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새벽에 일어나 웅치이치 전적지에 묵념을 올리고 전주쪽을 바라봅니다.
저 산 봉우리 넘어 전주성과 전라도 호남평야를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다 산화하신 선열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다소 차이가 있어도 그 시대에 살지 않았고 역사 현장에 없었기에
숫자 등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저는 오늘 추모식 연출을 맡았습니다.
428년전
[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
이순신 장군이 진주성 제2차 전투가 끝난 직후인 1593년 7월 16일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남은 국가의 보장이니 만약 호남이 없으면 곧 국가도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1년전.
1592년 부산으로 진격한 왜군이 빠르게 경상도 충청도를 거쳐 한양을 점령하지만
선조가 북으로 도망가고 조선 관군과 전라도에서 올라온 의병들의 저항으로
북진이 어렵고 본국에서 군수물자 보급이 더디자 왜군은 부산에 진을 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라도는 비교적 안전했습니다.
1592년 6월 말
한양에서 퇴각한 왜군 육군 주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전라도를 공격하기 위해 금산을 점령합니다.
그의 군대는 15,000명
이 소식을 들은 전라감사 이광은 권율장군을 도 절제사로 삼고 방책을 세웁니다.
전라도 군사는 이미 최원장군이 2만 관군을 거느리고 선조가 있는 북으로 간 상태이고
고경명 의병장은 전라도에서 모은 8천 의병을 데리고 한양으로 떠난 단계라
호남 방어에 큰 구멍이 생기게 됩니다.
이에 권율 장군은 황진 장군과 1,500의 군사로 이치(완주와 금산을 오가는 대둔산 배티재)를 지키고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동복현감 황박 등 1,000여명의 군사와 의병은
웅치(완주 소양 두목마을과 진안 덕봉마을을 넘는 고개)를 지키게 됩니다.
지금의 곰티재나, 모래재, 보룡재를 넘는26번 국도는 모두 강점기 이후에 만든 도로들입니다.
그 당시 길은 두목마을과 덕봉마을 고개가 유일한 길이였습니다.
1592년 음력 7월 7일
칠월 칠석이면 백중놀이로 우리나라 풍습은 마을 사람들이 길 마다 자라난 풀을 베고
힘든 여름 농사에 지친 피로를 풀기 위해
그날 하루 닭 잡이 죽 끓여 온 동네 사람들이잔치를 벌이고 즐겁게 노는 풍습이 있는 날입니다.
저 어릴때도 우리동네 어르신들이 모두 굿치고 장구치고 노래부르는 것을 보고 자랐거든요.
그런 중요한 명절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금산 주둔지에 3천명을 남겨두고
2천명을 권율장군과 황진장군이 지키는 이치 고개로
나머지 1만명을 정담 김제군수가 지키는 웅치로 왜군을 이끌고 진격하게 됩니다.
이에 우리 선조들은 3단계로 나누어 방어태세를 갖춥니다.
1진은 산 아래에 황박 장군이 최전방 지금의 진안 부귀면 세동리에,
2진은 나주판관 이복남 장군이 산중턱에,
3진은 산 정상에 김제군수 정담 장군이 진을 치게 됩니다.
7월 7일 첫날은 황박 장군이 승리를 했습니다.
군사를 비교하면1대 10.
우리 선조들 조선군1,000명대 왜군10,000명입니다.
말이 안되는 전투지만 전라도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충심 하나로
처절한 혈투로 그 많은 군사를 당황케 만든 것이지요.
이에 지금의 진안 모래재 메타세콰이어길에 주둔해 있던 왜군들이 격분해
다음날 음력 7월8일 대대적인 공격을 해옵니다.
같은 날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치르는 똑 같은 날입니다.
전라도가 바다에서 육지에서 피로서 전라도와 나라를 지키는 날입니다.
음력 7월7일 전투를 시작해서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이 7월 10일
고경명 의병장이 8천의 전라도 의병으로 금산 왜군 본거지를 공격하시다
장렬히 산화 하시는 날입니다.
전날 막아냈던 1차 방어선이 무너지고
2차 방어선도 무너지고
3차 방어선인 산 정상에서 처절하게 전투를 벌입니다.
해질무렵 왜군이 퇴각하는데 이때 조선군의 화살이 다 떨어져
화살이 떨어졌다고 큰소리로 후미 부대에 보급해 달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왜군이 다시 진격해와 육박전을 치르게 됩니다.
이 와중에 김제군수 정담을 비롯한 김제에서 온 장정들 600여명과
이봉, 강운 등 전투에 참여 했던 모든 분들이 안타깝게도 모두 산화하십니다.
웅치가 뚫리자 왜군들은 안덕원(지금의 전주 아중리 )까지 진격합니다.
왜군들도 주력부대를 다 잃은 상태이고 워낙 피해가 컷기 때문에
막상 전주성에 다달았으나 전주성을 탈환할 힘과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7월 8일 저녁무렵 왜군이 안덕원에 진을 치자
전라감사 이광이 일부 군사를 빼 금구로 도망가려고 후문으로 나가는데
이에 이정란장군과 최철견이 전주성을 수성하게 됩니다.
이광이 군사를 이끌고 후문으로 나가는 모습을 본 왜군들이
자기들의 후미를 노릴려고 빠져나간다 생각하고 급히 소양으로 후퇴합니다.
이에 남원에서 올라온 황진 장군이 소양에서 전투를 벌여 대승리까지 밀어붙쳐
대승을 거두어 오늘날 지명이 소양면 대승리라 한다 합니다.
퇴각하던 왜군이 전날 전투를 벌였던 산 정상에서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돌무덤을 만들고
왜장이“조선국의 충성스런 넋을 조상한다[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는 표지를 세우고 지나갔다고 합니다.
지금도 소양 두목마을과 진안 덕봉마을 고개에 돌무덤들이 남아 있습니다.
한편 이치 전투는 비교적 잘 방어를 했습니다.
권율 장군이 있는데다가 적의 인원이 오백명 더 많으니
산 꼭대기를 점령하고 있는 우리 조선군이 유리하기에 이치를 왜군이 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양으로 상경하던 호남 의병을 이끄는 고경명 장군이
이 소식을 듣고 금산 왜군 본토를 치러 금산으로 방향을 틀어내려갑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왜군들이 이치와 소양에서 황진에게 패배한 남은 왜군들이
급히 퇴각하는 바람에 전라도를 지킬 수 있었던 것 입니다.
금산 본거지를 공격한 고경명 장군은 7월 10일 장렬하게 전사하십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선조실록, 유성룡의 징비록, 조경남의 난중잡록 등 많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조선의 3대 대첩이 있는데
이순신장군의 한산대첩, 권율장군의 행주대첩,그리고 웅치이치대첩입니다.
물론 1년 뒤에 벌어지는 진주대첩도 있습니다만
후에 권율장군이 사위 이항복에게 말하기를 웅치이치전투가 행주대첩보다 위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만큼 적은 숫자로 처절하게 3일간 나라를 위해 목숨바쳐 지켜냈다는 것이겠지요.
나중에 왜군들의 회고록에도 왜군의 가장 큰 첫 패배는 웅치이치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전라도를 얼씬도 못하게 막고
육지에서는 웅치이치 전투와 경상도 곽재우 장군 등 의병들이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도록
기습 공격으로 왜군들의 발을 묶는 등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전라도가 지켜졌기에 그당시 70%의 식량을 생산하는 전라도에서
전국의 각 조선군의 군량미와 군수물자들을 조달하고 화살등 군수품을 만들어 보내어
임진왜란을 더 이상 확대하지 못하게 했던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와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완주군 운주 금산군 진산에 살았던 선조들의 노고가 얼마나 컷을지
또 아군들을 도왔다고 모두 죽임을 당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더 아픕니다.
역사를 보면 이순신장군들을 돕기위해 남장을 하고 횃불을 들고 강강수월래 노래를 부른 남도 지역 주민들과
행주산성에서 앞치마에 돌을 날라 아군을 돕는 아낙네들을 볼때
우리 형제 아들 남편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데 가만히 있을 분들이 한분도 안겨셨겠다 생각하면 더 눈물이 납니다.
그 당시 전국 어디에 가나 같은 마음이였겠지만
직접 저 전투를 겪은 소양면 신촌리 부귀면 세동리 운주 진산 주민들 존경합니다.
음력7월7일부터 10일까지 전라도 육지와 바다에서는
선조들이 처절하게 왜군을 막다가 피로 물들이고 산화하신 날입니다.
이후 여기에서 살아 남은 선조들은 강화도 조약이 결렬되자
정유재란으로 남원성을 막다가 모두 전사하십니다.
기회가 되면 정유재란에 대해서 부족하지만 올리겠습니다.
곰티재 정상에 150미터 올라가면 전적비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오늘 추모식이 열립니다.
폰 카메라로 줌 당겨보니 저 멀리 희미하게 전주 땅 아파트가 보입니다.
저 아름다운 강산과 호암들녘을 지키려고 모두 이곳에서 산화하셨다니 눈물납니다.
국화 꽃 밖에는 없지만 정성것 제단을 만들고
행사를 축소해 최소 인원으로 거리두기를 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선조들의 예를 표합니다.
군수님도 분향과 함께 묵념 하시고...
선열들의 희생의 뜻을 새겨 강하고 좋은 나라를 만들어 후세에게 물려주겠다고 다짐을 하며..
산화 하신 선열들의 넋을 위로하고 유족 들의 안녕을 빌며 코로나19가 하루 빨리 종식되어 강하고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후세에 길이길이 보전하자 는 의미로 헌무 추모공연을 올리고...
기념촬영을 하고..
깨끗이 청소까지 마치고 철수 했습니다.