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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의미 (1)
「시편」 제44편의 연구
「시편」 제44편은 민족적 고난 중에서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이다.
1. 하나님이여 우리 열조(列朝)가 우리에게 전한 것을 우리가 귀로 들었사오니 곧 주께서 저희 날에 행하신 옛일이로소이다.
역사는 죽은 것이 아니요 산 것이다. 선조의 지은 일은 선조의 일로만 지(止)치 않고 차대(次代)에서 차대로 산 활동을 낳는다. 고로 좋은 선조와 위대한 역사를 가지는 것은 행복스러운 일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고대에 있어서 가장 영광 있는 민족이었다. 그들의 역사에는 생존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役事)가 있었다. 이는 민족과 국가를 물론하고 하나님의 대경륜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지만 특히 이스라엘은 선민으로 택함을 받은 민족이었으므로 그들의 역사에는 전능한 신 자신의 직접 활동이 나타나 있었다. 고로 “주께서 저희 날에 행하신”것이다. 저희가 자기 날에 행한 것은 이미 몸과 시대와 공(共)히 썩어졌으나, 주 자신이 행한 것은 현재도 오히려 듣고 생명의 힘을 감득하는 것이었다.
2. 주께서 자기 손으로 이방을 쫓으시고 우리 열조를 심으셨으니 주께서 열방(列邦)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도다.
3. 대개 저희가 자기 환도로 땅을 얻음도 아니요 자기 팔로 구원함도 아니다.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빛이니 주께서 권고(眷顧)하심이로다.
시인은 역대 선조의 그 빛나는 역사를 회상하고 힘을 얻었다. 거기 전능한 이의 특별한 가호가 있음으로써다. 그리하여 회상은 신앙의 불길을 일으켰다. 이제, 그의 목소리는 맑고 높은 조자(調子)로 울린다.
4. 하나님이여 나의 왕이시니 야곱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옵소서.
5. 우리가 주를 힘입어 우리의 원수를 누르고 우리가 주의 이름을 힘입어 우리를 치려 하는 자를 밟으리이다.
6. 대개 내가 활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요 내 환도가 가히 나를 구하지 못하리로다.
7. 오직 주는 우리를 원수에게서 구원하셨으니 우리를 한하는 자로 수치(羞耻)를 받게 하였나이다.
8. 내가 종일토록 하나님을 자랑하오니 영원히 주의 이름을 사례하리로다.
신앙의 활역사(活歷史)는 힘있는 생명력을 공급하여준다. 용기와 확신이 생기고 감사와 찬송이 솟구쳐 올라온다. 전능한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다—— 이리 생각만 하고도 원기 백배하고 혼은 용약(涌躍)한다. “나”라 한 것은 물론 시인 자기 개인을 가리킨 것이 아니요 민족 전체를 가리킨 것이다. 여호와에 대한 감사와 동족에 대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 나의 왕”이라 부르게 했다. “야곱”이라 한 것도 전족(全族)을 대표한 말로,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스라엘과 특별한 약속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한 말이다. 그렇게 노래하여서 그는 절대 신뢰 속에 들어갔다. 자기 능력이 족히 믿을 바 되지 못하고 자기 무기가 자기를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역사가 가르치는 것과 일반으로 저희의 구원은 오로지 여호와 신께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고로 저는 종일 주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상에서 이 시의 제1단이 끝난다. 1절에서 8절까지 오는 동안 조자(調子)는 점점 높아져서 마지막에 그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의 가슴에 갑자기 암운이 뒤덮여왔다. 그리하여 9절에서 조자는 격변하여버린다.
9. (그러나 지금은) 주께서 우리를 버리사 우리로 욕을 받게 하시고 우리군사와 함께 나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시인은 역사에서 시선을 돌리어 현실로 향하였다. 거기에는 합할 수 없는 거구(巨溝)가 있다. 그를 보고 시인은, “그러나” 하고 비탄의 일어(一語)를 발하였다.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바 아니고 그로 인하여 그가 믿을 만한 하나님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러나 ·········다. 절대 신뢰와 찬송의 정상에 섰던 시인은 이제 의심과 바탄의 암연에 떨어졌다. 신앙은 깨어지고 걷잡을 수 없는 동요가 그를 삼켜버렸다. 지금 그의 노래는 극히 저조로 변하여, 노래라기보다는 중얼거림이 되어버렸다. 애소(哀訴)는 차차 나아가서 원망이 되어버린다. 전절에서 “종일 찬송”한다 했던 그가 지금은 “주께서 우리를 버렸다”고 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모른다. 믿었던 자에게는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였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괴로운 일이다. 한 개 애인에게 버림을 당하고도 자살을 할 만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고서랴. 고로, 시인을 향하여 박신(薄信)의 죄로써 책함은, 책하는 자신이 신앙 경험이 지극히 박약함을 증명하는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역사의 교훈과 선배의 경험은 가치 없는 것이 아니다마는 그것이 단순한 지식으로 있는 한 현재의 산 고난에 당할 때는 아주 무력함을 불면(不免)한다. 그리하여 과거의 모든 광휘 있는 역사는 몽중(夢中)의 일같이 인정하면서 “그러나, 그러나”를 반복하고 의심하고 탄식하고 낙망한다. 그러나 진리의 제일 위대한 교사는 고난이다. 몸소 당하는 고난, 그는 진리를 자기 살로 만들며 피로 만들고 모든 교훈을 생동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영혼은 진리의 계단을 또 한층 더 높이 올라간다. 역사의 배경을 뒤에 두고 “그러나”하고 현실의 고난의 격류에 잠입(潜入)한 시인은 과연 광명의 피안에 도달하나 못하나?
10. 주께서 우리로 원수에게 쫓겨 물러가게 하시니, 우리를 한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노략(鹵掠)하였도다.
11. 주께서 우리로 잡아먹을 양 같게 하시고 이방 가운데 흩으셨도다.
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팔아 이를 얻지 못하였으니 저희 값으로 주의 재물이 더하지 못하였나이다.
“그러나”라고 하였을 때 암흑이 그의 눈을 덮었다. 고로, 이제 그 입에서 원망이 쏟아져 나온다. 불신자라도 이에서는 더할 수 없는 말이다. 누구나 하나님을 향하여 이보다 더 격렬한 원망을 할 수는 없다. 왈—— 우리를 잡아먹을 양같이 하였다. 팔아먹었다. 팔아먹고도 이도 남기지 못하였다. 이것이 선민의 입에서 나온 말인가고 의심할 것이다. 과연 이스라엘인의 심혹(深酷)한 성질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진실한 모독(冒瀆)은, 가위(假僞)의 존경보다도 차라리 취할 만하다. 우리는 도리어 이 격렬한 독신(瀆神)의 어구 중에 동정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13.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보게 하시니 우리를 둘러 있는 자의 업수이 여김과 희롱이 되게 하리로다.
14. 주께서 우리로 이방 중에 웃음거리가 되게 하시고 만민이 우리에게 머리를 흔들게 하시도다.
15. 나의 능욕(凌辱)이 종일 내 앞에 있으니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도다.
16. 나를 꾸짖고 훼방하는 소리를 인하고 대적(對敵)과 원수를 인함이로다.
실패면 오히려 견딜 수 있고 패배는 오히려 참을 수 있으나 원수가 조롱(嘲弄)하고 머리를 흔들어 모멸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패한 것도 분하거니와 나의 패함을 쾌(快)하여 하는 적이 있는 것을 아는 일은 죽음의 고민(苦憫)보다 더한 것이다.
여기서 시인의 비수(悲愁)는 극저(極底)에 달하였다. 다시 참을래야 참을 수 없고 믿을래야 믿을 수 없다. 그리하여 17절에서부터는 그 고난의 원인에 대한 질정(質正)이다.
17. 이 일이 다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였고 또한 주의 언약을 배반치 아니하였나이다.
18. 우리 맘이 퇴축(退縮)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9. 비록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산(山)짐승의 굴에 깨어져 상하게 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도다.
무슨 연고로 이 고난인가 —— 하고 그는 자문하였다. 진실한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는 그 고난은 자기네의 불(不)진실이 혹 원인이 되지 않았나 의심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회개하고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성의 결과 그렇지 않다고 깨달았다. 그러면 도덕의 일반적 타락에 있는가고 생각하여보았다. 만일 그렇다면 용기를 가다듬어 일어날 각오였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 사망의 그늘 속에 던짐을 받음은 웬일인가. 그는 또 다시금 반성해본다.
20. 우리가 만일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으며 혹 손을 펴 다른 신을 향하였더면
21.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이를 궁구치 아니하였으리오 대개 맘의 은밀한 것을 아시도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배신의 죄라도 범하였는가. 만일 그 죄를 범한 것이 있다면 변명할 길도 없고, 묵과를 바랄 수도 없고 스스로 죽음의 고난이라도 당해야 마땅하다 겉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혹 은밀 중에 그런 일이나 없나. 있기만 하면 은밀한 것을 아는 하나님이 이를 궁구치 않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시인이 자기네의 죄를 발견치 못하였다는 것은 자기네가 절대로 결백 무하(無瑕)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 일인도 없음은 저도 잘 아는 바였다. 마는 그의 의심하는 바는, 자기네가 그런 특별한 고난을 당하여야 할 하등 특별한 극악을 지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의 이 이유는 정당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 이유는 없다 —고 생각하였을 때 지는바 고난의 짐은 갑자기 십 백배의 무게를 더하였다.
자기의 의를 하나님 앞에 주장하며 고난의 원인을 질정(質正)하다 못하여 극도로 피곤한 후, 헐떡이는 숨을 억제할 힘도 없이 절망 속에 떨어지려할 때, 그 최후의 순간에, 해답이 왔다. 맘의 깊은 속에 가는 소리가 들리었다. 그는 겨우 풀어진 맘으로 가만히 불렀다 ——.
22. 우리가 주를 인하여 종일 죽임을 당하고 우리가 잡혀 죽을 양과 같이 헤아림을 받았도다.
“주를 인하여”다. 고난의 원인은 주에게 있다. 내가 고난을 당함은 나를 인하여서가 아니고 주를 인하여서다. 내 죄값으로도 아니요 나를 시련(試練)하기 위하여서도 아니다. 주 자신에 그것이 필요하므로, 즐거움으로 그렇게 하고 싶으므로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무리라도 별수 없고, 포학(暴虐)이라도 별수가 없다. 만유의 주 저 자신이 내게 고난을 주고 싶으므로 주신다는 것이다. 단념이라면 단념이요, 실혼(失魂)이라면 실혼이다. 만은 절대 신뢰란 이런 지경을 가지고서야 말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이런 심령이다.
노예의 신앙이라고 매도(罵倒)하는 이가 있는가. 과연 노예의 신앙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가 노예의 종교임을 지금 와서야 안다면 너무나 늦은 깨달음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노예의 신앙을 가지고 부복할 때 아들의 영이 우리 맘에 충만하여짐이다. 자유와 희망과 확신을 얻는다. 고로 이 시인도 자아의 고성(孤城)을 지키기를 그만두고 전부를 들어 여호와의 군문에 항복하였을 때 새로운 용기와 확신을 얻었다. 23절로써 제3단이 시작된다.
23. 주여 깨시옵소서 어찌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사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시옵소서.
24. 주께서 어찌하여 낯을 가리우시나이까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 우리 영혼이 티끌에 꾸부리고 우리 몸이 흙에 붙었도다.
26. 일어나사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구속(救贖)하시옵소서.
이제 시인의 맘에는 평안이 왔다. 이미 원망이 없다. 초려(焦慮)가 없다. 고의(孤疑)가 없다. 오직 신뢰요, 오직 간원이다. 나를 위하여서가 아니요, 주의 인자하심으로 인하여서다. 주다, 주다, 주다.
이렇듯이 시는 빛나는 찬송으로 시(始)되어 신뢰의 기도로써 끝났다. 그러나 그 중간에는 자아 중심의 견성(堅城)을 내어 바치는 비통한 경험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사람이 자기 고난의 원인을 자기 죄악에 반구(反求)하는 것은 진실한 도덕적 태도요,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고난의 해설은 되지 못한다. 혹은 자기를 시련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겸손한 태도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그러한 자기중심의 설명을 하는 한까지는 고난의 무게는 없어지지 않는다. 고난의 진의는 그보다 깊은 데 구해야 한다 —— 즉 하나님 자신에. 하나님 중심이다. 즐거움도 하나님에, 고난도 하나님에. 그때에 우리 머리는 다시 들리고 우리 찬송 소리는 다시 높아진다.
성서조선 1931. 7월, 30호
저작집30; 20-53
전집20; 11-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