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42. [역경의 열매] 강국창 (1-20) '흙수저'로 태어난 삶… 하나님 만나 '막장인생' 벗어나
아버지 이직으로 영양서 강원도 이주
탄광촌에서 9남매 중 셋째로 출생
10대 중반 넓은 세상으로 도약 꿈꿔
강국창 장로가 최근 국민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강원도 태백 탄광촌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국민일보DB
나는 이른바 ‘흙수저’다. 탄광촌에서 태어나 어렵게 살다가 학과라고는 광산학과밖에 없던 공업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래도 다행히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뒤 사업을 시작했다. 성공도 하고 무섭게 실패도 했지만 역경 속에서 다시 일어나 자랑스러운 기업인이라는 영광을 얻었다.
지금은 국내 4곳과 해외 4개국에 5개 공장을 운영하는 경영자이면서 교회 장로로, 9남매 리더로, 또 여러 직함에 따른 역할로 바쁜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 힘없고 ‘빽’없이 시작했지만, 일생일대 가장 큰 만남의 복인 하나님을 만나 실패에서 일어서는 힘을 얻었다.
얼마 전 팔순 잔치를 치렀지만, 거짓말 조금 보태 요즘도 청년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아침 5시부터 새벽 기도를 시작으로 전화 영어 공부, 골프와 탁구, 걷기, 근력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한다. 조찬 모임을 갖고 출근해 퇴근 때까지 회사 일에 매진한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이 인생의 크나 큰 복이란 사실을 깨달았기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는 것이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는 내 자랑을 늘어놓는 자리가 아니다. 실패 앞에 두려워하는 지금의 세대들과 인생의 끄트머리를 함께 걷고 있는 선배로서, 나의 삶과 신앙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하고 싶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일어서고 도전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는, 반전 인생을 함께 꿈꾸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강원도 탄광촌에서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래 부모님 두 분의 고향은 경북 영양이었다. 1940년대 중반 부모님은 강원도로 이주하셨다. 영양우체국 부국장을 지낸 아버지는 그 경력을 바탕으로 대한석탄공사 관리직으로 일하셨다. 아버지는 실제 광부는 아니셨지만 광부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을 관리하는 입장이다보니 그들과 일상을 늘 함께하고 계셨다.
“느그 아버지나 다른 집 아버지들이 그렇게 석탄가루 마시면서 돈 벌어 가정을 살리고 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아버지가 지나가듯 던지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실 우리 동네에서 광부가 아닌 사람은 거의 없었다.
“너희 아버지도 탄광 다니시지?” “응, 우리 아버진 장성광업소. 너희 아부진?” “우린 그 옆 탄광으로 다니셔.”
석탄 산업의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 삶의 모든 사이클이 탄광촌 위주로 돌아갔다. 가족의 생활 패턴 또한 3교대 근무를 하는 아버지들의 근무 스케줄에 따라 달라졌다. 하지만 10대 중반을 지나면서 나는 한숨이 많아졌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라보니 뭔가 꽉 막힌 답답함이 들었던 것이다.
‘아, 나도 결국 탄광촌에서 살아야 하는 걸까?’ 평생 탄광촌 마을을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막막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반대 급부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 또한 끓어올랐다. 탄광촌이란 인큐베이터에서 ‘막장 인생’이 아닌 넓은 세상으로 도약할 길을 찾고 싶었다.
약력=1943년 강원도 태백 출생, 연세대 전기공학과 졸업, 동국성신㈜·가나안정자정밀㈜ 회장, 인천경영자총협회장, 국가조찬기도회 부회장, 서울 수정교회 명예장로.
* [역경의 열매] 강국창 (1) '흙수저'로 태어난 삶… 하나님 만나 '막장인생' 벗어나
* [역경의 열매] 강국창 (2)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어머니의 밥상철학
* [역경의 열매] 강국창 (3) 강인함과 인간미로 몸소 인생의 멘토 돼 준 부모님
* [역경의 열매] 강국창 (4) 서울 명문대 합격 소식에 현수막 내걸고 동네잔치
* [역경의 열매] 강국창 (5) ROTC 장교로 군 복무 마치고 사회인으로 첫발
* [역경의 열매] 강국창 (6) "일본이 만드는 냉장고 부품, 직접 만들어 보자"
* [역경의 열매] 강국창 (7) 1년 반 매달린 끝에 순수 국산 부품 개발 성공했지만…
* [역경의 열매] 강국창 (8) 국산품 보호법에 주문 폭주… 성공의 달콤함에 푹 빠져
* [역경의 열매] 강국창 (9) 고향 태백서 본격 선거 준비… 마음은 이미 국회의원
* [역경의 열매] 강국창 (10) 달콤한 국회의원 꿈 깨어나 보니 쑥대밭 된 공장
* [역경의 열매] 강국창 (11) 하루하루 고통 속에 떠도는 삶 "아… 죽고 싶다"
* [역경의 열매] 강국창 (12) "하나님은 어떤 분?"… 수많은 인파에 호기심 발동
* [역경의 열매] 강국창 (13) "하나님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울며불며 매달려
* [역경의 열매] 강국창 (14) "강 사장님, 재기하는 데 도움 드리고 싶습니다"
* [역경의 열매] 강국창 (15) 신앙으로 용기와 패기 충전하고 '제2 창업' 도전
* [역경의 열매] 강국창 (16) 꿈에도 그리던 공장 짓고 원가 절감에 승부 걸어
* [역경의 열매] 강국창 (17) 조직관리 패러다임 바꾸며… ‘정직하고 공평한’ 경영 고수
* [역경의 열매] 강국창 (18) '은칠노삼' 경영 철학… 늘 기도로 지혜를 구하다
* [역경의 열매] 강국창 (19) '하나님 은혜' 선명히 경험한 삶… '하나님 영광' 최우선
* [역경의 열매] 강국창 (20·끝) '흙수저'로 시작한 인생, 본향 꿈꾸는 '은혜의 금수저'로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역경의 열매] 강국창 (2)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어머니의 밥상철학
아버지 홑벌이로 살림 감당하기 어려워
늘 먹는 것에 유독 민감하셨던 어머니
공부할 때만큼은 인정, 일 시키지 않아
태백공업고등학교 시절의 필자. 강원도 태백에서 유일한 고등학교였다.
어머니는 밥에 유독 민감하셨다. 광산에서 일하는 남편 월급으로 열 한 식구의 삶을 꾸려가는 입장이었기에 늘 먹는 것에 예민하셨던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신념이 철저한 분이셨다.
우리 집 밥상은 3개였다. 하나는 아버지를 위한 밥상, 또 하나는 아들 일곱이 둘러앉아 먹는 밥상, 나머지는 어머니를 비롯한 여자 형제들이 먹는 ‘맨바닥’ 밥상이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가부장 문화가 팽배했던 시절을 반영하는 풍경이었다.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밥 먹을 때였다. 식욕은 늘 왕성했고 음식은 늘 부족했다. 식사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조용했다. 우적우적 밥 씹는 소리, 김치 씹는 소리만 들릴 뿐 별다른 대화도 없었다.
보릿고개라 해서 남들은 밥을 거르는 때였으나 그나마 아버지가 석탄공사에서 근무해 쌀을 배급받았다. 굶지 않을 만큼 쌀이 있었는 데도 밥은 늘 부족했다. “어머니, 저 밥 좀 더 주시면 안 돼요?”
누군가 용기 내어 한마디 꺼냈다가는 0.5초도 안 돼 어머니의 반격이 시작됐다. “밥 없다. 그만 먹어라. 넌 뭘 잘한 게 있다고 밥을 그렇게 먹냐. 공부는 서 푼어치하고 그렇다고 일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밥 먹을 때마다 어머니가 주문처럼 꺼내시던 말씀, “공부는 서 푼어치도 안 하면서 밥은 많이 먹는다”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밥만 축낸다”는 말이 가슴에 콕콕 박혔다. ‘아, 밥이라는 것은 공부나 일을 하고 난 뒤에 그 대가로 먹어야 하는구나’ 하는 인식이 그때 생긴 것 같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성경 말씀을 떠올리면 어머니가 잘못된 말씀을 하신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훗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데살로니가후서에 이미 같은 말씀을 하고 계셨음을 알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어머니의 ‘밥상 철학’ 덕분에 나의 유전자 속엔 ‘성실’ 인자가 깊이 새겨진 것 같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일하셨다. 아버지 홑벌이로는 살림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좌판에 농작물을 펼쳐 놓고 파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러다 보니 집안일이나 잡일 등을 자식들이 맡아 하는 건 당연했다. 나도 피할 수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돼지 밥을 수거해 오는 일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국창아, 가서 돼지 밥 가져와라.” 이런 명령이 떨어지는 날은 재수 없는 날이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버려진 음식물을 수거해 가져와야 하는데, 길게는 30분씩 걸리는 곳까지 다녀와야 했다. 양동이를 들고 다니느라 힘들 뿐만 아니라 창피하기도 했다. 한번은 일하지 않으려고 벽장 속에 전구를 설치하고 바둑과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어머니한테 걸려 장기판과 바둑판이 아궁이 불 속에 던져지는 것을 봐야만 했다.
그런 어머니도 공부만큼은 인정해 주셨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학교 공부를 곧잘 했던 내가 공부를 하고 있을 때는 일을 맡기지 않으셨다. 다른 형제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공부를 해야 인정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3) 강인함과 인간미로 몸소 인생의 멘토 돼 준 부모님
열 장정 부럽지 않던 억척스러운 어머니
맡은 분야서 늘 성실함 보여준 아버지의
열한 식구 지켜낸 부성애 영향 받아
강국창 장로 아버지인 강수원 명예집사와 어머니 박선규 명예집사의 생전 모습. 두 분이 자녀들에게 보여 준 본은 가정의 평화였고, 남겨 준 가훈은 ‘서로 사랑하라’였다.
누군가 나에게 인생을 이끌어 준 스승을 꼽으라면 부모님이 ‘0순위’일 것이다. 열 장정 부럽지 않았던 어머니의 억척스러움과 강인함, 그리고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최고의 성실함으로 열한 식구의 가정을 지키고 인간미를 보여주셨던 아버지의 부성애는 내 인생 곳곳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에 특별한 기억이 하나 있다. 태백에서 살다가 6·25전쟁이 발발해 피란길에 올랐을 때였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 고향인 경북 영양으로 향했다. 당시 나는 여덟 살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이던 형님이 학도병으로 징집돼 끌려간 터라 아버지는 걱정이 되셨는지 서둘러 피란길에 오르셨다. 경북 영주쯤 도착해 여장을 푸는데, 미군 헬리콥터가 착륙했다. 미군들이 초콜릿이나 과자 같은 것을 나눠 준다기에 아이들을 따라갔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울면서 아버지를 찾아 헤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국창아, 야 이놈아!”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리더니 나를 팍 안았다. 아버지였다.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런 기억도 있다. 어느 날인가 아버지의 옷을 옷걸이에 걸어 놓으려는데, 윗주머니에서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뭐지? 혹시 이거 월급봉투 아닌가, 한번 볼까?’ 호기심에 봉투를 슬쩍 꺼냈다. 예상대로 월급봉투였는데, 누런 봉투에 수기로 뭔가 잔뜩 적혀 있고 붉은 도장이 촘촘히 찍혀 있었다. 몇백몇십 원까지 꼼꼼히 적힌 글씨를 보니 한눈에 봐도 월급 가불 표시였다. 12월 월급은 1월 월급을 가불해 가져가고, 다음 달 월급을 받으면 채워 넣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시간이 흘러 부모님을 모실 기회가 많아지면서 어머니와 어린 시절 얘기를 나누던 중, 그때 일이 생각나 여쭤본 적이 있었다. “너거 아부지 고생 많이 하셨다. 그 쥐꼬리만 한 월급 받아서 니들 공부시키고 먹이고 입히고 얼마나 고생을 하셨냐. 니들 아버지 월급봉투는 온통 빨갛더라.” 그 말씀에 우리 모두 숙연해졌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멘토를 찾아다니는 이때, 온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자식을 키워온 부모부터 먼저 돌아보는 수고로움이 선행되었으면 좋겠다.
탄광촌의 삶은 잔잔한 시냇물 같았다. 동네 사람 생활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비슷했다. 초중고등학교는 각 한 곳씩뿐이었고, 고등학교조차 졸업 뒤 탄광 취업으로 이어지는 공업고등학교였다. 공고에 입학해 광부가 되는 삶, 이것이 불문율 같았다.
“아버지, 저 광업소에 취직했습니다.”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제대 후 귀향한 큰 형님마저 광부의 길을 걷기로 했을 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까지 이 길을 가야 하나. 아니야, 다른 길이 있을 거야. 대학에 가자, 서울로 가는 거다.’
마음을 굳게 먹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래 좋다. 너 공부 잘하고 똑똑한 거 잘 안다. 대학가라. 등록금은 어떻게 해서든 마련하면 안 되겠냐. 대신 니 아래로 줄줄이 동생들이 있으니까 재수는 절대 안 된다.” 결심은 했지만 앞길은 막막했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4) 서울 명문대 합격 소식에 현수막 내걸고 동네잔치
마을과 모교서 일류대학 진학 처음 배출
일대 사건으로 지역 기업의 후원 받기도
취미활동과 인맥 넓히며 학교생활 적응
연세대 재학 시절, 언더우드 동상 앞에 선 필자. 대학 시절은 신나게 놀면서 많은 사람을 경험했던 시기였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말로 ‘후시마’라고 하는 벽장 속에 틀어박혀 책을 파고 또 팠다. 고향 친구들은 놀기 바빴다. 남녀공학이었던 터라 함께 모여 어울리는 남녀 학생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조금만 어울려 놀아볼까’ 하는 생각이 피어오를 때마다 머리를 흔들며 뒤돌아서곤 했다.
책과 씨름한 끝에 고3 입시를 치렀다. 지금도 합격자 발표일이 기억난다.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상경해 청량리역에 내렸다. 신촌으로 가기 전, 급한 마음에 조간신문을 샀다. 당시에는 신문에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내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어찌나 실망했던지 신촌에서 자취하던 형님과 약속도 잊은 채 태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라 형님댁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형님이 빙그레 웃으며 맞아주었다. “너 합격했더구나.” 형님이 내민 신문을 보니 붉은색 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내 이름 석 자가 보였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내 이름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축 합격! 강국창, 연세대학교 전기공학과 합격!’ 마을 어귀에 현수막도 걸렸다. 합격 소식은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다. 지금껏 한 번도 일류 대학에 학생을 진학시킨 적이 없던 모교로서도 일대 사건이었다. 지역 기업의 후원을 받는 첫 번째 수혜자로도 선정되었다. 부모님은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벌였다.
서울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서울은 차도 많고 새로운 것도 많은 도시였다. “어이, 강원도!” 태백 출신인 나를 두고 친구들은 ‘강원도’라고 불렀다.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내가 인상 깊었나 보다. 나는 내가 어떻게 불리는지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생활에 적응하기 바빴다.
어느 정도 학교생활에 적응하면서 지방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졌다. 1학년 때는 친구 만드는 일과 노는 데 열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활동 반경도 넓어졌다.
“국창아, 니가 우리 학교 강원도 삼척군 출신 학우 모임 대표를 맡아라. 그리고 강원도 학우회로도 진출하자!” “그래, 니가 가장 적극적이잖냐. 강원도의 힘을 좀 보여주자.”
학우회장을 맡은 뒤 수첩 속 친구들 명단이 점점 더 많이 늘어났다. 이전까지의 나는 어떻게 보면 소극적이고 폐쇄적이었다. 하지만 상경한 뒤 나는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발 넓은 리더가 되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대학 시절만큼 신나게 시간을 보낸 적도 없었다. 등산 바둑 당구 탁구 족구 볼링 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하면서 인맥도 넓혔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져 집에서 보내준 하숙비를 홀랑 쓴 뒤 입주 과외를 하면서 부족한 돈을 메운 기억도 있다.
하지만 그 시절 사람과 관계를 배우고 알아간 것이 대학생활 중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취업문이 좁디좁아진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는 말일 수 있겠지만 내 지론은 변함이 없다. ‘사람 공부가 먼저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5) ROTC 장교로 군 복무 마치고 사회인으로 첫발
학교생활 병행할 수 있는 점 끌려 선택
인간관계·실질적 리더십 배우는 시간 돼
졸업 후 대학 전공 살려 동신화학 입사
강국창(오른쪽) 장로가 1965년 3월 열린 ROTC 임관식을 마친 뒤 지인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학 3학년이 되면서 군대 문제와 맞닥뜨렸다. 입대를 하느냐, 학군단(ROTC)에 들어가느냐를 두고 고심했다. 복무 기간은 좀 길더라도 학군단이 좋겠다고 판단했는데, 아무래도 학교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는 장점이 가장 컸던 것 같다.
나는 지역 장학금을 받는 수혜자 입장이라 학점 관리를 철저히 해야 했다. 하지만 워낙 공사가 다망하다 보니 어떤 과목은 담당 교수님을 직접 찾아가 사정을 해서 성적 관리를 하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ROTC에 지원하기에는 충분한 성적이라 당당히 지원했고 합격했다.
3학년부터 제복을 입고 캠퍼스를 누볐다. 제복이 주는 무게감은 달랐다. 이 제도가 소위로 임관하기 위한 예비 과정인 만큼 장교로서 갖춰야 할 능력과 자질, 리더십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됐다. 그동안 막연하게나마 인간관계, 사람 공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면 이론과 함께 훈련을 통한 실질적 리더십을 배울 수 있었다.
수업은 수업대로, 훈련은 훈련대로 받는 학군단 활동이 때로는 힘에 부치기도 했지만 나름 즐거웠다. 대학 3, 4학년 동안 ROTC 훈련을 받았다. 이어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돼 ROTC 3기로 군 복무를 마쳤다.
많은 사람이 내가 기업 최고경영자(CEO)로서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지 물어오곤 한다. 그럴 때마다 뾰족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실제로 리더십은 대단히 특별한 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장교 훈련 기회를 통해 학습하고 익혔던 것, 즉 나에 대한 책임 있는 행동과 가치관으로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는 정신이 곧 리더십의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보태자면 주어진 자리에서 사람을 중시하고, 개인보다 공의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런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리더로 서 있는 것 같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해는 1967년, 우리나라가 한창 산업 발전기에 들어서고 있던 때였다. 기업에는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졸업을 앞두고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나는 무엇보다 전공을 잘 살릴 수 있는 분야가 유리하겠다고 판단해 동신화학에 지원했다.
당시 동신화학은 타이어, 치약 등을 생산하고 아연 제련 공장도 갖춘 대기업이었고, 가전제품 생산도 준비하는 회사였다. 경쟁률이 치열해 합격하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드디어 발표 날짜가 됐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어 합격 여부를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축하합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실공히 사회인이 된 것이다. 강원도 탄광촌에서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대학 생활과 군 복무까지 마치고 사회인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 뿌듯했다. 입사 뒤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일을 배워나갔다.
나의 생존법은 무조건 많은 경험을 쌓는 것이었다.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는 생각으로 되도록 많이 경험하려고 노력했다. 엔지니어로 입사했지만 영업 부서 일이나 총무과, 경리과 할 것 없이 직원들과의 유대 관계를 넓히는 동시에 어깨너머로 그들의 일을 배워나갔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6) “일본이 만드는 냉장고 부품, 직접 만들어 보자”
엔지니어로서 부품 제작 열망 끓는데
협력업체조차 난색 표하자 오기 발동
사표 던지고 부품 개발에 사활 걸어
30대 초반 동남샤프 근무 시절의 강국창 장로가 어머니 박선규 여사와 함께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동신화학에 입사한 지 3년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거의 매일 야근을 자처하는 꽤 성실한 회사원이었다. 일이 재미있었고 또 사명감으로 상사를 따라다니며 기술을 익히고 배웠다. 당시 국내 가전업계는 금성사(현 LG)가 주도하는 가운데 대한전선 삼양전기 동신화학 등이 포진하는 상황이었다. 국내 최초 냉장고인 금성사의 눈표냉장고를 시작으로 다른 기업에서도 냉장고 개발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전자제품 기업들은 대부분 해외 선진국과 제휴를 맺고 기술을 배워오는 실정이었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일본에서 건너온 부품을 조립하고, 케이스만 그럴듯하게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엔지니어인 나는 회사 차원의 일본 출장이 잦았다. 제휴 업체들은 기술을 공유한다기보다는 중요 부품을 선심 쓰듯 제공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겉으로는 깍듯하고 친절한 것 같았지만 제 잇속만 챙기는 모습이 눈에 환해 화가 치밀기도 했다.
때로는 우리 엔지니어들은 그들이 보물단지처럼 여기는 기술 노트를 입수하기도 했다. 또 물밑 작업으로 얻어낸 기술을 써먹기도 했다. 이처럼 나의 엔지니어 생활은 치열했고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입사 5년 차가 되던 때 회사 경영에 빨간불이 켜졌다.
방만한 경영 탓인지 한 차례 외환 위기에 휘청하더니 순식간에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다. 나는 살길을 찾아야 했다.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이제 기업의 자산 규모나 크기보다는 내가 정말 전방위로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이렇게 결심하고 선택했다.
“저는 동남샤프로 갑니다.” “아니 강 과장, 다른 데서도 오라고 그러는데 왜 하필 거기로 정했어?” “소꼬리보다 닭 머리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동남샤프로 이직한 뒤에도 나는 냉장고 개발 관련 업무를 이어갔다. 현장을 진두지휘하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부품 하나 만들 생각을 안 할까. 우리가 직접 만들면 될 텐데.’
이런 생각이 더 깊어지면서 어느 날 ‘그래, 일본이 만드는 부품을 내가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1970년대 치열해지는 전자제품 개발 현장 속에서 이른바 ‘블루오션(경쟁자가 없는 유망한 시장)’을 만난 듯했다. 이 시장을 개척하고 싶다는 열망은 날이 갈수록 끓어올랐다.
나는 회사 개발실에 틀어박혀 일본 출장 중에 본 기억과 상상을 조합해 시뮬레이션을 해보면서 협력업체를 통해 부품을 만들어 보게끔 했다. 협력업체에서는 난색을 표하곤 했다. “부장님, 우리 기술자들도 못 하겠다고 하네요. 그냥 편하게 수입해서 쓰시지요.”
이런 말을 들을수록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 샘솟았다. 1976년, 나는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부품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결단했다. 주변에선 “탄탄한 직장을 놔두고 왜 가시밭길로 가느냐”고 혀를 찼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목적이 단순히 먹고사는 데 그쳤다면 이런 결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7) 1년 반 매달린 끝에 순수 국산 부품 개발 성공했지만…
공장 열고 냉장고 자석 패킹에 첫 도전
일본 기술 맞먹는 완벽한 제품인데도
국산 부품 못 미더워 써주는 곳 없어
강국창(단상 위 오른쪽) 장로가 1981년 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새마을운동 전진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서울 청파동 굴다리는 아주 허름했다. 주위엔 판자촌이 즐비했다. 그곳에서 공장이 시작됐다. ‘성신하이텍’. 대충 간판을 세워놓고 공작기계 한 대만 마련한 상태로 일단 문을 열었다.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은 몽땅 공장을 짓는데 쏟아부은 터라 이제 막 꾸린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다행히 아내는 나의 사정과 꿈을 알고 이해했기에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주었다.
가장 먼저 도전한 분야는 냉장고 문이 닫히는 부분에 사용되는 자석 패킹이었다. 냉장고의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데 핵심 부품이었다. 우리 기술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자석 패킹은 재질도 중요하지만 압출(특정한 제품 모양을 연속적으로 만들어 내는 공정) 실력도 있어야 해.’ 열악한 상황 속에서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사장님, 이것 좀 보세요. 웬만큼 성능을 내는 것 같은데요.” “웬만한 성능으로는 안 되지. 자, 여길 보라고. 이게 일본에서 만든 자석 패킹인데 우리가 만든 거랑 뭐가 다른지 좀 봐봐.” 일본의 기술이 괜히 선진 기술이 아니었다. 그들의 섬세함과 디테일은 정말 배워야 할 점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반이 흘렀다. 노력은 배신을 하지 않았다. 수백 번 시도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자석 패킹 부품을 개발했다. 여기서 개발이란 냉장고에 장착되었을 때 본래 기능을 완벽하게 해내는 수준을 의미한다. “와! 해냈다, 해냈어. 거봐! 하면 되잖아.”
드디어 국내 기술로 만든 부품 1호가 탄생했다. 자석 패킹을 개발하던 일련의 과정과 결과는 우리에게 ‘하면 된다, 최선만 다하면 언젠가 결과가 뒤따른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보여준 선물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내 생각이 복잡해졌다. 물건이 있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팔아야 자금이 회전된다. 이제부터는 영업 싸움이었다. 시장이 돌아가는 판도는 우리에게 유리했다. TV 보급률이 치솟으면서 가정마다 텔레비전이 놓이자, 이제는 냉장고 수요가 늘어나고 있었다. 나는 본격 영업에 들어갔다.
“저… 부장님, 안녕하세요. 강국창입니다. 제가 부품 공장을 시작했습니다. 이 자석 패킹이 저희가 만든 국산 부품이거든요. 한번 써봐 주세요.” “알았어요. 일단 두고 가세요. 보고 연락 드릴게요.” 순수 국산 기술로 개발했다는 말에는 못 미더운 눈치가 역력했다.
연락을 준다는 사람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때 직장생활 시절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부품 담당자였던 나는 부품을 수입할 때마다 상공부에 부품 국산화 계획서를 제출했었다. 그 경험과 함께 이런 생각이 불쑥 파고들었다.
‘정부도 부품 국산화를 권장하고 있는데 왜 우린 이렇게 찬밥 신세일까. 국산품을 만들어 냈는데도 써주는 곳이 없다면 이건 국가에도 책임이 있다. 정부의 힘을 빌려보자.’ 나는 공장에서 만든 부품을 챙겨 들고 곧장 상공부로 달려갔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8) 국산품 보호법에 주문 폭주… 성공의 달콤함에 푹 빠져
국내 개발된 제품에 한해 수입 금지로
시장 판도 바뀌며 독과점 현상 벌어져
공장 3곳 직원 500명 기업으로 급성장
강국창 장로가 처음 국산 부품으로 개발한 냉장고용 자석패킹 부품. 작은 사진은 냉장고 성에를 방지하는 서리제거용 제상장치 부품.
상공부 담당 직원을 만났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부에서는 국산 제품을 만들라 하는데 저희 같은 회사에서 만든 국산 부품을 써주지 않는 기업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제품은 결코 성능에서 뒤처지지 않습니다. 충분히 경쟁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국산 부품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어 주십시오.”
상공부 직원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국산품 보호법이 만들어졌다. 골자는 국내에서 개발된 부품에 한해서는 수입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시장의 판도가 확 바뀌었다.
자석패킹은 국산품 보호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업체 제품만 사용해야 하는 독과점 현상이 벌어지면서 물량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서둘러 공장을 증설했다. 회사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대기업 담당자들이 들렀다. 하나같이 부품을 납품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수요가 몰려 공장을 제3공장까지 늘렸다.
우리는 또 다른 부품 개발에 들어갔다. 당시 냉장고의 가장 큰 문제는 성에가 낀다는 것이었다. 내외부 온도 차를 일정 범위 내로 유지해야 성에가 생기지 않는데 당시 우리나라엔 아직 그런 기술이 부족했다. ‘어떻게 하면 얼음을 제거할 수 있을까…그래, 히터!’
곧바로 개발팀과 함께 서리 제거용 제상장치 개발에 돌입했다. 결국 개발에 성공하면서 납품까지 이어졌다. 두어 명에서 시작한 회사가 공장 3곳과 직원 500여명을 둔 기업으로 커졌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중요했다. 어떻게 첫 단추를 끼우느냐에 따라 두 번째, 세 번째는 쉬워진다. 흘러가는 방향에 편승하기보다 한 걸음 빗겨나되 우리만의 기술력으로 흐름을 선도적으로 따라잡는 것이 주효했다.
직원 수백 명을 이끌고 공장을 이끌 때는 젊고 패기가 넘치는 40대 초반이었다. 경쟁 상대가 없는 시장을 개척하다 보니 자신감이 충만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우리 회사의 급성장을 경계하는 업체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그뿐만 아니라 산업스파이 활동도 막 시작되던 때라, 우리 회사에서 일하던 직원이 동종업계로 스카우트돼가기도 했다.
‘그래, 사람과 기술이 빠져나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보유한 핵심 기술과 정신만큼은 빼앗기지 말자.’ 이런 마음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그런데 회사 규모가 커지다 보니 경영이 필요해졌다. 조직을 운영하고 시스템을 만들고 자금을 운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 나 한 사람이 모든 걸 관리할 수 없다. 적절한 인력을 뽑아 활용하자.’ 필요한 인재들을 영입한 뒤 나는 최종 결정권만 행사하며 개발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새마을 운동이 전국에서 활발할 때 공공기관과 군부대에서 나에게 성공 사례 강의를 부탁했다. 거절하기 힘들 정도로 간청해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그러면서 나는 성공과 명예를 동시에 경험하는 달콤함에 푹 빠져들었다. 휘몰아치듯 다가오는 성공이라는 태풍에 사로잡혔다. 40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에 나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9) 고향 태백서 본격 선거 준비… 마음은 이미 국회의원
지역 인사들 권유로 덜컥 정당 가입
공천 보장 제안에 국회의원 출마 결심
열심히 선거운동 중 공천 탈락 ‘날벼락’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엿새 앞둔 1985년 2월 6일 서울 종로·중구 합동연설회에 몰린 인파들. 당시 민정당 공천을 받지 못한 강국창 장로는 국회의원의 꿈을 접어야 했다.
성공에 취해 있을 때 주변의 공격을 받는다. 나 역시 그랬다. 본의 아니게 여러 모임에 참여하면서 지역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이들과 친목을 갖게 됐다.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 집권기로 예비 사단의 사단장이 영내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단장을 중심으로 지역 인사들이 모임을 가졌는데, 젊은 기업인으로 사업체를 운영하는 나를 좋게 봤는지 저녁 모임에 자주 불러주곤 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기관장급이었기에 내심 인맥 관리에 성공했다는 우쭐함도 있었다.
“자네가 그렇게 사업을 잘하고 있다면서?” “아, 아닙니다. 그냥 열심히 할 뿐입니다.” “그래, 우리나라도 이런 패기 있는 젊은이들이 일해야 해. 자네, 정당 활동 좀 해보는 게 어때.”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민정당이 창당을 준비하고 있으니, 창단준비위원회에 들어오라는 권유였다. 순간, 대학 학우회장 시절 국회의원에게 협조를 구하러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맞아. 내가 정치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던 때가 있었지. 그렇다면 혹시 지금이 그 기회 아닐까.’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모든 상황을 나 중심으로 끼워 맞추고 있었다. 결국 나는 입당해 당적에 이름을 올린 뒤 막내 당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열심히 참여했다. 나를 이끌어준 분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수발을 들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를 당으로 이끌어준 분들이 또 한 번 깜짝 제안을 해왔다. 국회의원직을 권한 것이다. 나도 모르게 끌리기 시작했다. 아마 본심 어딘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지 않았을까. 번갯불에 콩 볶듯 그렇게 정계 진출이 가시화되었다.
나는 회사에 이 소식을 알리고 추후 대책을 논의했다. 다행히 회계나 재무관리 쪽에 살림을 맡아줄 인력은 있었기에 당장 회사 운영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이미 개발된 부품을 생산하는 시스템도 잘 돌아간다면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이미 나의 머릿속에는 선거가 꽉 들어차 있어서 회사에는 거의 통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향인 태백으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선거 준비에 들어갔다. 아직 공천을 받기 전이었지만 당시엔 여당 공천만 받으면 당선 확률이 아주 높았다. 또 다들 공천을 보장하고 있었기에 지역 주민들을 만나면서 안면을 터 나갔다.
“국창아, 너 서울 가더니 정말 성공했구나. 그 나이에 벌써 국회의원에 도전하겠다니 참 대단하다. 사업도 성공했다면서?” 고향 친구들은 나를 엄청 부러워했다. 선거운동원이 되어 도와주겠다며 애도 썼다.
아직 예비후보자였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니며 민심을 파악해 나갔다. 진짜 국회의원이 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 자만했던 것일까.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나를 선거에 나서게 도와준 분이 만나자고 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공천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어.” “네? 공천을 못 받았다고요? 왜요?” “윗선에서 그렇게 결정이 됐어.” 화가 치밀기도 했고 허무하기도 했다. 마음이 너무 상했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10) 달콤한 국회의원 꿈 깨어나 보니 쑥대밭 된 공장
아픔 경험한 정치에 마음 접고 회사 복귀
재정 담당 상무, 부정 수표 발행 뒤 ‘먹튀’
어음 막으려 애썼지만 결국 부도 못 막아
강국창(맨 뒷줄) 장로가 신혼 시절인 1973년 아내와 어머니, 남동생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했다.
“당신은 아직 나이도 젊잖아. 다음에 기회가 또 있을 거야. 다음번 공천권은 꼭 받도록 힘써주겠네.” “아닙니다. 됐습니다. 저는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더 이상 태백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그날로 짐을 싸서 상경해 집으로 돌아왔다. 마치 한낮의 꿈을 꾼 것 같았다. 도대체 무엇에 홀려 있었는지 스스로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과연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할 일이 이 일이었는가.’ 대답은 ‘아니오’였다.
괜한 꿈을 꾸었고 다른 사람이 심어준 허황한 꿈을 잡으려고 허비한 시간이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다. 패잔병이 된 건 같은 이 기분, 사실 정치계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었다. 잠깐 마음의 눈이 멀었던 것 같다. 어쨌든 국회의원을 향한 꿈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또 다른 재앙의 전주곡이었다.
“사장님, 상무님이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사라졌어요. 지금 회사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공장에 돌아왔을 때 기다리는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국회의원에 출마한답시고 회사를 비운 시점이었다. 재정 회계를 맡고 있던 상무가 있는 대로 수표를 발행한 뒤 사라졌다. 발행된 어음이 돌아오는 시기에 돈을 막지 않으면 부도가 날 상황이었다. 나는 그 길로 은행으로 뛰어갔다.
“은행장님, 부도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강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까지 발행된 어음을 막지 않으면 회사가 부도나게 생겼습니다. 아니 어쩌자고 그런 큰일을 다른 사람한테 맡기셨어요?”
순간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문제를 일으킨 상무는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형님이었고, 그 분야에 특화된 적임자였다. 무척 꼼꼼하고 철저한 사람이라고 신뢰했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게 불찰이었다.
“사장님, 은행 마감 시간이 오후 5시인데 그때까지 어음을 다 막지 못하면 큰일 납니다.” 은행 측에 마감 시간을 7시까지 미뤄 달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은행에서 회사의 최종 부도 처리를 지켜봐야 했다. 휴짓조각으로 바뀐 어음을 들고 아우성치는 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힘차게 돌아가던 공장의 기계들이 뚝 멈춰버린 장면도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눈 뜨고 코 베였다’는 것이 바로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루아침에 공장도, 사람도, 돈도 잃은 빈털터리 신세가 된 것이다. 힘없이 터덜터덜 집을 향해 가는데 저 멀리 가로등 밑에 웬 사복 입은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았다. 순간 ‘형사다’ 하는 직감에 몸을 숨겼다. 당시 부정수표 단속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수표를 발행한 회사의 대표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집을 지척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는 신세, 처참하고 비참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중견 기업의 대표로 국회의원이 될 생각에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건만, ‘아, 일장춘몽이 이런 것이구나’ 절감했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11) 하루하루 고통 속에 떠도는 삶 “아… 죽고 싶다”
도망자 신세로 떠돌다 친구네 얹혀살며
밤이면 전에 살던 집 배회하다 돌아와
삶 힘들 때면 가족들 생각하며 견뎌내
강국창 장로(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1980년대 초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집에서 아내와 두 자녀, 부모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는 회사 부도 후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당분간 집에 들어가는 일은 엄두도 나지 않고, 남에게 넘어가게 된 회사는 더더욱 갈 수 없었다. 그토록 많았던 주변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지만 찾아갈 만한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친구였다. 나의 모든 모습을 보았던 친구, 그 친구에게 만큼은 내 처지가 덜 부끄러울 것 같았다. 그 친구는 하루 아침에 처량한 신세가 된 나를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맞아주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라.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잖냐.” 고마웠다. 그 친구의 위로가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신세를 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었다.
밤이면 예전에 살던 집 근처를 배회하며 멀찌감치 서서 집만 바라보다가 걸음을 돌리곤 했다. 아내와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부터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솟구쳐 올랐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다.’ 마음 속으로 이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부도난 공장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고, 수백 명 되는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손때 묻은 기계들은 방치돼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마음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쓰라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철저하게 혼자가 되고 나니 오히려 내 자신이 더욱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곱씹고 또 곱씹었다. 문제는 세 가지로 압축됐다. 먼저 성공에 너무 취했다는 것이다. 이렇다 할 경쟁업체 없이 블루오션을 개척해 승승장구 하다 보니 성공에 너무 익숙해졌던 것 같다.
게다가 과욕을 부렸다. 불과 몇 년 만에 부품을 개발해 소위 ‘대박’을 터뜨리고 나니 우쭐해졌다. 공장 규모도 너무 크게 늘렸고, 인력도 방만하게 운영했다. 겉모습에 취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을 즐겼던 것 같다.
특히 사람을 너무 믿은 것이 최대 실수였다. 사람은 존귀하다. 하지만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에 믿음에도 절제가 필요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회사 부도에 결정적 요인이 인재 등용의 실패였던 탓에 이 부분은 훗날 회사 경영에도 영향을 끼쳤다.
살아보니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장 차이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살짝 뒤집히면 성공과 실패가 바뀌는데, 성공에 취하다 보면 감각이 둔해진다. 그래서 기업가는 성공과 실패에 너무 둔해서도 안되지만 너무 예민할 필요도 없다.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고의 방책이다.
‘아… 죽고 싶다. 내가 더 이상 뭘 할 수 있을까?’ 날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 부정수표 단속으로 도망자 신세가 되어 여기저기 떠도는 삶은 하루 하루가 고통이었다. 그때마다 가족과 형제들이 눈에 아른거려 죽음의 늪에서 나를 간신히 건져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대뜸 이런 제안을 했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12) “하나님은 어떤 분?”… 수많은 인파에 호기심 발동
예배당 꽉 채운 사회적 명망가들 보며
‘믿는 이유 있을 것’… 믿음에 도전 생겨
이 사람들 무작정 따라 해 보기로 결심
강국창 장로가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된 계기는 친구의 권유 덕분이었다. 사진은 1980년대 초 여의도순복음교회 전경.
“국창아, 나랑 교회나 한번 가보자.” “교회? 거긴 뭐하러 가. 그런 데는 어디 나사 하나 빠진 사람들이나 가는데 아니냐?”
“그런 건 아니고…. 나도 그렇게 교회 열심히 나가지는 않지만 한번 나가봐라. 더 이상 갈 데도 없잖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같이 가보자.”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을 가 있는 그 친구는 당시 사업을 하고 있어서 가깝게 지냈는데,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친구 아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친구를 전도했고, 친구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다녀주고’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내게 교회에 가보자고 이끌었으니, 주님의 부르심이 그 친구를 통해 왔던 것 같다.
“국창아. 네가 종교에 비판적인 거 알고 있어. 우리 같은 공대생은 눈에 보이는 현상만 중요하게 생각하잖아. 나도 알아. 그래도 기적이라는 것도 있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병도 고치고 그런다더라. 밑져야 본전이니 가보자고.”
그렇게 나는 교회라는 곳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살던 곳이 바로 여의도 옆 원효로에 있는 산호아파트, 그러니까 전 세계에서 단일 교회로 가장 크다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근처가 거주지였다. 당시 그 교회가 얼마나 폭발적으로 부흥하고 있는지는 나도 익히 알고 있었다.
“와.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왔냐?” “정말 대단하지? 하나님 믿으러 온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
처음엔 나사 하나쯤 빠진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는데, 막상 예배당에 들어가보니 예상을 뒤엎는 광경이 펼쳐졌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그때는 직업별로 예배 드리는 자리가 구분되어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표지판에는 법조인석, 외교관석, 의료인석 등의 글자가 적혀 있었고, 그 곳에는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저 사람들은 여기에 왜 오는 걸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기에 저렇게 높은 사람들도 와서 얘배를 드리는 걸까.’ 그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과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게 과연 과학적으로 논리에 맞는 걸까’ 등등 온갖 궁금증이 쏟아졌다.
그러면서 교회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호기심이 더 생겼다. 이상했다. 어찌보면 나보다 더 높은 사람들, 사회적 명망을 얻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그 후로도 교회에서 예배라는 것을 드리고 더듬거리며 기도라는 것을 했다. 모든 게 증명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본성을 자제하고, 믿음의 사람들을 따라 해보자고 마음 먹은 뒤였다.
다행히 아내도 나보다 먼저 전도를 받아 교회를 다니고 있었던 터라 어느새 우리 가족은 자연스럽게 신앙을 갖게 되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누가 기도원을 가보자고 했다. 그때는 강퍅했던 마음이 좀 꺾인 상태라, 어딘지도 모르는 기도원에 간다는 말에 순종하며 버스에 올랐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13) “하나님 저에게 기회를 주세요” 울며불며 매달려
성도들의 절박한 기도 모습에 자극받고
찬양과 기도를 통한 성령의 임재 경험
기도굴서 온전히 주님 만나는 시간 가져
1980년대 중반 오산리최자실금식기도원 대성전을 찾은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하고 있는 모습.
기도원을 또 다른 교회 쯤으로 생각하고 가게 된 곳은 바로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오산리최자실금식기도원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기도원으로, 1980년대 초반 한국교회 부흥의 교두보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여긴 하루 종일 물만 먹고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곳이에요. 예배드리는 홀에서 생활하시면 될 겁니다.”
성경에 보면 금식기도라는 것이 나온다. 예수님도 금식기도를 하셨고 성경 속 여러 인물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금식기도를 드렸다. 인간의 본성 중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식욕을 억제하는 고난을 감내하며 기도 드릴 때 하나님은 그 간절함을 크게 보신다. 그래서 간절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기도원을 찾곤 한다. 나 역시 간절함으로 치자면 못할 일이 없었으니 기도할 이유가 충분했다.
금식기도가 시작됐다. 처음 하루는 견딜 만했다. 하루 다섯 번씩 드리는 기도원 예배와 기도 시간에 맞춰 생활하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기도원에 와서 며칠씩 기도하는 이들의 절박한 모습에 자극을 받기도 했다. 병자가 고침을 받기도 하고, 현실 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성경의 임재가 찬양으로, 기도로, 다양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기도원내 기도굴로 불리는 개인 기도실.
그러면서 가슴 한구석에 기도에 대한 도전이 생겼다. 그래서 아주 작은 기도 공간인 기도굴에 들어갔다. 기도굴은 한마디로 토굴 같은 공간으로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 앉을 수 있는 너비에 출입문 외에는 사방에는 막혀 있었다. 벽에 달린 십자가만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게끔 만들어졌다.
나는 온전히 하나님과 만나는 그 곳으로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다. 화려한 기도도 할 줄 몰랐고,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기도도 할 줄 몰랐다. 다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기회를 달라고 외쳤다.
“하나님,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저에게 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기회를 주십시오.”
이때까지 그렇게 목청껏 외쳐본 일이 있었을까. 사업을 하면서도 그렇게 간절했던 때가 없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부르짖었던 때는 없었다. 아마 이런 나를 볼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과 나만이 만나는 시간이었기에 하나도 거리낄 게 없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나는 신앙인의 길로 다가서고 있었다.
얼마나 울고불고 기도했는지 모른다. 이미 며칠 째 금식 중이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는데도 정말이지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도와달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그 간절한 기도를 통해 내 마음을 비워내도록 하셨다.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배신을 곱씹으며 사람을 원망했던 것, 화려한 성공을 그리워했던 것, 사람에 기대어 요행을 바랐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셨고, 회개하도록 이끄셨다.
그리고 얼마 뒤였다. 마치 청량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마음이 시원해지더니 기쁨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특별히 환경이 변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만으로 그렇게 든든하고 행복할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14) “강 사장님, 재기하는 데 도움 드리고 싶습니다”
부도 전 일본 기업과 계약한 납품 수수료
회사 망하며 계약도 허공에 날아갔지만
기업끼리의 약속 끝까지 의리로 지켜줘
강국창 장로가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특강에서 실패를 통해 얻은 교훈을 청중들과 나누고 있다.
‘그래. 다시 나가서 해봐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미세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이런 경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하는 든든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기도원에서 집에 돌아온 나는 달라졌다. 다시금 사업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동시에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하는데도 열심이었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영적으로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변화된 나를 보며 놀라워했다.
성령을 받으면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기에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나 역시 함께 살고 있던, 아니 내가 얹혀 살던 부모님을 교회로 모시고 나갔고 그 뒤로 차차 형제들까지 전도하게 됐다.
부도가 난 뒤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가로 들어갔다. 부모님 형편도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나 고꾸라진 아들을 안타까워하시며 나의 가족을 거두어주셨다. 내가 전도할 때도 순순히 내 말을 믿어주셨다. 아들이 믿는 예수를 자신들이 믿어야 아들도 잘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본에서 편지가 한통 왔다. ‘일본? 일본 도시바? 도시바에서 내게 왜 연락을 했을까?’ 발신인은 도시바에서 근무하는 아리마라는 사람이었다. 순간 무릎을 탁 쳤다. 도시바의 해외영업 담당자인 아리마는 수년 전 우리와 기술제휴를 하면서 우리가 한국 업체를 소개해줬고, 도시바 부품이 삼성 엘지 대우 같은 대기업에 공급됐다. 당시 도시바 측과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강 사장님, 어쨌든 사장님 덕에 우리 부품을 한국 업체에 납품하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커미션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강 사장님이 부품 개발에 성공하면 당연히 강 사장님 회사 제품이 납품되겠지만 그전까지는 저희 측에서 (업체) 소개비를 지불하겠습니다.”
그렇게 계약을 한지 1년도 안된 시점에 회사가 망한 것이다. 하루 아침에 회사가 풍비박산이 났으니 그들과의 계약도 허공으로 날아간 셈이었다. 나 역시 그 계약 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지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했던 약속을 끝까지 지키길 원했다. 아마 사업이 망했다는 소식에 더욱 나를 돕고 싶어했던 것 같다.
‘강 사장님, 저희는 조금이나마 사장님이 재기하는데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것은 국가 차원의 민족 감정이 아닌, 기업인 대 기업인으로서 느껴지는 의리요, 따뜻한 마음이었다. 매월 통장에 잔고가 쌓이기 시작하자 나는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을 먼저 지킬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 약속은 사업 재기가 아닌 하나님의 몸 된 성전인 교회를 먼저 짓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부모님을 전도하면서 집에서 가까운 작은 교회로 옮겼다. 직분도 얻고 교회 건축에 소망을 품고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빈털터리였던 나의 서원기도에 예비된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재정으로 부어주셨고, 성전을 건립하게 하셨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15) 신앙으로 용기와 패기 충전하고 ‘제2 창업’ 도전
친구의 도움으로 공장 다시 열었지만
업계 환경 변해 판로 개척 어려워져
절체절명 순간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
깨닫고 용기 얻어
강국창(앞줄 가운데) 장로가 1988년 5월 인천공장 준공식 때 참석자들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이제 정말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믿음이 생겼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로 하여금 큰 돈을 만지게 됨으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자그만 능력에 의지하여 자만하지 않게 하소서. 오로지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토록 인도하소서.” 이 기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업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니 모든 환경이 여의치 않았다. 도시바의 의리 덕분에 어느 정도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사업을 하기엔 필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기계와 공장이 필요했다. ‘그래, 다시 해보자. 하나님도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잖아.’ 의지가 생기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공장을 차릴 자금이었다. 작은 하꼬방(판잣집)이라도 빌려야 기계를 돌릴 수 있는데, 자금이 마땅치 않았다. 돈 얘기만 꺼내면 인색해지는 것이 친구 사이이기에 친구들에게는 말도 못하고 있던 차, 어느 날 한 친구와 만나게 됐다. 그는 정신을 차린 나를 보며 반가워했다. 내친 김에 나는 사업을 다시 해보려 한다는 말을 전하며 어렵게 돈 얘기를 꺼냈다.
“얼마나 필요하니?” “아무리 작은 공장이라도 임대료가 상당하더라고.” “강 사장, 지금 내가 가진 돈은 700만원이다. 이거면 되겠냐?” “되고 말고. 정말 고맙다. 내가 정말 이 은혜는….” 목이 메어 더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사람이 가장 어려울 때 돕는 것이 가장 힘들다. 성경은 바로 그 어려울 때 먼저 도울 것을 말씀하신다. 친구는 그런 행함 있는 믿음을 보여주었고, 나는 고마움을 잊지 못해 친구 이름인 신동춘의 ‘동’과 내 이름 국창의 ‘국’을 한자씩 따서 ‘동국전자’라는 회사명을 짓고 공장을 다시 열었다.
1983년 동국전자 공장을 가동하게 되었을 때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라는 절박함이 있었다. 또 내가 믿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신다는 절실한 믿음도 있었다. 업계 환경은 2년 전과 180도 바뀌어 있었다. 국내 최초 국산부품 생산업체였다는 타이틀은 그 어디에서도 통하지 않았다.
일단 판로 개척을 위해 사람들과 부딪혀가면서 전자제품 생산 업체를 찾아다녔다. 죽기살기로 버텨나가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자 귀한 인연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재기하는 나에게 박수를 쳐주며 돕는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아, 이게 하나님의 도우심이구나’ 또렷하게 느꼈다.
동국전자. 지금의 동국성신이란 기업이 있게 된 베이스다. 제 2의 창업을 하면서 나는 용기와 패기를 장착했다. 실패했을 때 일어설 용기, 앞으로 전진할 패기만 갖춘다면 기회는 또 다시 찾아온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아도 세상은 의외로 용기와 패기로 도전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준다. 그러니 용기와 패기만 잃지 않으면 된다. 나는 그 힘을 신앙을 통해 충전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역에 들어가 용기와 패기를 구했으면 좋겠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16) 꿈에도 그리던 공장 짓고 원가 절감에 승부 걸어
하나님께 모든 것 맡기는 비전 품은 후
우연히 예전에 거래하던 은행 직원 만나
건축 재정 지원받고 지상 5층 공장 건설
강국창 장로가 2016년 3월 한 경제 채널의 ‘CEO자서전’ 코너에 출연한 장면.
동국전자를 시작한 1980년대 초반, 한국 경제는 올림픽을 앞두고 한창 산업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반걸음 뒤로 물러서서 업계를 조망했다. 잘되는 기업은 왜 잘되는지, 부품 개발 업체가 보유한 기술은 무엇인지 등을 들여다봤다. 자세히 살펴보니 원천기술은 비슷한데 아직 개발이 활발한 상태는 아니었다. 다들 생산에만 주력하고 있었다.
‘우리는 후발 주자다. 후발 주자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가격이다. 그래, 어떻게 해서든지 원가를 줄여 마진을 남겨야 한다.’ 이미 치고 나가는 업체들이 많아진 상태에서 살아남는 길은 우리만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 뿐이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동국전자를 시작할 때의 비전은 소박했다. 예전의 영광을 회복할 수는 없으니 그때의 10%만 달성하자는 마음이었다. 이런 마음으로 새출발했을 때 또 한번 고마운 인연과 연결되는 일이 생겼다. 하루는 인천 공장을 가는 길에 서울 신림동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강 사장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둘러보니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낯이 익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가리봉동에서 공장을 할 때 우리 회사가 거래하던 은행의 대리였다. 당시 나는 은행 지점장과 직접 만나 거래를 했기 때문에 대리였던 그와는 인사만 하고 지내는 정도였는데, 나를 알아봐주니 고맙고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날 만남으로 동국전자의 공장이 세워지는 역사적인 일이 벌어졌다. 어느덧 은행 지점장이 된 그는 어떻게 해서든 일어서 보려고 하는 젊은 기업인을 돕고 싶어했다. 그는 땅만 확보하면 공장 건축 재정을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 여기며 부지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산 중턱에 부지가 났다는 말을 들었다.
가보니 공장을 지을 만한 300여평의 부지가 있었다. 여기에 꿈에도 그리던 공장을 지었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공장 건물이 우뚝 서게 됐다. 정말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마음이 벅차 준공예배 때 목이 메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본격적인 사업이 이어지면서 원가절감의 노력은 이어졌다. 우리가 차별화할 수 있는 길은 품질은 높이고 원가를 줄이는 길 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나의 집은 공장 한구석이었다. 한쪽 귀퉁이에 의자 몇 개를 붙여놓고 모포 한장 덮고 자면 그곳이 방이었다. 자세가 불편해 뒤척이다 잠이 깨면 다시 잠들기가 힘들어 다시 기계 앞으로 가서 연구를 이어가곤 했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며 공장에서 지내던 어느 날 드디어 첫번째 열매를 맺었다. “사장님 됐어요. 제품 생산원가가 5% 줄었어요. 오히려 품질은 더 나아진것 같아요. 5%면 얼마나 큰 금액입니까. 1년에 주문받는 생산량의 5%면…와!”
우리 제품을 사용하겠다는 거래처가 늘어갔다. 소리없는 총성이 오가는 기업 현장에서 경쟁사들의 견제도 심했다. 하지만 어차피 실력으로 승부하는 만큼 누가 더 혼을 쏟아 부으며 일하느냐에 달린 문제였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17) 조직관리 패러다임 바꾸며… ‘정직하고 공평한’ 경영 고수
제품 자동화와 신기술 개발 투자로
주문량만 신속하게 생산해 재고 없애
재창업 후 10여 년 만에 상위권 진입
강국창(앞줄 가운데) 장로가 2002년 10월 중국 웨이하이에서 열린 원창전자 유한공사 설립 준공식에서 참석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동국전자라는 기업을 경영하면서 패러다임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동국전자가 업계 상위권에 진입하기까지는 재창업 후 10여년의 시간이 걸렸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행이 원천기술이 있었던 터라 제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90년대 호황기를 지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 회사는 부품 다양화를 비롯해 기술력이 뒷받침된 제품을 선보였다. 냉장고 뿐만 아니라 세탁기, 정수기, 비데 등 다양한 가전제품의 부품을 생산하면서 특허개발과 실용신안 등 재산권도 늘어났다. 시장점유율도 부품에 따라 50~70%를 유지하게 됐다.
물론 그렇다고 자만할 틈은 없었다.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 장 차이임을 경험한 터라 사업이 잘된다고 교만하거나 사업이 안된다고 낙담하는 일에서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전략경영이란 패러다임이 떠올랐다. 과거 경영을 잘 몰라 어려움을 겪었던 때를 떠올리며 조직 관리와 경영에 대한 고민을 이어갔다.
우리 회사의 특징은 적은 인원이 모여 비교적 집중적인 분야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장점을 강화하려면 신속성이 최우선되어야 했다. 그러면서 패러다임에 세가지 변화를 주었다. 첫째 ‘저스트 인 타임’, 즉 주문량만큼 자재를 구입하고 먼저 만들어 놓지 않는다. 둘째는 ‘무창고주의’다. 주문과 동시에 생산하고 그 양만큼 생산하는 시스템이다. 셋째 ‘자동화와 신기술 개발 투자’다.
처음엔 내부에서 우려의 시선이 있었다. ’너무 촉박하게 일하는 것 아니냐’부터 ‘물건 쌓아 놓는 게 당연한데 왜 우리만 그렇게 하느냐’같은 의견이 나왔다. 나는 거래처와 직원들에게 설명하고 토론하고 설득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변화의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고, 이런 변화를 바탕으로 선순환 구조가 이어지자 회사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해외시장 개척에도 자신감을 갖게 됐다. 1983년 동국전자 창업 이후 90년대 국내 공장 네 곳을 짓고 2000년대 들어서는 해외 네 곳에 공장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이같은 패러다임은 유효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언젠가 또 다시 패러다임의 변화를 줘야 할 시기도 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든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동국전자 창립 40주년을 앞두고 있다. 현재 머물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거쳐간 사람들도 동국전자에서 일했던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곤 한다. 회사가 정직했고 공평했기 때문이란다.
‘과연 나는 공평하게 회사를 경영했나?’ 그런 이야기가 들려올 때면 곰곰히 지난 날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기도로 하나님께 묻기도 한다. 한창 어렵게 공장을 열었을 때 몇 명 되지 않는 직원들을 모아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월급은 많이 못줄지언정 제때 줄 것이고, 여자라고 남자라고 업무에 차별도 두지 않겠습니다. 도전하고 싶을 때 도전할 수 있도록 귀를 열겠습니다. 또 그에 따른 결과는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같은 경영 철학은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18) ‘은칠노삼’ 경영 철학… 늘 기도로 지혜를 구하다
하나님 믿고 난 후 성공의 기준 달라져
인생 만사 주님의 뜻 아래 있음을 인정
강국창(왼쪽) 장로가 2012년 11월 제주 스프링데일 골프장의 ‘한국 10대 뉴코스’ 선정 기념패를 받고 있다.
작은 기업이지만 수십 년간 경영일선에 있으면서 ‘경영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때마다 자신있게 꺼내는 얘기가 있다. 세상에선 흔히 ‘운칠기삼’이라고 해서 운이 70%, 노력이 30%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표현을 조금 달리한다. ‘은칠노삼’이다. 사람의 노력이 30%, 하나님의 은혜가 70%라는 뜻이다.
인생을 살면서 만난 행운을 꼽으라고 하면 첫째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간의 성공 기준은 완전히 바뀌었다. 기업이 곧 돈이라는 생각으로 뛰었을 땐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라고 보고 성공을 쫓았다면, 하나님을 알게 된 뒤엔 인생 만사가 하나님의 뜻 아래 있음을 인정하게 됐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부요함도 뒤따라왔다.
둘째는 한번 크게 실패한 것이다. 실패 가운데 하나님을 만났고, 그때 만난 하나님 덕분에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힘에 의지하며 기업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다시 일어설 때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사업체를 이끌어가면서 수많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나는 모든 일을 기도하며 결정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응답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 응답을 받을 준비를 하게 하시고, 그 사람으로 최선을 다하게 하셔서 준비된 그릇이 되었을 때 응답해 주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눅 12:25) 결과가 궁금하고 불안해질 때마다 이 성경구절은 큰 위안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 그저 주어진 일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된다.
은칠노삼의 경영 철학으로 또 한가지 변화가 생겼다. 기업경영은 인맥으로 움직일 때가 많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하고 지혜를 구하며 그분의 뜻에 맡기다 보니 사람에 의지할 일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인맥을 끊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탁을 해야 한다거나 부탁을 넘어 청탁을 할 일이 없어져서 인맥이 정직하고 깨끗해졌다. 사람을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께 의지할 때 하늘로부터 임하는 도우심이 분명히 있다.
부품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올랐을 때 나는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렸다. 2000년 제주도에 광어 양식장을 지어 수산업에 뛰어들었고, 2011년에는 역시 제주도에 ‘스프링데일 골프&리조트’를 여는 등 사업을 다각화했다. 특히 골프장 건설은 내게 있어 일생일대 도전이었다. 그간 해왔던 본업과 방향성이 맞지 않았지만 가진 것을 나눈다는 마음에서 접근했고, 사익보다는 공익 차원에서 바라보는 가운데 지혜가 임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19) ‘하나님 은혜’ 선명히 경험한 삶… ‘하나님 영광’ 최우선
사업 재기할 때 서원한 기도 응답받으며
월례 정기예배 회사 전통으로 이어가고
사랑·계명 충실히 지키는 나눔의 삶 살아
강국창(왼쪽) 장로가 2016년 2월 한국 CBMC 정기총회에서 아내인 최근미 권사, 가정문화원 이사장인 두상달 장로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주변에서 나를 보고 이제 그만하고 쉬라는 말을 자주 한다. 팔순이 될 때까지 전국으로, 해외로 뛰어다니고 있으니 그에 대한 위로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듣고 생각해보면 지금껏 기업을 경영한 목적이 나를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분주한 시간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먹는 삼시세끼 식사도 제때 먹지 못할 때가 많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평범한 이들보다 훨씬 적다. 그러니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기업을 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뛰어다니다 보니 하루 24시간이 너무 짧다. 한 시간만 더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일에 매몰돼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처음 동국전자를 다시 시작할 마음을 먹었을 때 하나님 앞에 서원했다. 당장 공장을 시작할 돈도 없었는데 그저 은혜에 감격해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 아시다시피 제가 가진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게 돈이 생기면 교회 짓는 일을 제일 먼저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회사, 그 다음에 집을 지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항상 이런 식의 기도를 드렸다. 가난한 자의 신음에 응답하시고 간절한 자의 부름에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다. 지난 40년 내내 거의 이런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 은혜를 생생하게 경험했기에 나는 기업가로서 삶의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게 됐다. 그 우선순위란 첫째 기업의 이익을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 연구개발을 위한 투자 순으로 진행했다.
둘째 예배 우선이다. 월 한 차례 진행되는 예배는 우리 회사 고유의 전통이다. 변화무쌍한 회사 스케줄과 겹치면 그땐 예배가 먼저다. 그 원칙을 고수한 덕분에 우리 기업의 월례 정기예배는 빠짐없이 드려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눔이다.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율법을 축소해 놓은 것이 십계명인데, 그 십계명도 예수님은 두 가지로 축약하셨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마 22:37~39)
우리 회사는 나눔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북한 어린이에게 분유를 보내기도 하고, 저 멀리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초등학교에 우물을 파서 기증하기도 했다. 어렵고 힘든 이들을 찾아 후원도 한다. 신기하게도 이런 나눔 활동을 하면 할수록 힘이 나고 더 나누고 싶어진다. 나눔이란 게 결국은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더 큰 선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26)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축복은 천대, 즉 영원토록 이어지는 축복이다. 물론 이 말씀 앞에 붙은 사랑과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사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축복의 말씀 앞에 우리 가정과 기업이 온전히 드려지길 오늘도 기도한다.
***[역경의 열매] 강국창 (20·끝) ‘흙수저’로 시작한 인생, 본향 꿈꾸는 ‘은혜의 금수저’로
주를 믿으며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면
불안하거나 욕심·탐욕 부릴 일 없어
의심·번민하지 말고 주님께 의지해야
강국창(왼쪽 네번째) 장로가 지난 6월 25일 열린 팔순축하 행사에서 가족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25일, 가족들이 마련해준 나의 산수연(팔순축하행사)은 특별한 행사였다. 가족과 친지,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인구감소대책 국민운동본부’(가칭) 발족을 위한 기금 전달식을 가졌다. 다소 의아해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나서야만 했던 이유가 있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해 이렇게 건강하게 팔순을 맞이했다. 사랑하는 가족도 있고, 아직까지 사업도 하고 있다. 감사한 마음이 너무 커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저출산 문제였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거스르는 문화 속에서 ‘출산 애국운동을 해야겠구나’ 결심했다.
방식은 교회를 중심으로 종교계가 중심이 되는 출산장려운동이 확산되면 좋을 것 같다. 정부와 지자체는 국내입양 운동을 전개하고 육아비와 출산장려금 지원 정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힘이 닿는 한 이 운동을 널리 전파하고 싶다.
가화만사성.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 중 하나다. 바쁘게 살다보면 가족끼리 북적거리며 만날 기회가 굉장히 줄어든다. 노력하지 않으면 소원해진다. 가족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나눠야 한다.
4년 전쯤 새해를 앞두고 가족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어느덧 우리 가족은 아버지 형제를 기준으로 모두 모이면 100명이 훨씬 넘는다. 숫자가 많아 다같이 만나기 힘들어 정기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모든 가족이 흔쾌히 응해줬고, 2018년 1월 1일 100여명이 함께 모여 신년하례 행사를 처음 가졌다.
가정은 공동체의 기본이다. 사회는 그 공동체들이 모여 조성되고 나아가 세계를 구성한다. 나의 본모습을 잘 알고 있으면서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수도, 때로는 따끔한 충언을 해줄 수 있는 곳이 가정이다. 출산과 더불어 건강한 가정이 더 많아지길 소망하는 이유다.
저마다 고향은 이 땅에서 태어난 곳이겠지만 믿는 자들에게 본향은 하늘나라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나그네 같은 삶을 살다가 다시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하나님을 믿기 전 나는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회심한 뒤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생겼다. 본향을 꿈꾸며 살다 보니 그다지 욕심을 부릴 것도, 탐욕을 부릴 일도 없다. 뭔가 잘 안돼도 ‘이번엔 잘 안되는 게 뜻이었나 보다’ 일이 잘 풀리면 ‘정말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식의 마인드 컨트롤이 되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3:5)
요즘 많은 이들이 불안해한다. 지금 가는 길이 맞는 길인지 의심하고, 번민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늘에 소망을 둔 자는 걱정할 것이 없다. ‘은혜의 금수저’로 바뀌는 길이 여기에 있다. 그동안 부족한 사람의 글을 읽어준 독자 분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