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어둔 페이지, 경화역 외 1편
김 루
기차는 날개를 접은 지 오래다
접은 시간만큼 가을이 깊어 멈춰버린 바퀴를 밤으로 밀면
물속에 잠긴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
보풀 풀린 목소리가 어깨를 툭 건드리면 발자국이 가득 차 있어도 텅 빈 경화역
화폭에 그림을 그린다면
묵묵히 혼자를 견디는 귀룽나무 한 그루 그려 넣겠지
밤을 지워도
발자국을 지워도
나란하게 뻗은 철길은 휘어져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멈추지 않고 달릴 때 마다 나는 무거워
뛰어노는 아이, 웃음을 두 손으로 받는다
웃음은
예고도 없이
협의도 없이
모래알처럼 새어
재미있는 일이 세상에 하나도 없어 자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이처럼*
내가 나를 배반하면 철길 위에는 하얀 눈이 흩날린다
*에밀 아자르 자기앞의 생 중에서
그림자를 지워도 지나갈 사람은 지나갈 뿐이고
오늘도 혼자 버릇처럼 십리대숲에 숨는다
숨는다고 숨어지는 건 아니지만 구석진 곳에 고양이처럼 엎드려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갈 뿐이고
곁눈질하다 발목을 삐걱하는 사람은
호기심에 잠시
삐걱거릴 뿐이다
눈을 감고 볕에 기대앉는다
내가 무성해진다
대나무처럼 속이 빈 줄 모르고 위로만 뻗다 꺾인 나와
심장을 쥐었다 펼쳐놓으며
내가 있어 매일이 좋은 거야
내가 있어야 매일이 좋아질 수 있는 거야
안에 가라 앉아 있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목젖까지 드러내며 웃던 내가
애인을 떠나보내고
엄마를 떠나보낸 뒤
놓친 게 뭔지 몰라
댓잎처럼 누레지면
슬픔이 강물처럼 불어 물속에서 혹등고래 울음소리 들린다
고래 울음에 깊이 빠져 본 사람은 안다 울음이 가슴을 어떻게 후벼 파는지
울음을 잘라 대숲에 심는다
마디마디 숲의 바람이 따뜻해진다
그림자를 지워도 지나갈 사람은 지나 갈 뿐이고 꼬리가 잘려도
푸르른 사람은 푸를 뿐이다
김 루
1965년 김천 출생. 2010년 현대시학 등단.
2022년 제2회 구지가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