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의 두 번째 도성으로, 그 역사와 문화의 상당 부분을 증명해 주는 무령왕릉이라는 보물이 있는 곳이다.
공주는 백제 왕국의 두 번째 도읍지다. 북쪽으로 금강이 자리한 천혜의 요새 공산성에 도읍을 정해 고구려의 침입을 방어하고자 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공주에는 백제시대의 건축물이 남아 있지 않지만 과거 공산성의 흔적은 살필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무령왕릉이 발굴되어 잃어버린 왕국의 역사를 부분적으로나마 복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주를 생각하면 백제의 문화재나 역사 탐방지보다 장군산 영평사 산자락에 하늘거리는 구절초 꽃세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영평사에서는 구절초가 만개하는 10월 한 달 동안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 이름하여 ‘야단법석’이다.
가을이다! 하얗게 수놓은 구절초 꽃과 신명나는 축제가 벌어지는 공주로 여행을 떠나보자.
한달음에 달려 내려가 한나절이나마 하얀 산사에 묻혀 시름을 잊고 구절초 꽃차 향기에 빠져보면 어떨까?

영평사라는 절 이름을 들어보았는가? 공주의 이름난 사찰인 마곡사와 갑사, 동학사는 들어보았어도 영평사는 아무래도 좀 생소하다. 그러나 속된 말로 요즘 여름과 가을철에 공주의 영평사가 끝발을 날리고 있다.
여름에는 2,000여 평 습지에 백련이 그윽한 향내를 뿜어내고, 가을에는 구절초 꽃세상이 펼쳐진다. 여름, 가을로 하얀 세상이 이어지는 영평사 일대에 봄꽃은 없을까? 봄에는 금낭화, 매발톱, 철쭉, 진달래, 제비꽃, 창포 등 그야말로 우리꽃 천국이다.
백련과 구절초는 스님들이 절에 오는 사부대중들과 백련차와 구절초 꽃차를 소박하게 나눠 마시다가 너무 좋은 나머지 본격적으로 재배를 시작했다. 불과 10여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백련과 구절초가 영평사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3∼4년 전부터는 구절초 꽃이 만발하는 10월 한 달 동안 스님들과 마을 주민들, 탐방객이 어우러지는 축제가 펼쳐진다. 충남지역의 예인들을 초빙해 각종 공연과 전시를 하는데, 2004년 축제 기간에는 승무, 마당극, 판소리, 사물놀이, 풍물판굿, 노래자랑, 국립관현악단 초청연주를 비롯해 한영애, 안치환 등이 출연한 다양한 공연이 주말 오후 내내 펼쳐졌다. 또한 평일에도 공예와 서예 등 각종 전시와 행사 및 꽃차, 꽃전, 국수 등 귀한 먹거리를 제공했다.

조용해야 할 사찰이 무슨 야단법석이냐고? 그렇다. 가을 영평사 꽃축제의 이름이 바로 ‘야단법석’이다. 야단법석이란 사찰 마당에서 많은 사부대중(불교의 남자 승려, 여자 승려, 남자 신도, 여자 신도를 통틀어 칭하는 단어)이 모여 법회를 여는 떠들석한 장면을 뜻하는 말이다. 축제 이름과 딱 맞아떨어진다. 축제에 참여해 본 결과 탐방객들이 영평사 앞마당과 주변을 메우고 전각들 사이에 무대가 설치되어 공연이 벌어졌지만, 번잡함은 없었고 되레 차분하게 웃고 즐기는 모습이 가치 있는 포교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영평사에서는 사찰 재정 자립과 스님들도 노동을 하여 공양을 한다는 취지로 영평식품이라는 영리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백련잎차, 구절초 꽃차와 환, 아홉 번 구운 죽염, 그 죽염을 이용해 담는 장 등을 판매 한다. 영평사의 명예를 걸고 최고의 건강 식품을 만들고 있으니 관심을 가져보자. 축제 기간은 10월 초부터 중순까지다.

식당 밖과 안의 모습, 그리고 메뉴까지 식당 이름 그대로 ‘토속적’인 집이다. 가게 겉모습은 초라하지만 음식이 담백하고 맛깔 나므로 두말 말고 들려보길 권한다.
집이 좁아 간이 테이블이 있는 작은 가게집과 초라한 살림집 내실 그리고 마당의 평상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 테이블을 찾지 말고 내실 방 안이나 마당 평상에 앉아서 먹는 게 제격이다.


위례성에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밀려 내려온 백제가 좀더 안정된 터전인 사비(부여)에 자리를 잡기 전 힘을 모으며 나라를 추스르던 기간이 바로 웅진(공주) 백제시대다. 남쪽에 왕궁을 짓고 어수선해진 나라를 정비한 천혜의 요새가 바로 공산성(당시에는 웅진성)이다. 왜 ‘천혜의 요새’인지는 공산성에 올라보면 알게 된다. 성의 북쪽에 거대한 금강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 북쪽의 적을 막아내는 데 군사 수만보다 더 나은 방어가 되었으리라. 다른 지역도 지형지세를 최대한 이용해 방어에 유리한 곳에다 성을 쌓았지만 특히 공산성은 북쪽의 적에게 쫓겨 내려왔기에 북쪽 방어에는 최고의 지형이었다. 공주가 선택되고 공산성 자리가 결정된 게 아니라 공산성 자리 때문에 공주가 도읍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백제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축물은 없지만 처음 성을 만들었던 기본 구조와 현재의 모습에는 별 차이가 없다. 조선시대와 근현대에 이르러 개축한 성의 건축물들을 보고, 금강을 바라보는 성의 위치를 살피며 성안을 한 바퀴 돌아보자. 성벽을 따라 걷노라면 금강과 공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이들과 함께 간다면 공산성 서문 금서루 안에서 4월∼10월까지 매주 토, 일요일 오후 2시부터 백제 의복 체험을 할 수 있으니 기억해 두자(7, 8월은 제외)

공주가 백제의 두번째 도읍이라는 역사적 사실 외에 근래 공주가 크게 주목받은 것은 바로 이곳 송산리 고분군의 무령왕릉 발굴 때문이다. 송산리 고분군의 1호∼6호분은 일제시대 때 이미 발굴되었다. 1971년, 백제의 벽화고분이 있는 6호분에 물이 스며들어 물길을 돌리려 고분 위에 도랑을 파는 공사를 하던 중 인부의 곡괭이에 무령왕릉의 벽돌이 걸리는 바람에 발굴이 시작되었다.

전혀 도굴된 흔적이 없는 처녀분으로 능의 주인이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었으며 방대한 유물이 쏟아져 나온 무령왕릉의 발굴은 잃어버린 왕국 백제를 밝혀낸 일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철저한 기록 작업과 세심한 주의를 동반해야 했던 발굴 작업을 하루 만에 서둘러 끝낸 일도 희대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한국 고고미술사학계의 태두이자 발굴책임자였던 김원룡 선생은 작고하기 전까지도 이 일을 후회했다고 한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2,000여 점이 넘는 유물들은 대부분 국립공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현재는 무령왕릉을 모형관을 통해서만 볼 수 있지만 학창시절에는 아름다운 아치형 벽돌 연도를 걸어 들어가 유리막 안의 무령왕릉을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과거 국립공주박물관은 언덕 위의 아담한 2층집으로 마당에 석조 유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금은 곰나루 가는 길에 큰 규모로 박물관이 새로 개관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예전에는 전시의 상당 부분이 무령왕릉 출토 유물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 외 웅진 백제시대의 여러 유물들과 대전, 충남지역의 발굴 유물이 늘어나면서 국립공주박물관은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찬찬히 살펴보면 백제의 문화적 수준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색적인 유물로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말로 무령왕릉의 주인을 밝히는 지석과 능 자리를 땅의 신에게 돈을 주고 샀다는 증표인 매지권 등이 있으며, 유물들의 예술적 아름다움과 의미까지도 안내판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금강이 공주 서남쪽의 부여로 방향을 잡는 지점에 곰나루가 있다. 공주 구시가지로 들어올 때 건넜던 금강대교나 공산성에서 보았던 금강의 물줄기보다 상당히 유속이 느려진 이곳 강 언덕에는 자그마한 곰 석상을 모신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웅진사’라는 이름의 곰을 기리는 사당인데, 공주의 옛 이름인 웅진이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나루터 근처 동굴에 암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숫곰이 없는지라 어부(또는 나뭇꾼이라 전하기도 함)를 납치해 같이 살다 자식 둘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굴의 입구를 막지 않고 먹이를 구하러 나갔다 오니 어부는 강을 건너 도망을 치고 있었다. 자식들을 데리고 뒤쫓으며 울부짖었지만 어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결국 암곰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식들을 데리고 물에 빠져 죽었다. 그후로 나루터에서는 고기도 잡히지 않고 배가 침몰하는 등 사고가 빈번하고 흉년까지 들자, 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지어 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공주 지역에 떠도는 곰에 관한 토템사상에서 유래한 듯하다. 어쨌든 지금도 곰나루 옆 언덕 위에는 자그마한 곰사당이 있고 사당 안에는 돌로 만든 작은 상이 모셔져 있다. 곰사당에 들른 후, 곰나루로 내려가 넓게 펼쳐진 강가 모래밭에 서서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며 여행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식당 차림판에는 ‘따로국밥’이라고 적혀 있다. 국과 밥이 따로 나온다는 의미와 국을 다 끓인 후 쇠고기 양지살을 따로 얹었다는 의미가 모두 들어 있을 것이다. 원래 이학식당은 공주 5일장터에서 따로국밥을 말아 내는데 공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곳이다. 이 식당은 한국전쟁 전부터 문을 열었다고 하니 반백 년이 넘은 셈이다.
지금은 두 며느리가 할머니의 지도 아래 시장 앞에 있는 이학식당과 여기 금강가에 있는 새이학가든을 운영하고 있다. 새이학가든은 식당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어 편리하다. 내력 있는 쇠고기국밥을 한 그릇 훌훌 말아 먹고 떠나는 것이 고속도로의 패스트푸드보다 훨씬 낫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