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두서 없습니다만, 일단 참고가 될만 하겠다 싶어 정리하여 긴 글 올려 봅니다.
- 1972년 사베나 572편 인질극 -
(당시 특공대의 직속상관으로 작전을 지시했던 유대인 무장단체 출신 모셰 다얀의 모습)
사베나 572편은 1972년 5월 8일, 오스트리아의 빈 에서 이스라엘의 텔 아비브로 가던 벨기에 여객기였습니다. 그런데, 네 명의 무장괴한이 이 여객기를 공중납치해 버렸습니다. 이들은 현재, 4개월 후 악명 높은 뮌헨 올림픽 인질극을 벌인 것으로 지목되는 "검은 9월단" 소속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 목적지대로 텔 아비브 근처에 비행기는 착륙했고, 인질범들은 이스라엘에 있는 수백명 규모의 자신들이 지목하는 수감자들을 석방하라는 요구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이들이, 폭탄으로 인질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이스라엘 측은 협상을 하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당시 협상에 나선 사람은, 이스라엘 건국 초기 스스로 무장단체 출신으로 정치인이 된 모셰 다얀이었습니다. 애꾸눈 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지는 그는, 협상을 질질끌면서, 구출작전을 준비하도록 했고, 곧 "동위원소 작전" 이라는 작전 암호명으로 특공대가 편성되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4시. 16명의 특공대원이 구출작전을 개시했습니다. 특공대의 대장은 에후드 바락으로, 이듬해 벌어진 중동전쟁에서 활약하고 20세기말에는 이스라엘 총리에까지 오르는 인물입니다. 그 부하 중에는 그보다 앞서 이스라엘 총리가 되는 벤야민 네타냐후도 있었습니다. 특공대는 비행기 정비사 등의 기술자로 위장하고, 비행기를 고치고 재정비해주는 척 하면서 비행기에 접근했습니다.
(당시 부상을 입은 특공대원이었던 벤야민 네타냐후의 현재 모습)
특공대는 곧 기내에 돌입하여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10분 간의 총격전에 두 명의 인질범이 사살되었고, 두 명은 생포되었습니다. 승객 중 두 명이 부상 당했고 한 명은 죽게 됩니다. 특공대 대원 중에는 벤야민 네타냐후도 부상을 입는데, 곧 회복합니다.
- 1972년 뮌헨 올림픽 인질극 -
(TV로 생중계된 당시 뮌헨 올림픽 인질극의 인질범 모습)
1948년 런던 올림픽에도 우리나라는 참가했습니다만, 당시는 아직 대한민국 정부가 완성되기 전이었으므로, 현재와 같은 대한민국 정부의 이름으로 처음 올림픽에 정식 참가한 것은 한국전쟁 도중인 1952년 헬싱키 올림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43명을 파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꿈자리가 사나웠는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72년 뮌헨 올림픽에는 그보다도 더욱 숫자가 적은 불과 39명의 선수단이 파견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한국이 가장 적은 선수단을 파견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후, 수영선수 조오련 등 현지에서 몇명이 더 합류하여 좀 더 숫자가 늘어나긴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국제정세에 불안한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측에 내쫓긴 팔레스타인 측은 요르단에서도 배척을 당하고, 아랍권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갖고 있는 대국 이집트도 서서히 미국과 친한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후 이집트는 1979년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고 아직까지도 비교적 미국,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편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 정세 속에서 당시 팔레스타인 과격 집단은 획기적인 전기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여러 첩보와 뜬소문을 입수한 이스라엘 측은 여기에 유의하여, 이러한 대규모 국제 행사에서 테러나 인질극이 벌어질 위험성에 우려를 품었습니다. 뮌헨은 특히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비하여 지리적으로 팔레스타인과 훨씬 가깝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뮌헨 올림픽은 아돌프 히트러의 나치 선전 행사로 기획된 베를린 올림픽에 이어 독일에서 두번째로 치르는 행사였습니다. 또한, 나치 독일 패망 이후, 새롭게 건설된 서독으로서는 처음으로 치르는 올림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측은 최대한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올림픽은 일주일이 넘게 평화롭고 성공적인 축제로 진행되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각국 기자들로부터 독일측의 지나치게 엄격하고 깐깐한 보안정책에 불만이 나오자, 어느새 독일 당국의 보안정책은 느슨해 지게 됩니다.
1979년 9월 5일. 새벽 4시경. 해가 뜨기 직전 무렵, 여느 올림픽 선수처럼 운동복과 운동복 가방을 입은 8명의 괴한들이 올림픽 선수단 숙소 근처에 나타납니다. 이들은 일부가 올림픽 행사 관련 자원봉사단 혹은 관계사 노동자로 들어가 이미 동태와 정황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8명의 괴한들은 2미터 정도의 담장을 넘어 선수단 숙소 안으로 진입했고, 운동복 가방에서 소총과 권총, 수류탄을 꺼내어 무장하고 복면을 뒤집어 씁니다.
재빨리 이스라엘 선수단의 방으로 달려간 이들은, 이스라엘 선수단이 묵고 있는 방에 노크를 하며, 독일어로 묻습니다.
"이 방이 이스라엘 선수단 방입니까?"
(TV에 잡힌 당시 인질과 뒤에 총을 들이대고 있는 인질범의 모습)
그리고 문이 열리는데, 침대에 누워 있던 이스라엘 선수단이 얼핏 보니, 복면을 뒤집어 쓰고 무장한 괴한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선수단 쪽은 황급히 문을 닫았고, 곧 덩치좋은 역도 선수단 사람이 몸을 던져 문을 막았습니다. 이 사람의 힘이 워낙 좋아서 한동안 무장괴한들은 방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막고 있는 사이에, 방안에 있던 권투선수가 창문을 깨고 탈출했습니다. 마침내 다섯명의 무장괴한들이 힘을 합하여 문을 밀친 끝에 무장괴한 문을 막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의 힘을 이겨내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무장괴한들은 총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제압하여 차례로 다른 방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인질로 붙잡으려 했습니다.
혼란한 와중에 이스라엘 레슬링 선수가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해서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한편으로는, 역도 선수 한 명이 부엌에서 식칼을 집어와 무장괴한들과 싸우다가 죽기도 했습니다. 때마침, 외박을 하고 들어온 역도 코치 한 명이 영문을 모른채 현장에 나타나는데, 이 사람 역시 인질범의 위협에 아랑곳 하지 않고, 식칼을 집어 저항하고 권총을 빼앗아 싸우다가 여러 발의 총격을 받고 죽고 맙니다.
이리하여, 이른아침 5시가 다 되어 갈 무렵, 인질범들은 도망친 사람, 외박한 사람, 싸우다가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총 아홉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을 인질로 잡게 됩니다. 인질범들은 같은 건물 안에 있던 우루과이 선수단과 홍콩 선수단은 인질로 삼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곧 건물을 빠져 나왔고, 독일 경찰이 출동하여 장갑차와 6백여명의 병력으로 일대를 포위하게 됩니다.
아침 9시가 되자, 협상을 위해 뮌헨 경찰 책임자가 혈혈단신으로 선수단 건물을 향해 걸어 들어갔습니다. 경찰서장 앞에 수류탄을 손에 쥔 무장괴한이 나와서는 영어로 쓰여 있는 종이 한장을 건넸습니다. 그 내용은 인질범들의 요구조건이었는데, 이들은 도합 236명의 수감자를 석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대립 과정에서 감옥에 갖힌 사람들도 있었고, 인질범들의 동료도 있었으며, 과격 폭력 조직인 적군파 대원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236명을 석방하고, 외국으로 갈 수 있는 비행편을 제공하면 인질을 풀어주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인질범과 협상하러 들어가는 경찰 책임자의 모습)
이스라엘 측은 인질범과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이후 대화 끝에 서독 정부가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독일 정부는 바이에른 지방자치체의 관리를 보내어 협상을 계속했는데, 독일 당국측은 돈을 달라는데로 줄 테니 물러나달라는 것을 주요 협상 조건으로 내걸었고, 이스라엘 선수들을 풀어주면 대신 다른 책임자들을 인질로 내어 주겠다는 조건도 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조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뮌헨 올림픽 인질극에서 가장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독일 국경 경비대 소속 경찰들이, 운동복을 입고 선수들처럼 위장한채, 인질들이 있는 곳으로 몰래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이 선수단 숙소 건물 근처에 있는 아파트에서 망원렌즈로 촬영하고 있는 텔레비전 카메라에 잡혀서 그대로 방송되어 버리게 됩니다. 텔레비전은 이 모습을 생중계했고, 전세계의 시청자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당연히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인질범들도 이 모습을 보았고, 인질범들은 이를 욕하면서 당장 꺼지지 않으면 인질 두 명을 죽이겠다고 합니다. 결국 경찰들은 아무 소득없이 퇴각합니다.
(TV에 찍힌 몰래(...) 접근하는 경찰들의 모습)
당시 인질 중 일부는 부상을 입고 있기도 했고, 일부는 건물 창밖에서 텔레비전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외부의 협상단이나 기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기도 했습니다. 협상은 하루 종일 길게 계속되었고, 마침내 저녁 무렵이 되어 인질범들은 이곳을 떠나 비행기를 타고 이집트의 카이로로 장소를 옮기겠다고 합니다. 아마도, 사방에 독일인과 독일군, 경찰이 가득한 낯선 뮌헨 땅보다는, 아랍권의 도시인 카이로가 훨씬 더 유리한 지역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독일 쪽에서 특공대를 보낸다면, 독일인들 스스로 손바닥 보듯 알고 있는 뮌헨은 인질범들에게 매우 위험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정부는 이에 동의하여, 인질범들에게 가까운 NATO 공군기지에 비행편을 준비해 놓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독일 당국의 계략이었습니다. 독일측은 총도합 5백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NATO 공군기지에 복병과 저격수들을 대거 배치하는 함정을 파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태를 처음부터 지켜보던 경찰 책임자 및 담당자들은 관제탑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활주로 곳곳에 저격수를 배치해 두었습니다. 한편 이들은 이집트까지 비행할 여객기를 대기시켜 두었는데, 특공대원들이 여객기 승무원과 조종사로 변장한채 여객기에서 인질범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질범은 인질들을 데리고 버스와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하여 공군기지에 도착합니다.
독일측의 작전은 헬리콥터에서 내린 인질범 일행이 비행기 안에 타기 시작하면,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으로 위장한 특공대가 인질범을 제압하고, 동시에 비행기 밖의 인질범들을 저격수들이 공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인질범과 인질들이 비행기를 타느라 어느 정도 분산되느라 쉽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측은 인질범들의 세력을 과소평가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당시 독일측이 인질범이 총 8명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네 다섯명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협상으로 시간을 보냈기에, 어느새 깊은 밤이 된 10시 30분. 공군기지에 도착한 인질범들은 우선 두 명만 먼저 나와서 비행기 내부를 미리 살펴 보는 치밀함을 보입니다. 독일측의 긴장감은 높아갔지만, 특공대는 공격을 시작하지 않고, 모든 것이 인질범의 뜻대로 준비된냥 보이도록 가만히 기다리며 참았습니다. 이후, 헬리콥터에서 인질범 두 명이 더 내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누군가 한 발의 탄환을 발사했습니다. 이제 대 부분의 인질범들이 나왔다고 생각하고, 이들만 제압하면 나머지는 항복시키고 인질을 구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듯 보입니다. 이 단 한 발의 총성이 울리자, 즉시 사방에서 총성이 들끌었습니다.
바깥에 있던 네 명의 인질범 중에 세 명이 곧 사살당했습니다. 그런데, 인질범들 중 일부는 여전히 마지막까지 인질과 함께 헬리콥터 안에 있었고, 사태가 급박하다는 것을 안 인질범들이 자포자기로 인질들을 향해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여 인질 전원을 죽여버립니다. 총격전 와중에 독일 경찰측도 한 명이 죽었으며, 독일인 헬리콥터 조종사도 죽었습니다.
(당시 수류탄으로 파괴된 헬리콥터의 모습)
인질범 중 한 명은 사태가 불리해지자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독일 경찰은 이를 추적하여 최루탄을 통해 싸움을 방해한 뒤 총격을 가해 사살했습니다. 새벽 1시 30분이 되어서야 싸움은 끝이 났는데, 끝까지 살아남은 인질범 중 세 명은 생포 되었습니다. 이 중 한 명은 부상조차 당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들 중 두 명은 다음 달 뒤이어진 또다른 인질극에서 석방하라는 요구 조건 때문에 석방됩니다.
이 사건은 모든 면에서 실패한 구출작전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평화와 우정을 추구하는 올림픽 사상 가장 참혹한 비극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독일의 인질범 대응과 특공대 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 왔으며, 이스라엘은 이같은 테러에 맞테러로 응수하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는 하나의 고비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연들이 이어져, 이후에도 수많은 사연과 그만큼 많은 음모론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 이 사건은 TV에 생생히 중계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러한 인질극에서 언론의 부작용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 1976년 엔테베 인질극 -
(문제의 아프리카 우간다 엔테베 공항)
1976년 여름에 벌어진 엔테베 인질극은 국제 인질극의 특공대 구출작전 사상 가장 어려운 작전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례로 널리 언급되는 경우입니다. 이 사건은 1976년 6월 27일, 이스라엘의 텔 아비브에서 출발해 프랑스 파리로 향하던 에어 프랑스 139편 항공기가 중간 기착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륙한 직후 공중 납치 당한 것으로 출발합니다.
인질범들은 독일인 과격행동단인 RZ 소속의 독일인 두 명과, PFLP-EO 소속 팔레스타인 사람 두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비행기를 리비아로 돌리도록 했는데, 리비아에서 임산부인척 위장하며 속임수를 쓴 한 인질을 풀어주었습니다. 이후, 이들은 이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일 것으로 판단되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으로 다시 비행기를 이동시키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우간다에서 동료 3명과 더 합류했고, 이스라엘과 서방 각국에 수감되어 있는 50여명의 동료들을 석방해 달라는 것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인질범들은 7월 1일까지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리고는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질을 풀어주어 이스라엘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풀려나던 비행기의 기장과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며, 승객들을 두고 갈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기장과 승무원들은 인질들과 함께 남기를 자청했는데, 이들의 의리가 후세에도 널리 이야기되기도 했습니다.
(살아 돌아온 사람과 감격의 해후를 하는 당시 상황)
한편, 이스라엘 정부측은 테러범과 협상을 하지 않는 강경한 입장을 애초부터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부에서 인명우선 여론이 도는가하면, 인질의 가족들이 격렬히 항의하고 이스라엘 총리실에 난입하려하는 등, 갈등은 깊어갔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정부는 협상을 시작했고, 협상시한은 7월 4일로 연장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PFLP의 유대인 인질 살해 지령설 등이 떠돌면서, 특공대를 투입해 구출작전을 벌이려는 계획이 시작되게 됩니다.
구출작전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에서 아프리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까지 갈 수 조차 없었습니다. 너무 거리가 멀어서 한 번에 갈 수 있는 비행편 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우간다 정부는 이스라엘에 비협조적이었고, 우간다를 다스리던 독재자 이디 아민은 오히려 인질범 쪽으로 기울어진 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간다 군과 경찰이 둘러싸고 있는 공항에 머나먼 이스라엘에서 출발한 특공대를 보낸 뒤, 수십명의 인질을 잡고 있는 인질범을 골라서 사살하고, 다시 안전하게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임무였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당국은 모사드의 정보원들을 동원해서 엔테베 공항의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는 것으로 임무를 시작했습니다. 모사드는 미국으로부터 엔테베 공항의 위성 사진과 첩보 자료를 입수하는 한편, 엔테베 공항의 건설 공사에 참여한 이스라엘 건설회사로부터, 엔테베 공항의 구조와 관련 도면을 입수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풀려난 인질들을 면담하여, 인질범들의 무장과 항공기 내부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C-130 헤라클레스 수송기를 통해 장비와 특공대를 투입하기로 하고, 비교적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케냐를 경유하여 우간다의 엔테베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이스라엘 측은 협상에 따라 석방된 죄수들을 데려다주는 것이라고 속여서, 특공대를 태운 C-130 헤라클레스 수송기와 지원 항공기를 우간다 상공으로 진입시켰습니다. 착륙한 뒤 깊은 밤을 틈타 특공대는 재빨리 비밀작전을 전개했습니다.
특공대는 검은색 메르세데스 벤츠 고급 승용차와 4륜구동차 몇 대에 나누어 탔습니다. 그리고, 우간다의 절대권력자인 이디 아민의 행차인냥 행세하고 인질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특공대가 인질에게 접근하던 도중, 이디 아민이 자동차를 흰색으로 바꿨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우간다 경비병이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과격하게도 우간다 경비병을 즉시 사살하고, 최대한 빠르게 인질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공항의 전기를 끊어서 순간적으로 암흑상태를 만든후, 이스라엘 특공대는 곧바로 인질범이 장악하고 있는 공항 건물 중앙으로 돌입했습니다.
특공대는 유대인 만 알아 듣도록, 헤브라이 어로 "엎드려!" 라고 소리 지르며 공격을 했습니다. 특공대는 정확한 총격으로 인질범을 제압했고, 이때 헤브라이 어를 모르던 인질인 유대계 프랑스인 소년 한 명이 인질범으로 오인되어 사살당했습니다. 이후 총격 과정에서 세 명의 인질이 사망했고 10명 가량이 다쳤습니다. 30분이 채 못되어 인질범들을 모두 사살한 특공대는 인질과 함께 탈출을 시작했습니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환영하는 이스라엘의 당시 축제 분위기)
인질 구출작전과 동시에, 특공대의 일부는 C-130 허큘리스 수송기에서 보병전투차량을 꺼내와서 우간다 군의 전투기들을 파괴하는 공작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간다 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합류하여, 이스라엘 특공대를 공격하는 우간다군과 싸웠으며, 마침내 우간다를 탈출해 케냐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습니다. 작전 중에 특공대원 한 명이 사살당했고, 우간다 군은 40여명이 죽었습니다.
무사 귀환한 인질들과 특공대원들은 이스라엘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으며, 라빈 이스라엘 총리의 인기도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우간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이스라엘의 우간다 주권 침해를 정식으로 규탄했고, 이스라엘은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맞서서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 1977년 네델란드 열차 인질극 -
(네델란드 BBE 대원들의 모습)
인도네시아에 속한 남부 말루쿠 독립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운 남부 말루쿠 인들이 일으킨 일입니다. 네델란드는 오랫동안 인도네시아 지역을 식민지배하고 있었고, 1949년 인도네시아가 네델란드로부터 독립했기에, 네델란드에는 인도네시아계 주민들이 지금도 꽤 있습니다. 이들중에 남부 말루쿠 독립운동을 내세운 무리들 9명이 1977년 5월 23일 열차를 급습해 긴급 브레이크를 걸어 열차를 세우고 승객 50명을 인질로 잡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건 도중에 네델란드의 선거가 있었으며, 사태 발발 5일째 되는 날에는 말루쿠 독립운동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네델란드 사람들이 포함된 60명의 시민운동가 가 대신 인질이 되기를 자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건은 정치문제화 되는 성향도 없지 않았습니다. 협상이 계속되어 임산부 한 명을 우선 풀어주는 것이 의논되기도 했고, 사건 2주째로 접어 들어서 실제로 임산부 두 명과 병든 인질 한 명이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사건 발발 20일째즈음이 되는 6월 9일 마지막 협상을 했습니다.
사건 발발 21일째인, 6월 11일 주변 조사와 몇 차례의 협상을 통해 내부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네델란드 정부는 마침내 특공대의 구출작전을 기획합니다. 이른아침 5시 네델란드 정부는 우선 F-104 스타파이터 요격기 여섯대를 발진시켜, 열차 바로 위에서 폭음을 내며 저공비행하게 합니다. 이것은 인질범들을 당황하게 하고, 폭음에 놀란 인질들을 바닥에 엎드리게 해서 최대한 안전한 자세를 취하게 하려는 계략이었습니다.
(F-104)
이후, 네델란드 정부는 해병대 소속 특공대인 BBE(Bijzondere Bijstands Eenheid)를 출동시켜서, 엄청난 양의 총격을 퍼부었습니다. 정부측은 인질들은 열차 중간에 있고, 인질범들은 출입구 쪽에서 지키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출입구 지역을 중심으로 약 1만5천발의 탄환을 쏟아 부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9명의 인질범 중 여섯명의 인질범을 사살하고 열차를 장악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출입구 지역 가까이에 있던 인질 한 명이 사망해버리기도 했습니다.
살아 남은 세 명의 인질범은 6에서 9년형의 징역을 살았으며, 이 중 두 명은 스스로 죄를 뉘우친다고 고백한 후, 올해 당시 인질범들을 만나는 모임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 1977년 네델란드 학교 인질극 -
(남부 말루쿠 지역의 모습)
네델란드 열차 인질극과 동시에 일어난 사건으로, 남부 말루쿠 독립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운 네 명의 무장한 인질범이 초등학교를 점령한 일입니다. 인질범들은 105명의 어린이들과 5명의 교사를 인질로 삼았습니다.
인질범들은 학교를 장악한 후 학교 유리창에 신문지를 바르도록 하여 바깥에서 안쪽을 볼 수 없게 만든 후에 범죄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네달란드의 선거 당일, 인질범들은 어린이들을 협박하여 유리창 밖으로 총리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살고 싶어요" 라고 소리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사건 발생 닷새째인 5월 27일. 어린이들이 갑자기 배우 아프게 되어, 인질범들은 어린이들이 일찍 죽어버릴 것을 두려워하여, 어린이들을 풀어줍니다. 이때 어린이들이 아픈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일각에서는 정부측에서 어린이들을 빼내오기 위한 계략을 위해 학교 안으로 공급해준 음식에 독을 탔다는 설도 돌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을 풀어 준 후, 약 열흘 동안 인질범들은 교사를 인질로 잡고 범죄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열차 인질극에 대한 구출 작전이 진행되던 것과 같은 때인, 6월 11일. 이른아침 5시. 네델란드 정부측은 역시 해병대 소속 특공대 BBE를 투입했습니다. 특공대는 장갑차를 동원하여 대규모 진격을 개시했으며, 폭탄을 이용해 벽에 구멍을 뚫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열차 인질극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질범들은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여, 특별한 교전 없이 사태는 종결되었습니다.
- 1977년 란주트 인질극 -
(사건 당시, 루프트 한자 181편, 란주트의 모습)
란주트(Landshut)는 1977년 10월 13일 운항했던 독일 국적 루프트한자 181편 여객기의 별명으로 독일 바이에른 주의 도시 이름을 딴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운 PFLP 라는 단체 소속으로 추정되는 4명의 무장 괴한이 바로 이 루프트한자 181편 여객기를 공중에서 납치한 것입니다. 이들은 82명의 승객을 포함한 91명을 인질로 삼고, 미국돈 1천5백만 달러를 지급할 것고 독일 감옥에 갖혀 있는 적군파(RAF) 소속 11명의 동료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연료와 물자를 보급하고, 보다 안전한 지역을 찾아 로마, 키프로스, 바레인, 두바이, 아덴 등을 경유해 5일 동안 지중해 일대를 비행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소말리아 모가디슈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그 동안 주조종사였던 슈만은 외부와 긴밀히 접촉하거나 설치된 폭탄의 위치를 알리려는 등의 시도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결국 인질범들은 슈만의 머리에 총을 쏘아 살해해버립니다. 인질범은 모가디슈 비행장에 도착하자, 활주로 위에 슈만의 시체를 버렸습니다.
인질범들은 감옥에 갖혀 있는 동료를 석방하라는 최종 시한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독일 정부는 우선 한명을 석방했는데, 소말리아 까지 오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말로 인질범들을 속였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번 뒤, 1977년 10월 17일의 구출작전을 준비했습니다. 구출작전의 작전암호명은 독일 신화와 바그너 오페라에서 따온 "마법 불꽃 (Feuerzauber)"으로 정했습니다.
(독일 GSG 9 대원들의 모습)
독일은 영국의 SAS 특공대와 소말리아 군당국과 연합하여, 현재 독일 연방 경찰 소속으로 되어 있는 국경경비대 소속 특공대 GSG 9 (Grenzschutzgruppe 9) 을 투입했습니다. 이들은 왜 국경경비대에 특공대가 필요하냐라며 예산 낭비 비판을 받기도 하던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동체와 날개에 폭탄을 이용해 구멍을 뚫어 진입로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영국 SAS 특공대가 전해준 섬광탄을 기내로 까넣었습니다. 이 섬광탄으로 인질범들이 앞을 잘 못보게 하고 혼란에 시달리게 한 뒤에 특공대는 일제히 돌입해 총격으로 인질범을 제압했습니다. 네 명의 인질범 중에 세 명이 사살되었고, 한 명은 산 채로 체포되었으며, 일부 승무원들과 대원들이 부상을 입은 것 외에는 모두 무사하게 구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성공적인 작전으로 GSG 9 은 예산 낭비라는 비판을 불식시켰으며, 문제의 항공기 란주트는 현재에는 수리 되어 브라질의 한 항공사에서 운항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소위 "독일 가을 (Deutscher Herbst)"이라 불리우는 1977년 가을 독일과 관련해서 벌어진 각종 인질극, 테러 사건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특공대가 성공을 거둔 경우라 할만 합니다. 이 사건 이후, 독일은 "테러범과는 협상을 하지 않는다" 라는 원칙을 공고히 세우게 됩니다.
- 1980년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극 -
(사건 당시 억류된 미국측 인질들의 모습)
1979년 시작된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극은 1980년대 냉전 말기의 세계 정세를 흔들었던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대외 정책에 직접,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사건입니다. 이란의 인질범 측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와 레이건이 대결하는 것을 교묘히 이용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높이는 계략을 여로모로 사용한 것으로 수많은 이야기거리가 쏟아지는 사건입니다. 그런만큼 음모론도 많습니다.
우선 발단은 이란에서 팔레비 2세 국왕을 몰아낸 호메이니의 반란이 성공한 것에 바탕을 둡니다. 팔레비 2세 국왕은 미국에 협조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망명 생활을 하다가 죽은 후에 그 시체가 미국 뉴욕의 병원 영안실에 가게 됩니다. 이때 이란에서는 팔레비 2세는 이란의 범죄자이므로, 이란으로 인도되어야 된다는 여론이 어느 정도 생기게 됩니다. 이에 1979년 이란의 대학생들이 이란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대사관 직원 52명을 인질로 잡은 것이 사건의 시작입니다. 사건이 장기화 되어 1980년으로 넘어가면서, 사건은 흘러흘러 이란 정부와 미국 정부의 알력 싸움이 되어 버립니다.
1980년 4월 7일 미국은 강경책을 쓰기 위해 이란과 국교를 단절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인질의 안전을 위해서 결국 군사작전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 작전은 육해공군의 각급 정예부대가 힘을 합쳐 벌이는 대규모 작전이었고, 처음에는 "공기밥 작전 (Operation Rice Bowl)" 이라는 이름으로 계획되었습니다.
(미군측의 RH-53D 헬리콥터)
이 작전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태평양과 인도양, 혹은 대서양과 아라비아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먼 지역이 이란이었고, 이 이란과 미국이 대립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사관 근처까지 특공대를 보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정부는 2단계 작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첫번째 작전은 C-130 허큘리스 수송기와 실제 구출작전에 참여할 RH-53D 시 스탤리언 헬리콥터를 보내서 이란의 사막 지역에 임시 기지를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바다 밖에 있는 항공모함과 이란 바깥 지역에서 이란 내륙까지 들어가면 연료가 바닥나게 됩니다. 그러면, 바로 이 임시 기지를 근거지로 버티면서, 그 동안 C-130 허큘리스 수송기로 운반해 온 물자를 이용해서 연료를 보충하고 재정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작전은, 이렇게 재정비가 끝난 RH-53D 시 스탤리언 헬기를 이용해서 다시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까지 가서 본격적인 인질 구출작전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길고도 어려운 작은 전쟁 규모의 구출작전이라 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작전암호명은 "독수리 발톱 작전 (Operation Eagle Claw)" 으로 했고, 1980년 4월 24일 작전은 개시되었습니다.
작전이 개시되자 C-130 허큘리스 수송기가 가장 먼저 임시 기지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모래 바람이 불어서 RH-53D 시 스탤리언 헬리콥터 중 일부가 길을 잃고 도착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 헬리콥터 중 일부는 고장을 일으켜 수리에 고생을 하게 됩니다. 게다가 업친데 덥친격으로, 근처를 지나던 이란 시민들의 버스에 임시 기지가 목격 되어 버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미군은 황급히 버스를 세우고 이란 시민들을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미군은 작전 내내 이들 44명의 시민들을 데리고 있어야 했기에, 병사들의 일손이 부족하고 할 일도 많아져서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사건 당시 작전 실수의 잔해)
결국, 헬리콥터의 숫자가 모자라고, 병력도 부족해져서, 미군은 황급히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급한 철수 과정에서 헬리콥터 한 대가 수송기와 충돌하여, 폭발을 일으켰고, 8명의 병사들이 사망했습니다. 혼란에 휩싸인 미군들은 정신없이 자리를 뜨기 위해 RH-53D 시 스탤리온 헬리콥터 다섯 대를 버리고 가는 바람에 이를 이란 군에게 넘겨주는 셈이 되었고, 들고 온 기밀문서 들을 두고 오는 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독수리 발톱 작전"은 인질이 있는 곳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변변한 싸움 조차 해 보지도 못한채, 괜히 병사들의 목숨과 장비만 날린채 허무한 대실패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이후, 미국은 외교적인 통로를 통해 기나긴 협상을 벌였고, 무려 444일이 지난 후에야 인질은 풀려나게 됩니다. 이때 이란 측은 카터 대통령의 위세를 깎아내리고, 미국 정치권에 영향을 발휘하기 위하여, 일부러 조금씩 시한을 미루다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에 인질을 풀어주는 계략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란 쪽에 잘된 일인지, 못된 일인지는 좀 더 생각할 여지가 큽니다만, 어쨌거나, 덕분에 로널드 레이건은 취임하자마자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 1980년 런던 주재 이란 대사관 인질극 -
(사건 당시 런던 주재 이란 대사관의 모습)
1980년 4월 30일부터 런던에서 벌어진 인질극의 그 바탕은 이란-이라크 전쟁에 있습니다. 이라크 정부는 이란 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최대한 괴롭히기 위해, 이란 내부의 반정부 단체를 지원했는데, 이때 이라크 정부의 도움으로 무기를 입수하고 훈련을 받은 이란의 DRMLA 라는 단체가 이 사건의 범인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이란 남부 지역의 독립운동을 명분으로 내건 단체였습니다만, 이란 정부에게 수감된 자신들의 동료들이 석방하라는 조건을 관철시키려고 인질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조금은 애꿎게도 영국 런던 중심가로 침투한 것입니다. 이들은 4월 30일 한낮에 런던에 있는 이란 대사관을 장악하고 26명의 직원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영국 경찰 당국은 이들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우선 음식과 담배를 제공했고, BBC 방송을 통해 이들의 요구 조건과 협박 내용을 방송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협상을 진행하여 인질범들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의논하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러한 5일동안 인질범들은 다섯명의 인질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6일째 되는 날, 인질범들은 영국 당국의 탈출 운운하는 협상이 속임수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에 인질범들은 인질 한 명을 죽여 건물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이에 분개한 마가렛 대처 당시 영국 수상은 특공대를 보내 구출작전으로 끝을 볼 것을 명령합니다. 경찰청장은 "이제 사태는 범죄가 아니라 전투의 단계이다"라고 하면서, 작전권한을 국방장관에게 넘겼습니다.
(영국 SAS 특공대의 모습)
곧 SAS 특공대의 투입이 결정되었습니다. SAS 특공대가 건물로 진입하는 소리를 인질범들이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계략을 사용했습니다. 우선 히드로 국제 공항으로 착륙하는 모든 비행기들을 최대한 저공비행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이착륙 때 나는 소음이 시내에 크게 울려퍼지도록 했습니다. 또, 영국 가스 공사가 영국 시내에 굴착공사를 일제히 시끄럽게 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바로 옆건물에서 몰래 광섬유 내시경을 집어 넣어 건물 내부의 동태를 살폈고, 고성능 마이크를 이용하여 소리를 엿들었습니다.
SAS 특공대는 목표인 이란 대사관 건물과 똑같이 만든 세트에서 연습 훈련을 마친 뒤, 1980년 5월 5일 저녁 건물 뒤편 계단을 통해 돌입했습니다. 일부는 지붕으로 올라가 창문을 부수고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돌입과 동시에 건물에 전기를 끊어서 인질범들이 볼 수 없게 한 뒤, 섬광탄을 동시에 사용하여 더욱 상대를 혼란 시키기도 했습니다. 격렬한 총격전 끝에 여섯명의 인질범 중 다섯명을 사살했고, 그 와중에 한 명의 인질이 사망했습니다. 총격이 워낙 격렬하여, 죽은 인질범 중 한 사람은 무려 76발의 총상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돌입때 항복 하겠다고 하며 무기를 버린 인질범들도 혼란 와중에 사살되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BBC의 케이트 아디 기자가 45분간 현장을 생생히 방송하여 대대적인 관심을 끌고 영국 SAS 특공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끈 사건으로 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1985년 이집트에어 648편 인질극 -
(협상단이 들어가고 있는 당시 이집트에어 648편의 모습)
1985년 11월 23일. 밤 9시. 이집트에어 648편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이집트의 카이로로 지중해를 건너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륙 후 불과 10분이 지났을 무렵, 세 명의 무장괴한이 나타나 승객과 승무원을 협박하여 기내를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이집트 혁명"의 무리라고 일컬었는데, 후에, 유명한 조직인 아부 니달 조직의 소속인 것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인질범들은 승객들의 여권을 모두 걷었습니다. 인질범들이 하나 둘 여권을 걷고 있는 도중에, 승객들 중에 이집트 정부의 비밀요원이 있었으므로, 이 사람이 총을 꺼내어 인질범을 공격했습니다. 비밀요원은 인질범 한 명을 사살하는데 성공했지만, 인질범 쪽의 반격 때문에 총상을 입고 죽게 됩니다. 이때의 총격전으로 항공기는 동체에 손상을 입게 되고, 때문에 항공기는 압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저공비행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 총격전으로 승객들도 일부 다치게 되었습니다.
두 명이 남은 인질범들은 애초에 리비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론상 리비아 보다는 다른 나라가 좋겠다는 판단을 했고, 또 리비아로 가기에는 연료도 충분하지 않아서 인질범들은 몰타로 방향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집트에어 648편은 몰타를 향해 날아가게 됩니다.
당시 이집트에어 648편은 동체 손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저공비행을 해야만 했고, 게다가 연료도 다 떨어져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죽은 시체가 있었고, 다친 승객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는데다가, 인질범 역시 두 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인질극에 휘말리기를 거부하는 정책을 내세우는 몰타 정부가 몰타에 항공기가 착륙하는 것을 거부해 버리게 됩니다. 인질범들은 몰타 정부를 협박했지만, 몰타 정부는 완강했고, 결국 인질범들은 조종사를 협박해 착륙 허가가 있건 없건 무조건 착륙을 시도하라고 합니다.
(당시 인질범 두목의 모습)
결국, 이집트에어 648편의 조종사는 어두운 시간이었으며, 활주로에 불빛도 켜지지 않은 상황에서 착륙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당시 조종사 하니 갈랄은 기적적인 조종솜씨로 동체가 손상된 이 항공기를 무사히 착륙시키는데 성공하게 되고, 사태는 몰타의 공항을 배경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됩니다.
몰타 측에서는 총리가 직접 관제탑에 나와 협상에 나섭니다. 몰타 군과 경찰은 문제의 항공기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총리는 인질을 모두 풀어주면 연료를 보급해 주고, 포위도 풀겠다고 합니다. 이때까지만해도, 몰타 측은 협상이 성공적으로 풀려가고 있다고 보았고, 실제로 인질범 측은 부상자를 포함하여 13명의 인질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인질범들의 태도는 급변합니다. 인질 중에 이스라엘 국적자인 여자 한 명에게 총을 쏘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15분 마다 인질을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에 미국, 프랑스, 영국 정부가 특공대를 투입해 구출작전을 벌이겠다고 나섰고, 그러면서 시간은 흘러흘러 인질범들은 이스라엘인과 미국인 네 명의 인질에게 차례로 총질을 했습니다. 인질범은 인질의 급소에 탄환을 명중시킨 것은 아니었고 때문에 즉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총 다섯 명의 인질이 인질범의 협박 과정에서 총을 맞았지만, 이들 중에 세 명은 후에 살아 돌아오게 됩니다.
인질들이 하나 둘 총을 맞게 되자, 협상 중인 몰타 당국은 당황합니다. 그 와중에 공항에 와 있던 미국등지의 외교관들이 대대적인 압력을 가하자 몰타 당국은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공항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미군기지가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 때문에 미군이나 미군기지를 통해 이스라엘군이 출동하여 몰타 지역을 접수해버릴 위험을 느꼈던 것입니다. 몰타 정부가 당황하며 고심하던 차에, 미국 측이, 이집트에는 미국의 델타 포스에게 훈련을 받은 특공대가 있다고 소개하게 됩니다. 이에 몰타 정부는 미군 보다는 이집트군을 끌어들이는 것이 몰타의 정치상황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이집트 특공대의 작전을 수락하게 됩니다.
이집트의 특공대는 "천둥번개 부대"라는 뜻의 "알 사이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777 부대였습니다. 이집트의 777 부대는 네 명의 미군 지휘관들과 한 무리가 되어 현장으로 급파되었습니다. 정석대로, 몰타 당국은 협상을 질질끄며 특공대가 작전을 준비할 시간을 끌었습니다. 인질극이 벌어진지 삼일째 되는 날인 11월 25일 이른 아침, 특공대는 음식을 기내로 전해주는 공항직원으로 변장한 채로 항공기에 접근했는데, 특공대는 예정 시각보다 1시간 30분 빨리 기습적으로 돌입을 개시했습니다.
(작전이 끝난 후, 이집트 특공대의 모습)
이집트 특공대는 항공기의 출입구와 화물칸 문에 폭발물을 던져넣어 구멍을 뚫고 기내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화물칸 문에 던져 넣은 폭발물 때문에 화물이 불에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 때문에 비행기 안의 산소통이 터져버려서 불이 더욱 극심하게 타올랐다는 말도 있습니다. 한편, 이 폭발음을 듣자마자 바로 인질범이 상황을 직감하고 인질들에게 수류탄을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화물이 불타는 유독가스와 인질범의 수류탄 공격으로 엉망이 된 아비규환 속에서 혼란스러운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것이 주요 원인이라는 점에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질들이 대거 사망해버린 것만은 사실입니다.
결국 88명의 승객중에 56명이 사망해 버리는 것으로 참담한 실패로 작전은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인질범 한 명은 사살 되었지만, 다른 인질범인 두목, 오마르 모하메드 알리 레자크는 부상만 입었을뿐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리하게도 혼란한 와중에 잽싸게 총을 버리고 스스로 인질인냥 행세했습니다. 총상을 입은 부상자 승객인 척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환자들 틈에 섞여서 현장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합니다. 뒤늦게 사실을 안 특공대들은 황급히 병원으로 난입하여 그를 찾았습니다. 그는 교묘하게 숨어있었지만, 같은 병원에 실려온 승객들이 인질범인 그를 알아보고 지목하여 마침내 그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몰타 정부에서 25년형을 판결을 받고 형을 살다가 8년만에 출옥했는데,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미국측이 그를 다시 체포하였고, 그는 종신형을 판결을 받고 현재까지 수감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 인질극에 대해서는, 최대한 발뺌만 하려한 몰타 정부를 비판하기도 하고, 이집트 특공대의 부족한 실력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의견은 분분하고 내막에도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만, 인질 협상 과정의 계략과 특공대의 구출작전이 서로 잘 협력하지 못했다는 점만은 명백해 보입니다.
(1993년 현재 인질범 두목의 모습)
- 1985년 정의의 궁전 인질극 -
(사건 당시 콜럼비아 대법원 건물의 모습)
"정의의 궁전"은 콜럼비아 대법원 건물의 별명입니다. 1985년 11월 6일. 35명의 게릴라 병사들이 훔친 트럭을 타고 대법원 건물에 들이닥쳐, 건물에서 일하는 공무원들과 판사들을 인질로 잡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게릴라들은 오랜 시간동안 콜럼비아 정부와 대결하던 M-19 소속이었는데, 이들은 콜럼비아 대통령이 바로 이 법원 건물로 와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건물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경비원들을 죽였고, 44명의 판사들을 포함 총 3백명에 달하는 인질을 잡았습니다.
게릴라 들과 싸우는 것이 일이던 콜럼비아 군은 즉각 출동하여 세 시간 만에 건물 1층을 차지하고 약 2백명의 인질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게릴라들은 건물 문을 닫고 완강히 저항했고, 주요 인질들을 건물 화장실에 가두어 두고 항전을 계속했습니다. 이에 오후가 되자, 콜럼비아 군은 EE-9 장갑차들을 대거 끌고와서 건물을 포위했고, 무고한 사상자를 감수하는 포격과 함께 오후 2시부터 본격적인 돌입을 시작했습니다.
(사건 당시 희생자들의 모습)
이튿날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양측 도합 1백명이 사망했으며, 게릴라들은 가망이 없어지자, 주요 인질인 판사들을 끌고와서 일렬로 세워 놓고 총으로 쏘아서 모두 죽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죽었는가, 사건의 정확한 시작과 끝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으며, 게릴라들과 콜럼비아 정부 사이의 평화협정 등등 많은 문제와 얽혀 있기에 여러가지 음모가 난무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대체 왜 장갑차를 이렇게 많이 끌고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콜럼비아 정부의 작전을 지휘했던 플라자스 대령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라고 답했던 일은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 1988년 오베아 동굴 인질극 -
(뉴 칼레도니아, 오베아의 정경)
1988년 4월 22일. 남태평양의 섬인 프랑스령 뉴 칼레도니아 에서 독립운동을 명분으로 내건 인질범들이 27명의 프랑스 경찰과 1명의 판사를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들은 오베아 동굴로 숨어들어 진지를 구축하고, 인질극을 벌였습니다.
요구 조건 관철 과정에서 인질 네 명이 살해 당하자, 10여일만인 1988년 5월 5일 프랑스 정부는 특공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합니다. 공수부대에서 34명, 경찰 공수특전단(EPIGN)에서 14명, 해군 특전단에서 16명, 경찰 특수부대(GIGN)에서 11명이 출동하여, "빅토르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동굴을 지키고 있는 인질범들은 방어를 위해서 경찰에서 훔친 기관총 총좌를 설치하여 항전하고 있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 화염방사기를 활용했습니다.
작전 결과 19명의 인질범이 사살당했고, 2명의 특공대원도 그 와중에 죽었습니다.
- 1991년 싱가포르 에어라인스 117편 인질극 -
(싱가포르 에어라인스 비행기의 모습)
1991년 3월 26일. 파키스탄 인민당 (PPP)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주장하는 4명의 무장 괴한이 말레이시아에서 이륙한 싱가포르 에어라인스 117편을 공중에서 장악했습니다. 그리하여, 118명의 승객과 11명의 승무원이 인질로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에 착륙했을 때, 싱가포르 당국은 이미 협상팀을 준비하여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싱가포르의 협상팀은 인질범들이 파키스탄 정치와 관련된 죄수 몇명을 석방하라는 것과 비행기를 호주로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을 요구 조건으로 내 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밤 중에 인질들은 승무원 두 명을 비행기에서 떠밀어 내쫓아 버렸습니다. 이들은 항공기에서 떨어지면서 부상을 입었지만, 비행기 내부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여 싱가포르 당국이 특공대의 돌입 작전을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싱가포르 당국은 "천둥번개 작전 Operation Thunderbolt"이라는 이름으로 특공대의 구출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싱가포르 특공대 SOF의 모습)
3월 27일 저녁이 되자 기다리기 지루해진, 인질범들은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5분에 한 명씩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런데, 2분이 지나자마자 싱가포르 특공대가 재빨리 돌입해 왔습니다. 특공대는 단 30초만에 4명의 인질범을 정확히 저격해 사살하고 단 한명의 인질도 부상당하지 않은채 작전을 완벽하게 끝냈습니다.
- 1994년 에어프랑스 8969편 인질극 -
(사건 당시 에어프랑스 8969편의 모습)
199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알제리에서 프랑스 파리로 떠나려 하는 에어프랑스 8969편 항공기에 갑자기 4명의 공항 보안관계자가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인가 조사할 것이 있다면서, 항공기 창문등을 봉쇄하고 모든 승객의 소지품을 수거해 갔습니다. 이후,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공개했는데, 자신들은 경찰이나 공항관계자가 아니라, 승객과 승무원을 납치하려고 온 GIA 일당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인질범 4명은 이렇게 해서 승무원들과 220명의 승객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들은 이륙을 하기 위해 관제탑을 협박했으나, 관제탑은 요구를 바로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인질범은 승객들 중에 알제리 경찰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사람을 가장 먼저 살해하여 항공기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계속 인질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 동안 알제리 특공대가 항공기 주변을 포위했고, 또 인질범들은 자신들의 동료를 석방해 달라는 요구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비행기를 가게 해 달라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때부터, 프랑스의 경찰 특수부대인 GIGN 이 출동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프랑스 총리가 여자와 어린이 인질을 풀어준다면, 프랑스 파리로 오도록 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인질범들은 이에 63명의 여자와 어린이 인질을 석방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총리의 결정과 무관하게 알제리 특공대 측에서는 여전히 항공기의 포위를 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분개한 인질범들이 승객 중 베트남 외교관 한 명을 살해했고, 그 시체를 바깥으로 내던졌습니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사태는 크리스마스까지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GIGN 대원들의 모습)
크리스마스 저녁 8시 30분. 인질 중 한명이었던, 프랑스 대사관의 젊은 직원 한 명의 목소리가 무선 교신으로 들려왔습니다. 이 사람은 30분 안에 비행기가 이륙하지 않으면 인질범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도 알제리 특공대는 인질범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결국 9시에 이 사람을 죽여서 시체를 바깥으로 내던졌습니다. 이후, 인질범들은 비행기를 이륙하게 해 주지 않으면, 매 30분 마다 한 명씩 인질을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마침내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알제리 특공대는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도록 포위를 풀고 바퀴의 버팀목을 치웁니다. 그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당국에서는 항공기에 수십개의 다이너마이트가 장치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밝혀지지만, 이들은 비행기에 연료를 가득채워서 더 잘 폭발하게 한 뒤에, 에펠탑이나 프랑스 파리의 인구 밀집지역에 비행기를 충돌시키려고 한것 같다는 설도 있습니다.
마침내 비행기가 이륙하여 프랑스로 향할 무렵. 프랑스 정부가 투입을 준비하고 있던 특공대는 스페인 영토에 있었습니다. 애초에 알제리로 들어가서 항공기에 접근하려 했지만, 옛부터 프랑스 정부와 대립관계에 있던 알제리 정부가 프랑스 병력의 알제리 상륙을 허가하지 않아서 가까운 곳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인질범이 장악한 에어프랑스 8969편과 동일한 기종의 항공기에서 구출작전을 연습하며 대기중이었습니다.
에어프랑스 8969편이 이륙하자, 조종사와 관제탑은 몰래 연락을 취해, 비행기를 파리가 아닌 마르세이유로 보내라고 합니다. 조종사는 연료가 부족하다는 거짓말로 비행기를 마르세이유로 이끌고 갔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내륙 깊숙한 곳으로 비행기를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방침이기도 했고, 스페인 영토에 머물고 있는 프랑스 특공대가 이동하기에 가까운 지역에 비행기를 끌어들이기 위한 계략이기도 했습니다.
(사건 당시 동영상)
프랑스의 GIGN 특공대는 에어프랑스 8969편이 도착하기 불과 20분전에야 겨우 마르세이유에 도착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들은 몰래 항공기 주변 곳곳에서 침투를 준비했습니다. 특공대 대원들은 공항 직원과 항공기 정비 업무 관계자등으로 위장을 했고, 인질범들에게 물자를 주고 항공기에 연료를 보급하는 척 하면서, 인질범들의 상태와 위치, 항공기 내부의 상황을 살폈습니다.
한편 12월 26일 아침이 밝자, 인질범 스스로 매우 지쳐가게 됩니다. 이들은 애초의 목표인 파리가 아니라, 제3국으로 탈출하려는 의견을 갖기도 한 듯 하며, 알제리의 다른 저항 단체들이 도리어 이들의 인질극을 규탄하는 발표를 하기도 하여 좌절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들은 항공기를 관제탑 쪽으로 바짝 붙인채, 여러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기도 하고, 여러가지 협박을 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저녁 5시 무렵. 특공대의 돌입이 개시되었습니다. GIGN 특공대는 섬광탄을 던졌고, 비행기의 문을 사격을 통해 총알을 명중시켜서 잠금장치와 경첩을 부수어 열어 젖혔습니다. 총격전이 벌어지자, 조종석에 있던 조종사는 황급히 비행기 밖으로 뛰어내렸는데, 이때문에 관제탑 쪽에 있던 저격수가 조종사가 다칠 위험없이 총을 쏠 수 있게 되어, 관제탑 쪽에서도 사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총격전과 동시에 특공대원들은 일제히 승객들을 탈출시켰으며, 30분만에 이리하여 인질범 네 명 모두를 사살하는 것으로 사태는 끝을 맺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1명의 특공대원이 부상을 입었고, 13명의 승객과 3명의 승무원도 부상을 입었습니다만, 다행히 인질 중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 1997년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 인질극 -
(사건 당시 인질범들인 MRTA 게릴라들의 모습)
1996년 12월 17일. 아키히토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때 MRTA 라는 민중봉기 혁명을 노리는 무장세력의 게릴라 14명이 갑자기 대사관에 뛰어 들어 옵니다. 이것은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 계열 인사들을 비롯한 일본과 일본계 페루인들의 영향력을 생각한 행동이었습니다. 인질범들은 당시 파티에 모인 각국 외교관 등 사람들 7백여명을 인질로 잡았으며, 이중에는 한국 대사인 이원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인질범들은, 4백명의 MRTA 동료 석방,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의 폐지, 일본의 페루 원조에 대한 폐단의 개선, 페루 정부의 인권탄압 철폐 등등을 요구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인질범들이 장악한 일본 대사관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화에 나오는 타라 농장의 저택과 비슷한 모양으로 세워 놓은 건물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외부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하여 건물을 매우 견고하게 설계해 놓았고, 방탄막이나 방어용 구조물을 많이 만들어 두어서 마치 요새처럼 꾸며두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당시처럼 인질범들이 대사관 건물을 장악한 상황에서는, 인질범들이 매우 방어하기에 좋은 환경이 되었습니다.
기나긴 협상을 통해, 인질범들은 단계적으로 일부 인질들을 풀어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비밀리에 아르헨티나의 조기성 대사를 페루로 보내서 인질범과 면식이 있는 변호사를 통해 협상을 하기도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노력 때문인지, 한국이 페루에서 벌인 의료지원 등의 혜택을 게릴라의 친지들도 입은 바 있기 때문인지, 이원영 대사도 일찍 풀려난 인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풀려난 인질들은 인질범들의 성향이나 무장 등등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전해 주었으므로 협상과 구출작전 계획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협상은 길어져만 갔습니다. 그동안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 정부와 당시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었는가하면, 강경 진압을 기조로 내세우는 후지모리 대통령과 일본인의 생명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일본측의 압력이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인질범이나 MRTA 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기도 해서 사건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구출작전에 미군 측의 지원이 있다는 설이 나올 무렵즈음해서 구출 작전은 가시화 됩니다.
페루 당국은 요새화되어 있는 대사관에 쉽게 돌입하기 위하여 땅굴을 파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들은 땅굴을 파는 소음을 줄이기 위해서 인근 거리에서 유난히 시끄러운 음악을 많이 틀게하여 위장하고 대사관 건물 중앙까지 굴을 팠습니다. 한편, 이들은 대사관 안으로 보급해주는 음식물, 책, 음료 등등에 소형 특수 장비를 숨겨서 보냈습니다. 그것은 무선 송신기, 도청기 등등이었는데, 이것을 인질들 중에 있던 페루 군장교나 정보장교 등이 알아 보았습니다. 이들 인질들은 이러한 특수장비를 이용해서, 인질범 몰래, 대사관 내부의 상황과 인질범의 동태에 대해 세밀한 정보를 알려 주었습니다. 한편 페루의 특공대는 대사관과 동일한 세트를 만들어 놓고 구출 작전을 연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건 당시 동영상)
마침내, 1997년 4월 22일, 약 넉달만에 특공대의 돌입이 결정됩니다. 인질들이 보내온 정보를 통해, 특공대는 인질들은 건물 2층에 모두 모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특공대는 1층에서는 마음껏 공격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땅굴로 들어간 뒤, 폭약을 터뜨려 통로를 확보하고 건물 밑바닥에서 위로 뛰쳐나올 것을 계획합니다. 작전 암호명은 "차빈 드 완타르"로 붙였는데, 이것은 지하 땅굴이 건설되어 있는 페루의 고대 유적 이름을 딴 것이었습니다.
4월 22일. 오후 세 시 경. 동시에 세 군데에서 폭약을 터뜨려 구멍을 뚫고 140명 가량의 특공대가 돌입했습니다. 당시 인질범들은 건물 1층에서 축구를 하며 소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 폭발로 그 자리에서 세 명이 즉사했습니다. 특공대는 1층과 지붕을 통해 들어와 인질범을 뒤쫓았고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인질범들이 2층에 있는 인질을 죽이기 전에 모두 사살하려 했습니다. 총격전 끝에 14명의 인질범 전원이 사살되었고, 그 와중에 인질 한 명이 죽었으며, 특공대원 두 명이 죽었습니다. 이 중 한 명은 아군의 총격으로 희생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구출작전 직후 현장에서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인질 구출 등의 작업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또 이 작전은 성공적인 구출작전으로 선전되어 후지모리 대통령이 몰락하기 직전 가장 인기를 끌던 시기를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 2002년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
(사건 당시 인질범의 모습)
2002년 10월 23일. 모스크바의 극장에서 "노르트-오스트" 공연의 2막이 진행되던 도중, 갑자기 42명의 무장괴한들이 난입했습니다. 이들은 850명에 달하는 관객과 공연자들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주자가 황급히 몰래 창문으로 탈출하여 처음으로 경찰에게 이 사건을 알렸고, 이후, 관객들의 휴대전화 연락을 통해서 러시아 당국에게 사건에 관한 정보가 보고 됩니다. 이들은 수류탄과 폭발물을 매우 많이 갖고 있으며, 상당수의 인질범들은 여자라는 정보도 보고되었습니다. 나중에 이들이 갖고 있던 폭발물 중 상당수는 모형임이 밝혀집니다.
인질범들의 요구 조건은 처음에는 거액의 돈이라고 알려졌습니다만, 곧 이들의 명분은 체첸 독립운동임이 밝혀졌고, 이들은 즉각 체첸 내에서 중화기 공격을 중단할 것과 체첸에서 조건 없이 러시아군이 철수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 극장에 갖힌 850명의 관객들은 겁에 질렸고, 인질범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는 것에 대해서 언론 보도에 촉각을 기울였습니다.
사건 당일 인질범은 환자와 어린이등 15명을 풀어 주었습니다. 한편 이 때 26세의 한 술취한 여자가 사태를 모른채 경찰의 제지를 피해 극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인질범들은 이 여자를 특수요원이라고 생각하여 사살하게 됩니다. 엉뚱하게도 이 사람이 이 사건의 최초의 희생자가 됩니다.
(의료진에 의해 끌려나오는 의식을 잃은 사람)
이튿날이 되자, 인질범들은 협상을 위해 적십자단을 보내 달라고 요구 했고, 한편 수많은 러시아의 유명인사들이 인질범들에게 의견을 피력하고 협상에 도움이 되겠다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여러나라 외교관들의 물밑접촉이 이루어졌고, 인질범들은 러시아인이 아닌 외국인들은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날 인질범들은 39명의 인질을 더 풀어주었고, 만약 현 체첸 행정부의 수장이 이 극장에 나타난다면 50명을 더 풀어주겠다는 조건을 걸기도 합니다. 사흘째 되던날, 인질범들은 체첸 독립운동을 외국에 인정받기 위하여 외국인 인질들을 더 풀어주려고 했고, 기타 어린이등 다른 인질들을 포함 19명을 풀어주었습니다. 이날, 인질범들과의 협의에 따라 의사와 기자들이 극장안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셋째날 밤에 한 인질이 여자 인질범을 유리병으로 때려서 공격하려 했습니다. 이 인질은 도망쳤고, 인질범들은 총격을 가했는데, 명중하지는 않았지만, 두 명의 다른 인질들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날 밤 접근하던 경찰이 수류탄 공격으로 부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음날인 10월 26일 토요일. 특공대의 돌입이 결정됩니다. 러시아 당국은 인질범들이 인질을 처형하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특공대는 KGB를 계승한 FSB 소속의 특수부대가 주력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실제 정황은 공식 보고가 미흡하여 상당부분 제대로 알려져 못합니다.
특공대는 우선 30분 동안 마취 가스를 건물 내부로 흘려보냈습니다. 인질범들의 대응을 어렵게 하려는 술책이었는데, 어느 정도 약효가 나타날만한 시점인 이른 아츰 5시 30분경. 특공대는 돌입을 시작했습니다. 특공대는 모든 출입구와 지붕, 하수도를 통해 동시에 돌격을 시작했으며, 출입구를 지키고 있던 인질범과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극장안에서의 총격전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고 피해도 컸다고 추정됩니다. 그러나 마취 가스로 상당수의 인질범과 인질들이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특공대 쪽이 우세했습니다. 여자 인질범들이 달려가다가 도중에 의식을 잃으며 서서히 쓰러졌다는 목격담도 돌고 있고, 일부 인질범들은 도망치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특공대는 30분만에 극장을 접수하는데 성공합니다.
(사건 당시 동영상)
러시아 정부는 당시 가스를 사용했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고, 처음에는 인질 중에 죽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를 유가족들에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가스에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바깥으로 구조하는 작업이 7시에나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이후 오후 1시에 67명이 사망했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고, 현재, 30명 정도의 인질범과 100명 내외의 인질이 죽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상당 수 사람들이 당시 가스의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는 설도 돌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강경정책을 더욱 강화한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으며, 실제로 러시아인 군인이나 경찰이 체첸 포로나 용의자에 대해서 가혹한 대우를 하는 빌미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습니다.
- 2004년 베슬란 학교 인질극 -
(사건 당시 인질을 구해 나오는 러시아 대원의 모습)
2004년 9월 벌어진 베슬란 학교 사건은 현대 국제 인질사건 사상 최악의 참극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특히, 사건 진압 직후의 정황들이 유럽권에 생생하게 TV뉴스로 보도되어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2004년 9월 1일, 러시아 연방의 자치 공화국인 북 오세티아의 마을 베슬란의 학교에서는 개학식 겸 입학식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천2백명 이상의 초중고교생들과 학부모들이 학교에 있었는데, 여기에 갑자기 이삼십명의 무장괴한들이 난입했습니다. 이들은 국적, 인종이 다양해 보였고, 여자들도 있어습니다. 처음에 러시아 경찰이나 군의 행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 앞에서 이들은 기관총을 허공에 난사하면서 협박하여 학교를 장악하고 인질을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이슬람교의 일부 사상에 바탕을 둔 과격 단체 그리고 체첸 독립운동을 명분에 건 단체가 함께 참여한 연합 단체라는 점 정도만 어느 정도 확실시 되고 있을 뿐, 정확한 정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부족합니다. 인질범 중에 흑인이 있었다거나, 한국계열 인종인 고려인이 있었다는 설도 돌고 있습니다만, 어떤 뜻에서 범행에 참가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상당히 과격하게 움직였고 1천2백명이라는 많은 인질을 다스리기 위해서, 인질들을 모두 좁은 실내체육관 안에 가두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어린이들이 옷을 벗은채 좁은 장소의 열기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았고, 특히 협상 결렬로 물과 음식물이 부족해지자 실신하거나 병을 앓는 어린이들이 속출하기도 했습니다.
둘째날 부터 러시아 당국과 인질범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협상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물자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질범들은 일부 인질을 풀어주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식을 두고는 떠나지 않겠다는 부모들이 있어서 혼란이 있기도 했고, 어린이들의 울음소리와 좁은 체육관의 열기 때문에 인질범들 스스로도 정신적인 압박에 이성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둘째날 오후 세 시에는 인질범들이 접근하는 러시아 당국을 향해 RPG를 두 발 발사하기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러시아 측은 인질범에게 응사하지 않고 신중히 인질의 안전을 도모했습니다.
(사건 후의 베슬란 학교)
셋째날 한 낮에 구출작전은 시작되었습니다. 작전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황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의견이 매우 분분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되는 것은, 구출작전이 시작될 무렵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러시아 쪽의 공격무기라는 설도 있고, 인질범들이 인질을 살해하거나 위협하기 위해, 혹은 실수로 터뜨린 폭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폭발 이후, 혹은 폭발과 동시에 러시아군이 구출작전을 시도했고, 이러한 혼란과 함께 인질들이 대거 도망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옳은 듯 보입니다. 많은 이야기 중에 정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떤 폭탄이 터졌고, 여기에 겁을 먹은 인질들이 도망치려 하자, 인질범들이 인질을 죽이기 시작했으며, 이를 보고 러시아군이 급격히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군은 체육관 내부로 돌입하고, 인질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건물 외벽을 폭파해 구멍을 뚫었습니다. 이에 무질서하게 인질들이 몰리고, 동시에 러시아 군과 인질범들 간에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학교 일대는 아비규환에 휩싸였습니다. 인질범들은 로켓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러시아 군은 이러한 인질범을 제압하기 위해 T-72 탱크와 Mi-24 하인드 전투 헬리콥터까지 출동시켰기 때문에 싸움은 매우 치열했습니다.
(사건 당시 동영상)
그 와중에 겁을 먹은 러시아 군인이나 경찰 중에 적을 앞에 두고 뒤돌아 도망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고, 분노한 지역 주민들이 총을 들고 인질범을 죽이겠다고 끼어드는 경우도 있어서 싸움은 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는 동안 인질범이 끈질기게 저항함에 따라 사상자가 속출했고, 몇명의 인질범들이 옆 건물로 도망치자 러시아군은 그 건물을 포 사격으로 그대로 파괴시키기도 하는 등 거의 여덟시간 동안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주로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무려 3백명이 훌쩍 넘어가는 사망자가 나온 대참사로 사건은 끝을 맺었습니다. 베슬란은 지역 전체가 한동안 장례식의 물결로 가득했고, 엉성한 구출작전을 한 푸틴에 대한 비난 여론과, 테러에 대한 강경책이 동시에 끓어오르는 등 여론의 반향도 컸습니다. 인질범들의 정확한 정체와 목적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하여, 러시아인 조직설, 현지 인사 가담설, 알 카에다 배후설 등등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 2006년 기독교 평화 사역팀 인질극 -
(인질로 잡힌 기독교 평화 사역팀 단원의 모습)
흔히 CPT 라는 약자로 불리우는 기독교 평화 사역팀 (Christian Peacemaker Teams) 은 퀘이커에 뿌리를 두고 있는 북미권 계열의 종교 단체 입니다. 이들은 상당히 급진적이고 매우 적극적인 평화 운동을 벌여왔고, 상당수 단원이 2003년 이라크 전쟁 이전 부터 이라크에서 각종 사회봉사와 기타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평화 사역팀은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기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74세의 영국인 의료물리학자 노만 켐버를 비롯한 네 명의 단원들이 무슬림 성직자 협회를 방문하러 가던길에 일단의 무장단체에 의해 납치 당하게 됩니다. 이때가, 2005년 11월 26일이었습니다.
이들이 납치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평화 사역팀측은 과감한 비폭력 원칙을 고집하여, 당국에게 결코 어떤 구출작전이나 무력 압박도 행사하지 말 것을 요청했습니다. 도리어, "이 모든 것은 미국 주도 연합군의 불법적인 이라크 점령이 원인이다"라며 당국의 개입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기독교 평화 사역팀 측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상황은 더욱 복잡 미묘해지게 됩니다. 이 사건은 곧 일부 반미 운동가들에게 큰 관심을 얻기도 했습니다.
(당시 기독교 평화 사역팀을 풀어주기를 시위하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의 모습)
결국 인질범들은 알 자리라 텔레비전에 비디오 테입을 보내어, "이 사람들의 정체는 사실 사기꾼 스파이들이다" 라는 주장을 하면서, 기독교 평화 사역팀 단원들을 죽이려 합니다. 이들은 12월에 미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인질들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이후 연락이 끊어졌는데, 이듬해 1월에 이들은 다시 비디오 테입을 보냈고, 인질들은 아직 모두 살아 있음을 알렸습니다. 인질범들은, 그러나, 마지막 기회라면서, 이라크 포로들을 모두 풀어주라는 요구 조건을 제시했고, 그러면 자기들도 인질을 풀어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인질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합니다.
(문제의 인질 한 명)
요구 조건은 당연히도 수락되지 않았고, 2006년 3월 10일. 인질 한 명의 시체가 바그다드의 쓰레기장에서 발견됩니다. 보도진은 이때 시체에 고문한 흔적이 있다며, 인질범들을 비난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체를 인수한 기독교 평화 사역팀 측은 도리어 고문한 흔적이 없다며 부인합니다. 이에 대한 무의미한 설전이 반복되었으며, 마침내 기독교 평화 사역팀 측은, 고문한 흔적이라는 것은 인질이 죽은 뒤에 선전용으로 나중에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는 우리를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용서합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어떠한 폭력에도 반대하며, 누구도 처벌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질이 살해된 것이 확인된 후, 연합군 당군은 구출작전을 구체화 합니다. 결국 시체 발굴 13일 후인 2006년 3월 23일, 영국군을 중심으로 미군, 캐나다군, 신생 이라크군의 연합 특공대가 인질들이 있는 곳에 들이 닥쳐 인질들을 구출합니다. 특공대는 이때 이상하게도 인질범들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이때 특공대와 인질범들이, 인질이 인질로서 가치가 없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서로서로 협상하여 대강 마무리 지었다는 설이 돌고 있기도 합니다.
기독교 평화 사역팀은 끝까지 특공대의 구출작전에 협조하지 않았고, 심지어 구출된 후에, 인질들은 도리어 나중에 인질범들이 잡힌다고 해도, 자신들은 인질범들의 범행을 덮어주겠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거기에 대해 증언도 하지 않겠다고 해 버립니다. 이들은 목숨걸고 작전에 참가한 특공대 대원들에게 비난만 하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며 욕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때문인지 후에 대부분의 인질들은 작전에 참가한 특공대 대원들에게 여러 경로를 통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습니다.
이 인질극은, 인질범의 유일무이한 협상조건인 "목숨"을 인질측에서 스스로 포기해버리는 듯한, 상식에 배치되는 태도를 취해버리면서, 매우 특이하게 전개된 사건입니다. 또한 그러한 특징 때문에 인질측과 당국에서 자세한 내막을 굳이 공개하지 않는 경우이기도 합니다. 정확한 사연과 사정은 인질범이 붙잡혀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오히려 객관적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첫댓글 「777」의 뻘짓도 저기에 들어가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