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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31일(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마태복음 8:1-13
컨택트 사랑, 언택트 믿음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이번 주 목요일, 모 일간지에 「백년을 살아보니」의 저자,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분이 최근에 지방 출장차 김포공항에 갔던 일을 소개했습니다.
예약자들에게 발권 표를 다 나눠 줬는데, 자기에게만 표를 주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이분이 여행사 매니저를 황급히 불러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매니저가 당황해하면서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시느냐?”고 묻더랍니다. 알고 보니 컴퓨터상에 김 교수님의 나이가 한살로 떴다고 합니다. 1920년생인 김 교수님이 올 해 나이가 만으로 101세입니다. 컴퓨터가 두 자리 숫자만 읽게끔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김 교수님이 지금까지 대한항공 비행기만 930번 이상을 탔는데, 직원이 보니 한 살짜리가 930번 비행기를 탄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더랍니다. 그래서 김 교수님이 올해부터는 자신을 한 살이라고 생각하고 인생을 새롭게 살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기자가 김 교수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100년을 살아보니 가장 행복했던 나이가 언제이셨습니까?” 그러자 김 교수님이 60세부터가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30년간 공부하고, 30년간은 직장생활을 한 후, 60세 이후부터는 죽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살아보니 60세부터가 가장 전성기를 구가했다고 합니다. 그 때 김 교수님은 집필도 가장 왕성하게 했고, 강연도 가장 많이 다녔고, 사람들도 가장 많이 만났다고 합니다. 그 비결은 건강관리와 더불어, 60세 은퇴 이후로 자신의 정신세계가 쇠퇴하지 않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책을 읽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인터뷰에서 아무리 행복해지고 싶어도 행복해지기 힘든 사람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데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크게 보면 두 부류인데, 첫째는 정신적인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가치가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나 권력, 명예를 좇는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돈과 권력, 명예욕은 기본적으로 소유욕이고, 그것은 가지면 가질수록 더 목이 마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은 만족을 압니다. 그래서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두 번째는 이기주의자입니다. 그들은 자신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절대로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인격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선한 가치이자, 행복을 담은 그릇입니다. 그래서 인격의 크기가 행복의 크기입니다. 그러나 이기주의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선한 가치인 인격을 못가지게 됩니다. 이기주의자는 인격의 그릇이 작기 때문에 거기에 담을 수 있는 행복도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출처: https://mnews.joins.com/article/23981265#home
여러분은 정신적 가치를 모르는 사람과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자는 행복해 질 수 없다는 노(老)철학자의 행복 론에 공감하실 수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두 사람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후에,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2절)”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놀랍게도 나병환자의 나병이 즉시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제사장에게 보내어 깨끗해진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가 온전한 몸으로 회복되었음을 입증하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지만, 중요한 교훈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병에 걸리면 제의적으로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져, 진영 밖으로 쫓겨나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레위기 13장에서, 일단 나병환자로 확인이 된 사람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또 그는 병 있는 날 동안 늘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규례는 공동체 전체의 성결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안전조치 역할을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사회에서 격리되어 지내야 했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심한 고립감을 느껴야만 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온 나병환자는 육체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치유에 대한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은 이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른 사람은 그 다음에 소개된 백부장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치유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백부장은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로마의 장교였으니, 사회적인 신분이 꽤 높은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5절).”
이 백부장은 자신의 문제로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하인의 문제로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당시 하인은 사람들로부터 인격적인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 백부장의 사랑과 인격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주여, 저는 주를 제 집 안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우리말성경).”
여기서, “그저”(개역개정에서는 ‘다만’)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모노스’입니다. 이 단어는 ‘단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 ‘단 하나’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한 말씀이면 됩니다.”라는 믿음이 백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단 하나’의 말씀 이외에 또 다른 그 어떤 것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옛날 엘리사 앞에 나아왔던 아람의 장수 나아만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당시 아람 왕의 군대장관으로서,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그는 당대에 큰 용사로 이름을 떨쳤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나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스라엘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그의 나병을 고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권세 있는 모습으로 엘리사의 집에 찾아갔습니다만, 엘리사는 고작 종을 보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는 말을 전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이 때 나아만 장군이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왕하 5:11-12).”
여러분은 나아만 장군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아만 장군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텐데, 나아만 장군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만 장군은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세에 합당하게 엘리사로부터 환대받기를 원했습니다. 적어도 엘리사가 정중하게 자신을 대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자신의 상처 부위에 올리고,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종을 보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엘리사 선지자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나아만은 옆에 있던 부하들의 간청에 못 이겨,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치유를 경험하기 원한다면, 우리도 자신의 생각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단 하나’의 말씀이면 충분합니다.”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 예수님 앞에 나왔던 나병환자와 백부장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치유와 응답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둘 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치유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소외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서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사람이었고, 백부장은 로마의 군인으로서 유대인들이 적대시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백부장의 하인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건이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사 43:5)”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으로 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인 유대인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 3:8-9).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드리던 형식적인 제사와 금식과 십일조는 자기 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와 백부장을 다르게 대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의 몸에 대시며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지 않으시고, 단지 말씀만 하셔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부정케 되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실 때에도 그녀의 손을 만지심으로 열병을 고쳐주셨습니다(마 8:15). 또한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이 이미 죽은 것을 알고도,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그녀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마 9:25). 또한 예수님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가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질 때에도 그 행동을 미리 막지 않으시고 용납해 주셨습니다(마 9:20). 나병환자, 혈루증 환자, 죽은 시체는 율법조항에 의하면, 모두 부정한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만지는 사람도 함께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모르실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하게 여겨졌던 모든 사람들, 심지어 시체까지 직접 손으로 만져주심으로 그들의 병을 치유해 주셨고, 죽은 자를 살려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부정을 이기시는 생명과 사랑의 주님이신 것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규례로는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하고, 병든 것을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회복시키심으로,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에게는 예수님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에게는 ‘단 하나’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의 말씀, ‘단 하나’로 하인의 질병이 치유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다음과 같이 반응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절).”
다른 사람의 믿음을 시기하거나, 무시하는 대신, 그의 믿음을 놀랍게 여겨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믿음을 칭찬해 주는 방식이 얼마나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기도응답을 받고 기뻐하며 간증할 때, 우리의 냉소적인 말 한 마디가 그의 믿음의 불씨를 꺼뜨릴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새가족이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할 때, 자신도 모르게 냉소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아마 기쁨이 충만했던 새 가족에게는 큰 상처가 될지도 모릅니다.
함께 기뻐해주고, 그의 믿음을 인정해 주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믿음을 칭찬해 줄 수 있다면, 이것처럼 덕스럽고, 격려가 되는 일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에 대해 그런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자에게는 자신이 부정케 되는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그의 몸에 손을 대 주셨고, 이미 굳건한 믿음으로 서 있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정해 주심으로 그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지도록 배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에는 방식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사랑의 방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각 사람을 다양하게 다루시는 사랑의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을 대해야 한다면 다음의 간증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번 달 「활천」지에 하늘소망교회 김성환 목사님의 감사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감사일기 중에 작년 12월 성탄절에 세례를 받은 한 성도님의 간증이 소개되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분은 일주일에 두 번씩 신장투석을 하며, 매일 한 움큼씩 약을 먹으면서도 “목사님, 주일이 기다려져요”라며 은혜를 사모하는 분입니다. 이분의 간증은 이렇습니다.
저는 김화숙 성도입니다. 교회 나온 지 열 번이 채 되지 않은 막 쪄낸 찐빵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싫어했습니다. 비방도 많이 했고, 하나님의 말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을 스스로 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만하고 교만했습니다.
그러던 중 몸이 아파서 포천의료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연약한 저를 위해 포천의료원 정미숙 전도사님이 많이 기도해 주었고, 김희연 집사님도 많이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저는 커다란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딸 김화숙이 되었습니다. 감격의 눈물이 흘렀고, 무엇인지 모르는 전율에 온몸이 떨렸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하나님께 연약한 저를 붙잡아 달라고 애원하고 매달리려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결단합니다. 또한 목사님과 함께하는 제자훈련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주님의 일에 더 헌신하려고 합니다. 저를 위해 더 기도해 주세요.
-출처: 김성환, “나의 감사 일주일: 한해를 돌아보니 감사, 새해의 소원을 담아 감사”, 「활천」(서울: 활천사, 2021년 2월호), p. 63.
여러분은 김화숙 성도님의 세례 간증을 들으시고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이제 막 쪄낸 찐빵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간증이 아니겠습니까? 이분이 육신의 고난 중에 주님을 새롭게 만나도록 중간에 기도로, 격려로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 계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의 환부에 손을 대주시는 사랑과 헌신이 이런 분들에게는 더욱 절실히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굳건한 믿음 가운데 서 계신 분이라면 또 다른 방식의 사랑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 교회로 향하는 교회 승합차 안에서 우리교회 최 권사님께서 다음과 같은 간증을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최 권사님이 지난 몇 달째 입맛을 잃고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최 권사님 말씀이 언젠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목사님, 제가 입맛을 잃고 보니까, 이 세상에는 딱 한 가지의 맛만 느껴졌습니다. 제가 무엇을 먹어도 그것은 맛없는 맛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최 권사님은 매끼니 식사를 성인 숟가락으로 두 숟가락 정도 밖에 못 드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우리교회 강 권사님이 최 권사님을 위해 호박죽을 만들어 오셨습니다. 최 권사님이 호박죽을 드시면서, 호박죽이 사랑으로 느껴졌다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최 권사님이 호박죽을 드시고 나서 입맛이 되살아나, 드디어 밥이 밥맛으로 느껴지고, 김치가 김치 맛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답니다. 최 권사님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교회로 향하는 승합차 안에서 강 권사님의 손을 꼭 쥐면서 ‘고맙다’는 인사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누군가 사랑으로 죽을 써서 섬기면, 그 죽이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화목하게 만드는 불씨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인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백부장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서 언택트(Untact)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대면, 접촉이라는 뜻의 단어가 영어로는 컨택트(Contact)입니다. 그러나 비대면, 비접촉이라는 뜻의 단어인 언컨택트(Un+contact)를 줄여서, 사람들은 언택트(Untact)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즘같은 비대면, 비접촉(언택트)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백부장과 같은 믿음입니다. 비록 우리가 서로 대면하여 만나지 못하지만, 이 때 우리가 서로를 더욱 믿어주고, 기대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초두(初頭)에 말씀드렸던 김형석 명예교수의 이야기처럼, 정신적인 가치를 모르는 사람과 이기주의자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육신의 질병에 매여 있고, 제의적인 부정에 매여 있고, 사회적인 편견에 매여 있어도,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그 마음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서, 여러분의 사랑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또 여러분 주변에서, 여러분이 믿어주고, 칭찬해 주어야 할 사람은 또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의 방식으로 그들을 섬기고,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사진은 최근 눈이 많이 오던 날, 저의 세 딸들이 집 근처에서 만든 눈토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