 마음이 내키는 사람을 만나면 음택(陰宅)이 아닌 양택(陽宅) 관련해서만큼은 한두 마디 해준다고 하는데, 그날 나로선 큰 행운을 맞은 것이다. 맛집에서 ‘다슬기탕’까지 사주고 “오랜만에 남의 집 대문까지 정해줬는데, 오기를 정말 잘했다” “조만간 우화소설 한 권이 나올 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표표히 떠났다. 이게 바로 그 책이다<사진>. <질라래비 훨훨>.
무슨 뜻인인지는 몰랐으나, 제목부터 친근한 마음이 들었다. ‘질라래비 훨훨’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그보다 먼저 ‘단동10훈(檀童十訓)’을 아시는가? 단동10훈은 조상 대대로 전해져 온 놀이육아법이고 어느 엄마나 아이 어릴 적 가르치던 육아법이건만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도리도리, 쥐암쥐암, 쩍짝궁짝짝궁, 섬마섬마, 곤지곤지 등이 단동 10훈인데, 그 10번째가 ‘질라래비 훨훨’인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아이의 양팔을 벌려 ‘질라래비 훨훨~’ ‘질라래비 훨훨~’ 새처럼 춤추는 흉내를 내는 것이다. 걸음마를 하면서부터 이제 세상과 우주의 모든 이치를 알았으니 기쁘고 즐겁고 건강하게 자라나 마음껏 꿈을 펼치며 살아가라는 세상 모든 엄마의 축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 좋은 놀이의 마지막을 이제껏 모르며 아이들을 키웠다니, 우리는 조상님들의 이런 슬기와 지혜를 개무시하며 살아도 되는 것일까? 자책이 앞섰다.
아무튼, 우화소설 얘기로 돌아가자. 우화란 무엇인가?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인격화하여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담는 야야기이다. 익히 알고 있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이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등이 그것이다. 자, 여기 몽골초원 알타이산자락 검은 호수에서 살아가는 쇠재두루미(우리는 이를 현학玄鶴 또는 선학仙鶴이라고 불렀다) 부족이 있다. 이들은 해마다 늦가을이면 해발 7천m급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따뜻한 북인도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이다. 수백 년 전에는 한반도, 그것도 진안(전라북도) 용담댐 근처에 와 겨울을 날고 갔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이 되었지만 말이다. 질라래비는 선천적인 기형으로 날기보다는 춤추기를 좋아하는 소녀의 이름. 설산(雪山)을 넘지 못하자 질라래비의 할머니는 막내손녀를 데리고 아주 어릴 적 가본 진안고원을 찾아나섰다. 비록 공해와 미세먼지 등으로 오염이 되고 먹을 것이 빈약하지만, 원초적인 고향을 순례하면서 원래 인간과 새가 한몸이었고, 진화된 다음에도 친하게 지냈던 왕년의 전설과 신화를 들려준다는 줄거리이다.
곳곳에 우리 현대문명의 허와 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독특한 시선이 있다. 질라래비의 생각과 그 할머니의 성찰이 번득인다. 인간이든 새든 왜 생존적 가치관에서 자기표현적 가치관으로 전환해야 하는지를 할머니의 어록(語錄)으로 엿보게 한다. 어록이 중요하다. 바크의 갈매기는 ‘가장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기똥찬 어록을 남겼다. 쌩텍쥐베리의 ‘어린왕자’는 ‘사랑한다는 것은서로 길들여지는 것’이라는 불멸의 어록을 남겼다. 할머니의 어록을 주의깊게 귀 기울여보시라. 이 문명을 바라보는, 사람과 사람관계를 정리해볼 수 있는 혜안(慧眼)이 돋보인다. 질라래비가 왜 물질주의와 산업화를 벗어나야 한다는 노래를 부르며 부단히 춤을 추는지 그 이유를 알려준다. 흔히 이런 책을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라고 말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좋은 내용의 그림책을 이미 굳을대로 굳어버린 어른들이 읽으면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청소년들이야말로 이런 좋은 우화소설, 그림동화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가치관이 정립되기 전에. 어떤 책 한 권, 어떤 한 사람, 어떤 한 사건을 제대로 만나면 그 사람의 인생이 획까닥 바뀔 수 있다. 환골탈태하는 그런 계기가 중요하다. 그러기에 좋은 선생님이 필요한 것이다. 한 편의 준수한 교양소설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두 번을 정독(精讀)했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작가의 역량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경의를 표한다. 제발 바라건대, 안도현 시인의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작품 ‘연어’가 당시 50만부가 팔렸다는데, 이 작품은 100만부가 팔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제는 ‘책을 읽지 않는 시대와 세상’이 돼버린 걸.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래도 읽을 책은 읽어야 한다. 필요충분조건의 책.
그림을 그려준 '은섬'이라는 작가의 여러 편의 삽화도 삽상하고 쌈박해 책의 품위를 더한다. 더구나 책을 펴낸 ‘다슬기’라는 출판사도 재밌다. 본사가 전북 진안이고 지사가 서울이다. 소위 지방출판사다. 궁금해 물어봤더니, 조합원들이 출자해 만들었단다. 현실적으로는 어렵겠지만,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문화는 서울과 지방, 상호 교류가 되어야 흥성(興盛)할 것은 분명하다. 어찌 대한민국은 모든 것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오기만 하는 것인가? 상향(上向)될, 상향되어야만 할 문화가 얼마나 많은데, 우리는 편향이 되어도 너무 편향이 된, '천민(賤民)자본주의'의 극치(極致)를 달리고 있다. 어쩌면 이 우화소설이 그런 측면도 아프게 꼬집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