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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의 시 쓰기, 부재하는 공동체
-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리뷰
김태선(문학평론가)
황인찬의 첫 번째 시집 『구관조 씻기기』(민음사, 2012)가 출간되었을 때, 그의 작법에 대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인 일이 있다.
그 특징적인 것들 중 하나는 관조의 태도, 즉 사물에 어떤 개입을 하기보다는 그 사물이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을 말로 옮기려는 태도였다. 관조라 했지만 물론 시의 주체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진 않는다. 대상에 어떤 작용을 가하기도 한다. 가령 「건조과」에서 보이는 “나는 말린 과일로 차를 끓인다”라는 수행문처럼. 그런데 “말린 과일은 뜨거운 물속에서도 말린 과일로 남는다”라는 표현처럼, 어떤 행위를 가하더라도 여전히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시의 주체가 대상에 가하는 행위는 무위의 행위가 되고 관조의 태도는 유지된다. 분명 어떤 일을 하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작용을 산출한다. 이 지점에서 ‘안 하기를 행함’이라는 의미인 종래의 무위와는 조금은 다르다.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에서 대상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모습은 줄어들고, 행위를 하는 장면이 늘어났다. 시의 주체는 더 이상 대상을 관조하지만은 않는다. 행위는 주로 “~는데, ~이다”라는 구문으로 나타난다. 가령 “새를 팔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새를 사는 사람이 없었다”(「종로일가」), “다른 아이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너”(「조물」), “아무런 비밀도 없는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계다”(「네가 아닌 병원」), “총소리가 들릴 이유가 없는데 총소리가 들리는 것은”(「여름 연습」), “네가 죽는 꿈을 꿨는데 아무렇지 않았다” “검은 모래가 하염없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바다였다”(「유사」), “누군가의 죽음도 아닌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나는 한 가지 일만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등, 이외에도 열거하지 않은 많은 표현들이 있다.
이러한 문장들은 “~이므로 ~이다”라는 인과의 표현과는 달리, 어떤 행위가 일어났음에도 뒤따르는 결과는 행위의 목적과는 전혀 다른 일이 이루어지는 바를 나타낸다. 때문에 시에 등장하는 주체의 움직임은 행위를 지워버리는 행위가 된다. 일종의 부정(否定)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개의 부정은 대상을 향하는 반면, 이 움직임은 시의 주체 자신을 향한다. 주체가 목적한 바대로 조작되는 세계가 아니라, 세계가 주체의 조작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스스로를 드러내는 운행이 『희지의 세계』에서 주로 나타난다. 목적에 의한 작위와는 관계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사물과 그것에 어떤 작용을 가하거나 바라보는 주체가 있다. 이들의 관계를 무엇이라 어떻게 이를 수 있을까. 황인찬의 시에 나타나는 관계들은 어떤 목적을 담지하고 쓰였다기보다는, 글쓰기 자체의 유희적 움직임에 의해 산출된 우연의 결과들이다.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목적을 배반한다. 유희적인 움직임에 의한 결과는 반성적 사유를 배제한다. 즉 그 결과를 움직임에 내재한 목적인으로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책상이 있고 책상에 누가 누운 흔적이 있고 수백 개의 창이 있고 거기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는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조용히 움직이는 초침이 있고 망상과 전망을 혼동하는 시인이 있고 점차로 잦아드는 들숨과 날숨이 있는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낮과 무관한 밤이 있고 눈뜨지 않는 육체에 갇힌 영혼이 있고 창밖으로 무수하게 펼쳐진 마지막 잎새가 있는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자주 아픈 사람은 병원에 자주 가고 계속 아픈 사람은 병원에 계속 있고 아프지 않으면 오지도 못하는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
아무런 비밀도 없는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계다
- 「 네가 아닌 병원」 전문
시가 그려내는 것은 ‘네가 아닌 병원’의 풍경이다. 누가 누운 흔적이 있는 책상이 있고, 수백 개의 창과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고, 망상과 전망을 혼동하는 시인이 있고, 잦아드는 숨이 있고, 낮과 무관한 밤이 있고, 육체에 갇힌 영혼이 있고……. 기묘한 일은 이 풍경을 열거하는 대목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이 전혀 병원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병원에 있어야 할 것들이라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아파 보이는 것들만 있다. 시에선, 병원이라면 아픔들을 응당 치료하는 데 쓰이는 것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황인찬의 시는 부정하는 문장의 배열로써 인식의 충돌을 일으키며 의미화에 저항한다. “이곳은 네가 아닌 병원”은 물론 그 의미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이곳은 병원이되 네가 아니다. 병원은 어떤 장소의 이름이기에 사람으로 상정할 수 있는 ‘너’라고 지칭할 수는 없다. 그런데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두 대상이 문장에 의해 등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즉 ‘네가 아닌’은 곧 ‘병원’과 등가가 되고, ‘병원’은 ‘너’의 부정이다. 그러나 시는 ‘너’에 대해 말하는 바가 없다. ‘네가 아닌’ 것들의 목록만이 시에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너’는 없다. ‘너’와 대립된 것이라면 ‘네가 아닌 병원’이라는 이곳에 있는 ‘나’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나’는 발화의 주체로 등장할 뿐이지만, 발화가 들려주는 목록들은 결국 ‘너’를 부르지 않고, ‘나’를 지시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로써 ‘나’는 폐쇄적인 곳에 고립된 인물처럼 나타나게 된다.
“네가 아닌 병원”에 대한 목록을 나열하면서 ‘나’의 발화가 우리에게 알게 해주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 “아무런 비밀도 없는데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세계다”라는 사실만이 전부다. 주체의 발화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드러내는 것 같으면서도 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발화가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너’를 부르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 시는 담화의 맥락에 놓여 있지 않다. 담화라는 것은 발화 작용에 포함되어 있는 ‘너’에게 말을 건네는 일이지만, ‘너’는 발화문에서 부재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너’는 부재함으로써 발화 상황과 함께한다. 동시에 시는 여전히 담화로 기능한다.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건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특정되지 않은 비인칭, 부재의 자리로 남아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겨우 집에 왔구나”
그건 일어나지 않는 일이야,
나는 속으로 조용히 말하고
“우리 이제 뭐 할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는 묻는다
- 「 조율」 중에서
「조율」에선 ‘나’와 ‘너’가 등장하며, 분명 둘은 서로 말을 나누고 있다. “너는 나의 왼팔에 매달려 있다”라는 표현처럼 두 사람은 꼭 붙어서 걷고 있다. “뭘 하고 싶어?”라는 물음은 ‘너’의 말이다. 그런데 화자는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라고 한다. 묻는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추운 겨울 저녁 두 사람이 걷는 일 자체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인지 분명치 않다. 다만 앞선 상황 자체가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라는 표현으로 부정되고 있다. 그것은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그 일이 앞서 일어나고 있다. 이 지점에서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라는 말 자체도 부정된다.
부정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담화. 담화란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는 상황이다. 담화의 상황에선 발화하는 ‘나’와 그것을 수신하는 ‘너’가 발화된 문장 안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나’나 ‘너’가 직접 현시되지 않더라도 둘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담화란 1인칭과 2인칭이 만들어내는 이자관계(dyadic relationship)의 움직임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나’와 ‘너’ 두 사람이 분명히 등장하고 ‘너’의 말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과 행위 모두를 부정하기라도 하듯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또한 ‘나’와 ‘너’의 직접적인 대화의 장면은 나타나지 않는다.
‘나’를 향하는 ‘너’의 발화는 직접 등장하고 있지만, ‘나’의 발화는 ‘너’를 향하지 않고 담화 상황 바깥에 있는 수신인을 향한다. 그 수신인은 특정되지 않은 사람, 담화 내에 부재하는 인물, 그러나 화자에게는 청자로 가정된 부정(不定)의 인칭이다. ‘나’는 ‘너’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발화가 향하는 곳은 기묘하게도 ‘너’에게서 비껴나 그 부정의 인칭을 향한다. 수신인을 시의 독자라고 생각할 수는 있겠으나, 독자 역시도 불특정한 누군가일 뿐이다.
부정은 계속된다. 가령 “우리는 아름다운 숲 속을 거닐게 될 거야”라는 미래를 가정하는 표현은 “그건 이미 일어났던 일이고”라는 문장으로 부정되고 “겨우 집에 왔구나”라는 말은 “그건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라는 문장으로 부정된다. 게다가 1연에선 “추운 겨울 저녁”에 걷고 있던 두 사람이 5연에서 “여름밤 주택가에 늘어선 가로등을 따라” 걷는다는 말로 부정되고 있다. 앞서 제시된 상황을 부정하는 문장들로 발화된 모든 것들이 불확정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불확정 상태를 만드는 관계의 양상은 동시에 문장들 간의 위계를 전복시킨다. 일반적인 문장의 흐름은 대개 위에서 아래로 순차적으로 흘러가는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흐름은 하나의 주제 아래 모든 문장을 종속시킨다.
황인찬의 시에 쓰인 문장들은 그런 순차적인 흐름을 거부하고 무언가에 종속되려 하지 않는다. 하나의 목적을 향해 흘러가는 어떤 필연의 움직임에 대한 거부일까.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는 건, 하나의 의미로 고착되어 간다는 것, 일관된 모습으로 종결되어 간다는 것, 어떤 앎을 완성한다는 것일 테다. 제작자의 의도에 맞게 하나의 작업이 의미를 갖게 된다면, 그 역시도 어떤 완성이지만 동시에 죽음으로의 귀결이기도 하다.
어떤 혼은 돌아오지 않고 어떤 혼은 깃들지 않는 교실 안에서 시간이 자꾸 흘러 애들이 죽고, 살아 있던 내가 만든 작은 물건을 믿을 수 없게 커져버린 그 피조물을
죽어버린 나 자신이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 어디에 있지? 혼을 잃은 선생님과 죽은 애들 사이에 여전한 모습으로 네가 있었고
차가운 캔 음료를 얼굴에 대며, 이제 살 것 같다고
너는 말한다
- 「 조물」 중에서
『희지의 세계』에서는 전작에 비해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자주 나타난다. 『구관조 씻기기』에도 죽음에 관한 시어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희지의 세계』에서는 죽음이나 끝에 관한 이야기가 높은 빈도로 출현한다. 죽음은 분명 모든 존재자들의 가능성들이 불가능에 이르게 되는 종착지지만, 동시에 어떤 삶, 혹은 작품이 완성에 이르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희지의 세계』에선 그 죽음이 출현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가령 「조물」에서는 “살아 있던 내가 만든 작은 물건을 믿을 수 없게 커져버린 그 피조물을// 죽어버린 나 자신이 보고 있었다”라는 상황이 제시된다. ‘나’의 의도는 자신이 만든 물건에 혼이 깃들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작은 물건”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너”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작게 만들었던 그 물건은 제멋대로 커져버리고, 오히려 제 혼이 몸을 빠져나와 버리게 되었다. 게다가 ‘너’를 위해 물건을 만들었던 ‘나’는 죽어버렸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너’는 “차가운 캔 음료를 얼굴에 대며, 이제 살 것 같다고” 말한다. 분명 어떤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 행위들의 결과는 의도를 배반하며 일어난다.
이와 유사한 상황이 「서정2」에도 등장한다. 「서정2」에서는 “여름 속에서 자꾸 죽으려 하고 있었다 나무는 죽는 것에 가까운 것이 되고 있었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정작 “나무는 이 여름이 가짜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진술이 이어진다. 나무는 “여름 속에서 자꾸 죽으려”는 행위를 하지만, 자신이 속해 있던 여름이라는 건 가짜였던 셈이다. 이외에도 『희지의 세계』에는 의도에 따라 행해지는 움직임이 결국에 가선 제 의도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반복된다. 시집의 제목 『희지의 세계』마저도 자서에 “이자혜의 만화 『미지의 세계』에서 제목을 빌려 시를 쓰려다 그만 착각을 하고 말았다.”고 쓰여 있다.
시의 주체는 의도에 따라 어떤 일을 행하고자 하지만, 그의 앞에는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계들이 잔뜩 펼쳐지고 있다. 분명 우리 시대는 어떤 일을 해내고자 하여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많은 이들이 어떤 목표를 향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대부분은 실패하고 좌절에 빠지곤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앞선 세대의 어른들이 일러준 대로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그에 대한 보상은 노력에 비해 턱없이 하찮고 시시한 것들인 경우가 많다. 날이 흐를수록 체계는 공고해지고, 개인의 노력으로는 쉽게 세상을 바꾸기 어려워 보인다. 주체의 움직임이 자신의 의도대로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는 일들이 반복된다면, 그 주체는 허무와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황인찬 시의 주체는 비탄에 빠져 있지 않다. 황인찬 시의 주체는 부정의 시 쓰기가 보여준 움직임처럼 의도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움직임마저 부정하면서 어떤 극적인 행위가 아닌 유희를 향해 나아간다. “비는 비의 모습을 지우고, 소리를 지우고,/ 그 부분이 비가 좋아하는 부분”(「채널링」)이라는 말처럼, 그의 시가 드러내는 움직임은 자기 자신을 지우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런 일을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라 생각하는 모습이다. 시인이 행하고자 하는 일은 큰 변화가 아니다. 「채널링」에 쓰인 것처럼 “우리는 시시하고 즐거운 일들을 하기로 했다/ 그것들을 계획하면서 너무 신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다.
시는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 황인찬의 시는 다만 시시한 일들을 계획하며 즐거워하는 이의 목소리를 구현하려 할 뿐이다. 시로써 그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는 있지만, 애써 어떤 공통분모를 만들거나 연루되고자 하진 않는다. 그러나 시는 하지 않음으로써 무언가 해낸다. “어디로도 향하지 않았는데 자꾸 어딘가에 당도하는 것”(「이것이 시라고 생각된다면」)처럼. 물론 이런 일은 “너무 무섭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들게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 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정해진 자리로부터 달아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잘할 수도 있지만 잘못하기로 했어요
그냥 멍 짖어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작은 새가요
자꾸 멍하면 좋아요 아주 좋아요
- 「 멍하면 멍」 중에서
아마도 그건 시를 쓰는 일. 황인찬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이란 “누군가 시를 쓴다면 그건 그냥 시예요”라는 것 외에는 다른 수식이 필요치 않아 보인다. 중요한 건 누군가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 시가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냥 시’라는 점이다. 시는 분명 어떤 의미를 전하지만, 어떤 정확한 의미라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 시를 읽는 일은 항상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시는 이 세계라는 감각의 연속들을 분절하여 언어라는 옷을 입힌다. 그럼에도 그 언어가 작품이 되는 순간, 다시 사물이라는 연속적인 감각의 상태가 되어버린다. 사물은 하나의 외연에 무한한 내포를 담지하고 있는 것. 때문에 사물의 감각을 의미의 그물로 포획하려 할 때엔 붙잡히지 않고 달아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시는 매순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맥락에 자신을 기입하면서, 동시에 그곳을 빠져나간다. 일의적인 의미로 시를 읽어내는 시도는, 그래서 불가능한 시도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시는 나름의 의미를 그 누군가에게 전한다.
“멍하면 멍 짖어요”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어떤 은유나 알레고리 같은 걸 확인할 필요는 없겠다. 은유라든가 알레고리라든가 하는 것들을 몰라도 괜찮다. 『희지의 세계』에는 ‘모른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애써 시인은 이를 앎의 상태로 전환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앎이라는 건 세계를 장악하려는 어떤 가정에 불과할 뿐이다. 모르는 일을 긍정할 수 있을 때, 오히려 주체는 자신에게 부과된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시인은 “잘할 수도 있지만 잘못하기로 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그냥 시를 쓰는 일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예술가의 미학적 태도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시를 쓰기 위해선 시를 쓰기 위한 능력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 능력은 앞선 세대가 만들어 놓은 전범을 따르는 가운데 획득된다. 시를 쓰기 위해선 시라는 것에 대한 연습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쓰기 위해 학습했던 능력만을 발휘하는 일은 그저 시 비슷한 것만을 만들 뿐이다. 그것은 시가 아니다.
시를 쓰는 일은 능력을 배반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는 가운데서 시가 나온다. 그렇게 쓰인 시는 어떤 목적이나 능력을 따르는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순전히 유희에 의한 산물일 것이다. 더 이상 시인 자신의 것이라 할 수도 없을, 스스로 존재하게 되는 그러한 것이 될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을 준다. “자꾸 멍하면 좋아요 아주 좋아요”라는 말처럼. 시시해 보이더라도, 이는 이 시대가 우리에게 안겨 준, 어떤 목적에 따라 움직일 것을 종용하는 죄악감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움직임이다.
앞서 황인찬의 시에서 목소리를 내는 주체는 홀로 고립된 세계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며, 전언의 수신인은 부재하는 누군가라고 언급하였다. 시집의 표제작 「희지의 세계」에는 양들을 기르며 자족적인 생활을 하는 희지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분명 그의 곁에는 양들과 목양견 미주가 함께한다. 그러나 시에는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처럼 황인찬의 시에 등장하는 초점 인물이나 목소리를 내는 주체는 특정한 개인과 접합되어 있지 않고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향하는 곳은 구체적인 개인이 아니라 특정되지 않은 그 누군가가 된다.
그 누군가는 시의 주체와는 어떠한 공통점이나 우정의 흔적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는 자리에 있다. 황인찬의 시가 그려내는 담화의 수신인은 모르는 사람이다. 담화 내에서는 부재하는 인물, 그러나 부재함으로써 담화 안으로 호출되는 인물이다. 이는 ‘나’에게는 부재하는 이로 상정된 ‘너’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황인찬의 시 쓰기는 특정되지 않는 이에게 말을 건네면서 독특한 모습의 공동체를 가정케 한다. 바로 부재하는 공동체, 어떤 앎을 상정하지 않고, 모르는 일을 긍정하는 공동체다. 모든 우정을 배제하지만, 그런 부정으로써 시 쓰기는 어떤 우정을 향해 나아간다. 그 우정이 자리하는 곳은 앎이라는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앎을 상정하는 일은 공동체를 하나라는 동일성의 맥락에 자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모름을 긍정하는 이 공동체에는 계속해서 다름을 향해 열린다. 이렇게 폐쇄와 고립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였던 ‘나’의 세계가 열린다. 이는 나와 너라는 이자 관계의 닫힌 항을 상정하는 담화를 부정하며, ‘너’의 자리에 누군가라는 비인칭, 부정(不定)의 인물이라는 부재의 자리를 놓음으로써 닫힌 체계를 부정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독특한 담화에 의해 가능해진다. 불가능해 보였던 소통은 그렇게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렇게, 시를 통해 그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건네는 방식은 기묘하게도 어떤 연루를 만들어낸다. 이런 연루를 통해 황인찬의 시를 읽는 이들은 시에 드러나는 ‘있음의 세계’를 서로 나누는 일에 참여한다. 어떤 의미의 공유가 아니라 의미 이전의 감각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현사실성을 나누는 것이다. 앎을 상정하는 비밀을 나누는 것보다, 모르는 것 자체를 긍정하며 나눠 갖는 일이다. 앎을 상정하는 미지의 세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든 그 다름을 받아들이는, 유희하는 희지의 세계를 나누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