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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열도기행 ]
먹거리 천국-오사카
천년의 세월-교토
글 사진 / 이영섭 일본여행전문기자
낮보다 화려한 도톤보리 야경
흔히 오사카(大阪)하면 쿠이다오레(食い倒れ 먹다가 망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을 대표하는 먹거리 천국이다. 회전초밥, 삼각김밥, 오코노미야키, 타코야키… 모두 오사카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오사카에서는 결국 맛에 취하게 된다. 예전부터 나니와(浪速 물의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항구 도시다운 분위기는 부산하고도 많이 닮았다. 도쿄(東京)가 세련된 회색빛이라면 오사카는 훨씬 더 요란하고 활력 넘치는 원색이다. 익숙하지는 않아도 마음이 편한 곳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천년의 고도 교토(京都), 아스카 문화가 꽃피운 나라(奈良) 등 오랜 전통과 문화, 자연 등 다채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알면 알수록 깊은 매력에 빠지게 된다.
낮보다 더 화려한 ‘도톤보리’
거리에 낙엽이 한잎 두잎 떨어지기 시작하던 날 서울을 떠났다. 오사카의 관문 간사이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오사카 시내로 바로 들어가는 청 보랏빛 난바(難波)행 특급열차가 한눈에 들어왔지만 ‘스루토간사이 패스’로 보통열차를 탔다. 오사카 중심 난바 역까지는 50분 남짓. 바다를 끼고 달리는 기차는 여유롭게 풍경을 조망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난바 역에서 지하철 요츠바시선으로 갈아탄 뒤 혼마치역에 내렸다. 간사이 지역은 50여개 기차 노선이 거미줄처럼 엉킨 ‘기차 천국’이었다.
오사카는 쇼핑 지역이 수없이 쪼개지는 도쿄와는 달리 ‘기타(북쪽)’와 ‘미나미(남쪽)’만 외우면 기본적인 곳은 다 돌아볼 수 있다. 우선 오사카의 명물로 손뽑히는 도톤보리(道頓堀)를 찾았다. 도톤보리 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거리는 어둠이 내리면서 현란한 불빛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인 난바역 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거리는 독특한 간판들이 가득 메워져있다. 북치는 삐에로 ‘쿠이다오레’ 집게발이 움직이는 ‘카니도라쿠’ 같이 역사를 자랑하는 집들이 그야말로 휘황찬란하게 줄을 서있다. 온갖 음식과 마음을 들뜨게 하는 흥겨운 노랫소리들…. 그 중에서 ‘복주는 아저씨’ 간판이 달린 ‘고쿠라쿠(極楽) 상점가’는 1960~70년대 오사카 거리와 상점가들을 재현해 놓은 푸드 테마파크로 먹거리들이 가득했다. 향수를 자극하는 이색적인 분위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한결 여유가 생겼다.
새하얀 자태를 뽐내는 히메지성
한 폭의 그림 백로의 성 ‘히메지 성’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히메지 성(姫路城)을 보기 위해서 아침부터 서둘러야 했다. 바다를 끼고 달리는 한신본선에 몸을 실고 2시간 남짓 달려서 종점에 도착했다. 히메지 성을 만난 건 이번 여행 중 가장 잘한 일이다. 잠에서 덜 깬 졸린 눈을 비비면서 만난 눈이 부시게 하얀 성은 꿈꾸듯 만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란(亂)에서 주인공이 불타는 성 안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 마지막 장면이 바로 일본 최초의 국보건물인 히메지성(姬路城)이다. 그러나 영화와는 달리 히메지성은 축성 이래 단 한 번도 전화에 휩싸인 적도 화재도 없었다고 한다. 400년을 히메산 위에 우뚝 선 채 그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 제대로 진수를 느낄 수 있었다.
부채꼴 모양과 하얀 외벽으로 ‘백로의 성’이란 애칭을 갖고 있는 히메지성은 천수각이 있는 6층까지 삐걱대는 나무복도와 계단을 오르면서 17세기 성주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 긴 복도 옆방에는 공주(센히메)를 모신 하녀들이 살았고 공주는 이 복도에서 아침저녁으로 오토코야마 신사(男山神社)를 향해 참배를 했다고 한다.
파란하늘과 하얀 새털구름사이로 백로 한마리가 우아하게 앉아 있는 히메지성을 뒤로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리려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 공주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흔드는 듯했다. 몽롱한 기분으로 일본의 3대 온천으로 꼽히는 아리마온천을 찾아 나섰다.
아리마 온천 족탕
황금빛 온천 ‘아리마 온천’
신카이치역에서 아리마선을 타고 아리마온천역으로 기차를 갈아탔다. 장난감처럼 작고 낡은 기차는 시골 온천마을의 정겨움이 빼곡히 묻어났다. 효고현 고베(神戶) 북부지역에 자리 잡은 아리마 온천(有馬温泉)은 일본의 3대 온천 중 하나로 꼽히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다. 잊고 있었던 고향동네를 찾은 것처럼 아릿함이 스며든다.
아리마 온천은 온천수의 색깔에 따라 금탕(킨노유)과 은탕(긴노유)으로 구분하는데 금탕은 온천수가 황토보다 진한 금빛을 띠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색깔이 진한 갈색을 띠는 이유는 바로 온천수에 다량 함유된 철분 성분 때문이다. 금탕과 달리 은탕은 일반적인 물 색깔과 차이가 없이 무색투명하다. 금탕과 대비시키는 차원에서 은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듯하다.
느긋하게 온천 골목을 걸어서 진흙탕 온천으로 유명한 킨노유(金の湯) 찾았다. 황금빛 원천이 흐르는 족탕(足湯 발만 담그는 온천)에 두 발을 담근 채 모처럼 한가롭게 수다를 떨었다.
아리마 온천을 하면 지팡이도 버린다는데 족탕만으로도 한결 가뿐해진 기분이다. 어디 버려야 할 게 지팡이 뿐이겠는가? 서둘러 호쿠신급행을 타고 고베로 향했으나 이미 날은 저물었다. 난킨마치 차이나타운에서 커다란 만두를 베어 물었을 때 고베항 포트타워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쪽빛 하늘에 물든 기요미즈테라
기요미즈테라 입구
천년 세월의 매력 ‘교토’
천년 고도 교토를 찾았을 때는 사진을 많이 찍으려는 욕심이 생겼다. 여행 내내 맑은 날씨는 이날도 계속되어서 커다란 행운을 잡은 기분이었다. 경주와 비교되는 교토에서 세계문화유산을 일일이 열거한다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수도 많거니와 역사와 유적의 고대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허투로 지나칠 곳 하나 없고, 온전하지는 않지만 과거의 융성과 영화를 짐작케 하는 역사의 편린들이 산재해 있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렇게 다양한 표정들을 사진 몇 장에 담을 수 야 없겠지만 어째 뜬 눈으로 확인한 것은 힘닿는데 까지 담을 작정으로 기요미즈테라(清水寺)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기요미즈테라로 향하는 골목길은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어 교토다운 풍경을 더 했다. 개성 있는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올라서니 기요미즈테라였다. 8세기에 처음 세워진 이래 화재로 소실됐던 것을 163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재건해서 지금까지 이른다고 한다.
기요미즈테라는 건축양식이 독특했다. 섬세한 손을 지닌 여인네가 조물조물 거려 빚은 장난감 같았다. 본당으로 올라서니 교토시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한눈에 쏙 들어온다. 사진기에 손이 저절로 가는 풍경이다. 기요미즈테라를 둘러보고 내려서다 운 좋게 게이샤를 만났다. 그동안 사진에서나 봤던 게이샤를 거리에서 만나니 이색적인 재미를 더 해줬다. 진짜 게이샤는 아닌 것 같지만 묘한 즐거움을 주는 것은 분명했다. 캔버스처럼 새하얀 두터운 화장 오시로이(白粉 얼굴에 바른 흰색 분) 아래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볼그레한 청춘의 열꽃도 느낄 수 있었다.
교토에서 만난 게이샤
교토 동산문화를 대표하는 은각사
금빛 그림자를 드리운 금각사
교토의 진수 은각사 - 금각사
은각사(銀閣寺 긴카쿠지)와 금각사(金閣寺 킨카쿠지)에서 교토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화려한 북산문화를 대표하는 금각사에 비교되는 단순하고 차분한 동산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은각사다. 은각사라고 해서 은을 입힌 것은 아니다. 본래는 관음전이었던 건물이 속칭 은각이었다고 한다. 은각사 입구는 나무를 터널처럼 깎아 놓아서 편안하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소박한 정원 앞에 모래로 조성한 카레산스이(枯山水) 앞에 서니 청신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은각사를 끼고 도는 작은 개울을 따라서 ‘철학의 길’이 펼쳐지는데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즐겨 걸었다고 한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장관을 이루는 이 한적한 길을 천천히 산책하면서 잠시 숨을 돌렸다.
한적한 오후에 만난 금각사는 묘한 곳이었다. 도무지 절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금각사는 장군 아시카가가 쓰던 별장이었다. 그가 죽고 나서 록원사라는 절이 되었는데 화려한 금박에 대해 사람들이 붙인 별명인 셈이다. 수면에 비추는 금각은 일본인들이 교토의 진수라는 금각사를 가리킬 때 하는 말이다. 해질 무렵 햇살을 받아 연못 위에 금빛 그림자를 드리운 금각사를 보고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덕분에 나라의 사슴들과 만나려던 꿈은 깨지고 허전한 마음을 회전초밥 ‘류쿠테이’에서 달랬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던가?
역사의 현장 오사카성
천년을 거슬러 현실로…
아침 일찍 짐을 싸놓고 오사카성(大坂城)을 찾았다. 주오선 다니마치 4초메역을 나서니 한눈에 천수각이 들어온다. 오사카성을 만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전범이지만 일본에서는 천하통일을 이룬 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역사란 야누스의 얼굴처럼 아이러니하다. 오사카성은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불타는 바람에 수차례 증축을 거치면서 1997년에 천수각 내부에 엘리베이터 설치 등 현대식으로 완성되었다. 오사카성은 도심 속 공원으로 최적의 나들이 장소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같은 성을 지키기 위해 성 주변을 파서 강을 만들고 건물의 고도를 제한했다고 한다. 8층 전망대에 올라서서 그림처럼 펼쳐지는 오사카 시내를 바라보니 천하를 얻은 듯 힘이 불끈 생겼다.
다시 난카이선에 몸을 싣고 밀물처럼 밀려드는 피로에 눈을 감았다. 하긴 천년의 시간을 넘나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