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차오를 때 / 정선례
달은 원래 둥근 모양의 보름달이 원형이다. 이 보름달이 주기적으로 모습이 바뀐다. 달이 지구를 한 달 주기로 공전함에 따라 태양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다. 억겁의 세월을 한결같이 지구 둘레에서 기울고 다시 차오르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의 순서를 밟으며 한 달 동안 차근차근 변화한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낳아 성장하는 과정과 닮아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어리고 자그만 초승달이다. 나이를 불리어 점점 성장해 가면서 몸집이 붙는다. 차근차근 키와 체중이 늘면서 상현달의 청소년이 된다. 그리고 다시 보름달의 장년이 되어 인생의 절정기를 맞는다. 그 후 달이 쇠퇴기를 맞는 것처럼 인생도 노쇠기로 접어든다. 하현달, 그믐달이라는 노년기를 맞아 차츰 일그러져 가다가 지상에서 소멸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흡사한 달의 순환은 늘 정서적 융합을 낳는다. 끊임없는 반복 순환 속에서 바늘과 실처럼 친분을 맺고 서로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는 것이다. 우주와 자연, 인간이 하나가 되는 공간이 커다란 보름달이 뜨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억이 아슴아슴하다. 어머니의 배가 달처럼 불룩 차오른 어느 날이었다. 나는 작은 방 장롱 사이로 들어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숨을 죽였다. 해산하는 날은 달빛이 가득했다. 옛 빨래터 우물에도 보름달이 차오르고, 장독대 넘실넘실 채워진 물 항아리에도 휘영청 떴을 것이다. 산파 역의 할머니는 나직한 음성으로 아버지에게 아궁이 가득 불을 때서 끓여놓은 물을 방으로 가져오라 일렀다. ‘응애’ 드디어 귀가 빠져 남동생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립에 짚을 왼쪽으로 꼬아 만든 기다란 새끼줄에 고추와 숯을 매달았다. 삼칠일이 지날 때까지 사람들이 함부로 선을 넘지 말라는 표시로 금줄을 친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시집 간지 이태 만에 나도 배가 보름달로 차올랐다. 해산하러 가방을 챙겨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사전에 경험 많은 전문의와 의료 장비, 평소 출산 관련 심호흡이나 운동, 진행 과정을 책에서 충분히 익혔다. 겁은 났지만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그리고 큰 무리 없이 출산했다. 그 옛날 대도시 외에는 집에서 해산하는 시절이 있었다. 임부들은 해산하러 방으로 들어갈 때 ‘다시 저 신발을 신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댓돌에 신발을 벗어 놓았다고 한다. 옛 산모의 공포가 어떠하였을까? 좋은 시절에 태어난 나는 감히 짐작도 못 하겠다.
광활한 우주 태양계에서 달은 지구에서 가장 가깝다. 태양이 스스로 빛을 내며 밝게 빛나는 데 반해 달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어 태양 빛을 반사해 밝아 보이도록 한다. 태양계에서 달은 지구 주위를 도는 유일한 위성이다. 태양의 각도에 의해 달이 차고 기울어 바다에까지 영향을 미쳐 밀물과 썰물이 생긴다.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는 절기나 자연변화는 음력으로 한다. 초승달과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의 순서를 밟으며 한 달 동안 차근차근 변화한다. 억겁의 세월을 한결같이 지구 둘레에서 기울고 다시 차오르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모두가 잠든 밤, 초승달이 어느새 보름달로 골투 고갯마루 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세월을 거슬러 그 옛날 어머니는 낮에는 일하고 초저녁부터 밤이 깊도록 총각무를 다듬었다. 밤늦게 화장실에 가려고 밖으로 나오면 어머니는 그때까지도 하고 계셨다. 철이 없었던 나는 바쁜 어머니를 거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아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히는 달님만 줄곧 바라보기에 바빴다. 수고하시는 어머니의 손놀림만 곁눈질하는 정도였다. 밤이 이슥토록 어머니는 혼자서 달빛 차오른 마루에 다소곳이 앉아 총각무를 다듬고 계셨다. 무를 다듬을 땐 껍질이 있어야 영양가도 풍부하고 아삭아삭 씹는 식감도 좋다고 말씀하셨다. 억센 겉잎과 잔뿌리만 떼어내고, 속잎을 물에 헹궈 깨끗이 따로 큰 그릇에 담아두셨다.
뒷날 밤새 다듬은 총각무를 싱겁게 절여 물기가 잘 빠지도록 커다란 소쿠리를 비스듬히 세웠다. 양념을 준비하는 어머니 곁에서 들기름으로 길들어진 까만 무쇠솥 밥 뜸 들이는 부뚜막에 앉아 밥 냄새에 침을 삼키곤 했다. 어머니는 멸치젓과 새우젓을 넉넉히 넣고 꽁보리밥, 마늘, 고춧가루, 생강, 참깨 양념을 넣고 버무렸다. 알타리무 김치를 차곡차곡 눌러가며 항아리 가득 채우시고 겨우 허리를 편다. 양념 묻은 항아리 둘레를 새하얀 행주로 닦아내며 흡족하게 바라보는 어머니 얼굴에 달의 미소가 한가득 번졌다. 그 김치는 일 년 내내 밥상에 올라왔다. 알타리무 김치가 보여야 나와 여동생이 떼를 쓰지 않고 밥숟가락을 들기 때문이었다. 알싸한 맛, 상큼한 맛, 입안에서 신선한 맛을 일으키는 간이 배인 총각무김치는 늘 최고의 입맛을 돋우는 반찬으로 기억된다. 어머니의 손맛이요, 달빛 아래서 어머니의 정성과 우주의 기운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특별한 맛이다. 우리는 지금도 알타리무 김치를 매양 좋아한다. 하다못해 비싼 뷔페에서도 이 김치가 눈에 띄면 덥석 한가득 담아오는 걸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반찬임이 틀림없다. 성품이 차분하고 온유한 어머니는 어찌 보면 달의 이미지와 흡사하다.
어느덧 나는 그 시절 어머니 나이보다 더 들어 머리에 흰 서리가 내렸다. 총각무를 밭에 한가득 심어 한나절 내내 다듬어서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항아리 가득 담아 익힌다. 어머니와 동생에게 보내기 위해서다.
“얘야, 입맛이 없어 도통 밥이 안 들어갔는데 네 덕분에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웠다.”
고맙다는 어머니의 전화다.
“언니 냉면 그릇에 가득 담아와서 다 먹고 시원한 국물에 밥 비벼 먹었어. 오늘 거래처 사람들과 언쟁해서 힘들었는데 이제 살 것 같아. 고마워.”
바쁜 동생이 퇴근해서 보내온 문자다. 어머니의 손맛을 전해 받아 나 또한 힘든 줄 모르고 김치를 담그곤 한다. 맛있게 먹어주는 이들이 있어 김치처럼 내 마음도 익어가는 기분이다. 밤하늘에 변함없이 눈부시게 차올라 흐르는 달을 홀로 깨어 바라보며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가만히 꺼내 읊조린다.“당신의 딸이라서 정말 좋아요. 다음 세상이 있어 다시 태어난다면 제 딸로 와주세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달은 우리 지구별과 가까운 친근하다. 어머니처럼 지구별을 안정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달이다. 끊임없이 지구를 대신해서 소행성과 충돌하며 지구를 보호하는 달은 자녀의 방패막이가 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만약 달이 사라진다면 소행성 충돌의 방어막이 사라져서 소행성과 지구가 충돌할 가능성이 커져 매우 위험해진다. 간조와 만조인 밀물 썰물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지구의 생명체들에게도 생태계의 교란을 일으켜 많은 삶의 장애를 입힐 것이 틀림없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른다. 초승달로 태어난 어머니가 저 하늘에 일출과 함께 사라지는 그믐달로 떠 있다. 모든 것을 품고 물들이는 만월로 하늘가 그 자리에 떠서 내 창에 살포시 다가와 물끄러미 비춰주실 것이다. 그런 밤,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참 좋겠다. 달은 어머니처럼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행성이다. 달이 뜬 밤 하늘을 올려다보노라면 달빛이 신비롭다. 마음이 자못 두근거려지는 걸 느낀다. 달이 차오르면 나는 또 나만의 생각에 잠기며 그 옛날 달빛 아래 김치를 담그시던 그런 나의 어머니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사색이 부럽습니다.
어머니에게 김치를 담가 보내실 수 있다니 좋군요.
엄마가 생각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어머니가 알타리 김치 담그시는 부분에서 입에 침이 고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김치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선생님이 담근 김치 덕분에 어머니와 동생이 행복하셨겠네요.
정 선생님 글 읽으며 과학 공부 다시 했습니다.
글쓰기 공모전 내려고 쓰신 글 같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우주, 자연, 인간, 달.
정선례 선생님의 생각은 어디까지 뻗어나가는 걸까요?
달이 차오르는 걸 임신에 빗댄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선생님, 참 멋있으세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