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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회>
겨우내 지겹게 내리던 눈도 , 옷깃을 바짝 여미며 종종 걸음을 쳐야 했던 매서운 바람도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소리도 없이 다가온 봄은 영원히 가지 않을 것 같던 겨울을 밀어내고 성큼 다가와 있었다.
수혁의 결혼식이 있던 주말 아침, 하늘은 맑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이젠 두꺼운 코트가 제법 거추장스러워 진 듯 거리엔 화사하고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일찌감치 봄날을 즐기고 있었다.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햇살이 얼굴을 간질이자 수혁은 귀찮은 듯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시끄러운 알람소리에 억지스레 몸을 일으키는 순간 머리가 핑 돌며 현기증이 났다.
지난밤 혼자 들이킨 술 탓에 몸이 천근만근이다.
흐트러진 침대를 뒤로하고 욕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로 전신을 씻어 내렸다.
정신 차리자. 천수혁.
너 답게 제대로 살아보는 거야.
그는 몇 번이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몸 구석구석에 찌든 옛기억과 짙은 술 냄새를 지워갔다.
정오에 있을 결혼식까지는 아직 네다섯 시간쯤 남아 있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희연은 몇 번이나 전화를 해 준비할 게 많으니 빨리 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래도 그는 요지부동 메이크업이니 헤어니 하는 것 따위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제 시간에 맞춰 도착해 예복만 입으면 준비는 끝인 것이다.
희연은 수혁을 더 멋지게 꾸미지 못해 안달이 났지만 그녀의 바람대로 가만히 앉아 미용사의 손길을 받고 있을 수혁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풀 죽은 목소리로 제발 식장에만 늦지 않게 와달라는 부탁으로 전화를 끊어야 했다.
수혁은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집을 나섰다.
결혼식이 열릴 호텔로 가기 전 어제 끝내지 못한 업무를 마쳐야 하기에 회사로 향했다.
남들이 보면 워크홀릭이라고 혀를 찼겠지만 수혁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신혼여행 때문에 일주일이나 회사에서 자리를 비우는 것도 못마땅한 참이었다.
여행이야 언제라도 갈 수 있는데 하필 이 바쁘고 위급한 시기에 꼭 유럽까지 가서 여행을 해야 하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희연이 하도 완강하게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해 주었다.
사실 딸의 부탁을 들어달라는 유회장의 은근한 협박도 큰 몫을 했다.
5일제 근무라 출근하는 직원은 하나도 없었다.
수혁은 홀로 사무실에 앉아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해 나갔다.
일에 빠져있다 시계를 보자 오전 11시가 다 되어간다.
이제 슬슬 마무리하고 호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았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보고있던 서류를 정리해 가방에 넣고 사무실을 나섰다.
지금 챙긴 서류들은 신혼여행차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검토할 것들이었다.
그런 뒤, 업무지시는 전화나 인터넷을 이용하면 된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수혁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려던 그는 문뜩 이곳에서 진우와 처음으로 재회했던 때를 떠올렸다.
진우가 벌이던 어설픈 납치극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이없는 재회였지만 어쩌면 그건 두 사람의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만남의 끝에 상처투성이 마음만 남았으나 다시 만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수혁은 생각을 접고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간 차는 시내를 가로질러 그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호텔을 향해 빠르게 질주했다.
호텔에 도착한 수혁은 대기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아는 얼굴들을 맞이하며 인사를 나눴다.
잠깐 신부대기실도 들러 눈도장을 찍고, 아름다운 신부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을 건넨 후 다시 자신만의 조용한 공간으로 돌아왔다.
호텔 곳곳에서 천씨 가문의 온갖 친척들이 모여들어 그를 귀찮게 했던 것이다.
다들 자기를 이용해 유회장과 사돈이 된 걸 기뻐하고 있었다.
끝까지 이용해 먹을 꺼리로 밖에 자신을 취급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였다.
결국 신랑대기실 앞에 경비원을 세우고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령한 뒤 혼자 쉬고 있었다.
그때, 불쾌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뵐 수 있겠습니까?]
조금 전 세워뒀던 경비원들은 어딜갔는지 문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혁은 혼잣말로 욕설을 내뱉은 뒤 의자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왔다.
“누구 십니.......!!”
딱딱한 표정으로 문을 여는 순간,
문 밖에 선 한 남자의 모습에 수혁은 말을 잊은 듯 그대로 멈춰섰다.
“오랜만입니다, 천수혁이사님.”
도저히 결혼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점퍼 차림에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수혁을 바라본다.
“넌......”
수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목소리와 대강의 이목구비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잠깐 조용한데서 얘기 좀 하시죠.”
남자는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조심스레 사방을 둘러보았다.
수혁이 한쪽으로 물러서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휴, 답답해 죽을 뻔 했네”
그리고는 모자와 마스크를 한꺼번에 벗어버렸다.
“정민철...”
수혁의 눈가가 더욱 가늘어진다.
민철은 모자에 눌린 머리를 툴툴 털며 잠시 숨을 고른다.
수혁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주시했다.
“오늘 결혼하는 새신랑 얼굴이 왜 그래? 세상의 불행은 다 짊어진 것 같은 표정이군”
민철은 뭐가 재밌는지 혼자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네가 왜 여기 나타난 거지?”
무겁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수혁이 물었다.
“그야 물론 고아원동기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지. 큭큭... 전부터 느꼈지만 넌 정말 대단한 놈이야. 같은 시궁창에서 굴렀는데도 너만은 처음부터 우리와 달랐지. 결국은 멋지게 성공했잖아. 아름다운 아내와 엄청난 돈. 명예와 권력이 비단길처럼 네 앞에 펼쳐져 있군. 기분이 어때? 그 모든 걸 손에 넣을 준비가 되셨나?”
민철은 기분 나쁜 미소를 입가로 흘리며 수혁의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우리가 굳이 이런 대화를 나눌 만큼 친분이 있었던가? 수갑 차고 교도소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꺼져버려.”
수혁이 위협적인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한손으로 멱살을 움켜쥐었다.
곧 있을 결혼식만 아니면 이 자리에서 실컷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민철은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지지 않고 대꾸했다.
“워워.. 진정해. 새신랑이 벌써부터 흥분하면 안 되지. 오늘은 특별히 결혼선물까지 가지고 왔는데.”
그는 수혁에게 붙들린 멱살을 간신히 풀고 구겨진 옷을 폈다.
그리고는 점퍼 안쪽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냈다.
“선물을 하기 전에 한 가지만 묻지.”
민철은 그 봉투를 건네려다 멈추고 도전적인 눈빛으로 수혁을 노려보았다.
수혁도 지지 않고 그 눈빛을 받아쳤다.
“이진우.”
민철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수혁의 날카롭던 눈빛이 한순간 흔들렸다.
“너에게 그 녀석은 어떤 존재지?”
예상치도 못했던 공격적인 질문에 수혁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네가 왜.. 그런 걸 묻는거지?”
침착하려 애썼지만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민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말했다.
“글쎄. 그냥 궁금해서. 그 녀석은 왜 그렇게 미련할 정도로 네 놈을 위해 희생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순간, 수혁의 눈썹이 움찔했다.
“...무슨.. 뜻이야?”
“훗.. 궁금해?”
입가를 말아 올리는 민철을 보며 수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에게 달려들었다.
옷깃을 바짝 움켜쥐고 사정없이 민철의 몸을 흔들며 사납게 소리쳤다.
“무슨 뜻이냐니까! 어서 말해!!”
“윽!.. 이.. 이걸.. 놔야 말을 하지! 크윽!”
목이 졸려 답답해하던 민철은 겨우 수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거칠게 기침을 해댔다.
“제기랄.. 성질머리하고는... 맘 같아선 네 놈따위 그 악마같은 여자랑 결혼하게 놔두고 싶지만 그건 그 여자가 가장 바라는 것이니 그렇게 둘 순 없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민철은 품안에서 꺼냈던 그 서류봉투를 수혁에게 집어던졌다.
종이가 아닌 뭔가 묵직한 물건이 수혁의 손안에 떨어졌다.
“자! 내가 주는 결혼선물이다! 지긋지긋한 인간들! 네 놈들은 나를 인간쓰레기라고 부르지만 내가 보기에 너희도 하나 다를 것 없어! 카악! 퇘!”
그는 불량스럽게 침을 뱉고는 수혁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수혁은 민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문뜩 생각이 난 듯 자신의 손에 들린 낯선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섣불리 손 댈 수 없는 미지의 물건처럼 여겨졌다.
정민철이라는 믿지 못할 인간이 남긴 물건이다.
분명 위험하고 지저분하며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혁은 그것을 열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민철의 입에서 나온 한 사람의 이름.
그 이름과 이 봉투 안에 있는 물건이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서였다.
천천히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꺼내었다.
낡은 휴대폰 하나가 들어있었다.
액정 화면에는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고, 휴대폰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 밑에 녹음된 음성사서함과 통화내역을 들어보라는 친절한 안내도 덧붙여 있었다.
수혁은 습관처럼 시계를 보았다.
결혼식이 채 5분도 남지 않았다.
그는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휴대폰을 몇 번이고 만져보다 천천히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녹음되어 있던 통화내역을 재생시켰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속했던 돈 입금했어요. 그리고 녹화 테이프와 사진들은 당신 주소로 보냈으니 내가 지시한 대로 천민형 이사한테 보내세요.]
[계획대로 잘 하고 있는 거죠? 중요한 건 수혁씨가 자연스럽게 이진우에게 질리도록 만드는 거에요. 그에게 도둑질 시키는 거 잊지 말아요.]
[일을 잘 처리했더군요. 나머지 돈 넣었어요.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 되겠군요. 다시는 서로 연락하지 않도록 하죠.]
그 외에도 여러 개의 수상한 음성메세지가 들어있었다.
민철은 용의주도하게 그녀에게서 오는 모든 연락을 녹음해 두었던 것이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뒤에서 하나하나 철저히 계산하고 지시해 나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수혁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적인 목소리로 그런 잔인한 일들을 꾸밀 수 있는지 그녀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놓고는 이중인격자처럼 자신의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했던 모습을 떠올리자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마치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헐리웃 여배우의 멋진 연기를 감상한 듯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영화도, 소설도 아닌 현실이었다.
인간이란 이토록 추악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모든 걸 가진 여자였다. 돈도, 명예도, 아름다움도.. 게다가 그녀를 사랑하는 가족들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무언가를 갖기 위해 그녀가 저지른 짓은 결코 용서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문뜩 수혁은 인간이란 동물에, 또 자기를 둘러싼 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썩어빠진 환경에 진저리가 쳐졌다.
갑자기 우주 바깥으로 떠밀려 나간 사람처럼 그는 혼란에 빠졌다.
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모두가 우러러보는 이 화려한 세계 속에서 내가 원하는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태껏 자신이 꿈꿔오고 열망해왔던 것들이 지금 이 순간, 마치 바람이 불면 힘없이 무너질 모래성처럼 여겨질 뿐이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
노크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천민형이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손님들 기다리는 거 안 보이냐! 하여튼 너라는 놈은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어서 나와!”
그는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윽박지르듯 짜증을 냈다.
그래도 수혁이 움직이려 하지 않자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들어와 수혁의 팔을 잡아끈다.
“처음 우리 집안에 들어올 때부터 골칫덩이더니 아주 끝까지 말썽이야!”
하지만 아무리 민형이 끌어당겨도 수혁은 꼼짝하지 않았다.
마치 돌덩이가 된 듯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놈이 진짜!!! 결혼식을 망칠 셈이냐! 청운물산과의 결혼이야! 청운물산!!”
민형은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도 잊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민형과 수혁에게로 몰렸다.
입장을 기다리며 문 쪽에 서 있던 희연과 그녀의 아버지도 소란이 난 걸 눈치챘다.
유회장은 주변을 둘러본 뒤 딸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신랑대기실로 향했다.
“무슨 일인가? 이제 곧 식이 시작될 텐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유회장이 다급히 다가와 묻자 천민형이 비굴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회장님. 이제 막 제가 이 녀석을 데리고 가려던 참입니다.”
“서두르게. 벌써 시간이 5분이나 지났어”
유회장은 화난 표정을 애써 억누르며 조용히 말하고 돌아섰다.
그 순간, 줄곧 침묵을 지키던 수혁은 뭔가 결심한 듯 짧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유회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 두겠습니다.”
이제야 겨우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결정하고 나자 오랫동안 답답하게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진 듯 그는 가벼운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수혁의 반응과는 반대로 주변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유회장이 천천히 돌아선다. 그는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수혁은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채 유회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하지만 정확한 어조로 분명하게 말했다.
“이 결혼. 그만두겠습니다.”
대기실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수혁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주위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뒤덮였다.
천민형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같은 표정으로 수혁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네 놈이 돌았구나! 지금이 어느 땐데 감히!!”
수혁은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 민형의 손을 쳐내고 유회장을 향해 말했다.
“결혼. 할 수 없습니다.”
유회장의 얼굴빛이 변하더니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천장이 울릴 듯 지른 고함소리에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대기실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 인파를 뚫고 희연이 수혁에게로 달려왔다.
“수혁씨! 대체 왜이래요!”
꽃처럼 화사한 드레스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던 신부의 얼굴은 순식간에 울상이 되어 있었다.
수혁은 아무 말 없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희연은 갑작스런 수혁의 변화를 감당하기 힘겨웠다.
그녀는 눈물을 참으며 애원하듯 그에게 매달렸다.
“말을 해 봐요, 대체 왜 이러는 거에요, 네? 수혁씨...”
그는 대답대신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건네받은 희연은 조심스레 그것을 귀로 가져갔다.
그곳에선 자신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희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온 몸을 덜덜 떨더니 이내 들고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아니에요!! 아니에요, 수혁씨!!”
그녀는 미친듯이 고개를 흔들며 땅에 떨어진 핸드폰을 하이힐로 밟아 부셔버렸다.
그 거친 행동에 그녀의 아버지도 옆에 있던 천민형도, 주위 사람들도 모두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수혁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요! 그러니까 이건....”
“그만.”
그녀가 변명하려하자 수혁은 한 손을 들어 제지했다.
“더 이상은 아무 말도 듣지 않겠어.”
“..수혁..씨...”
그녀의 얼굴에선 벌써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결혼은... 없어. 너와 나의 관계도 여기서 끝이야.”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같이 희연의 표정이 절망적으로 바뀌었다.
“아....안 돼... 그럴 순 없어.. 수혁씨, 제발... 내 말 좀 들어요. 난 단지.. 당신을 사랑해서.. 그래서 ...”
“이런 짓을 하는 게 네 사랑의 방식이라면 정말 구역질나는군. 넌 정민철보다 몇 배는 더 저질이야. 추악하고 이기적인...”
수혁은 분노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희연이에게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네 놈이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유회장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 소리 질렀다.
그 옆에서 민형은 안절부절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지..진정하십시오, 회장님! 이 놈이 원래 가끔 이렇게 미친 짓을 합니다. 출생이 워낙 천하다보니 그런 것이니 제발 회장님께서 이해를 좀...”
“시끄러워! 결혼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 감히 내 딸을 모욕하고 우리 가문을 조롱하다니! 네 놈도 너희 청해그룹도 모조리 박살내 버리겠어!!”
“회..회장님!!”
천민형은 노발대발 고함을 질러대는 유회장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안간힘을 썼다.
“이 놈아 뭘하고 있는 거야! 어서 무릎 꿇고 사과드리지 못해!”
천민형은 잘못 유회장의 심기를 건드려 거액의 투자건이 무산될까 두려워 조바심을 냈다.
옆에서 큰소리를 내던 말던 희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녀는 수혁에게 다가와 달콤하게 속삭였다.
“수혁씨.. 제발 한번만 더 생각해줘요.. 이번만 딱 눈 감고 한발만 앞으로 내딛으면 당신이 평생 꿈꿔오던 삶을 누릴 수 있어요. 이번 한번만 용서하고 나를 가져요. 그럼 당신은 모든 걸 가질 수 있어.. 제발...”
그녀는 눈물이 일렁이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희연은 수혁이 얼마나 성공을 원해왔는지 알고 있었다. 청해그룹을 손에 넣고 싶어하는 그 간절한 갈망도...
그러니 분명 그는 자신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꼭 청해그룹의 총수가 될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거니까. 그뿐 아니라 청운물산까지 당신의 소유가 되면 그야말로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기업을 만들 수 있어요. 그게 다 당신 꺼야. 자, 내 손을 잡아요. 저 식장 안으로만 들어가면 당신은 행복해질 수 있어.”
마치 이브를 유혹하는 뱀처럼 희연은 수혁의 귓가에 속삭인다.
수혁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한순간이었지만 그녀가 정말 뱀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녀뿐 아니라 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보였다.
독사가 우글거리는 굴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진저리가 쳐 지고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을 것 처럼 구역질이 난다.
그녀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몇 걸음만 걸어 식장으로 들어가면 그가 여태껏 꿈꿔왔던 인생이 시작된다.
꿈은 현실이 될 것이고 거대기업의 주인이 되어 한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모두가 우러러 볼 것이고, 존경할 것이다.
그렇게 미치도록 갖고 싶던 미래인데....
왜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양쪽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줄이 한순간 툭하고 끊어져 나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하찮고, 거추장스러우며,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입에선 자꾸 허무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수혁..씨?”
그녀가 살피는 듯한 눈길로 조심스럽게 그를 들여다본다.
수혁은 힘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두지.”
“...네?”
“지긋지긋해.”
“수혁씨!”
“너도 이제 그만해.”
“시..싫어!! 수혁씨 제발!”
“난 가겠어.”
수혁은 예복에 꽂혀있던 꽃을 뽑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안 돼! 이대로 나가면 진짜 끝이야! 당신의 꿈 산산이 부셔버리겠어!”
희연이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마음대로”
“청해그룹을 갈기갈기 찢어 이름조차 남기지 않을 거예요!”
수혁은 대답 대신 그녀를 지나쳐갔다.
“천수혁이란 사람 다시는 그 어디에 발도 못 붙이게 철저히 밟아 버릴거야!”
여전히 그는 그녀를 무시한 채 걸어갔다.
“수혁씨!!!”
등 뒤에서 울음 섞인 그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홀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때 사나운 표정의 천무한이 달려와 수혁의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그리고는 숨 쉴 틈도 없이 수혁의 뺨을 후려쳤다.
“이 망할 놈의 자식! 기어이 천씨 가문에 먹칠을 해! 네 놈이 처음 기어 들어왔을 때부터 언젠가 우리 가문을 말아 먹을 놈이란 걸 알아봤어! 네 놈 따위 그냥 버려뒀어야 해! 가문에 망신이나 시키는 후레자식!”
그는 성에 안 찼는지 한번 더 뺨을 때렸다. 그러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며 욕을 해댔다.
“여기서 나가면 그 길로 네 놈은 호적에서 없어질 줄 알아! 십원 한 장 못 받고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당장 식장으로 돌아가!!”
천무한은 한 대 더 칠 기세로 버럭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런 소동에도 불구하고 수혁의 표정은 차분하기만 했다.
“할 말은 끝나셨습니까?”
“뭐..뭐야?!!”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자식이!!”
“아, 참. 가기 전에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수혁은 천무한에게로 한발 바짝 다가섰다. 위협하듯 다가 와 내려다보는 시선에 천무한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내 몸 속에 당신과 같은 피가 흐른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줄 알아? 날 벌레 보듯 하는 당신들을 실컷 밟아주려고 이를 악물며 살아왔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어. 그렇게 하는 건 나 역시 당신들과 똑같은 인간이란 걸 증명하는 셈이거든. 이제야 진짜 복수가 뭔지 알게 됐어. 당신들과 내가 다른 인간이란 걸 보여주는 것. 그래서 같은 피가 흘러도 얼마든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게 내가 당신들에게 할 수 있는 진짜 복수야.”
여태껏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 만이 이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먼 훗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그들과 다를 게 없다면 그처럼 허무한 삶이 또 어디 있을까.
회사를 갖고, 돈과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이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 보다 중요할까...
지금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호텔을 나가는 수혁에게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오직 하나.
사랑하는 사람만 있다면 세상을 다 잃는다 해도 기꺼이 웃을 것이다.
호텔을 뛰쳐나와 무작정 거리를 달렸다.
그는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틀을 벗어던지듯 목을 옥죄던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재킷도 벗어버렸다.
묘하게 웃음이 나온다.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그는 이제야 자유로움을 느꼈다.
여태껏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자유를.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그의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심장은 터질듯 고동쳤다.
가쁜 숨을 삼키며 그는 길가에 멈춰 섰다.
맞은편으로 낡은 주유소 하나가 보인다.
수혁의 눈빛이 빛난다.
먼 거리를 뛰어왔지만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곧 만나게 될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수혁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
“그 녀석 여기 그만뒀습니다.”
부푼 기대를 안고 한 걸음에 달려왔지만 수혁은 진우를 만날 수 없었다.
“한 열흘쯤 된 것 같은데...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더니 짐 싸갖고 나갔지요.”
“어디로 갔습니까?”
“그야 나도 모르지. 짐이라고 해야 달랑 가방 하나뿐이던데. 어디로 간다 말도 없이 그냥 떠났습니다.”
수혁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진우를 만나 품 안에 꼭 끌어안고 싶었다.
따뜻하게 입을 맞추며 몇 번이고 사랑한다 속삭이려 했었는데...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왜 이리 갑작스레 떠난 걸까....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와 수혁의 마음을 삼켜버린다.
온 몸에 힘이 빠지며 그대로 휩쓸려 버릴 것 같았다.
그를 만나고 싶다.
아니.. 반드시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주유소를 나온 수혁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진 얼굴로 터벅터벅 거리를 걸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낯선 길을 헤맸는지 모른다. 방향도 목적지도 정하지 못했다.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눈 앞에서 사라지자 그는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그를 기다려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느린 걸음이 이어지다 끝내 멈춰섰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위는 온통 높은 빌딩숲과 주말 오후 밀물처럼 쏟아져 나온 인파의 물결뿐이다.
기름에 떠 있는 물방울처럼 그는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지 못한 채 한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멀미를 하 듯 가벼운 일렁임과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진다.
그는 한동안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생각도, 집착도 사라져 버린 텅 빈 상태가 되자 그의 몸은 이제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뗀 그가 도착지점을 알 수 없는 어딘가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걷다보면 반드시 어딘가에 이를 것 같은 기분이다.
그리고 그곳에 간절히 바라던 누군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를 만난다면... 이제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
“노을이 꽤 근사하지?”
아이들과 나란히 운동장 모퉁이에 앉은 진우는 멀리 높다란 아파트들 사이로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에이, 멋진 거 보여준다더니 기껏 저거였어요?”
한눈에 보기에도 개구쟁이처럼 생긴 사내아이가 실망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린다.
“왜? 멋있잖아. 노을로 물든 하늘처럼 멋진 건 세상에 없는 것 같아.”
“칫.. 재미없어.”
사내애가 작은 돌멩이 하나를 운동장으로 휙 하고 던지자 옆에 있던 자그마한 계집아이 하나가 퉁명스럽게 눈을 흘긴다.
“하여튼 남자들이란.. 도무지 낭만이라는 게 없다니까.”
그러더니 옆에 앉은 진우의 팔짱을 끼며 귀엽게 생긋 웃는다.
“오빠만 빼고. 나도 노을 보는 거 무지 좋아해.”
여자애가 진우에게 달라붙자 사내애는 더 짜증이 난 듯 벌떡 일어나 버린다.
“이래서 계집애들은 안된다는 거야! 얘들아! 축구나 하러가자!”
남자애들이 우르르 흙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으로 달려가 버린다.
“아우, 정말 남자들은 전부 야만적이야! 물론 오빠 빼고.”
여자애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불평을 하더니 또다시 생글생글 웃으며 진우를 올려다본다.
귀여운 아이의 얼굴을 보며 진우도 같이 미소지었다.
얼마 전, 결국 주유소 일을 그만두고 그곳을 떠났다.
오래 머물수록 그가 더 많이 생각났고, 잊는 것이 힘겨웠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누군가의 기억을 지운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가 지날수록 더욱 그리워지고, 만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달려가면 당장이라도 그가 있는 곳에 닿을 수 있고,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점점 더 자신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이대로 있다간 무슨 일을 저지를 지 알 수 없다.
욕심에 못 이겨 그를 찾아가고, 얼굴을 보면 또 다시 그 품으로 달려가 안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스스로를 그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만 했다.
그래서 진우는 주유소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딱히 갈 곳도 없는 처지였다.
예전 민철이 변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형제처럼 친구처럼 함께하며 서로를 의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오라는 곳도, 머물 곳도 없다.
수중에 가진 돈도 얼마 없었던 그는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진우는 자신이 마치 연어가 된 기분이었다.
막다른 곳에 이르자 생각나는 건 여기뿐이었다.
자신이 떠나왔던 바로 그 장소. 지긋지긋하다며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던 바로 그 고아원으로 그는 다시 돌아온 것이다.
좋았던 기억도, 즐거웠던 추억도 없는 이곳이 왜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다만.... 여기로 오면 자신을 받아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초라한 모습으로 왔을 때 옛날 자신을 돌봐주던 선생님들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잠시가 될지, 오래가 될지 알 수 없는 그에게 방을 내어주고,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지내라고 말했다.
진우는 여자선생님들이 많은 이 시설에서 남자가 할 수 있는 험한 일들을 찾아 대신해 주며 생활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그를 잘 따라주었다.
“근데 오빠는 애인 있어?”
옆에 찰싹 달라붙은 여자아이가 눈을 예쁘게 깜빡이며 진우에게 묻는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다.
진우는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아니, 없는데. 별이가 오빠 여자친구 해 줄래?”
“진짜?!!”
가뜩이나 노을 때문에 붉어진 얼굴이 더 빨갛게 물들었다.
“좋아! 오늘부터 내가 오빠 여자친구다!”
여덟 살 꼬맹이의 천진한 모습에 진우는 스스럼없는 미소를 지었다.
“얘들아! 저녁 먹어야지!”
멀리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이들이 우르르 식당으로 몰려간다.
꼬맹이 여자애도 배가 고팠는지 아이들을 따라 뛰어갔다.
주위가 조용한 침묵에 휩싸이자 진우는 홀로 노을을 감상했다.
평온한 저녁이다.
붉게 물든 구름 사이로 저녁 해가 서서히 집으로 돌아간다.
운동장 가득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그때 문뜩 정문 사이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지는 저녁해 때문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는 천천히 문 사이를 지나 운동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반쯤 지나왔을까 문뜩 그 사람이 멈춰 섰다.
그는 똑바로 진우를 향해 서 있었고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진우 역시 그를 처음 발견한 그 이후 조금의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본 순간 숨쉬는 것 조차 잊은 듯 했다.
시간조차 멈추어버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만 본 지 알 수 없었다.
진우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그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 현실인지 노을이 만들어낸 환영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드디어 손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고 나서야 그토록 보고싶던 사람의 모습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여길..”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진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온다.
“할 말이 그것뿐이야?”
낮지만 부드러운 음성.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을 짓는 진우를 향해 수혁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무작정 걸었고, 걷다보니 여기였어. 그리고... 너를 꼭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
수혁의 커다란 손이 진우의 얼굴을 감쌌다.
마치 눈앞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그는 세심한 손길로 진우의 얼굴 생김새 하나하나를 매만졌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따스한 입술, 부드러운 뺨.
그제야 안심한 듯 후우하고 숨을 내쉬며 진우를 품안에 꼭 끌어안았다.
얇은 셔츠 사이로 수혁의 심장고동이 느껴졌다.
진우는 놀라고 당황스러우면서도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하지만 꿈꿔왔던 그의 품에 안겼다 해서 마냥 행복해할 순 없는 일이었다.
“잠..깐만... 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야?”
진우는 언제까지고 안겨있고 싶은 강한 열망을 억누르며 그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수혁은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진우의 허리를 감싸 안아 품안에 가둘 뿐이었다.
“나 돌아왔어.”
“뭐??”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어.”
그렇게 말하고는 진우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쉰다.
익숙한 체취에 마음이 따뜻하게 녹아내린다.
하지만 그런 수혁과는 반대로 진우는 놀란 얼굴로 다시 그를 밀어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돌아오다니! 그보다 너 오늘 결혼식 아니었어?! 대체 왜 이런 꼴로 지금 여기 있는 거야!”
“이제 다 끝났어.”
수혁은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오늘 있었던 일을 진우에게 얘기했다.
정민철이 진우를 협박했고 희연이 배후에서 모든 걸 꾸몄다는 사실도 전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수혁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우의 표정은 걱정에서 당혹감으로 다시 쓴 약을 삼킨 듯 고통스럽고 아픈 얼굴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지금 결혼도 그만두고 집안에서도 뛰쳐나왔다고?”
진우는 금세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너 바보야?! 천수혁! 너 바보냐고!!”
그는 수혁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안타깝게 소리쳤다.
“네가 늘 꿈꾸던 일이었잖아! 이를 악물고 버티며 열망하던 거였잖아!! 나 따위가 뭐라고 그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어!!”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버렸다.
“살다 살다 너 같이 바보같은 놈은 처음본다! 이 따위 사내자식이 뭐가 대수라고 평생을 바라던 꿈을, 네가 살아온 이유를 포기할 수 있는 거야! 어서 돌아가! 당장 꺼져버리라고!!”
울며 소리치는 자신이 볼썽사납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는 참을 수 없었다.
그토록 높은 자존심에, 오로지 앞만을 보며 달려가던 그가 지금 자신 때문에 눈 앞에 펼쳐진 인생의 멋진 성공을 휴지처럼 내던지고 말았다.
나에겐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
진우는 절망스러웠다.
그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오직 그것만 생각하며 도둑으로 몰리는 부당함도 참아냈다. 그랬는데... 그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지금 억울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가슴이 아팠다.
수혁이 해온 그동안의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집안에서 무시 받고 천대받아온 그가 피눈물을 흘리며 그것들을 인내해 온 이유를 알기에 더더욱 안타까웠다.
“제발 돌아가.. 지금이라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어. 제발...”
진우는 수혁의 옷깃을 움켜잡고 애원했다.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 뺨을 차갑게 적셔간다.
젖은 얼굴을 수혁의 따뜻한 손길이 감싸온다.
“나도.. 조금은 행복해 지고 싶어.”
“천수혁!”
“네 옆에서. 널 보면서. 그렇게 살면 나란 놈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야.”
“..제발...”
“그러니까 부디 날 행복하게 해줘.”
다시 두 팔이 등을 감싸고 진우는 수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 바보같은......”
자꾸만 울음이 새어나와 말을 잇기 힘들었다.
“사랑해...”
귓가에 속삭인 나직한 목소리에 진우는 끝내 참지 못하고 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입술이 뜨겁게 맞닿았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게 한 몸처럼 맞닿은 그들은 서로의 입술을 소유했다.
모든 걸 빨아들일 듯 격렬하게 혀가 얽힌다.
가빠진 숨결과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도 마치 하나처럼 들려온다.
“아마.. 처음 봤을 때 부터였던 것 같아.”
수혁은 진우의 두 눈과 코, 이마와 뺨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었다.
“열세 살,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 제일 먼저 널 만났지. 미치도록 더운 여름이었는데 운동장에 있던 널 보자마자 더위가 순식간에 날아가더군. 아직 어려 미처 깨닫진 못했지만 어렴풋이나마 알았던 것 같아. 이 여덟 살 꼬맹이와 나 사이엔 뭔가가 있구나..하고 말야.”
“그래서 그렇게 날 괴롭혔던 거야?”
이제 수혁에게 편안히 안긴 진우는 살짝 얼굴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훗.. 글쎄.. 아마 그 나이 때 어린애의 심술이었겠지. 나에게 관심을 가져달란 투정쯤이 아니었을까?”
“그런 거 치곤 너무 심했어. 매일 나를 수면베개처럼 이용했잖아.”
“그래. 이상하게도 네가 곁에 있으면 잠들 수 있었어. 그때부터 이미 난 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었던 거지. 어리석게도 이제야 깨달아 버렸지만...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 응. 내가 재워줄게. 아무 걱정 하지 마.”
서로의 체온만 있다면 세상의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수혁은 진우를 더 꽉 끌어안으며 만족스러운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 예전 진우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척들에게 외면당한 뒤 방치되었다가 겨우 경찰의 손에 이끌려 이 보육원으로 왔다.
그리고 진우를 만났다.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던 작은 꼬마아이.
그 눈과 마주친 순간, 그에게는 인생의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자신의 운명을 바꿀 결정적인 기회.
그는 기꺼이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먼 길을 돌고 돌아 그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이 선택한 바로 그 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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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지만.. 참.. 알고보면 별거 없었던...;;; ... 이야기가 드디어 끝이 났네요.
모자란 부분이 많았던 거 알아요. 이해 안되고, 어설펐던 점도 무지 많아서 창피하지만...
그래도 혹독한 질타의 말씀보단 다음에는 더 잘 써보라는 격려의 한마디가 살아갈 힘이 될거 같아요...ㅜㅜ흑..
마지막편을 쓰고나니 후련함보단 죄송스런 마음이 더 크네요.
죄송해요!!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땐 진짜 열심히 써 볼게요!!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연휴 마지막 날 즐겁게 보내세요!
그동안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사랑해요~
첫댓글 그동안 너무 재밋게 잘보고갑니다!!!! 한동안 글을 안올리시길래 궁금했었는데...^^ 다음소설 기대할께요~~~~~ 감사.
진우랑 수혁이가 잘되서 너무 좋아요~~ ^^
아아...정말 잘 되었군요...ㅠㅠ
후속편을 .... 연재 하심이 떨지??뒷부분에서 먼가 여운이 남았어서 ㅎㅎㅎ 머하고 지내셨어요 ㅜㅜ 엄청 오래 기달렸어요 ㅜㅜ
진우랑 수혁이 만나게 해주셔서 제가 감사하네요~ 둘이 행복한 모습 보고푼데...에필은 ..안될까요?
정말 재밌었어요!! 역시 살아가는데 사랑이 제일 중요한거겠죠 ㅎㅎ 다음 소설도 기대할게요!!
대박이에요ㅠㅠㅠㅠ 이렇게 아름다운 재회는 또 없을거에요ㅠㅠ 늦게읽어 죄송하고 후속작 또 기대할게요!!
엉엉 해피엔딩이라 너무 좋군요 ㅠㅠㅠㅠ 민철이도 나쁘긴 했지만 끝에서 이런 착한 일도 해주고.... 감동이예요 ㅠㅠㅠ 데코님 이제 까지 소설 쓰시느라 수고하셨어요 ^^ 다음편에서 또 뵈요 ㅎㅎㅎㅎ
ㅜㅜ이제야읽었어여 ㅠㅠ 그동안 얼마나 바빴던지 이거 없어졌을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ㅠㅠ완결 축하드려요너무 이쁘게 끝났네요 ㅠㅠ
헐... 요즘 데코님 소설 완파중... 고백도 어긋난 인생도... 이번 돌아서지마도...다 넘넘 좋아요... 데코님 완전 짱~~ 인제 두번째 스타트라인 읽으러 출발~~
지금 데코님 소설 전부 보는중인대 너무 자극적이지도 않고 재미있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