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 양선례
글쓰기는 꽤 오래된 취미다. 밤새워 책을 읽는 문학소녀였지만 긴 호흡의 글을 완성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 겨우 일기나 끄적이는 수준이었지만 대학 때 학보사 기자를 했다는 이유로 교직에 나와서는 학교 신문이나 문집 만드는 업무를 맡았다. 지금 같은 인터넷 시절이 아니었기에 학교 홍보 목적의 종이신문이나 잡지를 어느 학교나 만들었다. 원고를 청탁하여 작품을 모으고, 출판사를 다니면서 여러 차례 교정을 봐서 한 편의 문집을 만드는 활동은 재미있었다. 교무, 연구, 정보, 생활, 체육, 과학 등 교사가 가르치는 일 외에 해야 하는 수많은 업무 중에 나는 일찌감치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간간이 교장 선생님이 읽어야 할 졸업 축사나, 정년퇴직하는 선생님을 보내는 송사, 혹은 학교 문집에 넣을 머리말 등을 쓰기도 했다.
교직에 들어온 지 9년이 되던 해, 아이들 독서 지도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동료 교사의 권유로 문인협회에 가입했다. 일기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글을 써 본 적이 없는데도 작품 심사의 과정도 없이 그냥 이름만 올렸따. 얼떨결에 회원이 되어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썼다. 수필의 형식을 띄기는 했지만 지금 보면 낯 뜨겁다. 수필이라기보다 산문이나 일기 수준의 잡문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서 근무하고 있는 지역의 단체이다 보니 글에 나를 얼마나 드러낼 것인지가 늘 고민이었다. 좋은 일, 기쁜 일만 기록하고 슬프고 속상한 일, 엄마 아빠가 부부싸움 한 일 등 그날 있었던 정말 중요한 일은 기록하지 않는 아이의 일기와 비슷했다.
피천득의 『인연』에 보면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의 나는 순진하게도 글을 못 쓰는 이유를 나이에서 찾았다. 별다른 노력 없이 그저 나이가 들면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이 더 넓어지고 깊어져서 글도 저절로 잘 쓰게 될 거라고 믿었다. 연말이 되어 작품집을 묶게 되면 수필 2편을 내지 못하여 끙끙 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해에는 내 작품이 없는 작품집을 받은 적도 있었다.
문인협회도 하나의 단체여서 일 년이면 추진하는 행사가 꽤 된다. 작가를 초청하기도 하고, 시민의 날이나 매화축제 기념 백일장이나 시화전을 추진하기도 한다. 이름만 걸어 놓고 활동은 열심히 하지 않는 부실 회원으로 산 지 20년이 넘었다. 출발점은 비슷했으나 활발한 동인 활동으로 개인 작품집을 낸 사람도 여럿이다. 그동안 내 글도 꽤 길어졌다. 굳이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어디까지 써야 하나 고민도 줄었다. 부끄러운 과거도 내 이력이라고 생각하는 여유가 생겼다. 그런 내가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기에.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마음 내키는 대로 쓰게 되었지만 등단은 욕심조차 내지 않았다. 내가 쓰고 싶을 때 쓰면 되는 것이지 남에게 보여 주려는 간판이 왜 필요한가 생각했다. 등단이 목표가 아니라 '좋은 글'을 쓰는 게 목표였다.
여름방학에 ‘콕콕 짚어 주는 글쓰기 실습 연수’가 목포 전남교육연구정보원에서 열린다는 공문을 보았다. 제대로 된 글을 배울 수만 있다면 조금 멀어도 대수랴. 오전 근무를 마치고 목포로 내달렸다. 오후 2시부터 열리는 강의에 참석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첫 번째 여름방학에는 5일 중 4일을 참석했다. 과제로 해 오라는 숙제는 이미 써둔 글로 대체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꼬집고 비트는데 어디에서도 배워본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반복되는 낱말이나 문장이 많다. 주어와 서술어가 호응이 안 된다. 비문이다. 날카로운 창에 찔리고, 독설에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배울 점이 많았다. 교단에 선 이후 대놓고 공개적으로 야단을 맞아본 적은 거의 없기에 더 아프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교사의 글이라고 하기에는 수준이 너무 떨어지는 다른 수강생의 글에서 내가 얼굴이 화끈거릴 때도 있었다.
작년 이맘때의 나는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따느라고 바빴다. 기초학력을 공부하다 보니 중도입국하는 느린 학습자를 만나는 일도 있어서 따기로 했는데 그 과정이 만만치가 않았다. 원격강의로 14학점을 이수하고, 마지막 1학점은 나주 동신대학교에서 매주 토요일마다 네시간씩 수업을 실습해야 했다. 순천에서 나주까지 왕복 세시간씩 운전하는 일도 힘들었다. 함께 공부하는 동료가 없었더라면 중도에 포기했을 것이다. 어려웠던 만큼 보람이 컸다.
글쓰기가 비대면 원격으로 열린다는 문자를 받고 한국어를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에게 권유했다. 예상과는 달리 6명이 흔쾌히 등록했다. 등록뿐인가. 매주 한 편의 글을 올리는 일에도 꽤 성실하게 참여했다. 간혹 전화로 물으면 글쓰기 반에 들어오기를 잘했고, 권유해 줘서 고맙다는 말도 했다. 40쪽 가까이 되는 글을 일일이 읽고 첨삭하는 일은 보통의 열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우리는 너무나 잘 알았으니까.
속 깊은 정담을 나눠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지인도 글로 만나니 새로운 사람 같았다. 일 년에 두 편 써내기도 힘들어하던 내가 이 수업으로 열두 편의 글을 모았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다. 닥쳐야 일을 하는 게으른 버릇은 어쩌지 못해서 막차를 타기 일쑤였으나, 한 주도 빼먹지 않고 글을 쓴 스스로가 대견하다. 기쁠 때는 물론이고 슬플 때도 시간이 지나면 글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앞으로도 글을 향한 내 짝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마음 맞는 동료들과 함께 한 비대면 글쓰기 수업이 코로나19가 준 유일한 선물이 되었다.
2020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공모교장이 되어 6주간의 교장 연수를 받았다. 적어도 10년은 더 내 곁에 머무르리라고 믿었던 부모님이 지난여름 차례로 돌아가셨다. 내가 속한 단체가 도서관협회에서 공모한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사람들을 인터뷰한 내용의 기사를 40쪽 넘게 썼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쓰고, 글쓰기 수업을 듣느라고 일주일이 바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엄마를 잃은 슬픔에 오래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잊은 듯 살다가도 작은 기억이 엄마 생각으로 이어져 울음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어서 올해가 좀 지나갔으면 좋겠다. 내게는 오래오래 아픈 해로 기억될 2020년이 이렇게 저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