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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06 / 회개하라 하시는 하나님 (사59:1-2)
여러분은 ‘나비’ 그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뭐가 있습니까?
대부분 호랑나비, 흰나비처럼 곤충을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상 우린 나비 그러면 ‘나비’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나비’는 어떤 뜻일까요?
히브리어로 나비는 ‘부름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예언자 또는 선지자’라는 뜻이 됩니다.
구약에서는 이사야서부터 말라기까지가 예언서에 해당하는데, 각각의 예언자들이 부름받은 방식이나 출신성분은 달랐지만, 예언한 내용에 있어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과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서 우연히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씨를 뿌려야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무엇인가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시련이나 고난에도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일 텐데, 성경에서는 그런 것들의 근본 원인을 한 마디로 죄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는다면 지은 죄를 빨리 회개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알아야 할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신학적으로 죄를 분류하자면 죄는 원죄와 본죄로 분류되는데 원죄는 아시다시피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죄를 말하며, 본죄는 사람이 살면서 짓게 되는 모든 죄를 통칭하는 말로 ‘자범죄’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이들은 ‘본죄’를 ‘자범죄’와는 별개로 ‘조상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는 책이나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이런 사상을 일명 ‘가계 저주론’이라 하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조상들이라고 말하는 아담 이래의 모든 인류에게는 조상들 각자가 지은 본죄가 있었고 이는 후대로 유전되는 조상죄가 아니라 당시 조상들이 지은 자범죄인 고로 조상들 각자가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걸 해결했든 못했든 조상들 각각에 대한 심판이나 상급은 이미 그들 대에서 끝난 것입니다. 따라서 후손들의 공덕으로 죽은 조상들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했던 중세 천주교의 면죄부 사상이나, 죽어 이미 각기 심판과 상급 아래 있는 조상들의 불신이나 혹은 믿음으로 인해 그 후손들이 저주를 받거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가계 저주론 역시도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모든 세대에는 각 세대가 저질렀고 그랬기에 그들 세대에서 해결했어야만 하는 자범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 각자의 자범죄가 있기에 이 역시 우리 대에서 우리 각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나에게 있는 고난이나 시련을 마치 불신 조상들의 탓인 양 핑계 대면서 정작 내가 해야 할 회개를 등한시하는 것은 결국 믿음을 가장한 사탄의 또 다른 시험에 속고 사는 것일 뿐입니다.
이젠 분명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종류의 죄든 간에 최초에는 다 사탄에 의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에 대항할 힘이 없다는 데에 죄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죄인 줄 뻔히 알면서도 번번이 그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더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알아야 할 것이 사탄은 왜 호시탐탐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도록 하는 걸까요?
오늘 본문 2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보면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했는데, 이게 사탄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단절되게 하는 것이 사탄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안 지으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성경이 말하는 죄는 윤리나 도덕 혹은 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순간’의 모든 행위나 말을 죄라고 합니다. 따라서 ‘죄가 있기에 고난이 있다’는 말은 정확하게는 ‘하나님 없이 살기에 고난이 있게 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의 불 뱀 이야기를 떠올려 보세요. 자기들을 척박하고 살기 힘든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지 않기로 합니다. 그러고는 하나님 없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순간, 그때부터 그간 하나님에 의해 막혀있던 불 뱀과 전갈들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물어 죽입니다.
이 사건을 신학적으로만 보면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신앙으로 인해 그들에게 고난이 닥쳐왔다고 할 수 있으나 신앙적으로 보자면 저들이 하나님 없이 살기로 작정했기에 저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도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불 뱀과 전갈이던 겁니다.
항시 ‘하나님 없이 사는 순간’이라는 말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서 예수님을 믿어도 죽을 때까지 계속 범하게 되는 것이 자범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사는 순간’이 죄라고 한다면 자범죄란 나에게서도 ‘하나님 없이 사는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회개하라고 하면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대부분이 나의 말이나 행위 중에서 범했던 죄를 떠올리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하면 주일을 못 지켰다느니, 누구를 미워했다는 둥, 누구에게 손해를 입혔다는 식의 잘못했고 나쁜 행위들만을 찾다 보니 어느 순간엔 ‘뭘 회개해야 하나?’ 하며 ‘회개할 거리’를 놓고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제대로 다시 알아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고 죄책감을 가지게 하시려고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복 받게 하시려고 하라 하시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순간들에 대한 것임을 확실하게 아셔야 합니다.
이처럼 죄는 사탄이 가져오는 것으로 우리로 하나님 없이 살게 하려는 것이 죄이기에 죄의 문제는 인간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의 역사이기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했고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 문제의 해결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시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겐 죄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다고 하자니 믿음이 없는 것 같고, 없다고 하자니 뭔가 켕깁니다.
왜? 어째서 우린 죄가 있다, 없다를 당당하게 선포하지 못하는 걸까요?
문제는 자범죄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계속 재발 되기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원죄와 관련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담의 후손이란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억울하기도 하고 원망 되기도 합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원죄가 해결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죄인 자범죄의 경우엔 좀 다릅니다. 말 그대로 내가 지은 죄가 자범죄다 보니 해결도 내가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나의 자범죄를 해결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 없는 자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솔직히 죄는 내가 지었지만, 해결은 내가 못 합니다. 그래서 나의 자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마태복음 3:2절에서도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상을 향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요?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로 오셨다면 어떤 식으로든 본인이 메시아임을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그러니 ‘나를 믿어라.’라고 하셨어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따르든 말든 했을 텐데, 생뚱맞게도 예수님의 첫 선포는 ‘믿어라.’가 아니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은 본인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사람들이 구원받고 복 받게 하는 데 목적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한 결과 때문에 사탄에게 계속 시험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은 가장 시급한 문제 즉 사람들의 고난과 고통의 원인이 되는 ‘죄로부터의 자유함’을 주시기 위해 ‘믿어라.’가 아닌 ‘회개하라.’는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회개 사이에서 어느 게 먼저일까나 혹은 어느 게 더 중할까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믿는 게 먼저입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만 하나님께 죄를 회개하게도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믿으라가 아니라 회개하라는 말씀을 먼저 하신 걸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첫 단계가 회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회개가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는 시작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이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바라는 오직 한 가지가 저들이 구원받고 복 받게 하는 데 있으셨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복을 받기 위한 출발선이 되는 회개를 하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를 알고 마태복음 3:2절을 다시 보면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뭐라고 말씀하고 계시나요?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회개 뒤에 있게 되는 것이 천국의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자범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세상이 주는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피해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린 죄의 문제를 회개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러자니 우선은 회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원어에서 보면 ‘회개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메타노에오’인데, 직역하면 ‘마음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즉 ‘회개’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마음을 바꿔 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음을 바꾼다’는 말이 의미하는 게 뭘까요?
흔히 누군가가 어떤 중차대한 일을 앞뒀거나 상당히 힘든 도전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에게 뭐라고 합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라거나 ‘마음의 준비가 됐냐?’라고들 합니다.
이때 사용된 마음은 단지 생각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뭔가를 행동하는 것을 전제로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의 원뜻이 ‘마음을 바꾸는 것’이라는 건 회개가 단지 자백이나 자책만이 아니라 뭔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행동이나 다른 결단을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탕자의 비유에서도 보면 탕자는 아버지에게서 유산을 미리 받아 내 맘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탕자는 단지 생각만으로만 끝내지를 않고 그리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이렇듯 일단 마음을 먹고 나니 그다음으로 탕자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달라는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에도 마찬가집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비렁뱅이가 된 이후에 그는 아버지에게로 가면 먹으며 사는 게 지금보다는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엔 어찌했던가요?
역시나 탕자는 생각으로만 끝내지 않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자.’는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그리 마음을 먹고 나니 그다음으로 탕자는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이런 탕자의 비유에서 우린 성경이 말하는 회개의 제대로 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회개가 일반의 뉘우침이나 반성 또는 후회와 다른 것은 그저 잘못했다거나 잘못됐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바꿔 먹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탕자의 시대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에게 원하는 걸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과 고생과 수고를 요구하는 곳이 세상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혼자서 이리 해보자. 저리 해보면 될까? 하고 애만 쓰다 보면 사는 게 바빠 의도치 않게 많은 순간들을 하나님을 잊고 살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없이 사는 순간’들이 자범죄인 거고 그것들이 반복되면서 매 순간 하나님 없이 살다 보니 사탄이 주는 시험과 고난도 당연히 당하며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기 위해 지은 죄를 떠올리실 때면 내가 했던 행위에서 죄를 찾지 마시고 내가 하나님을 잊고 살았던 순간들을 헤아리셔서 이후론 하나님을 늘 의지하며 살기로 마음을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절에서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언제든 복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회개를 위해 내가 지은 죄를 세상 법이나 교회 법안에서만 찾으려 하다 보면 사람들은 각기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첫째는 혹여라도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은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늘 주눅 들어 살아갑니다.
둘째로는 자신은 세상에서건 교회에서건 법적인 죄를 짓지 않았다 여기기에 회개를 마치 사극에서 임금 앞에 나와 말로만 ‘죽여주시옵소서’라고 하듯이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만 할 뿐이다 보니 이런 것들은 이는 올바른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을 오해한 불행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고 인생이 안 풀리는 이유가 여러분에게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했다 해서 내가 뭔 죄를 그리 많이 지었느냐고 억울해 하지 마시고, 나보다 더 죄짓고 사는 사람도 나보다는 더 잘살고 잘 풀리는 인생이라며 낙심하거나 분노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하지 않은 삶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았던 순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없이 살다 보니 때론 세상 법에 저촉되거나 교회 법을 어기는 잘못을 범하며 살기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회개하고자 할 때면 행위로 드러난 ‘죄의 잔가지’들만 붙들고 ‘잘못했느니. 잘하겠다느니’라고 할 게 아니라, ‘죄의 뿌리’가 되는 ‘하나님 없이 살았던 순간’들을 회개해야 하는 것이고, 회개가 ‘마음을 바꿔 먹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잊은 채 뭔가를 해보자 했던 마음을 이젠 하나님께 기도해서 응답을 받자는 마음으로 바꿔 먹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마음먹은 걸 행동으로 옮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할 때면 하나님 역시도 행동하셔서 그간 우리가 회개하지 않음으로 해서 주시지 못했던 모든 복을 다 주시되 그야말로 성경이 약속한 대로 흔들며 부어 차고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복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 1절을 재해석하자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우리에게 하나님 없이 사는 순간이 많았기에 복을 주지 못하신 것이었습니다. 또한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도, 부르지도, 기도하지도 않았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들으실 게 없으셨던 겁니다.
민수기 14:28절의 말씀대로라면 하나님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으니 하나님 귀에 우리에게 복 주실 만한 소리가 들린 게 있어야 복을 주실 것 아니겠는가 말입니다.
본문 1절은 그걸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들으신 게 없기에 들은 대로 해 주실 것도 없었다는 것이고, 결국은 이게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을 받지 못하고 사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턴 우리도 마음을 바꿔 먹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순간들을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늘 찾고 믿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서, 이젠 그만 죄로 인한 고생과 괴로운 인생은 끝내고 죄로부터 자유한, 그래서 하나님이 복 주실 때 받고, 응답하실 때 누리는 인생이 되기 위하여 여러분이 사는 삶의 현장 어디에서든, 어떤 형편이나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늘 생각하며, 믿고, 기도하여,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여러분도 받아 누리며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