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白碑)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지 4차지역(청주청원분터골국민보도연맹학살지위령원혼표식설치순례)
일시:2018년9월11일(화)오전10시
장소:청주청원분터골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사회적공론화 미디어투쟁단
청주청원보도연맹유족회
후원단체: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 시민모임.통일WHO,사단법인우리민족.원불교청원교구.(사)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과거성찰비핵평화상생번영국민개헌추진전국순방단.서울의소리.국민주권개헌연대.전국농민회총연맹
지금 이곳학살현장에는 유해가 널부려져있다.
과거사기본법재개정을촉구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유족들
청주청원분터골 학살현장에 설치된 원혼비표식
분터골학살현장은 발굴이 중단되어 지금도 흙을 파면 유해가 나오고있다
청주청원분터골학살현장을 성명하는 박남순회장
천도재봉행을 집전하는 추도엽 원불교청주교당 추도엽교무님
관련시민단체의발언
유족증언1
유족증언2
청청청원보도연맹최대학살지인 분터골학살현장위령추모행사를 진행하는 정재권미더어팀대표
백비민간인학살지 위령순례김선희당장
kbs.청주방송국과 뉴시스,인터넷언론사들이 취재를 하고있는장면
분터골학살지 충북청주분터골유족회 박남순 유족회장님, 김윤일 사무국장님, 김재국 유족님, 성낙엽 유족님, 배기성 유족님, 정종수 유족님, 노영춘 유족님, 김태선 유족님, 김봉우 유족님, 박영서 유족님, 박현순 유족님, 임창근 유족님, 박계서 유족님, 강태민 양민학살사 유투브강사님 외 유족 친지님들께서 참석해 주셨습니다. 위령천도제는 분터골과 오창 양곡창고에서 원불교 충북교구 사무국장 추도엽 교무님께서 집도해 주셨습니다. KBS 청주 이정훈 기자님과 뉴시스 송휘헌 기자님께서 취재해 주셨습니다.
○ 청원지역민간인학살
1950년 7월초, 경찰과 국군은 충북 청주 청원지역 보도연맹원 700여 명과, 청주형무소 재소자 300여 명 등 1,000여 명의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집단학살한 후, 충북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일대에 암매장하였다. 2007년 7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사건 발생 57년 만에 공식적인 유해 발굴 사업을 실시하였으며, 당시 분터골 일대에서는 70여 구의 희생자 유해와 수십 점의 탄피, 옷, 단추, 고무신 등 다수의 유품들이 수습되었다.
□ 아래 청원분터골,오창양곡창고 민간인학살사건자료는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자료입니다.미흡한 조사였기떄문에 실제발생한 민간인학살사건과는 동떨어진 조사결과에 불과합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고 7월 2일에서 8일 사이 북이면 주민들이 북이국민학교 교실에 감금되었다. 소집 당일 저녁, 경찰들은 간부를 제외한 주민들에게 ‘밥 먹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며 내보내기도 했는데, 도망갈 기회를 주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순진하게 다음 날 다시 집결한 주민들은 7월 9일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등에서 희생되었다.
청원군 오창면 오창창고에는 진천과 청원 오창면에서 연행된 500여 명의 주민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7월 10일 오창지서와 오창창고 등에 갇혀 있던 진천과 청원 오창지역 주민 10여 명이 수도사단(사단장 김석원) 헌병대에 의해 사살 또는 폭행치사 당했다.
이날 저녁에 군인 2명이 창고에 와서 군인가족을 나오라고 한 뒤, “동생하고 싸우려고 빨갱이 짓을 했느냐”며 총 개머리판으로 주민 3명을 때려 죽였다. 이어 밤에는 헌병과 경찰이 지서 유치시설에 별도로 갇혀있던 주민 10~15명을 끌고 가 한 명씩 권총으로 사살했다.
이들은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마을의 책임자급으로 판단된 주민들이었다고 한다. 이날 밤 수도사단 헌병들은 오창창고에 주민들을 가두어 둔 채 오창지서장에게 이들을 인계하고 후퇴했다. 당시 창고에 갇힌 주민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10일 밤을 지새웠다.
7월 11일 새벽 2시경 오창에 도착한 6사단 19연대 헌병대 10여 명은 창고에 감금된 주민들이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관총과 수류탄까지 사용하며 주민들에게 살해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총 쏘기를 일시 중단한 군인들이 ‘산 사람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앞으로 나오라’고 소리치자 생존한 주민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걸어 나갔다. 그러자 군인들은 이들에게 다시 총을 쏴 살해했다. 이날의 희생자는 400여 명에 달했다.
같은 날 오전 8시 30분 인민군이 진입했다며 수도사단이 폭격을 요청했으므로 이에 미 전투기가 오창창고를 폭격하였다. 한편, 7월 10일에 진천전투가 있었으며 인민군은 7월 11일 오후에 오창에 진입했다.
한편, 인민군 점령 후 7월 20일경 이로 인해 의용소방대장 김씨가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되는 일이 발생했다. 인민재판 당시 김씨의 죄목은 ‘수도사단의 후퇴 후 주민들을 풀어주려는 오창면장의 열쇠를 빼앗아 이를 막았으며 그 결과 주민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국군은 7월 12일 청원군 오창읍 화산리와 오근장의 인민군에게 포격을 가했으며, 13일에는 미호천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청원군 남일면에서 전투를 치르고 보은으로 후퇴하였다.
첫댓글 충북지방최대의학살지인 청원분터골유해매장지룰 보고 충격을 금할수가없습니다.발굴이 중단되어 지금도 흙을 파해치면 유해가 발굴돤다니 기가막혀 말이 나오지를 않습니다.무슨 이런나라가 자구상에있습니까.
이나라눈 인권을말할자격도없는 나라입니다.후손둘이 무엇울 보고배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