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할 약속 / 박선애
시작은 2학년 담임 선생님이 조회를 마치고, 케이크와 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나온 5월 어느 날부터였다. 그날이 선생님 생신이라는 것을 알고 이천 원씩 걷어서 깜짝 파티를 해 줬다는 것이다. 애들 수준에 맞게 작은 인형과 과자 몇 봉지가 담겨 있는 선물 상자를 보니 귀여웠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더구나 2학년이 한 일이라니 기특하고 대견하기까지 했다. 수업 시간에 고마움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정성을 칭찬하던 끝에 내년에는 내가 담임할 테니 내 생일도 꼭 챙겨주라고 농담했다. 애들도 장난으로 받아들일 거로 알고 한번 웃자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반응이 의외였다. 좋은지 싫은지 내색은 안 하고 마치 결정된 일 받아들이듯 했다. 그동안 내 이야기에 귀기울였다면 내가 이 학교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고 조금만 관심 있게 봤으면 선생님들이 몇 년 지나면 학교를 옮겨야 한다는 것도 알 만한데 그것조차 관심이 없는 듯했다.
이 2학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참 유별난 아이들이다. 이들을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자면 천방지축, 중구난방,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 잘난 척의 끝판왕, 생각하지 않고 되는 대로 말하기 등이다. 천방지축인 그들을 보며 여느 해 애들처럼 중학교 생활에 서툴러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애들은 조금 특별했다. 담임 선생님이 하나하나 꼼꼼하게 짚어주고 끊임없이 지도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별로 나아지지 않은 채 2학년이 되었다.
초등학교에서는 최고 학년으로서 제법 어른 노릇 했을 텐데 중학교 신입생이 되면 대부분 어리바리하다. 쉬는 시간마다 와서 “아무개가 욕해요, 때려요, 기분 나쁘게 쳐다봐요. 지나가다가 내 물건 떨어뜨리고 사과도 안 해요. 지우개가 없어졌어요. 준비물 안 가져왔는데 어떡해요?” 등 끝도 없이 묻고 이르느라 교무실이 한동안 1학년 차지가 되어 어수선하다. 그러다가 점점 적응하고 교실에서 해결하고 서로 조정해 가는데, 이 아이들은 달랐다. 일 년 내내 울고 이르고, 선생님 앞에 와서도 서로 자기가 잘했다고 싸워 대니, 담임 선생님이 재판관 노릇까지 하느라 끝까지 시달렸다.
수업 시간에도 볼 만하다. 질문하면 생각하다 기회가 남에게 넘어갈세라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해 버린다. 여기저기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너무나 창의적인 대답으로 수업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기 일쑤다. 되는 대로 주워섬기다 맞추기라도 하면 세훈이는 거의 월드컵 경기에서 골이라도 넣은 것처럼 몸짓을 크게 하며 잘난 척을 한다. 준석이는 “역시 나야.” 또는 “이 정도는 껌이죠.” 등의 말로 되지도 않는 실력 자랑을 한다. 자기들 세계에서는 공부를 제일 잘한다고 믿어 범접하지 못할 실력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현우조차도 “동생은 대리고 가고, 생물체는 새포 분열을 하며, 중학생이 돼고, 탄산음료는 않 먹는다.”라고 쓰고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요란한 빈 수레인지 알 만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남이 틀리게 답하거나 잘못을 지적받으면 우르르 달려들어 한마디씩 야유하며 끌어내리는 걸 즐긴다.
거기에 여학생 세 명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주로 화장하고 사복을 입고, 아침이면 만나서 오느라 함께 지각하는 등 규칙을 잘 지키지 않았다. 2학년이 되자 이 애들의 기세가 더 세졌다. 선생님이 지도하면 잘못을 깨닫고 고치기는커녕 심지어 대들기까지 한다. 물론 모든 애들이 이런 건 아니다. 뛰어나지는 않아도 조용히 자기 일을 잘하는 착실한 학생이 훨씬 많지만, 미꾸라지 몇 마리가 눈에 더 잘 띄고 기억에 남게 마련이다. 두 해 연속 그 반 담임 선생님들이 가장 고생하는 걸 옆에서 보면 누구라도 선뜻 내년 담임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올해로 이 학교 근무가 마지막이라 맘 놓고 농담 한번 한 것인데 애들이 순진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그대로 믿으니 재미있어 계속하게 되었다. 거기에 1학년 때 담임이었던 김 선생님이 가끔 쐐기를 박아 놓으니 애들이 의심 없이 믿는 것 같다.
수업하다가도 내년에 우리 반이라고 생각하니 훨씬 사랑스럽다는 둥, 내년에 무엇을 해 보자는 둥, 내년 담임 선생님 수업이니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냐는 둥 걸핏하면 ‘내년 우리 반’을 들먹이게 된다. 애들을 구슬리는 데 효과가 있다. 애들은 이제는 아예 내년 담임으로 인정하고 3학년이 수학여행을 갈 무렵에는 우리는 언제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능청스럽게 현재 3학년은 2학기에 가니까 마이스터고 원서 쓰고 면접 보는 시기와 겹쳐서 곤란한 것 같으니 우리는 꽃 피고 따뜻한 데다 해까지 긴 4월에 가자고 하니 좋다고 한다. 부산으로 가자느니, 서울이 좋다느니, 제주도로 가고 싶다느니 하는 의견에는 다음에 진지하게 의논하자고 하며 슬쩍 넘겼다. 선배들이 수학여행 가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멋진 기념품을 받은 것을 보고, 자기들도 그렇게 해 주라고 한다. 얼마 전 1학년 학급 여행을 부러워하며 내년에도 가자고 조른다. 그러겠다고 하는데 찔렸다.
내년 반장도 정해서 알렸다. 아이들이 선출하므로 내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찬욱이는 체구가 작지만 날렵하고 운동을 좋아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데다 산만한 편이라 수업 중에도 주위 친구들에게 말이나 장난을 건다. 주의를 줘도 그치지 못해 수업을 방해한다. 워낙 말을 거르지 않고 하는 데다 행동이 가벼우니 애들에게 인정받지는 못한다. 1학년 때는 친구들과 갈등이 생기거나 선생님들께 야단을 맞고 억울하다고 느끼면 흰자만 나오게 눈을 치뜨고 째려보고 울면서 달려들었는데 지금은 하지 않는 걸 보면 많이 컸다. 어느 날 담당 구역인 탈의실을 청소하는 찬욱이를 보았다. 손으로 바닥에 물을 뿌리고 마른 밀걸레로 깨끗이 닦고 있었다. 대부분 싫어하는 일을 이렇게 진지하게 하니 찬욱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청소를 참 잘한다고 칭찬했다. 다음에는 유리창을 기구까지 써서 말끔하게 해 놓았다. 우리 학교에서 제일 깨끗한 유리창을 만들었다고 살짝 호들갑을 떨며 치켜세웠다. 청소를 성실하게 하는 걸로 보아 찬욱이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 내년에 반장 하자고 했다. 처음에는 본인도 다른 친구들도 긴가민가하더니 몇 번 더 반복하자 믿는 눈치다. 그 후로 찬욱이는 수업 중에 딴짓하거나 복도에서 장난치다가도 “쓰읍, 내년 반장이”까지만 해도 즉시 차렷 자세를 취한다. 한번은 수업이 한 부분 끝났는데 새로 시작하기에는 어중간한 시간이 남았다. 갑자기 찬욱이가 나서서 “내년 반장 권한으로 수업을 여기까지만 하고 끝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라고 의젓하게 말한다. 너무 웃겨서 흔쾌히 그러자고 하며 내년 반장 체면을 세워 줬다. 그때 앞에 앉은 듬직하고 착실한 봄이가 특유의 느린 말투로 “선생님, 부반장은 제가 할게요.”라고 한다. 당황스럽다. 이제 장난을 멈춰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장난이라고 하지만 거짓말을 계속하다 보니 진짜처럼 느껴진다. 내가 담임인 듯 아이들과 관계가 더 끈끈해진 것 같다. 같은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들께 내년에 3학년 담임도 하고, 시키는 것 다 할 테니, 누가 힘써서 나 좀 잡아 주라고 농담처럼 하는 말은 진심이다. 내년에 내가 담임이 아니라고 해서 아이들이 실망하거나 아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담임으로 애들이 환호할 만한 사람은 못 된다. 우선 나이가 너무 많다. 아이들은 젊은 선생님을 좋아한다. 가끔 서운하지만 이것이 순리인 것을 어쩔 것인가. 나도 다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또 나는 유연하지가 못하다. 나이 들면서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본성이 고지식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빡빡하게 군다. 그러니 담임이 아니라고 하면 오히려 안도할지도 모른다. 다만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해 놓은 것이 걸린다. 아직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순수하고 착한 아이들에게 2월 종업식 전날쯤에 사탕이라도 하나씩 주면서 사과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