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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3회)
1.일시:(2019.10.18.19.20.목.금.토).
2.모임장소:압구정역 6번출구
3.참석자(110여명):고경수.권호성.김양기.김창덕.엄영섭.오춘식.장기성.하동만.허홍외 용두열친구들과 부인.
4.코스:
*.첫째 날(10.18.금):압구정역6번출구현대백화점주차장
(신동아관광)-동천.옥신후게소-점심(통영자연회타운)-미륵산신선대-이순신공원-저녘식사(한마음식당.굴코스)-동피랑벽화마을.중앙전통시장-금호통영마리나리조트
*.둘째 날(10.19.토):조식(리조트부페식)-와현해변유람선-해금강-외도-점심(부산횟집.학동해변)-바람의언덕-거제포로수용소-기념행사(금호리조트)
*.셋째 날(10.20.일):조식(리조트부페)-진주성(촉석루.남강)-점심(사천서울설렁탕)-신정휴게소.청주휴게소-저녁식사(숭례문)-귀가
졸업 50주년 가을여행은 우리들의 기념비적 행사다.
오랜 세월동안 이어저온 우정들이 함께 떠나는 의미 있는 여행이다.
110여명으로 대식구가 움직인다.
어디에서 무엇을 먹고 잠은 어디에서 자고...
우리가 하나가 되었던 2박3일 여정을 돌아보련다.
오래 동안 숙성된 와인이 값어치가 있듯이 우리들 우정 또한 50년 동안 숙성시켜왔으니 가치있는 상품이 되었다.
서로들 소중하고 귀한 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생각한다.
“어이~~친구야.
무심한 세월이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다..
浩然之氣 기르기는 100살까지라고...잊지말게...허허!!
통영에서 굴밥묵고 미륵산에 올라 한려수도도 보고 이순신공원에서 기를 받아서 동피랑으로 내려오자고....
거제도에서 해금강 불노초가 아직도 자라고 있나 모르겠어...
아름다운 외도에서 산책하고 포로수용소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를 목놓아 불러보자고....^^
차 창가에 스치는 금빛 들판보며 가을 기분에 젓는다.
큰 숨 들이키니 상쾌한 기분이다.
여행의 즐거움은 보고 들으며 느끼고 맛 집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했지....
준비위원들의 정성으로 남도의 맛을 실컷 느낄 수 있었기에 맛 집 이야기도 별도로 기록해야겠다.
〔남도음식〕
남으로 달려와서 처음 맞이하는 점심은 통영자연회타운의 활어회매운탕이다.
반찬으로 나오는 것들 중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멸치조림이 별식이다.
서울에서는 맛 볼 수 없는 것인데 새콤한 맛이 혀끝에 남는다.
한마음 식당에서 저녁만찬은 굴탕과 굴부침과 생굴로 이어지는 굴코스요리다. 굴로 만든 음식으로 여러 가지 맛을 보게 해준다.
싱싱한 생굴의 맛을 언제 또 맛 볼 수 있을려는지...
둘째 날 아침 리조트 뷔페에서는 따근한 크림스프가 속을 시원하게 해 주었는데, 슈퍼에서 판매하는 인스턴트 스프는 비교하면 아니 될 것이다.
학동의 몽돌 해수욕장 앞 부산횟집에서 멍게비빔밥도 감칠 맛이였고, 고등어구이는 항상 어디서나 인기라서 한 마리로는 양이 부족하다.
통영거제에서 멍게비빔밥은 전주 콩나물 비빔밥과 함께 각각 지역의 유명식이다.
단독홀에서 기념행사에 제공된 뷔페식 만찬은 우리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 한 것이다.
정성으로 준비했으니 감사히 먹는다. 가격 꾀나 나가겠는 걸 하면서.....
셋째날 박우룡 동문의 서울설렁탕은 정성을 들여서 준비한 역 대급이라고 칭찬한다.
수육은 연하고 설렁탕 국물은 고소하고 감칠 맛이 있었으며 후식으로 나온 청포도와 귤은 싱싱하기도하고 당도도 최고다.
서울 도착해서 ‘숭례문’ 지하식당에서 차돌배기 된장국과 갈비탕도 참 잘 한 선택이다.
그동안 기름진 음식으로 채웠던 위 청소를 된장국이 한 방에 씻어준다.
압구정역 4번 출구로 나와서 우회전해서 ‘숭례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첫째 날〕
남으로 달려와서 처음 맞이하는 점심은 통영자연회타운의 활어회매운탕이다.
반찬으로 나오는 것들 중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멸치조림이 별식이다.
서울에서는 맛 볼 수 없는 것인데 새콤한 맛이 혀끝에 남는다.
미륵산 전망대에서 다도해는 짙은 안개로 볼 수가 없다.
수백개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장관인데...
초가집지붕과 황토색마당의 운치있는 박경리 작가의 집도 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당시에는 그 초가집에서 거주하였는데 그 후 몇 년있다가 작고하였으니 오늘 감회가 새롭다.
이순신 공원에 오르니 안개 걷힌다.
충무공동상에 ‘必死卽生 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글에서 오래 동안 눈길을 띌 수가 없다.
23전 23승의 기적을 이루고 마지막 노량진해전에서 장열히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위대한 활약상은 아래에 따로 붙인다.
그 분의 해전사를 읽으며 경외심과 함께 감동으로 짙게 물들고 싶다.
통영은 리아스식해안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강구안을 감싸고 아늑하기 그지없다.
이곳 이순신공원에서 바다 건너편에 숙소 금호 리조트가 조망된다.
숙소 금호리조트의 위치가 바다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강구안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동안 통영을 스쳐 지나만 갔으며 잠시 머무는 짧은 시간이였기에 통영의 아름다운 구조를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야 비로소 미항의 본 모습을 본 것 같아서 부끄러운 마음이다.
한마음 식당에서 저녁만찬은 굴탕과 굴부침과 생굴로 이어지는 굴코스요리였는데 굴로 만든 음식의 여러 가지 맛을 보게 해준다.
싱싱한 생굴의 맛을 언제 또 맛 볼 수 있을려는지....
식후 해는 서산에 지고 몇몇이 그룹지어 동피랑 길에 오른다.
통영은 낮에 보고 여수는 밤바다를 즐기라고 했다는데 가로등 희미한 동피랑 길의 벽화들이 제 멋을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좁은 통영해안 길을 베테랑 기사가 잘도 운전한다.
용두열 행사중에서 오늘 금호리조트 숙소가 최고라고 한다.
비회원일 경우 리조트 5인 기준 25평이 주중에는 15만원이고 주말과 휴일에는 29만원이라고....
〔둘째 날〕
아침 리조트 뷔페에서는 따근한 크림스프가 속을 시원하게 해 주었는데 자꾸 생각난다.
슈퍼에서 판매하는 인스턴트 스프 맛은 비교하면 아니 될 것이다.
통영과 거제는 이웃사촌이다.
여행객들 대부분은 통영을 거쳐 거제도로 와서 유람선으로 섬을 찾는다.
어제 파도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어서 유람선이 많이 흔들린다.
해금강을 보면 홍도를 생각하고 외도를 가니 소매물도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나라 한려수도에 아름다운 섬들은 신이 준 크나큰 선물이다.
해금강에 진시황제가 구해오라는 불노초 자란다는 바위는 해금강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파도를 피해 외도로 피난 왔다가 섬을 가꾸게 된 일대기도 흥미롭다.
평범한 섬에서 지혜를 발휘하니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탄생하였네....
학동의 몽돌해수욕장앞 부산횟집에서 멍게비빔밥도 감칠 맛이고 고등어구이가 싱싱하다.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고등어는 어디서나 인기인데, 네명이 고등어 한 마리로는 양이 부족하다.
식후 바람의 언덕에서 바다 건너편 학동마을이 멋있는 풍경을 연출한다.
학동에서 우측으로 하얀 모래사장에 수심이 완만한 구조라 해수욕장이 가족캠핑장소로 좋다는 사실도 남겨 둔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흥남 철수와 도드준장의 납치사건등 민족의 아픈 역사가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펼쳐진다.
194척의 피난민 이송 배와 장전호에 설치된 14m높이의 철조망과 14000명의 피난민이 14005명(피난중 탄생한 생명 5명)으로 바뀐 사연등
거제포로 수용소에서 일어난 역사이야기를 다 듣고 관람하는 데는 시간이 부족하다.
입체적으로 꾸며 놓은 내부 시설은 압권이다.
10년 전과 다름이 없으나 이곳이 생생이 살아있는 아픈 역사를 교육하는 데는 더 할 나위 없는 곳이다.
‘용두열 졸업 50주년 가을 여행’ 플랭카드를 걸고 조촐한 기념행사를 한다.
먼 이국에서 오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온 동창들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교정을 떠나 세월이 흐르니 그리움을 쌓이게 한다네...
‘보고 싶었다’ ‘반갑구나’. ‘또 만나자구나...^^‘
단독홀 뷔페식 만찬장에서 술 한잔씩 주고 받는다.
이 짧은 시간에 50년 회환을 어이 다 풀 수 있겠는가.
마지막 교가제창을 하며 박문우를 향하여 ‘울어’ 울어‘소리친다.
우리도 마음 속으로 나마 문우따라서 울어야지.....
〔세째 날〕
통영트라이애슬론 철인3종경기가 2일간 리조트 앞에서 있는데 오늘 끝나는 날이다.
차거운 바다에서 젊은 선수들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가을여행 마지막날은 진주 촉석루를 보고 사천에서 점심하고 귀경 길에 오르기로 한다.
사천 비행장이 가까이 있는 진주는 강씨 하씨 정씨들이 모여사는 집장촌이다. 남강 논개의 전설 만큼 이나라 국민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어디 또 있을까.
결코 흔치 않다.
기생으로 위쟝해서 감동을...충절이요.애처러움이요.안타까움이요. 그 용기 어디서...
진주는 남강의 논개로 누구나 한 번 쯤 방문했었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필자는 중학교때 수학여행을 와서 촉석루 계단에서 찍은 사진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해설사의 낭랑한 목소리로 진주대첩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이야기를 들려준다.
의기사로 기록된 19세의 나이에 목숨을 던진 논개의 사당 앞에서 묵념도 올린다.
영정사진의 수수한 미모가 살아 있는 듯하고 가락지 낀 손이 살아 있는 듯 자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 모습 가히 비교할 바가 없다.
논개의 투신은 2차대첩에서 일이였다고 한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남강에 의암바위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다.
영정이 있는 사당의 마당 담장에 100년만에 대나무 꽃이 피어난 이야기도 들려준다.
해설사는 120명의 많은 관람객 우리를 향해 신이 나 있다.
충무공 시호를 가진 사람이 12분이라 하는데 인터넷 검색하니 9분으로 이순신, 김시민, 남이...로 되어 있다.
진주교와 천수교사이에 유유히 흐르는 남강은 낙동강과 합류 하는데,
진주교와 천수교 사이에 연등을 띄우며 소원을 빌면 이루진다고 하며 내년 연등축제 때 꼭 오라고 한다.
박우룡 동문의 서울설렁탕은 정성을 들여서 준비한 역 대급이라고 칭찬한다.
수육은 연하고 설렁탕 국물은 고소하고 감칠 맛났으며 후식으로 나온 청포도와 귤 맛도 최상이다.
신정휴게소와 충주휴게소를 지나 서울 도착해서 ‘숭례문’ 지하식당에서 맛 본 차돌배기 된장국과 갈비탕도 참 잘 한 선택이라고 한다.
그동안 기름진 음식이였는데 된장국이니 안성맞춤이여서다.
압구정역 4번 출구로 나와서 우회전해서 ‘숭례문’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렇게 함께 또 언제 떠나보려나...
이런 생각하게 되었다면, 야~~ 기분 좋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었건만....2박 3일이 짧았나,
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있네 그려....
전화로 할까.... 아니야 불러내서 만나야 될 것만 같아....허허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지....?
2박3일이 큰 약효가 되었나보다. 우리 자주 얼굴 보아야 겠어...!
60주년까지 이어지게 하자는 말도 새겨서 듣는다.
감사의 마음으로 글을 마칩니다....
〔여행길 계획〕
1월,2월 온천 눈꽃 산행
3월 매화,개나리, 산수유 꽃 산행
4월 진달래, 벗꽃 산행
5월 철쭉 꽃 산행
6월 섬 산행
7월 계곡 산행
8월 야영
9월 특별히 가고 싶은 곳
10월,11월 단풍, 억새 산행
12월 기차여행, 또는 온천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 및 활동사항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이변(李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李琚)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이백록(李百祿)이 조광조(趙光祖) 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 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이순신이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이순신은 위로 이희신(李羲臣)·이요신(李堯臣)의 두 형과 아우 이우신(李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臣)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堯)·순(舜)·우(禹) 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이순신은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詩才)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강한 정의감은 뒤에 상관과 충돌하여 모함을 받기도 하였으며, 용감성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서 매양 선두에 나서서 장졸들을 지휘함으로써 예하장병의 사기를 북돋워 여러 전투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또, 이순신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 감히 이순신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 이때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이순신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이 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 장졸을 이끌고 동래 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또,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하고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 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이순신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4일 새벽 출진을 명하니, 이때의 규모는 전선 24척, 협선(狹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이틀 뒤 한산도(閑山島)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선단을 만났는데, 그 규모는 전선 3척과 협선 2척에 불과하였으나 연합함대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일 옥포(玉浦) 앞바다를 지날 무렵 척후선(斥候船)으로부터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연락이 왔다. 이때 옥포에 정박중인 적선은 30여 척이었다.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육지에 올라가서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배에 올라 도망하려 하였으나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조선수군의 포화와 불화살[火矢]에 격파되고 많은 왜병이 궤멸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이순신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옥포해전이 있던 다음날에는 고성의 적진포(赤珍浦)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제1차 출동 후 전력을 보강하고 전선을 정비한 뒤 다음 출동에 대비하고 있던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주력함대가 서쪽으로 나아간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자,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에게 합동으로 출동하여 왜선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왜선 10여 척이 사천·곤양 등지로 진출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예정출동일을 변경하여 적에게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하였다.
5월 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이순신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이순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월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척,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이순신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 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순신과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척, 중선 4척,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은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계(陞階)되었다. 그 뒤 다시 선제공격으로 거제·가덕에 출몰하는 일본수군을 격멸하기 위하여 우수사 이억기에게 작전을 전달하고 연합함대의 조직을 통첩하고, 7월 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해상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見乃梁)에는 적장 와키사카[脇坂安治] 등이 인솔한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견내량이 지형이 좁고 활동이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약간의 판옥선(板屋船)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陣)을 쳐, 일제히 총통(銃筒)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層閣船)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와키사카의 가신(家臣) 와키사카사베에[脇坂左兵衛]·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를 위시하여 이름 있는 자들이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이 한산대첩의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계되었다.
한산대첩 후 이순신은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安骨浦: 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작전을 하려던 구키[九鬼嘉隆]·가토[加藤嘉明] 등의 일본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이순신은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焚滅)하였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회의를 하여 부산포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沒雲臺)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絶影島: 지금 影島)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草梁)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督戰旗)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右部將) 정운(鄭運)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이순신은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특히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이순신은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이순신은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모함당하게 되었다.
또,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 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이때 이순신은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때, 영남 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이순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이순신이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이순신은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1차 신문(訊問) 때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인 변호로 인해 추가적인 신문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이순신은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이순신이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순신은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敎書)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
통제사에 재임용되어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고 보화도(寶花島: 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영(營)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鎭)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魚鹽)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은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이순신을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이순신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선조실록』에서 사관(史官)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순신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 忠淸道·全羅道)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다.
정인보(鄭寅普)는 「이충무공순신기념비(李忠武公舜臣紀念碑)」에서 “공(公)은 명장보다도 성자(聖者)이다. 신묘불측(神妙不測)이 오직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千寬宇)는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순신은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死後)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이순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순신의 업적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이순신이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이순신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중략……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순신은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이순신이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순신은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亂中日記)』·시조(時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여수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賜額), 입사(立祠)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이순신을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申采浩)의 「이순신전(李舜臣傳)」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순신 [李舜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論介]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 임진왜란 때 최경회가 전사하자 일본군이 촉석루에서 벌이는 잔치에 참석해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출생-사망: ? ~ 1593 .본관: 신안 주씨. 출생지:전북 장수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다. 전북 장수(長水)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28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제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두산백과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제1차 진주성 싸움. 제2차 진주성 싸움〕
진주성의 전략적 중요성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난 곳으로 그만큼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진주는 경상도 일대를 관장하는 가장 큰 고을이었으며 고려시대부터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방어하는 기지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부산포를 시작으로 도성 한양까지 큰 저항없이 진격했던 왜군들은 점차 경상도를 중심으로 조선 의병들의 반격활동으로 후방에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조선 의병활동의 중심에 진주성이 있었다. 평양성에서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한양으로 후퇴한 왜군은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고 호남지역으로 진출하여 안정적인 후방의 보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주성을 차지해야만 했다. 바닷길을 통해 호남으로 진출할 수도 있었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에게 가로막혀 있었다. 따라서 조선과 왜군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에서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을 벌이게 된다. 제1차의 진주싸움은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로 꼽혀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하며, 왜군들이 대패하였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1차에 비해 5배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왜군에게 진주성은 함락되고 만다. 당시 왜장을 끌어 안고 남강에 뛰어든 논개(論介)의 죽음으로 잘 알려진 싸움이다.
〔제1차 진주성 싸움〕
1592년(선조 25) 9월 김해에서 출발한 왜군은 창원을 거쳐 10월 5일 진주성 외곽에 도착했다. 당시 진주성은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일반 양민 약 2만 명이 진주성 내에 있었다. 남강과 주변의 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진주성은 천혜의 요새로 공략하기 쉬운 성채가 아니었다.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병들과 함부로 응대하지 않고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방어 전술을 펼쳤다.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玆] 등이 이끄는 왜군 약 2만 명은 수 천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김시민은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게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의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왜군을 물리쳤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의 동생(長岡玄蕃之允)이 이광학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10월 10일에 패주했다. 하지만 탁월한 지도력을 보여준 진주목사 김시민은 이마에 총상을 입었으며 그해 11월 22일에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정유경, 김준민 등 군소 의병군들이 외곽에서 지원한 것이 아군에게 협공작전으로 심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제2차 진주성 싸움〕
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왜군은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위신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다. 또한 북쪽으로 진군했던 왜군은 명나라가 개입하여 평양성에서 패배하자 일단 남쪽으로 후퇴하여 경상도와 호남지역을 장악하여 후방의 안정적인 보급과 확실한 교두보로 만든 다음 다시 북상하여 공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때문에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손에 넣는 것은 전략적인 중요성이 증대되어 반드시 진주성을 공략해야만 했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咸安)·반성(班城)·의령(宜寧)을 점령하고, 19일 9만 3000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서예원 휘하의 2400명과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高從厚)과 이계련(李繼璉), 태인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순천 의병장 강희열(姜希悅),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포진하였다. 진주성에 집결하여 수성을 맡은 병사는 약 6000~7000명의 병력과 약 6만 명의 일반민들이 있었다. 조선군의 전투력은 왜군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열세였다.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산발적으로 공격하던 왜군은 번번히 패퇴하였다. 성밖에 높은 토대를 쌓아 높은 곳에서 조총을 쏘면서 공격해오자 조선군의 사상자가 늘어났다. 황진과 이종인, 김천일, 김준민, 장윤 등이 분전하여 왜군의 파상공격을 거듭하여 막아내었지만,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전사하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고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어 호남으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임진왜란의3대첩 조선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무찌른 3대 싸움을 말한다.
① 한산도대첩 : 임진년(1592) 7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선을 전멸시켜(60척 침몰) 왜의 수군에 큰 타격을 주어 제해권을 잡았다.
② 행주대첩 : 1593년 2월 전라 순찰사 권율이 서울 수복을 위해 북상하다가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크게 쳐부수어 승리한 싸움을 말한다. 이때 동원된 부녀자들이 긴 치마로 돌을 날라 석전(石戰)을 벌인 것이 유명하다.
③ 진주성대첩 : 1차 혈전은 1592년 10월, 3만의 왜군 연합부대가 공격해 왔으나 진주 목사 김시민이 끝까지 이를 고수하였으며, 이때 의병 곽재우가 합세하여 화약물과 돌로 왜군을 물리쳤다. 2차 혈전은 1593년 6월, 1차전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대군으로 공격, 의병인 고종후·강희열등이 참가하여 항전하다 전원이 전사하였다.
이순신의 3대첩-한산도대첩·명량대첩·노량대첩 / 거북선이 최초로 출현한 전투-사천해전
졸업 50주년 가을여행 (제223회水山노리)
1.일시:(2019.10/18.19.20.목.금.토).
2.모임장소:압구정역 6번출구
3.참석자(110여명):고경수.권호성.김양기.김창덕.엄영섭.오춘식.장기성.하동만.허홍외 용두열친구들과 부인.
4.코스:
*.첫째날(10.18.금):압구정역6번출구현대백화점주차장
(신동아관광)-동천.옥신후게소-점심(통영자연회타운)-미륵산신선대-이순신공원-저녘식사(한마음식당.굴코스)-동피랑벽화마을.중앙전통시장-금호통영마리나리조트
*.둘째날(10.19.토):조식(리조트부페식)-와현해변유람선-해금강-외도-점심(부산횟집.학동해변)-바람의언덕-거제포로수용소-기념행사(금호리조트)
*.셋째날(10.20.일):조식(리조트부페)-진주성(촉석루.남강)-점심(사천서울설렁탕)-신정휴게소.청주휴게소-저녁식사(숭례문)-귀가
졸업 50주년 가을여행은 우리들의 기념비적 행사다.
오랜 세월동안 이어저온 우정들이 함께 떠나는 의미 있는 여행이다.
110여명으로 대식구가 움직인다.
우리가 하나가 되었던 2박3일 여정을 돌아본다.
오래 동안 숙성된 와인이 값어치가 있다.
우리들 우정 또한 50년 동안 숙성시켜왔으니 가치있는 상품이 되었지 않은가.
소중하고 귀한 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생각한다.
“어이~~친구야.
무심한 세월이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다..
浩然之氣 기르기는 100살까지라고...잊지말게나.
통영에서 굴밥묵고 미륵산에 올라 한려수도도 보고 이순신공원에서 기를 받아서 동피랑으로 내려오자.
거제도 해금강의 불노초가 아직도 자라고 있나 모르겠어.
아름다운 외도에서 산책하고 포로수용소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를 목놓아 불러보자.
차 창가에 스치는 금빛 들판보며 가을 기분에 젓는다.
큰 숨 들이키니 상쾌한 기분이다.
〔첫째 날〕
남으로 달려와서 처음 맞이하는 점심은 통영자연회타운의 활어회매운탕이다.
반찬으로 나오는 것들 중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멸치조림이 별식이다.
서울에서는 맛 볼 수 없는 것인데 새콤한 맛이 혀끝에 남는다.
미륵산 전망대에서 다도해는 짙은 안개로 볼 수가 없다.
수백개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장관인데....
초가집지붕과 황토색마당의 운치있는 박경리 작가의 집도 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당시에는 그 초가집에서 거주하였고 몇 년 후 작고하였는데 감회가 새롭다.
이순신 공원에 오르니 안개 걷힌다.
충무공동상에
‘必死卽生 必生卽死’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는 글에서 오래 동안 눈길을 띌 수가 없다.
23전 23승의 기적을 이루고 마지막 노량진해전에서 장열히 전사한 이순신장군의 위대한 활약상은 아래에 따로 붙인다.
그 분의 해전사를 읽으며 경외심과 함께 감동으로 짙게 물들고 싶다.
통영은 리아스식해안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강구안을 감싸고 아늑하다.
이곳 이순신공원에서 바다 건너편에 숙소 금호 리조트가 조망된다.
숙소 금호리조트의 위치가 바다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 강구안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동안 통영을 스쳐 지나만 갔으며 잠시 머무는 짧은 시간 때문에 통영의 아름다운 구조를 보지 못했다.
이제야 비로소 미항의 참 모습을 본다.
한마음 식당에서 저녁만찬은 굴탕과 굴부침과 생굴로 이어지는 굴코스요리였는데 굴로 만든 음식의 여러 가지 맛을 보게 해준다.
싱싱한 생굴의 맛을 제대로 맛 보게 된다.
식후 해는 서산에 지고 몇몇이 그룹지어 동피랑 길에 오른다.
통영은 낮에 보고 여수는 밤바다를 즐기라고 했다는데...
가로등 희미한 동피랑 길의 벽화들이 제 멋을 보여주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좁은 통영해안 길을 베테랑 기사가 잘도 운전한다.
용두열 행사중에서 오늘 금호리조트 숙소가 최고라고 한다.
비회원일 경우 리조트 5인 기준 25평이 주중에는 15만원이고 주말과 휴일에는 29만원이라고....
〔둘째 날〕
아침 리조트 뷔페에서는 따근한 크림스프가 속을 시원하게 해 주었는데
여행을 마치고 나서도 자꾸 생각난다.
슈퍼에서 판매하는 인스턴트 스프 맛은 비교하면 아니 될 것이다.
통영과 거제는 이웃사촌이다.
여행객들 대부분은 통영을 거쳐 거제도로 와서 유람선으로 섬을 찾는다.
어제 파도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어서 유람선이 많이 흔들린다.
해금강을 보면 홍도를 생각나게하고 외도에서는 소매물도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나라 한려수도에 아름다운 섬들은 신이 준 크나큰 선물이다.
해금강에 진시황제가 구해오라는 불노초 자란다는 바위는 해금강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파도를 피해 외도로 피난 왔다가 섬을 가꾸게 된 일대기가 흥미롭다.
평범한 섬에서 지혜를 발휘하니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탄생하였네....
학동의 몽돌해수욕장앞 부산횟집에서 멍게비빔밥도 감칠 맛이고 고등어구이가 싱싱하다.
굳이 이곳이 아니어도 고등어는 어디서나 인기다.
네명이 고등어 한 마리로는 양이 부족하다.
식후 바람의 언덕에서 바다 건너편 학동마을이 멋있는 풍경을 연출한다.
학동에서 우측으로 하얀 모래사장에 수심이 완만한 구조라 해수욕장이 가족캠핑장소로 좋다는 사실도 남겨 둔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흥남 철수와 도드준장의 납치사건등 민족의 아픈 역사가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펼쳐진다.
194척의 피난민 이송 배와 장전호에 설치된 14m높이의 철조망과 14,000명의 피난민이 14,005명(피난중 탄생한 생명 5명)으로 바뀐 사연 등등...
거제포로 수용소에서 일어난 역사이야기를 다 듣고 관람하는 데는 시간이 부족하다.
입체적으로 꾸며 놓은 내부 시설은 크기와 구성이 실로 압권이다.
10년 전과 다름이 없으나 이곳이 생생이 살아있는 아픈 역사를 교육하는 데는 더 할 나위 없는 곳이다.
‘용두열 졸업 50주년 가을 여행’
플랭카드를 걸고 조촐한 기념행사를 한다.
먼 이국에서 오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온 동창들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교정을 떠나 세월이 흐르니 그리움을 쌓이게 한다네...
‘보고 싶었다’ ‘반갑구나’. ‘또 만나자구나...’
단독홀 뷔페식 만찬장에서 술 한잔씩 주고 받는다.
이 짧은 시간에 50년 회환을 어이 다 풀 수 있겠는가.
마지막 교가제창을 하며 박문우를 향하여 ‘울어’ 울어‘소리친다.
우리도 마음 속으로 나마 문우따라서 울어야지.....허허^^
〔세째 날〕
통영트라이애슬론 철인 3종경기가 2일간 리조트 앞에서 열리고 있는데 오늘 끝나는 날이다.
차거운 바다에서 젊은 선수들 보는 재미도 솔솔하다.
가을여행 마지막날은 진주 촉석루를 보고 사천에서 점심하고 귀경 길에 오르기로 한다.
사천 비행장이 가까이 있는 진주는 강씨 하씨 정씨들이 모여사는 집장촌이다.
진주 남강 논개의 전설 만큼 이나라 국민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어디 또 있을까.
기생으로 위장해서 충절이요.애처러움이요.안타까움이요 그리고 감동이다.. 가녀린 여자로서 그 용기 어디서 나왔을까.
진주는 누구나 한 번 쯤 방문했었던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다.
필자는 중학교때 수학여행을 와서 촉석루 계단에서 찍은 사진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해설사의 낭랑한 목소리로 진주대첩은 한산도대첩과 행주대첩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이야기를 들려준다.
의기사로 기록된 19세의 나이에 목숨을 던진 논개의 사당 앞에서 묵념도 올린다.
영정사진의 수수한 미모가 살아 있는 듯하다.
가락지 낀 손이 자꾸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그 아릿따운 모습 대단한 용기 가히 비교할 바가 없다.
논개의 투신은 2차대첩에서 일이였다고 한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남강에 의암바위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다.
영정이 있는 사당의 마당 담장에 100년만에 대나무 꽃이 피어난 이야기도 들려준다.
해설사는 120명의 많은 관람객 우리를 향해 신이 나 있다.
충무공 시호를 가진 사람이 12분이라 하는데 인터넷 검색하니 9분으로 이순신, 김시민, 남이 등등으로 되어 있다.
진주교와 천수교사이에 유유히 흐르는 남강은 낙동강과 합류 하는데,
진주교와 천수교 사이에 연등을 띄우며 소원을 빌면 이루진다고 하며 내년 연등축제 때 꼭 오라고 한다.
여행의 즐거움은 보고 즐기며 듣고 느끼며 맛 집 찾아다니는 것이라 했지.
남도의 맛을 실컷 느낄 수 있었기에 맛 집 이야기도 별도로 기록한다.
준비위원들의 정성에 감사한다.
〔남도음식〕
남으로 달려와서 처음 맞이하는 점심은 통영자연회타운의 활어회매운탕이다.
반찬으로 나오는 것들 중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멸치조림이 별식이다.
서울에서는 맛 볼 수 없는 것인데 새콤한 맛이 혀끝에 남는다.
한마음 식당에서 저녁만찬은 굴탕과 굴부침과 생굴로 이어지는 굴코스요리다. 굴로 만든 음식으로 여러 가지 맛을 보게 해준다.
싱싱한 생굴의 맛을 언제 또 맛 볼 수 있을려는지...
둘째 날 아침 리조트 뷔페에서는 따근한 크림스프가 속을 시원하게 해 주었는데, 슈퍼에서 판매하는 인스턴트 스프는 비교하면 안 될 것이다.
학동의 몽돌 해수욕장 앞 부산횟집에서 멍게비빔밥도 감칠 맛이였고, 고등어구이는 항상 어디서나 인기라서 한 마리로는 양이 부족하다.
통영거제에서 멍게비빔밥은 전주 콩나물 비빔밥과 함께 각각 지역의 유명식이다.
단독홀에서 기념행사에 제공된 뷔페식 만찬은 우리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 한 것이다.
정성으로 준비했으니 감사히 먹는다. 가격 꾀나 나가겠는 걸.....
셋째날 박우룡 동문의 서울설렁탕은 정성을 들여서 준비한 역 대급이라고 칭찬한다.
수육은 연하고 설렁탕 국물은 고소하고 감칠 맛이 있었으며 후식으로 나온 청포도와 귤은 싱싱하기도하고 당도도 최고다.
서울 도착해서 ‘숭례문’ 지하식당에서 차돌배기 된장국과 갈비탕도 참 잘 한 선택이다.
그동안 기름진 음식으로 채웠던 위 청소를 된장국이 한 방에 씻어준다.
압구정역 4번 출구로 나와서 우회전해서 ‘숭례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렇게 함께 또 언제 떠나보려나...
오래간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었건만 2박 3일이 짧았나,
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 있네 그려....
전화로 할까.... 아니야 불러내서 만나야 될 것만 같아...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지....?
2박3일이 큰 약효가 되었나보다. 우리 자주 얼굴 보아야 겠어...!
60주년까지 이어지게 하자는 말도 새겨서 듣는다.
감사의 마음으로 50주년 가을여행 겸 제 223회 수산노리 글을 마칩니다.
2019.10.22.
〔水山노리계획〕
1월,2월 온천 눈꽃 산행
3월 매화,개나리, 산수유 꽃 산행
4월 진달래, 벗꽃 산행
5월 철쭉 꽃 산행
6월 섬 산행
7월 계곡 산행
8월 야영
9월 특별히 가고 싶은 곳
10월,11월 단풍, 억새 산행
12월 기차여행, 또는 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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