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의 무측천, 선태후(宣太后)
진시황의 증조부인 진소왕(秦昭王) 시대에 위염(魏?)은 초(楚)나라계 외척의 대표인물이었다. 국내국외의 큰 일들은 모두 그가 나서서 처리했다. 그의 누나인 선태후는 궁중에 있으며, 초나라계 외척의 핵심인물이다. 초나라계 외척의 다른 구성원들은 모두 그녀의 품안에서 각자 요직을 차지하고, 진나라정권을 손안에 장악하고 있었다.
미융(?戎)은 선태후의 부친이 같은 남동생이었다. 선태후가 진나라로 출가할 때, 그는 아직 초나라에 남아있었다. 나중에 초나라에서 죄를 지어, 초나라를 떠나 동주(東周)로 가게 된다. 선태후가 정권을 장악한 후, 미융은 동주에서 진나라로 불려오고, 크게 중용된다. 그는 승상이 되고 화양군(華陽君)에 봉해진다. 이렇게 하여 그는 초나라계 외척의 또 한명의 대표인물이 된다. 미융, 위염과 선태후의 삼형제는 오랫동안 진나라정계를 주름잡는 삼거두가 되고, 세상에서는 이 세 명을 “삼귀(三貴)”라고 불렀다.
당시의 진나라정계에는 “사귀(四貴)”라는 말도 있었다. “사귀”는 앞의 양귀(미융, 위염)에 고릉군(*高陵君) 영리(??)와 경양군(涇陽君) 영불(??)을 합하여 부르는 말이다. 영리와 영불은 진소왕 영칙(?則)의 동생이며, 선태후의 두 아들이다. 그들도 진나라정계에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거나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는등 활발히 활동했다. 사서에는 위염은 정권을 농단했고, 경양군과 화양군은 거리끼믄 것이 없었으며, 고릉군은 들어가고 나갈 때 청하지도 않았다고 되어 있다. 진왕은 대권을 행사하지 않았고, 사귀는 왕실보다 부유했다. 이런 주장은 당시 유사(遊士)들의 과장이 있을 것이고, 정적을 공격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초나라계외척이 진나라정계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했는지는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선태후는 진소왕의 모친이다. 삼귀중 첫째이고, 사귀의 뒷배경이다. 세력이 방대한 초나라계 외척은 마치 뭇 별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녀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쇠락했다. 진나라의 국운과 세력은 선태후와 진소왕의 집권시기에 최고조에 이른다. 진나라의 통일천하는 이미 추세로 굳어진다. 진나라이 역사상 그리고 중국의 역사상 선태후는 대단한 여성이다. 그녀는 걸출한 정치인이다. 그녀는 국사에 능했고, 정치적 업적이 비범했다. 뿐만 아니라 사상이 자유롭고 생활도 방종했으며 일처리나 사람됨은 제 하고싶은대로 하는 편이었다. 후대의 역사인물중 비슷한 사람을 꼽는다면 무측천이 비슷하다고 할 수있을 것이다.
<<전국책.한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소왕이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초나라는 한나라를 공격한다. 한나라는 여러 번 사신을 파견하여 진나라에 도움을 청한다. 진나라는 그러나 들은척 만척 한다. 선태후는 초나라사람이다. 그녀는 얼마전에 아들 진소왕에게 친정에서 초부인을 불러와 결혼시켰다. 진나라와 초나라 양국은 허니문의 시기였다. 그녀는 초나라와 등지고 싶지 않았다. 한나라는 어쩔 수가 없었다. 다시 사신 상근을 진나라로 파견하여 진소왕에게 이해관계를 설명한다: “한나라는 지리적으로 진나라의 담장이다. 외교적으로는 진나라의 시종이다. 양국간의 관계는 순망치한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한나라가 위급한데, 진나라가 도와주지 않으면, 순망치한의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대왕께서는 다시한번 고려해주십시오.”
진소왕은 상근의 말을 선태후에게 전한다. 그러자 선태후는 이렇게 말한다: “한나라에서 온 사신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는 상근의 말이 이치에 어느 정도 맞는다.” 그리하여 상근을 만나보겠다고 동의한다. 선태후는 상근에게 이렇게 말한다: “천첩이 옛날에 선왕을 모실 때, 선왕이 그의 다리로 천첩의 몸을 누르면, 천첩이 힘들게 느껴져서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선왕이 몸 전체를 천첩의 몸 위에 누르면, 천첩은 무겁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즐거움이라는 이로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한나라를 도와주려면 적지 않은 병사를 보내지 않고, 양식과 풀도 충분히 준비하지 않으면, 이루기가 어렵다. 자세히 계산해보니 하루에 천금이 들 것같다. 이런 상황하에서 한나라는 어떻게 진나라에 보답할 것인가, 그리하여 진나라가 무거운 부담으로 느끼지 않고 이익을 얻는다는 즐거움을 갖게 해줄 것인가?”
전국시대 외교활동에서 노골적인 이익요구는 왕왕 완곡한 싯구나 여러 분식이 붙어서 우회적으로 표현되었다. 선태후처럼 직설적으로 한나라에게 진나라의 군사적 원조에 대하여 실질이익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하고싶은 말은 그대로 내뱉어야 하고, 국익추구에 대하여도 전혀 감추지도 않았다. 더욱 기괴한 것은 이런 일에 대하여, 그녀는 외국 사신의 앞에서, 자신과 진혜왕과의 성관계를 비유로 들어 설명했다는 점이다. 이는 외교상에서도 성관계를 전혀 거리낌없어한다는 것이고, 중국역사상으로도 다시 없는 일이다.
성관계를 거리끼지 않는 선태후의 방식은 입으로만 뱉어진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나타났다. 의거(義渠)는 진나라 서북쪽의 유목민족국가이다. 군사력이 강성하고, 오랫동안 진나라 변방의 심복대환이었다. 이런 국정의 난제에 대하여 선태후는 스스로 나서서 미인계를 쓴다. 그녀는 의거왕이 진나라에 온 틈을 타서, 의거왕과 사통하고, 두 아들을 낳는다. 의거왕이 경계를 느슨하게 할 때 그녀는 함양의 감천궁 안에서 계책을 써서 죽여버린다.
의거의 국내에 군주가 없는 틈을 타서 신속히 공격하여 일거에 의거를 멸망시킨다. 그리고는 그 곳에 진나라의 군현을 설치한다. 이후 진나라의 서북은 안정된다. 이 일에 대하여 진소왕도 잘 알고 있으면서, 모친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서로 지지한다. 아주 중요한 때에는 진소왕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선태후를 찾아가서 자문을 구하였다고 한다. 선태후와 의거왕의 일은 <<사기.흉노열전>>과 <<범수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상세한 상황은 불분명하지만 고대사상 기이하고 강인한 여주인의 이미지는 드러난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