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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 이승만 행적
이번 편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승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해방전후사는 싫던 좋던 이승만을 중심으로 돌아 갑니다.
그래서 '버치보고서'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이승만을 대략이나마 정리해놓고 시작하려 합니다.
해방 전 이승만 행적을 이 한 편으로 정리하려다 보니 상당히 깁니다.
불평소리가 벌써 들립니다. ^^
제가 해방전후사 시리즈를 쓰면서 예상한대로 댓글에 여러 반대 의견들도 달렸습니다.
반대의견을 논리적으로 쓰신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견강부회하는 내용으로 자기 감정만 쏟아 냅니다.
제가 지금까지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사회활동 정치활동도 상당히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많은 글을 쓰고 sns에 올렸습니다.
그런 활동을 하면서 만난 부류 중 가장 골치아프고 위험한 상대들이 있었습니다.
설익은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고 강한 확신에 빠져 완전 자기 신념화한 부류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제가 또 그런다고 합니다. ㅎㅎ
그런데 이념문제에서 이런 부류들은 좌우에 다 있습니다.
이들은 극좌 극우로 나뉘어 자기들 신념화된 생각만이 무조건 옳다고 여깁니다.
이들은 모든 문제를 단편적인 면만 보며 흑백논리로만 생각합니다.
이들이 이미 분단되어 있는 우리나라를 또 다른 갈등과 분열로 빠지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에는 한 나라 권력을 잡고있는 정권차원에서도 그러 합니다.
지금도 그런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오늘 주제인 이승만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 영화
'건국전쟁'이 상당한 흥행돌풍을 일으키며 커다란 논란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나서 초대 대통령이 됩니다.
그래서 일부에서 우리나라 건국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지도자로 평가합니다.
이처럼 이승만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과극으로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제가 이승만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에 기록과 다른 전문가들 연구한 기록을 토대로 살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객관적으로 한다고는 했지만, 이승만이 한 행위들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본다해도
이승만이 잘못한 것이 훨씬 많기에 이승만을 추앙하는 쪽에서는 제 글을 좌쪽으로 편향된 글로 볼 것입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는 기록에 의해 객관적으로 살펴 보았다는 것을 분명 밝혀 드립니다.
오늘 편에서는 이승만 생애에 대해 해방 전까지 살아온 행적을 우선적으로 대략 정리하겠습니다.
이후 해방직후 이승만 행적은 해방전후사 시리즈와 함께 정리해 나가겠습니다.
이승만은 1875년 양녕대군 후손(이승만 본인 주장)으로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1877년 서울로 이사해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과거를 준비했으나
이승만이 19세였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 되어 과거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과거제도 폐지는 이승만에게 신학문을 접하는 계기를 준다.
이승만이 막 스무살이 되던 해인 1895년 4월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기독교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 한다.
1896년 5월부터는 미국에서 온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매주 목요일에 특강을 했다.
이승만은 미국 생활에 대한 서재필 강의에 크게 감명 받는다.
이승만은 1897년 7월 8일,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한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 (1897~1910) '협성회보'와 '독립신문' 주필로 활동한다.
또한 이승만은 이 시기에 '교육계몽운동' 일환으로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왕정폐지와 공화국수립을 도모 했다는 반역죄목으로 사형까지 선고 받았고
5년 7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899년~1904년)
이승만은 수감시절 동안에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리고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당시 청년이승만은 서재필을 통해 미국 민주주의를 받아 들이고 조금은 혁명적인 생각을 가졌었다.
이승만은 1904년 러일전쟁 중에 사면된다.
그리고 을사조약 부당함을 국제법으로 주장하려는 민영환 밀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활동한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조선주권회복을 위한 청원외교를 전개한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 한다. 그래도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학업을 계속 한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거주하며,
5년에 걸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승만은 이처럼 미국수재들도 하기 힘든 세계 최고학벌을 만들어 낸다.
이때까지 이승만은 우리가 본 받을 점이 많다.
그 뒤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귀국하여 교육계몽운동등을 하다
일제탄압을 피해 하와이로 건너 가 한인학원과 한인학교등을 운영한다.
이때부터 이승만이 가는 곳마다 갈등과 분열이 시작된다.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민족지도자들 사이 의견이 갈라 섰을 때
그는 국내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려는 '외교독립론' 을 주장한다.
위에서 보다시피 임시정부 수립 전까지 이승만이 독립운동은 나름 했지만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오를 정도로 크게 한 것이라고는 별로 없다.
당시 이승만이 가진 장점이라고는, 조선인으로서 보기드문 엘리트 중 엘리트로서
미국 명문대를 나온 정치학 박사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승만 장점이 상해임시정부가 출범하고 이승만을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큰 이유가 된다.
아마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조선독립을 영국, 미국등 외국에 알리기 위해서는
서구에서도 알아주는 이승만 같은 미국 명문대 박사출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임시정부가 여러 갈등을 겪다가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1921년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상해임시정부가 대통령제가 아닌 내각제 국무총리였을 당시에도
이승만은 미국에서 자기 스스로 대통령을 칭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런 이승만 행각에 안창호가 화가 나서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가 아래와 같다.
["구미위원부 이승만 각하!
초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직명 이 없으므로, 각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지금은 각하가 집정관 총재직명을 가지고 정부를 대표하실 것이요,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사를 하시면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려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ㅡ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ㅡ
그런 이승만이 임시정부가 1921년 대통령제로 바뀌면서 진짜 초대 대통령으로 정식 추대를 받는다.
이승만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통령직을 수락하지만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는 오지 않는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측에서 빨리 오라는 재촉에도 가지 않다가
대통령으로 추대받은 지 6개월이 지난 1921년 12월에서야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하여 상해에 도착한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상해에 약 6개월 간 머물렀다.
이때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상해 머무는 기간 전부였다.
대통령제 시작부터 정부 내에 대통령이 없는 정부가 된 것이었다.
이승만이 상해에 늦게사 오니까 국무총리 이동휘가 첫번째 국무회의에서 이런 요청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 당신이 안 계실 때는 우리가 임시정부를 잘 운영해야 되고,
대통령 부재시 통치는 원할하게 해야 되니까 대통령 대리인이라는 것을 설치하자."
그러나 이승만은 이동휘 제안을 인정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을 한다.
그러면서 이 두 사람 갈등이 더 심각해진다.
대통령이 당연히 정부가 있는 곳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싫고
또 임시로 대행할 대통령직을 맡기기도 싫다는 이승만 당시 심뽀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이승만이 대통령직에 있었던 거는 5년 6개월이다.
그런데 그 중에 상하이에 단 6개월만 있었다.
이게 이승만 탄핵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요즈음 클린스만이라는 축구 국가대표 감독도 이런 비슷한 이유가 경질되는데
제일 큰 역할을 했는데 초대 대통령이란 자가 그랬으니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의 분노스런 속을 알만하다.
게다가 이승만은 상해에 도착하자 마자 당시 국무총리 이동휘와 심한 갈등을 빚는다.
이승만은 먼저 독립운동에 대한 방향 설정부터 갈등을 일으켰다.
이동휘는 독립운동은 '무장투쟁' 으로 해야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이에 이승만은 무장투쟁보다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다.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이승만이 오기 전에 임시정부는 이미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의 해”로 선포하고
'무장투쟁'을 주노선으로 선택했다.
그런데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와 가지고 "그건 아니다" 하면서 "
우리의 성공은 결국 무력에 있지만 무력의 승리는 준비에 있다."
(1921년 이승만 임시 대통령 교서 중 ) 고 주장했다.
여기까지 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또 이런 말도 한다.
"독립군은 민병대와 같은데 지금 정 무장을 하고 싶으면
개인들이 무기를 사서 훈련을 할 때다."
(1921년 이승만 임시대통령 교서中).
이게 말인가 막걸리인가?
일제강점기 치하에 있던 개인들이 무기를 사서 훈련을 해야 된다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이승만은 지금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 임시정부 돈은 안 주겠으니 무장하고 싶으면 개인들이 알아서 하라는 얘기였다.
즉 이승만은 무장투쟁론에서 대해 '난 반대다' 라고 얘기하는 것을
그 주특기인 외교적 언어로 돌려서 말한 것이다.
이러한 독립운동 노선 갈등은 이승만과 이동휘 사이 심각한 재정 갈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서 받아 들인 돈을 본인이 재정을 관활하면서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에다 돈을 내놓지 않았다.
당시 임시정부 재정은 거의 구미위원부에서 충당하고 있었다.
이러니 임시정부가 잘 돌아 갈 수가 없었다.
이동휘도 자금 문제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소련이 혁명에 성공한 이후에 사회주의 혁명을 돕기위해 재정을 지원하기로 했다.
레닌은 2백만 루블을 주기로 약속한대로 1차로 60만루블을 조선 사회주의자 들에게 주었다.
오늘 날 화폐가치로 약 510억원이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이 거액을 이동휘가 임시정부에 내놓지않게 되면서 굉장한 논란이 일어난다.
이런 와중에 임시정부 경찰 경무부에 의해서 그 돈을 쥐고있던 김립이 살해되는 사건까지 일어 났다.
(임시정부경무부는이 자금을 관활하고 있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였던 김립을 처단했다.
당시 경무부장은 김구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도 김립이 이 돈을 독립자금으로 쓰지않고
개인적으로 유흥과 집을 사는등 횡령했다는 명목으로 처단했다고 썼다.
그러나 김립이 이 돈을 개인적으로 횡령했다는 증거는 아직까지도 발견하지 못 하고 있다.
이후 러시아는 이 사건을 핑계로 약속한 140만루블도 주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보면 김립 암살사건이 없었다면 러사아로 부터 엄청난 자금을 받아들여
독립운동에는 큰 도움이 되었을 거라 주장한다.
하지만 그 돈이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들에게만 흘러 들어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득세하여 한반도가 사회주의화 될 수도 있었다며
김구가 처단해 다행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강력한 무장투쟁론자인 이동휘는 무장투쟁을 반대하며 구미위원회 자금을 틀어막고
임정에 지원 안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임시정부에 내 놓기 싫은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이처럼 당시는 서로가 임시정부를 신뢰하지 못했다.
특히 대통령자리에 있는 이승만이 임시정부를 못 믿고 이 갈등 한 축을 차지했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처럼 이승만이 오고 나서 자금 문제에다가 통치문제까지 날선 대립이 심해지게 되면서
결국은 1921년 1월 24일에 이동휘가 국무총리 직을 사임하고 만다.
또 이승만과 안창호 갈등도 심각했다.
이승만 임시정부가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자 임시정부 내에서는 옹호파,
개조파, 창조파로 나누어져 갈등과 대립이 생겼다.
이 때 백범김구는 이승만정부를 강력히 옹호하였다.
그러나 도산안창호는 개조파로 활동하며 이동휘와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주도했다.
이 이후부터 김구는 안창호 측과 대립하며 반대활동을 하였다.
예로 1926년 5월 임시의정원에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했는데
김구는 안창호 국무령선임 반대 운동을 하였다.
이후에도 김구측은 안창호측과 갈등, 대립했다.
그래서 후일 윤봉길의거 때 김구가 안창호에게 사전에 피하라는 언질을 주지 않아
안창호가 일제에 체포된 것도 그냥 실수가 아니지 않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김구 안창호가 이토록 반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고 무척 안타갑다.
그리고 이번 글을 쓰면서 백범 김구선생에 대해서도 다른 면모를 알게 되었다.
김구는 '김립살해사건'에서 보다시피 사회주의를 경계하고 아주 싫어했다.
김구는 사실 임정 내 우파로서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과 합이 잘 맞았다.
이러한 것이 김구가 해방직후 이승만과 형님, 동생하면서 잘 지내게 된 이유였다.
김구는 해방직후에도 같은 우파로서 이승만을 많이 도와준다.
그러나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자 우파이지만 우파보다
민족주의가 더 강했던 김구는 그때서야 이승만과 결별하고
한반도 단일통일정부를 수립하기위해 온건한 우파 김규식과 함께 북에까지 간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리고 김구는 이승만 세력으로 의심되는 안두희에게 암살 당하고 만다.
사실 백범김구에 대해서도 이번 정리를 통해 다른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김구가 직접 쓴 '백범일지'만을 사실로 받아들인 경향이 있었다.
해방전후사 시리즈 숭 김구편에서 객관적으로 자세히 정리하겠다
어쨌든 안창호가 떠난 지 1주일도 안 돼서 1921.5.18에
대통령 이승만도 다시 미국으로 떠나 버린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상해 임시정부에는 대통령이 근무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에게 돌아 와 주라고 간청을 하지만
이승만은 들은 척도 안한다.
이에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참다 참다 못 참고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한다.
이승만이 우리나라 대통령 중 최초로 탄핵을 받고 대통령 직에서 쫒겨났다.
탄핵으로 쫒겼난 대통령 최초는 박근혜가 아니었다.
아래는 이승만에 대한 탄핵선고문 이다.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킨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
'한성조직 계통 운운' 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있는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ㅡ 대한민국 7년 3월 11일 ㅡ
이처럼 상해임시정부는 이승만 한 사람때문에 출발부터 우여곡절을 겪은 것이다.
이승만 탄핵은 이승만을 건국 아버지로 추앙하는 세력들에게는
이승만을 탄핵한 상해임시정부가 곱게 보일리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을 탄핵한 상해임시정부를 정식정부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건국절논란'은 임시정부 초창기 이승만과 큰 관련이 있는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이후 많은 분란을 겪으면서 1926년이 지나서야 김구주석 체제로 완성되어 간다.
이승만은 탄핵 당하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미국과 하와이에서 나름 독립운동을 한다.
그러나 이승만이 가는 곳에서는 항상 커다란 분열과 갈등등 크고 작은 분란이 일어났다.
하와이에서 이승만 행적은 이곳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갈등과 분란이 있었다.
너무 길어지니 생략하니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이승만이 해외에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고 있을 때 이에 비해 다른 독립투사들은
중국에서 국내에서 일제에 잡혀 고문을 받고 투옥되어 모진 고난을 다 겪는다.
이승만은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일제에 잡히거나 감옥에 간 적이 전혀 없다.
이처럼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 행태를 개관적으로 살펴보면
개인 성취욕이나 명예욕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독립운동에 대한 이승만 진정성이 상당히 의심스런 경우가 많다.
이 점은 해방직후 이승만 행적도 비슷하다. 앞으로 자세히 정리해 나갈 것이다.
이런 이승만이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 가장 뜨고 있다.
이승만은 건국아버지로 추대되고 있고,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위해 국민모금까지 준비하고 있다.
그러다 나온 것이 '건국전쟁'이라는 영화이다.
이승만은 나름 독립투사로 알려져 있고,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으로서 공도 분명있다.
그러나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으로서 보인 행태로 많은 비난을 받고 곧 탄핵되었다.
해방직후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한반도 영구분단 획책에 커다란 책임이 있다.
또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초대 대통령으로서는 공보다는 과가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독재정치와 부정투표등 때문에 4.19혁명으로 쫒겨 났다.
이런 이승만은 60, 70년대 박정희 정권, 80년 5공 전두환 군사정권은 같은
독재자임에도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놓고 깠다.
이처럼 80년대까지 이승만은 좌우 대다수에게 욕을 먹는 처지였다.
그런데 나와 같은 세대인 윤석열이 정권을 잡고 이승만 띄우기에 왜 나서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래도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하면 일베,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일제 근대화 식민지론'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간단히 말하면 일베나 뉴라이트는 공산주의 치하 보다는
일제치하가 훨씬 더 좋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물리치고 지금의 영광된 대한민국을 수립한 이승만이
우리 역사 상 최고 영웅으로 봐야 된다는 것이다.
현재에도 이런 논리를 받아들이는 국민이 30%는 된다
이승만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쉽지 않은 이유이다.
오늘 내 글에도 반대 댓글을 넘어 나를 저주하는 댓글까지 달린 것이 뻔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던 이 문제에 대해서 앞으로 자세히 정리해 나갈 것이다.
이어서 해방전후사 9편이 계속 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첫 번째 사진은 젋은 이승만이다.
두 번째 사진이 이동휘 독립운동가이다.
인터넷에서 이동휘를 쳐보니 맨 먼저 탤랜트이자 영화배우 이동휘가 뜨고
사진도 거의 대부분 배우 이동휘 뿐이었다. 독립운동가 이동휘 사진은 포도시 하나 찾았다.
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사실 임정출범 당시는 대통령제긴 아니였기 때문에
이동휘가가 초대 임정 수반으로 봐야함) 사진이 이토록 찾기 어렵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동휘 선생이 아무리 사회주의자라고 해도 지나친 일이라 생각이 든다.
세 번째, 네 번째는 다 알겠지만 상대적으로 젋은 안창호와 김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